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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적 입장에서 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허순길 박사
교회의 정체성은 그 교회가 가진 공적인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질서)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교회생활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 시간에는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생활의 차이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그 신학과 신앙과 교회생활의 뿌리를 칼빈에게 두고 있으면서 교회의 이름을 달리해 오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출발한 칼빈주의 교회들이 개혁교회라 불리어지며, 스코틀랜드에서 출발한 칼빈주의 교회들이 장로교회로 부리어 왔다. 유럽 대륙의 칼빈주의 교회를 ‘개혁교회’라 부르게 된 것은 변질된 로마교회로부터 신학과 교회정치면에서 개혁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불리어져 왔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라 불리게 된 것은 감독에 의한 정치가 아닌 장로회에 의한 정치라는데 강조점을 두게 된데서 온 것이었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칼빈의 신학적 신앙노선을 따르면서도 또한 각기 다른 신앙고백서들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각기 역사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개혁교회는 세 가지 신앙고백서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세 일치신조’(The tree fors of unity)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작성된 배경의 나라와 저자와 시대가 각기 다르지만 진리를 표현하는 면에서는 서로 모순이 없이 일치하다는 뜻에서이다. 세 신앙고백서 가운데 둘은 곧 벨직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순교자들이 생겨나던 16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신앙고백들 속에서 그 시대의 뜨거운 신앙적 정서를 읽을 수 있고, 사용된 어휘에서도 성경적인 단순성을 가진 어휘가 사용되어 “오직 성경”이란 종교개혁시대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개혁교회의 첫째 신앙고백서는 37장으로 된 ‘벨직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은 지금의 벨기에에서 산 ‘귀도드 브레’(Guido de Bres)가 여러 동역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559년에 작성하여 1561년에 발표했다. 이 고백서의 내용은 1559년에 나온 블란서 개혁교회신앙고백의 본을 따랐다. 그는 이 신앙고백서로 당시 개신교도들을 무참히 박해하는 스페인의 왕 필립2세에게 개혁신자들이 단순한 발란자들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임을 밝힘으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1567년 순교를 당했다. 이 신앙고백이 벨기에와 화란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졌다.
개혁교회의 둘째 신앙고백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다. 1560년대에 독일의 루터파 교회는 로마 교회의 화체설입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루터의 공재설을 따랐으며 대부분의 독일 선제후들이 루터가 쓴 교리문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때 팔레스틴네이트지역이 서로 다른 성만찬 견해를 내세우며 싸우는 중심이 되어 있었다(쯔빙글리, 루터, 칼빈). 당시 이 지역의 선제후였던 ‘프레데릭 3세’(Frederic III)는 칼빈의 신앙사상의 영향을 받고 자기 영지 내에 있는 교회들의 신앙일치를 위해 새 교리문답을 작성해야 겠다는 뜻을 가지고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신학부의 유능한 두 교수들에게 이 일을 위촉했다. 위촉 받은 두 신학자들은 칼빈에게서 배운 우르시누스(Zacharius Unsinus)와 올레비아누스(Casper Olevianus)였다. 이들은 1563년에 이를 완성하였다. 프레데릭 3세는 이 교리문답을 그의 영지 안에 있는 교회들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게 했다. 이 교리문답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 영ㅈ의 수도였던 도시의 이름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 교리문답의 첫 문답이 매우 인상적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답이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이다. 이것은 순교자가 많이 나던 당시의 환경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이 교리문답이 칼빈사상의 색채가 짙다고 하여 문제가 되어 프레데릭 3세가 독일 황제 찰스의 소환을 받아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황제 앞에서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자신은 칼빈을 알지도 못하고, 다만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하지만 사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작성한 두 신학자는 칼빈의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프레데릭 3세는 황제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교리문답은 빠르게 팔레틴네이트 지역 뿐 아니라 다른 지역과 나라들에도 확산되어 개혁신앙을 대변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고 개혁주의 교회들이 선호하는 중요한 교리문답이 되었다.
개혁교회의 셋째 신앙고백서는 ‘돌트신경’이다. 화란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부인하는 아르미니안주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1618-1619년에 돌트에 총회를 소집하고 여러 외국 개혁교회들의 대표를 초청했다. 이 총회는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5개항의 항의를 반박 정죄하고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천명함으로 돌트신경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결과 200명의 아르미우스의 추종자 목사들이 면직을 당했다.
이 돌트 총회는 화란 개혁교회의 터를 굳건히 새우는 이정표가 되었다. 기존의 신앙고백서들(벨직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돌트신경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기존의 교회질서를 정리하여 ‘돌트 교회질서’를 받아 개혁교회의 터를 공고히 했던 것이다. 오늘날 화란, 미주 등 여러 나라에 있는 개혁교회들은 이 신앙고백과 교회질서를 그대로 받아 생활하고 있다.
장로교회는 17세기 중반에 영국 런던에서 모인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대회(1643-1653)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으로 받고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1560년 개혁자 낙스(John Knox, d. 1572)에 의해 세워졌을 때에 그의 주도로 초안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받았었다. 낙스는 피난 중 제네바에서 영국계 피난민을 위한 목사로 봉사하면서 신학적 교회정치적 입장에서 칼빈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1559년에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교회개혁을 단행하여 장로교회를 세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에서는 아직 유사 감독제도가 수용되었었다. 낙스를 이어 등장한 멜빌(Andrew Melvile, 1545-1622)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더욱 견고한 자리로 이끌었었다. 멜빌은 제네바에서 5년 동안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Theodore Baza)와 교제하며 연구하고 1574년에 돌아와 감독정치를 완전히 제거함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7세기에 영국의 정치적 교회적 변화와 연관되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새로이 채용하게 되었다.
17세기 중반 영국에는 칼빈주의적 개혁사상이 청교도들 가운데 지배를 했다. 당시 청교도 편에 영국의회는 왕 찰스 1세의 독재에 맞서 싸웠다. 이 때 의회는 영국교회의 감독체제를 폐지하고,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의 본을 따른 새로운 장로회 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원하여 1643년에 신학자 회의를 웨스트민스터 대 교회당에 소집하게 되었다. 의회는 121명의 신학자들과 상원위원 10명, 하원의원 20명에게 이 일을 위촉했다. 이때 회의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이 회의에 특사들을 보내 주어 도와 줄 것을 요청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유능한 신학자 8명을 자문위원으로 파송하였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장로교 정치 체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1646년 12월에 완성되어(예배모범 1644년, 장로회 정치 1644년, 대소요리문답 1647) 이것이 1647년에 영국의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루 곧 독립교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은 크롬웰 장군(Oliver Oromwell, 1599-1658)이 호민관으로 등장하여 영국의회가 무력하게 됨으로 영국에 장로교를 세우려던 기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영국교회에 전혀 수용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표준문서들은 1649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와 의회에 의해 수용이 되었다.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문서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새로운 신앙고백적 표준 문서가 되고 이후 그 교회생활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로마교회가 트랜드 공의회(1545-1563)에서 반 종교개혁적 교리 선언을 하고 루터와 칼빈의 노선이 완전히 갈리게 되고, 아르미니안주의가 화란 돌트총회(1618-1619)에서 정죄를 받음으로 아르미니안 논쟁이 끝난 후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 결과 이 신앙고백은 그동안 쟁점이 되어온 교리를 밝히 정리한 것의 완벽한 신앙고백문서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고백서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와 달리 스콜라스틱한 청교도적 특성을 띠고 있고, 온화한 성격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곧 17세기 이후 신대륙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계 장로교회 교인들에 의해서 미주에 전해지고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이것이 9세기에 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해졌다.
2. 신앙고백에 대한 양 교회의 관점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 교회의 터를 놓은 미국, 캐나다, 호주의 장로교회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미국 북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수가 가장 많았다 때문에 그들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저들 중 대부분은 19세기 미국을 휩쓴 부흥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은 분들이었다. 19세기 전반에 나타난 장로교회의 목사 피니(Charles G. Finny, 1792-1875)와 이어 나타난 초교파 인물인 무디(Dwight L, Moogy, 1837-1899)에 의한 부흥운동은 모든 교파를 초월한 지지를 얻었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도 예외 없이 이 부흥운동에 휩싸였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부에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이 부흥운동에 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분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저들은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장로교회의 교리와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고백 문제에 대하여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증거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저들은 선교 초기부터 아르미니안주의를 경계하지 않고 한국 선교지 교회들의 교회일치를 주장하였다. 1905년 미 장로교 선교회의 “재한 서울 장로회 일치 위원회”는 “대한예수교회(혹은 그리스도교회)”를 설립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그해 9월에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 150명이 함께 조직한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총공의회”에 한국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 혹은 예수교회”를 세울 것을 제의하게 되었다. 총공의회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총공의회의 목적은 “선교활동의 협력과 단 하나의 원주민 복음주의 교회의 조직”이었다. 이런 하나의 교회운동은 곧 같은 때에 캐나다에서 일어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의 일치운동의 소식에 고무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한 운동은 그 결실을 쉽게 보지 못했다. 그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가 이것을 수용하지 않았고 한국장로교회의 안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분들의 수가 차츰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리교회와 합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은 1920년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1925년 캐나다의 일치운동이 결실을 맺어 “캐나다 연합교회”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29년 개신교 기관지인 “기독신문”이 당시 교회지도자들에게 교회 통합에 대한 의견을 질문지를 내어 물어보았다. 답을 준 36명 가운데 대부분이 찬성을 보였다. 신학 면에서 진보적 경향을 가졌던 남궁혁, 백낙준, 부산의 김길창 등이 찬성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한국 교회의 목사인 선천의 양전백, 임권택 목사 같은 분들은 장로교회, 감리교회는 신학과 정치가 다름으로 양 교회일치는 불가하다고 했었다.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었지만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초대 미 장로교 선교사들의 일치운동은 첫 복음 선교사였던 언더우드가 주도했었다. 그는 철저한 교회일치주의자였다. 그가 미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사 모집에 응모했을 때 선교부 총무인 엘링우드(Ellingwood)에게 한국에 복음전하는 자로 보내면 가고, 한국에 장로교회를 세우기 위해 보내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첫 선교사의 장로교회에 대한 입장이 그러했으니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교회관을 잘 짐작할 수 있다.
초대 선교사인 소안론(W. L. Swallon)같은 분도 성경의 완전영감은 철저히 믿었으나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데 어려움이 개재한다고 보지 않는다”라고 했다. 1925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한 라브열(S. L. Roberts)같은 분도 장로교회, 감리교회 양 교회의 일치문제에 있어서 양 교회가 다 한국교회이니 한국교회의 의견을 듣기 원한다고 하면서 중립태도를 취했었다. 김리교는 그들 독특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있다면 인본조의적, 체험주의적 부흥신학이고,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안 신학을 좇고 있다. 이 신학은 화란의 돌트 총회에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신학이었다. 그런데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게는 아르미니안주의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선교구역을 분할할 때에도 나타났다. 1890년부터 시작된 장로교회, 감리교회 선교회의 협의로 선교구역이 확정되었다. 그 결과 장로교회 선교회는 지난날 자기들이 세운 장로교회를 감리교회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넘어가도록 강요를 당한 장로교인들이 항거하게 되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에 된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선교사들이 신학과 신앙고백(교리)을 간과한 데서 온 사건들이었다.
둘째는, 한국 장로교회 독노회를 조직할 때(1907년) 한국 장로교회의 터를 놓으면서 선교사들은 역사적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내용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1904년 인도의 장로교회가 채용한 간단한 소위 ‘12신조’만을 받아들인 것이다. 표면적 이유는 교회역사가 오래지 않은 교회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선교가 시작된 지 이미 23년이 되었고,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교세는 세계 어느 나라 장로교회 공동체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큰 공동체를 이루었었던 것이다. 당시 교회당 수가 1,472개요,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수다 18,061명, 교회지도자인 조사가 160명, 전도인이 330명이나 되었다.
독노회는 12신조를 “대한장로교회신경”으로 채용하면서 그 서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라고 한 것이다.
1907년 한국장로교회의 조직으로 교회의 터를 놓으면서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하지 않은 내적인 이유는 선교사들이 가졌던 교회일치에 대한 염원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2년 전인 1905년에 한국에 하나의 “예수교회”를 세우기로 감리교 선교사들과 합의를 보았었다. 그러니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과 유기의 교리들을 고백하는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하게 되는 경우에 염원하는 하나의 교회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구체적인 교리를 담지 않은 아주 간단한 12신조를 채용헀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초대 선교사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소극적 견해와 접근태도를 볼 때,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음은 틀림없으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귀중히 여기고 정체성 있는 장로교회를 세우는 데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곧 저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터로 하고 장로교회를 세우고자 힘쓴 분들은 아니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07년에 첫 졸업생을 낸 평양 장로교회신학교가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였지만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친 학교라기보다는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신학을 가르친 학교였다. 이 사실은 이미 앞서 언급한 소안론 교수와 라부엘 교장의 신학적 입장에서도 분명하였지만 1930년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박윤선 박사가 그의 자서전에서 밝힌 말에서도 분명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칼빈주의, 개혁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성경신학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단지 평양신학교에서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를 배웠을 뿐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초대 미 장로교 선교사들은 개혁주의 신학입장에 서 있지 않았고 신앙고백 문제에 있어서 해이한 교회생활의 전통을 남겨주었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1960년대가 이를 때까지 자기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한국 대부분의 장로교 교파들은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총회에서 이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 총회들이 1960-1970년대에 이르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 신앙고백이 실질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총회의 신앙고백 채용은 하나의 사건으로 지나갔을 뿐이고 교회의 실제생활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교회설립 시초부터 거의 일세기 동안 신앙고백과 먼 거리에서 살아온 교회가 갑자기 신앙고백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것을 귀중하게 여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신앙고백을 형식적으로만 받았을 뿐이고 지금도 이것이 교회의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관은 한국의 장로교회와는 매우 다름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소위 ‘세 일치신조’(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신조)를 교회의 신학적, 교리적 기반으로 삼고 이를 교회의 가치로 내세우며 거기서 개혁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적인 공식신앙고백문으로 채용했으나 현재 이를 참고서 정도로 여기고 있는 형편이다. 목사와 장로 등 직분자들까지도 이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목사가 임직 시에 이 신앙고백 내용을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라는 물음에 “예”라 대답함으로 서약을 한다. 그렇다면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나 설교의 내용이 이 신앙고백에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 목사 상당수의 설교들은 장로교 설교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설교 내용이 개혁주의라기보다는 아르미니안적 경향을 띠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개혁교회는 아와 달리 목사의 교육과 설교에서 신학과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고백교회로서의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편이다.
3. 신앙고백서에 대한 양 교회의 상이한 접근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누가 신앙고백을 하며, 그 신앙고백을 따라 살 것을 서약하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직분자들만이 임직 시에 장로교 신앙고백을 수락하고, 서약할 뿐이고, 일반교인들은 이에서 제외된다. 그러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직분자들만의 신앙고백일 뿐이고, 일반 교인들의 신앙고백은 아니다.
원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장로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작성되었었다. 대요리문답은 강단에서 교리적 해설과 설교를 하기 위함이었고, 소요리문답은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원래 장로교인들은 이 신앙고백문서로 교리교육을 받고 당회 앞에서 이 신앙고백내용으로 문답시험을 거쳐 신앙고백(입교) 시에 “이것을 성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믿느냐?”라는 물음에 “예‘라고 서약함으로 장로교회 신앙고백을 하는 고백교회 교인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었다. 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회는 지금도 그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신앙고백(입교)을 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는 초대 선교사들로부터 이런 전통을 받지 못했다. 목사, 장로, 집사만이 장립 혹은 임직 시에 “신앙고백, 대, 소요리문답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라고 묻고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신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문답을 할 때는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에 관하여는 묻지 않는다. 단지, “예수가 구주임을 믿느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겠느냐?”라는 아주 초보적이고 보편적인 것만을 묻고 서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위한 문답(신앙고백)을 한 분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교적에 오름으로 장로교회의 교인이 될 뿐이지, 장로교회가 믿는 바를 믿고 고백함으로 장로교회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한국장로교회가 가진 큰 문제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목사, 장로, 집사들만이 장로교인이요, 일반 다른 교인들은 어느 교회라도 넘나들 수 있는 보편교인이 되는 것이다(물론 장로, 집사도 신앙고백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모르면서 임직 때 ‘예’라고 답하는 것은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고 한 제9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일반교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장로교회에서 감리교회로, 혹은 침례교회로 드나들게 된다.
이런 신앙고백에 대한 접근생활은 교회의 권징 문제에 있어서도 관계가 된다. 교리적으로 크게 탈선하였을 때에도 신앙고백을 두고 서약한 직분자들에게는 법적으로 징계를 가할 수 있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직분자들은 신앙고백을 두고 서약했지만 일반교인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혁교회가 언급하는 참교회의 표지 중 하나인 권징문제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권징만 할 수 있고 교리적인 면에서의 권징은 불가능한 것이다.
개혁교회는 교회 직분자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이 다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문서 내용을 자기의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수용하고 고백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에서 신앙고백의 내용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뒷받침된다. 일단 교회 청소년들이 12세가 되면 매주 한 시간씩 목사로부터 직접 교리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18세 안팎이 되어 입교문답(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신앙고백을 할 때쯤이면 청소년들은 ‘세 일치신조’에 대한 내용을 거의 익히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교리교육을 통해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을 좇는 교회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개혁교회에서 입교 시에 서약을 위해 묻는 물음 가운데는 “신앙고백서에 요약되고 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진심으로 믿습니까?”, “또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이 되는 이단과 모든 오류를 거절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생사 간 이 교리를 계속 굳게 붙들고 살기를 약속합니까?”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개혁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철두철미하게 신앙고백 내용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고 사는 개혁교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거의 다른 교파 교회로 옮기는 일이 없다. 자기 교회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은 칼빈주의 개혁교회와 아르미니안주의 교회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안다. 이들은 어느 지역, 어느 나라로 이동을 해도 개혁교회를 찾아간다.
4. 신앙고백관에 대한 차이의 근거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신앙고백을 접근하는 것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신앙고백서 내용에 나타난 교회관에서 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25장에서 교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고백에 나타난 교회관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교회에 대해 매우 상대적인 사고를 쉽게 갖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4항에 보면 “이 공동의 교회에 속하는 개 교회는 복음의 교리를 가르침과 받아들임, 규례의 집행, 그리고 공적 예배가 행해지는 순수의 정도에 따라 혹은 더 순수하기도 하고 혹은 덜 순수하기도 하다”로 함으로 더 순수하고 덜 순수한 교회를 구별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25장 5항에서 “세상에 있는 가장 순수한 교회도 혼합과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하기보다 사단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항상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런 교회에 관한 내용은 매우 현실적이라 볼 수 있다. 이 신앙고백 내용을 잘 알고 사는 신자들은 더 순수한 교회에 가담하고 사단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한 교회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순수성이 차이를 언급하게 될 때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상대주의적 사고를 쉽게 가지고 어느 교회든지 안주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벨직신앙고백 제29장은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참 교회의 표지로 순수한 복음설교, 순수한 성례의 집행, 교회 권징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제28장에는 “누구든지 교회의 일치를 지탱하고 이 교회에 속하고 연합할 의무가 있다”라고 한다. 개혁교회 신자들은 이런 교회관을 가진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서약했기 때문에 참 교회의 표지를 따라 참 교회를 분별하는데 노력한다. 물론 세상에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없는 것처럼 완전한 교회도 없다. 그러나 개혁교회 신자들은 참 교회 표지를 따라 교회 중에 참된 교회로 판정되는 교회를 택하여 속해야 한다는 신자의 의무감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회관이 개혁교회의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고백 내용을 귀중하게 생각하도록 하고, 개혁교회가 명실공히 고백교회로 자리를 잡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맺는 말
한국 장로교회 초대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성경을 영감된 절대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주의, 근본주의 신학을 좇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자들로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따른 교회건설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안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교회일치주의자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 장로교회를 장로교의 역사적 기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터로 하는 개혁신앙 고백교회를 건설하지 못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지난날 성경관에 있어서는 매우 강한 입장을 취해 왔지만 다른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강조를 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의 복음주의교회로 성장해 왔지 색깔이 선명한 장로교회로 성장해 오지는 않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많은 분열에는 교리가 아닌 다른 것이 요인이 되어 왔었다. 이는 교회가 선명한 신앙고백 내용 위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개혁신앙고백 교회가 되지 못함으로 현재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2007년에 “한국 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회의”의 주도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한국 교회연합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한국기독교협의회”가 1905년 장감 선교회로 이루어진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통합공의회”의 전통을 이어 왔음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의 교파선교…군사독재 등의 시기에 발생한 신학과 신앙, 사회 윤리적 문제에 대한 대처 방법 차이로 인해서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나아가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기본원칙”에는 이 연합운동이 “한국교회의 궁극적인 일치를 지향한다”고 되어 있다. 결과 이 연합운동은 분명히 1905년에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통합공의회”에서 하나의 “대한예수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이상을 따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연합 일치운동에 합동, 고신 증 지난날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파수하며,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해 오던 교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신학과 신앙고백적인 입장을 초월한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에 소리 없이 동조하는 교회들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침묵에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오늘의 교회일치운동은 종교다원주의 운동과도 맥이 통하는 자리에 있다. 이런 교회생활의 변질을 가져오는 교회연합과 일치운동 가운데 사는 우리는 오늘날 주께서 기뻐하실 교회운동이 무엇인지를 묻고 우리들의 역사적 위치를 한 번 더 점검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난날 한국 교회 초대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희망대로 하나의 “대한 예수교회”가 이루지지 않았던 것은 교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섭리적 간섭이었다고 보게 된다. 한국교회가 지난날 놀라운 성장의 축복을 받은 것도 거기서 찾게 된다. 같은 때에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하나의 교회를 이룬 케나다 연합교회는 오늘날 세계에서 속화된 교회 중에서도 가장 속화된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신앙고백적인 면에서 순수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런 교회로부터 생명력이 있는 메시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의 무오 교리를 견지하는 동시에 그 범위를 더욱 넓혀 개혁주의 신앙고백교회 건설에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장로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 직분자들이나 평신도들이 왜 내가 장로교인인지 누구 앞에서나 그 이유를 당당히 밝힐 수 있고, 장로교인 된 것을 감사하며 자부심을 가질 때 한국 장로교회는 참으로 개혁주의 장로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개혁해 가는 교회(총회출판국), 허순길 박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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