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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김명도 교수)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김명도 교수(튤립신학연구원)
사람들은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가끔 신문에 <교회를 새로 개척한다>는 광고를 보는데, <신앙 노선이 개혁주의>라고 하여 예배에 참석해 보면, 설교나 예배 양식이나 간에 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개혁주의 신학이 좋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단지 남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이런 속임수를 쓰는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다. 목회자는 진리를 바로 분변하여 자신을 부끄럼 없는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야 한다. 바로 배우고, 바로 살고, 바로 남에게 전해야 한다. 먼 훗날, 이 땅의 장막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날이 반드시 오는데, 그 날 하나님에게 대답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 옛날 Scotland의 언약파(Covenanters)들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사역해야 하다.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바로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바로 실천 생활하고, 바로 남에게 전하자.
우선 <개혁주의 신앙>이 아닌 것부터 말해 보자. 다음과 같은 신앙노선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첫째, <예수를 믿으면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하며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이런 가르침은 <Health-Wealth Gospel>이라고 불리는데, 요즘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마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으로 착각한다. 예수를 믿어도 이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수가 있고, 가난할 수도 있다. 칼빈의 경우는 그분이 결코 신앙이 우리들 보다 못한 분이 아니지만, 그는 5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몸에 27가지의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다. Robert Murray McCheyne 목사는 26세에 목사로 안수 받고 사역하다가 29세에 세상을 떴다. 그는 그 3년간의 사역 기간에 다른 사람이 30년 목회한 것 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었다. 바울에게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육신의 가시>가 있었다. 그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하나님에게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다. 요즘 어떤 목사들 중에는 <우리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병에 걸리거나 가난하게 사는 이유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성도들을 속인다. 바울이나 Calvin이나 McCheyne 목사 등이 우리 보다 믿음이 약한 분이어서 세상을 일찍 떠났는가? 요즘 Kenneth Copeland나, Charles Cabbs나, Napoleon Hill 등이 이런, 소위 <Health-Wealth Gospel>을 가르치는 분들이다.
둘째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생활은 적당히 하면 된다>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우선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믿는다, Credo>란 말이 무슨 뜻인가? 믿음을 논할 때는 <믿는 대상>, <믿는 내용>, <믿는 방법>, 그리고 <믿는 이유> 등이 확실해야 하는데, 목적도 믿는 대상도 뚜렷이 알지 못하고, 믿는 내용(교리)도 모르고, 믿는 방법(기독교 윤리학)과 믿는 이유(변증학)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교회만 기계적으로 출석하여 <주일을 성수했다>고 자부한다.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어떻든 <믿기만 하고 그 다음은 적당히 생활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성경과 정반대가 된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믿는 내용은 기독교 교리이다. 기독교 교리를 알면 우리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스스로 자명해 진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기독교계에는 바른 신앙고백서를 체계 있게 가르치는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요리문답, 이를테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대,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을 제대로 교육하는 교회가 몇이나 되는가? 교인들이 무식하기 때문에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창궐하고 이단에게 속아 넘어간다.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니, 예수를 믿는 방법인 기독교 윤리도 모른다. 따라서 왜 믿는지 믿는 바를 남에게 대답할 수 있는 힘, 즉 변증학을 모르니 이단들과 싸울 때도 힘이 없고,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맹목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장성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화(sanctification process)의 과정이 정체되어 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선 우리가 믿는 바를 알아야 한다. 어떤 목사들은 “교리를 따지지 말고 믿어라”라고 가르친다. 크게(큰) 잘못이다. 믿는 대상도, 내용도, 방법도, 이유도 모르면서 <믿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기독교는 아무렇게나 믿는 종교가 아니며, 동시에 아무렇게나 적당히 생활하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했다는 말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대상과 믿음의 내용, 믿음의 방법 및 믿음의 이유 등이 모두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적당히 생활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로지 <사이비 신자들>만 그렇게 알고 그렇게 생활한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게 해 주지만, 일단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율법으로 되돌려 주어 율법을 지키게 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얻었으니 생활규범 (norm)으로서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시편 119:105). 율법의 세 가지 목적은, 1.우리로 하여금 죄인 것을 깨닫게 하고, 2.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고, 3.우리가 살아갈 생활의 규범이다. 우리는 죄의 종이 되었다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서 자유를 얻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데서 부터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다가 다 지키지 못하여 지옥에 내려가야 하는 형벌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켜 생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고 요한복음 14장 23절 이하에 여러 번 말하고 있고, 요한일서 5:2에도, 요한2서 6절에도 같은 말들이 되풀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적당히 하라는 가르침은 절대로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활하는 목사나 장로나 전도사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셋째, <죄 문제를 거론하여 교인들을 괴롭히지 말고 교인들이 좋아하는 대로 목회하라> 이렇게 가르치는 성직자는 개혁주의는 고사하고 성경의 기본도 모르는 분들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의 고집을 내세운다. 예배할 때도 <하나님 중심>보다는 <인간 중심>이다. <성경에서 무어라고 말하던, 기분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emotion-oriented service). 그래서 요즘은 <열린 예배, Seekers' Church>라는 것이 유행한다. 이른바 <새 신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니 어려운 교리를 말하지 말고, 그들이 좋아하는 세상 음악을 즐기면서 예배를 드리자>는 주장이다. Rick Warren이라는 목사가 쓴 Purpose-Driven Church라는 책이 그런 말을 한다. 그는 그 책에서 노골적으로 말한다(Rick Warren. Purpose-Driven Church.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5, p.285). 이 책은 결단코 개혁주의 신앙을 전파하지 못한다. 아론(Aaron)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예배를 제 멋대로 드리다가 불에 타서 죽임을 당했다(레위기 10:1-2). 예배나 신앙생활은 절대로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반드시 성경적이야 한다. 성경에서 지시한 대로만 예배를 드려야 하고, 성경에서 지시한대로 생활해야 한다.
넷째, <예수님이 재림하여 성도가 휴거하고 지상에 7년 대 환난이 온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학은 <개혁주의>가 아니라 “세대주의”라고 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원래가 1880년대에 영국 Plymouth Brethren에서 John Nelson Darby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후에 형제교회 (Brethren Church)로 발전하였다. 미국에서는 20세기 초엽에 신학교에 다닌 적도 없는 Cyrus Ingerson Scofield라는 사람에게 전수되어 미국에서 이런 세대주의 사상이 널리 만연되었다. 1904년에 이른바 Scofield Reference Bible이 나오면서 급속도로 펴져 나갔다. 평양에 들어와서 평양 신학교를 세운 Allen Clark(곽안련) 목사도 이런 신학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경은 <7년 대 환난>을 가르치지 않는다. 계시록에 나오는 <1260일>, <한 때와 두 때 반>, <3년 반> 등은 모두 수학적으로 <3.5>의 상징적인 개념이며, 다니엘서 9:27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7년 대 환난>과 아무 관련이 없다. 단지 <칠십 이례>의 <마지막 이례의 절반에 제사가 끝이리라>는 것뿐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약의 제사법이 끝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 특히 Dallas 신학교나 PCB나 Grace 신학교 등에서는 Scofield 식으로 가르친다. 이들은 가르치기를, 예수님이 <도적같이> 임하여서 잘 믿는 사람들을 휴거(rapture)하고 지상에는 <7년 대 환난>이 오고, 전 삼년에 유대인들이 모두 구원을 얻고, 후 삼년에는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에게 핍박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다가, 주님이 두 번째로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의 <다윗의 보좌>에서 1,000년 동안 왕 노릇하다가 끝난다고 가르친다. 이런 사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근자에 나온 Tim LaHaye의 Left Behind라는 영화이고, 또 30년 전에 나온 Distant Thunder라는 영화이다. 이들 영화들은 모두 이런 세대주의 신학에 입각한 영상물로, 많은 교회에서 무분별한 주일학교 반사들이나 개혁주의 신앙에 어두운 전도사들이 열심히 이런 영화를 학생들에게 상영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두 번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이다. 성경이 이를 입증한다. 요한복음 6장을 읽어 보라.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라”란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문제의 “마지막 날”이라는 말은, 원어인 헬라어에서는 <헤 헤스카테이 헤메라>, 즉 “최후의 날”이라는 단수명사이다. 마지막 날, 즉 <주님이 오시는 심판의 그 마지막 날>은 <단수>이다. 복수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도적같이 임 하시는가?> 베드로 후서 3장에는 그렇게 썼으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3-4절을 보라. <믿는 자는 어두움에 있지 않으니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는가? 예비하지 않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도적같이 예기치 않을 때 주님이 오신다. 그러나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늘 성경대로 주님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절대로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
다섯째, <성경의 내용에는 믿지 못할 것들도 있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1920년대 독일과 영국의 자유주의가 미국에 들어 왔는데, 동부 뉴져지주 Princeton 신학교에 처음으로 이런 사상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Barth나 Bultmann 같은 사람의 사상을 받아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고 가르쳤다.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부임한 Charles A. Briggs목사는 1896년 취임사에서 노골적으로 “고등비평을 성경 해석에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무렵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J. Gresham Machen박사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 책의 이름이 Christianity and Liberalism(기독교와 자유주의)이라는 책이다. 그는 그 책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주의자는 크리스챤이 아니다”라고 혹평했다. 과연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예수님을 하나의 스승으로 믿는 자,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 기독교의 목적은 사회의 정의구현이라고 외치는 <사회복음주의자>는 분명히 크리스챤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승천도, 재림도 믿지 않는 자는 분명히 크리스챤이 아니며, 따라서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놀랍게도 이런 교회가 오늘날 상당히 편만하여 부흥하고 있는 것은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여섯째,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으니 믿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라고 가르치는 분은 <개혁주의 신앙가>가 아니다. 이런 사상을 <아르미니안 주의 Arminianism>이라고 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것 뿐, 궁극적으로 믿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단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것뿐인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보장하였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이 스스로 믿을 수 있는가? 에베소서 2:8-9을 보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믿는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죄인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갈수 있는가? 에베소서 2:1-9을 읽으라. 로마서 3:1-23을 읽으라. 죄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로 하나님을 찾아 갈 능력이 없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도 올 자가 없다”라는 요한복음 14:6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기원 1618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있었던 화란 Dort 대회에서 아르미니우스 교수의 제자들이 화란정부에 <항소문>을 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함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함이라고 하고, 사람이 한번 구원 얻었다 해도 구원을 상실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불러주셔도 구원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153차에 걸친 회의 결과 아르미니우스 교수의 제자들이 패소하였고 여기서 바른 구원의 도리를 정립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TULIP이며 본 튤립 교육 선교회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다.
일곱째, <지금도 직통 계시, 환상, 천사의 방문, 입신, 천당 여행 등 신비주의를 믿는다>라고 가르치는 교리는 결코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Montanus 같은 사람이 있어서, 소아세아 브리기아 산 (Phrygia)에 A.D.150년에 주님이 재림한다고 가르치며, 굴속에 들어가 Maximllla와 Prisilla 등 두 여자 선지자와 같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던 무리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단자로 파문되었다. 이런 운동은 그 때도 있고 지금도 존재한다. 근자에는 이런 운동이 극심하여 많은 성도들을 미혹한다. 성경에 어두운 성도들은 이런 가르침을 좋아하고 따라간다.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계시의 종결을 부인한다.
전통적인 신앙, 즉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이적, 기사, 꿈, 환상, 천사의 방문 등을 통해서 역사 하였지만, 성경이 끝난 다음에는 성경 가장 끝 책인 계시록의 맨 마지막 장, 22장의 맨 끝부분인 18-19절에서, <이 기록된 말씀위에 더 이상 보태지 말며 감하지도 말라>고 엄하게 명하며, 히브리서 1장에서도, 옛날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던 일이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성취되어 나타났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상당히 명확히 가르쳐 왔다.
예를 들면, 옛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B.B.Warfield 교수는 그의 명저 Counterfeit Miracles(거짓 기적)이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이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도들이 가시고 교회가 세워진 다음부터 이런 <특수 은사 (혹은 임시은사), 영어로는 Extraordinary gifts>는 끝났고, 지금은 기록된 말씀만 가지고 역사한다고 가르친다. 그 외에도 Missouri주 St. Louis에 있는 Covenant 신학교의 교수로 있다가 나중에 Westminster 신학교에서 구약을 얼마동안 가르친 후,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신학교를 운영하시는 O Palmer Robertson 교수도 그의 책, Final Word (계시의 종결)라는 책에서 같은 주장을 하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동부) 조직신학 교수이며 필자의 신학교 시절 신학석사 논문 심사 위원 중 한 분이시던 Richard Gaffin 박사도 그의 책 Perspective on Pentecost(오순절의 의의)라는 책을 통해서 계시의 종결을 역설하며, 시카고 Moody 성경학교의 Merrill Unger 박사도 New Testament Teaching on Tongues라는 책에서 같은 사상을 피력하고 있고, 남가주의 Master 신학교의 교장인 John MacArthur 박사도 그의 명저인 Charismatic Chaos라는 책을 써서, 역시 계시의 종결을 강하게 주장한다. 계시의 종결을 인정하지 않는 교파에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계시가 임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 받는 계시와 성경을 합해서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오직 성경>을 외치는 종교개혁의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불행스럽게도 오늘의 기독교계는 계시의 연속성을 믿는 성도들이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국적을 불문하고 80퍼센트가 넘는다(1999-2003조사). 그러므로 교인들 중, 80퍼센트는 개혁주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만일 지금도 성경기록 당시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초자연적 방법으로 계시가 임한다면, 그리고 성도들 각자가 체험하는 계시가 서로 다르다면, 그 모든 계시를 책으로 만든다 해도 저장할 곳이 없을 만큼 많을 것인데, 서로가 제 멋대로 계시를 받는다면 객관적인 성경 해석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대개 이런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분들은 <개인의 체험>을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해석에서 가장 위험하다. 체험은 각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5:7에 따르면,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보는 것이나 체험으로 행치 않는다.
위에서 말한 일곱 가지 신앙 형태는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개혁주의 신앙의 철학>, <개혁주의의 핵심사상>, <개혁주의의 구원관> 등, 세 가지로 나누어 <개혁주의 신앙>을 설명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개혁주의가 아닌 가르침들을 보았다. 그럼 이제,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가를 보도록 하자.
I. 개혁주의의 철학 (혹은 원칙)
<개혁주의 철학>에는 세 가지 원칙 혹은 철학이 있다.
첫째,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는다.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우리 인간의 조물주임을 믿으며, 그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며, 세상과 인류와 개인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며, 만물이 그의 전제적 의지대로 운영됨을 의심 없이 믿으며,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은 조물주인 성 삼위 하나님을 내 생명의 근원으로 믿으며 그에게만 의지한다. 나의 의지를 고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
둘째,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다.
개혁주의 신앙가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신 말씀으로, 절대로 정확하고 절대로 무오한 계시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믿는다.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인간의 구원을 말하며, 구약 때나 신약 때나 모두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하나님은 같은 방법,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신다. 구약이 없이 신약이 없으며, 반대로 신약이 없이 구약이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구약만 수용하는 유대교는 잘못이며, 반면에 신약만 인정하는 이른바 Apostolic New Testament Church(신약 사도교회)는 성경적이 아니라고 믿는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대로 “신약은 구약 속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 나타나 있다”고 믿는다. 성경의 어느 부분도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곳이 없으며, 모든 성경은 모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 믿으며, <자유주의자>들처럼 성경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수용하지 않는다.
셋째,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을 절대적으로 생활화 한다>
개혁주의 신앙가(信仰家)는 성경을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으로 믿고 그렇게 생활한다. 성경말씀은 우리 <믿는 도리>를 가르쳐 주고, 또한 <생활 강령>을 가르쳐 준다. 절대적인 진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성경은 진리와 비 진리를 분간하는 시금석이 된다. 성경이 없이는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다(요 14:6). 그러므로, Scotland나 Holland의 개혁주의자들은 성경대로 살았다. 오늘날의 교회가 영력(靈力)을 상실하고 그 많은 <영적 각성 운동>을 하면서도 변화가 없는 것은, 성경대로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그러했듯,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순종을 가장 요긴하게 가르친다. <사랑>과 <순종>은 동의어이다.
II.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사상(核心思想)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사상>은 다섯 가지이다. 그 다섯 가지란,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3. 오직 믿음(Sola Fide), 4. 오직 은혜(Sola Gratia), 5.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Soli Deo Gloria) 등인데, 이제 하나씩 설명해 보도록 하자.
첫째,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개혁주의 신앙은 모든 것이 성경 중심이다. 설교도, 예배도, 찬송도, 교회 행정도, 친교도, 개인의 직장이나 가정 및 사회생활도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다. 성경 이외의 어느 문헌도, 어느 권위도,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을 수 없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은 지구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리를 가르친다. 그들은 교황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 <교황의 무오설>을 주장한다. 성경 해석도 교황이 해석한 것이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전통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는 목사나 신부나 교황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성경 스스로가 해석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유일한 최고의 권위이며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며>, 어느 인간도 결코 독단적으로 해석함을 용서치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공부, 특히 catechism(요리문답) 공부에 집중한다. 개혁주의자는 <성경 기록 당시 사용되었던 특별계시의 방법은 이제 종결되었다>고 믿으며, 어떤 <직통계시>도 인정치 않는다. 하나님은 신구약 66권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말씀을 모두 충분히 주셨다고 믿는다. 즉 성경의 필요성과 함께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of the Scripture>를 믿는다. “성경의 충족성을 믿는다”는 말은 상당히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교파에서는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는다.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으면, 직통계시, 환상, 입신, OBE(Out-of-Body Experience), NDE(Near-Death Experience) 등을 따르게 되어 성경만을 인정치 않고 성경 이외에 다른 것들을 인정하게 된다. 고로, 성경에 다른 것을 보태는 결과가 된다. 오늘날 교계에는 이런 현상이 아주 유행이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당장 입증이 되는 이야기이다. New Age와 Postmodernism의 물결이 교회에 무서운 속도로 파고드는 지금의 이런 현상은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주의<Sola Scriptura, 오직 성경>의 사상에 위배된다.
둘째,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 사상을 믿는다. <성령이 중심이 아니다>. <마리아가 중심이 아니다>. <직통계시가 중심이 아니다>. <그리스도 중심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신 분은 바로 예수 한 분이다. 마리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준 일이 없다. 누가복음 1:41절 이하에 읽어 보면, 마리아도 예수를 <아들>이 아닌 <구세주>로 보았다. 마리아도 죄인이고, 교황도 죄인이고, 목사도 죄인이며, 아담의 후손치고 죄인 아닌 분은 없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 탄생하여 성육신하였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갖고 계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고후 5:21). 어떤 분은 성령을 강조한다. 이 역시 잘못 된 교리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며, 성부도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분 계심이 아니요, 한 분 하나님에게 삼위가 계신다. 이것은 창세기 1:26,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3 등이 입증한다. 성령이 누구를 증거 하는가? 요한복음 14:26이나 요한복음 15:26절을 읽어 보라.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사도행전 1:8에는 그리스도가 승천하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는데,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리라>”고 가르친다. 거기서 <증인이 되리라>란 말은 원문에서 <순교하리>의 의미이다.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성령을 받은 증거는, 죽도록 전도하는 것이다(사도행전 1:8 참고). 그러기에 16세기의 Scotland나 Holland의 종교 개혁가들은 화형에 목숨을 잃으면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외쳤다. 오직 성령을 외친 것이 결코 아니다.
셋째, 오직 믿음 (Sola Fide)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믿음>을 믿는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이뤄진다. 믿음은 그 자체가 agent가 아니라 means이다.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는데, 믿음이란 그 은혜를 받는 방편(means)인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창성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히브리 11:13절 이하에 의하면 그 약속이 먼 훗날 이뤄질 것을 의심 없이 믿고 눈을 감았다. <믿음이란 이적이나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고후 5:7). 그러므로 이적과 기적에 관심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앙가가 아니다.
넷째, 오직 은혜 (Sola Gratia)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은혜>를 믿는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나 살아가는 모든 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천주교에서는 이른바 “여공(餘功, supererog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사람마다 교회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공>을 세워야 하는데, 구원 받기에 충분한 공보다 초과한 공을 “여공” 이라고 한다. 이 “여공”은 교회에 예치(deposit) 되었다가 나중에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에게 성찬식을 통해서 공급된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이 이른바 supererogation의 교리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종교 개혁가들은 <Sola Gratia>를 외쳤다. <오직 은혜>란 뜻이다. 구원은 1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은 조금도 가산되지 않는다. 지금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든지,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든지, 어떤 공로를 이루어야 구원에 가산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십계명, 즉 도덕법을 지킬 의무는 있으나 그 도덕법을 완전히 지킬 인간은 없다(갈 2:16, 롬 3:20). 도덕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으로 모두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히 지켜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 도덕법을 지키다가 완전히 지키지 못하여 지옥에 내려갈 형벌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잘 못 이해하기 때문에 소위 <도덕 폐기론, Antinomianism>이 나와서 교인들을 오도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계명을 모두, 완전히, 우리를 위해 지켰으니 우리는 그런 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자>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명백히 개혁주의 신앙도 아니며 극히 비성경적인 신앙이다. 시편 119편을 읽어 보라 특히 119:105을 읽어 보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성경 말씀은 내가 인생을 살아갈 규범(Norm, 規範)이란 말이다. 또한 119:109을 읽어보라.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요컨대 시편 119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생활강령>임을 가르쳐 준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4장에도 15, 21, 23, 24 절 등을 보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요 나의 제자라”고 주님이 직접 말씀 하시지 않는가?
다섯째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 (Soli Deo Gloria)
끝으로,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교리는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이라는 사상이다. 우리의 생명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태어났고, 하나님의 예정 속에 택함을 입어 사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종으로 변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 summum bonum, the highest good>은 조물주 하나님만 공경하고, 섬기며,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 소 요리문답 제1문 참고).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탓에(창 2:7), 반드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직업을 택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며, 학교를 택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며,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기독교 교계에서는 이런 생활은 극히 찾아보기 드물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기의 유럽의 화란이나 Scotland, Hungary 등에서는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다.
이 말은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미도 들어 있다. 천주교에는 예배의 종류가 셋이다. doulia, hyperdoulia, latreia 등 세 가지이다. 천사나 성자들에게 예배하는 것이 <doulia>이다. 이들은 천사도 경배하고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사람이나, 그 외에 공을 많이 세워 성자(saint)로 추인 받은 사람을 경배한다. 성경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는 분, 즉 중생한 분을 지칭하지만 천주교에 있어서 <성자>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경배의 대상이 된다. <hyperdoulia>란 마리아를 경배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리아를 경배의 대상으로 알고 경배한다. 끝으로, <latreia>는 성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이다.
개혁주의는 오직 성삼위 하나님에게만 경배하고 그에게만 순종하며 다른 이들에게 예배하는 것을 엄금한다.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에는 <십자가>도 없었고, <예수님의 사진>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성상>도 없었다. 중앙에 강대상 하나만 놓고 한 시간씩 성경 중심으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설교로 회중에게 큰 은혜를 더하였다. 오늘의 대부분의 교회의 설교와는 천양지차이(天壤之差異)가 있다.
III. 개혁주의 신앙의 구원관
개혁주의 신앙은 구원관에서 다섯 가지 교리를 믿고 가르친다. 그 다섯 가지란, 1. 인간의 완전타락 (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4. 무저항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그리고 5. 성도의 궁극적 인내(Perseverance of Saints) 등인데, 차례로 하나씩 설명한다.
첫째, 인간의 완전타락 (Total Depravity)
아담이 범죄한 이후 태어난 모든 사람은 모두가 죄에 팔려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을 상실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며 죄의 노예(bondage to sin)가 되어 자행자지(恣行自志 autonomy)하며 하나님 없이 자기중심으로 살아간다. 옛날 기원 5세기에, Pelagius(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갈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은 성경을 곡해한 소치이며, 성경은 시편 14:1이나, 이사야 1:6, 롬 3:11이나, 엡 2:1-9에서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음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에 기인한다. 개혁주의 신앙은 인간의 완전타락을 믿으며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믿는다.
둘째,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지옥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중에서 구원 얻을 자를 택해 주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어서도 아니며, 우리가 무슨 공로를 세워서도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창세전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예지론>에 의해 구원 얻도록, 즉 무조건 구원 얻을 백성을 <무조건 선택해 주셨다>고 믿는다.
이에 반해 어떤 이들은 가르치기를 “우리가 믿을 것을 알고 하나님이 예수 믿을 사람을 선택해 주었다”라고 하는데, 이런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협력구원설, Synergism)이라고 하며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아르미니안 주의자, Arminian>이라고 부른다. Arminian이라는 말은 17세기에 Holland의 Leyden(라이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Jacobus Arminius라는 교수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조건부 선택, 즉 “예지예정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아르미니안주의자. Arminian>이라고 부른다.
로마인서 8장이나 9장, 또한 에베소서 1:4에 보면 우리를 택해 주시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거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로마인서 9장을 자세히 읽어 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우리를 택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무조건선택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해 주신다고 개혁주의 신앙은 주장한다.
셋째,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
개혁주의 신앙은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 혹은 Particular Atonement>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만을 위함이라고 믿는다. 이 말은 요한복음 17:9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가 비옵는 것은 온 세상을 위함이 아니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입증된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살후 3:2 에 말한다. 요한일서 2:2 말씀을 들어 반박하는 분도 있으나 문제의 요일 2:2에서는 <천하 만민 중 종족이나 직업이나 성별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간에 모든 사람>을 말한다.
넷째, 무저항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개혁주의 신앙은 <무저항적 은혜, Irresistible Grace>를 믿는다. 한번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하여 <효과적인 부름>의 은혜를 주시면 인간은 반드시 구원 받고야 만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시면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신다. 그 방법은 그가 택한 자들에게 그가 정한 때에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으로 이뤄진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일반적 부르심, universal call>과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방법을 통해서 전파되며 사람들은 모두 복음을 직접 간접으로 접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 부르심, universal call”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들어도 믿기를 거절하는데, 이유는 그들을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자는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불러주신다. <효과적인 부름>을 받으면 즉시 <믿음>과 <회개>가 생긴다. 그래서 <회심, conversion)의 단계를 거쳐 <칭의 justification>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무저항적 은혜>란 하나님이 <효과적 부름>으로 불러주시면 그 부름을 거절할 수 없이 구원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대로 죄악으로 죽은 인생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다. 좋은 예를 사도 바울에게서 본다. 사울은 율법에 통달한 사람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도들을 핍박하고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불러 주시니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어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다.
다섯째, 성도의 궁극적 인내 (Perseverance of Saints)
개혁주의 신앙은 <성도의 궁극적인 인내 Perseverance of Saints>를 믿는다.
다시 말하면, <한번 구원을 얻으면 구원을 영원히 보존하고 결코 구원을 상실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빌립보 1:6 에는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라고 했고, 로마인서 8:38-39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말한다. 또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에서 “온전케 한다”라는 말은 “끝까지 완성시켜 준다”는 말이다.
또한 성경원어인 헬라어의 문법으로 보아도 엡 2:8의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란 말에서 <너희가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말은 원문인 헬라어에서 “sozo,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완료형 주격 복수 분사이다. 언제나 헬라어의 <완료형, Perfect tense)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동작의 결과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음>을 말하다. 같은 이유로 요한일서 3:9에 나오는 말,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에서 <하나님께로서 났다>란 말 역시 헬라어에서 연구해 보면 <완료형 남성 복수 분사>로 쓰이고 있으므로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과거에 중생한 자는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뚜렷해진다. 한번 구원 얻은 자는 영원토록 구원을 잃지 않는다. 구원 얻었던 사람이 구원을 얼마 후 상실한다면 그것은 <영생, eternal life>이 아니고 <임시생, temporary life?>일 것이다.
<한번 구원 얻은 사람이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성경적 가르침은 그가 진정 회심했을 때를 말한다. 회심이 없는 <사이비 신자 (a nominal Christian)>을 지칭함이 아니다. 많은 경우의 사람들이 열심히 입으로 신앙고백도 하고, 세례도 받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지만 얼마 후에 교회를 떠나고, 신앙도 완전히 떠나고, 죄악의 길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죽는다. 이래도 <한번 구원 받은 성도는 끝까지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교리가 성립하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요한일서 2:19에 나와 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며, 진실로 회개하고 회심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믿는 척하는 사이비 신자”였을 뿐이라고 요한일서 2:19이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성도의 궁극적 인내>란, 진정 <효과적인 부름>으로 부르심을 입고, 회심하여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크리스챤, a spiritual Christian>을 말하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육적인 크리스챤, a carnal Christian>을 말함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이비 신자, nominal Christian>은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 제61문은 아주 정확하다.
이상 다섯 가지가 <개혁주의 신앙>의 구원관이다.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성경의 권위를 높이며, 성경대로 사는 것인데, 성경이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으로 믿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며, 인생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살아간다. 개혁주의 신앙의 구원관은 인간은 완전 타락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창세전에 그의 구원할 자를 오로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어 택해 주셨고, 그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을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어 저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해주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효과적인 부름으로 불러주시면 그는 거절할 수 없이 구원을 얻고야 말며, 한번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결코 구원을 잃는 법이 없이 끝까지 은혜로 같이 해주신다. 이것이 바른 <개혁주의 신앙>이다.
바울은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말한다(갈라디아서 1:8). 주님은 “인자가 다시 올 때 이 땅에서 <믿음, the faith>을 보겠는가?”라고 한탄 하신다(눅 18:8). 원문에 보면, “믿음”(눅 18:8) 에는 여성정관사 "he" 가 붙어 있으니 "그 신앙" 즉 "성경적 신앙" (the biblical faith)을 말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앙”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교회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세속화, secularization” 되어간다. 16세기의 종교 개혁가들이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면서 (특히 Jan Hus, John Wycliffe, William Tyndale, Thomas Cranmer, George Wishart, Patrick Hamilton 등) 이들이 바로 잡은 개혁주의 신앙은 오늘의 많은 교회에서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입으로만 <개혁주의 신앙>을 말할 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철저하게 부인한 채 천주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와 밀착하여 “혼합주의 복음” 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교인에게 독약을 먹이는 행위이다. 이런 현실을 보고도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방관한다. 오늘날 이런 사이비 목회자들 때문에 아름다운 개혁주의 신앙은 자취를 감추어 간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서 경고하는 주님의 음성을 귀담아 듣자.
끝으로 개혁주의 신앙을 원하며 성경의 교리를 바로 알기 윈하시는 분들은 다음 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서적을 모두 익히면 목사들이 강단에서 말하는 비성경적 그릇된 가르침을 쉽게 분별할 수 있게 되며 어떤 이단 사설에도 빠지지 않게 단단히 무장하게 됩니다. 이런 책들을 통달한 후 교리 분별력이 생기게 되면 교회에서 개혁주의 설교가 행해 지지 않을 때 내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그 교회를 단연 떠나십시오.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로 옮기십시오. 거짓 복음은 구원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책들은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니 가까운 기독교 서점에서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돈이 좀 들어도 꼭 사서 보시기를 진심으로 당부 드립니다.
J. Gresham Machen (그래섬 메이천) 저. 바울 종교의 기원, 믿음이란 무엇인가?
B. B. Warfield (벤자민 워필드) 저. 기독교 교리, 거짓 기적, 성경의 영감론
Herman Bavinck (허만 바빙크) 개혁주의 교의학 (전 4권)
Francis Turretin (프란시스 튜레틴) 기독교 변증개요 (전3권)
John Calvin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영문은 가급적 McNeill 이 편집한 것을 구할 것)
Louis Berkhof (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기독교 교리 요강, 기독교 교리사
Charles Hodge (촬스 핫지) 조직신학 (전 3권)
Robert Reymond (로버트 레이몬드) 기독교 조직신학
John Owen (존 오웬). 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죽음의 죽음
John MacArthur (존 맥아더). 무분별한 은사운동
Richard Gaffin, Jr. (리차드 깨핀) 은사론
Kurt Koch (쿠르트 코흐) 사탄의 전술 전략
John R. W. Stott (존 스톳트) 성령 세례와 충만
A.A. Hodge (아치발드 알렉산더 핫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이런 책들은 모두 개혁주의 를 공부하는 필수 참고서적들 입니다. 꼭 읽고 또 읽고 또 읽어 익히시기 바랍니다.
참고사항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박윤선 박사
개혁주의(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를 말한다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들이 흔히 "성경대로,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누구든지 실제로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 주장에 잘못된 내용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믿되 성경을 바로 해석한 그 내용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성경주의이다. 우리가 성경을 성경의 본 뜻대로 바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으며, 그 내용대로 실행할 때에 하나님께는 영광이 돌아가고 인류에게는 유익이 있다. 주님의 교회는 이 신앙 노선에서 건전하게 성장하게 된다.
성경은 자초지종 초자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첫 말씀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로 시작하여 성경의 마지막 말씀에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들이 초자연주의이기 때문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이루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그리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놀라운 약속, 이 말씀들이 초자연주의라는 것은 성경 66권의 말씀 전부를 다 초자연주의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이루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그리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놀라운 약속, 이 말씀들이 초자연주의라는 것은 성경 66권의 말씀 전부를 다 초자연주의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가운데는 물론 도덕적인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성경의 도덕은 비기독교에서 말하는 도덕과 달라서 역시 초자연주의의 도덕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도덕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해야 된다는 것, 즉 하나님이 주신 그의 말씀(성경)대로 행해야 된다는 것이니, 이것이 역시 초자연주의이다. 그리고 사람이 잘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초자연주의에 속한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에서 초자연주의를 빼놓고 기독교를 말해 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돌집에서 돌을 다 빼버리고 집을 세워보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니 그런 이론은 성립될 수 없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초자연주의의 구원운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감(加減)없이 받아서 바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는 것이 개혁주의(칼빈주의)이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깨닫고 바로 해석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되어지지만 인간편에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그것은 성경을 바로 깨닫고 바로 해석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다. 즉, 성경 해석에 필요한 준비공부를 착실히 해야 하며, 바른 기도생활과 성경대로의 진실한 삶과 특히 성령님의 감화하심을 간절히 구해야 된다.
학문만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고 할 때에는 결국 인본주의로 기울어지기 쉽고, 인간의 합리성에 치우치게 되어 초자연 방면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매우 약한 연구자가 되기 쉽다. 그러한 학자들의 성경 해석 문헌들을 읽어 보면 그런 내용이 환하게 알려진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인간의 연구만 가지고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며, 그 은혜 속에서 지식을 활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할 때에는 매우 천단한 데로 기울어지게 됨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건조하지 않으며, 성경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심령에서는 찬송이 나오고, 설교가 나오는 법이다. 벵겔의 말과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꿀을 짜내는 작업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경을 깊이 알고 또 바로 알 때에 그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된다. 이 은혜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결국 성경을 해석한다는 일은 꿀을 짜내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의 주석에는 전질 가운데 일천여 편의 설교가 들어 있다. 그것은 성경을 깨달은 나의 심령에 기쁨이 있고 생명의 약동이 있어서 그 깨달은 진리를 설교로 증거한 것들이다.
내가 여러 주석가들의 글을 참고함으로 배운 바도 많다. 그러나 자유주의 진영에서 발행되는 성경 해석 문헌들을 읽어보면 단어와 어구 풀이에서 그쳤는데, 그것은 성경의 한 방면만을 드러낸 것에 불과함으로 유감스럽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영적 해석을 하지 않게 되면, 성경 자체가 요청하는바 영적 방면의 증거를 외면하는 것이니 그런 해석은 불충분하다.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겸병하는 것이 세계 공통적인 해석 원리이다. 물론 영적 해석을 할 때에 사람의 생각대로 귀에 걸어 귀걸이 만들고 코에 걸어 코걸이 만드는 식의 성경 취급 방법은 절대 금물이다. 영적 해석이란 것은 문자적 해석을 하는 가운데서 종합적 해석을 하게 되고, 그 본문이 정확하게 의미하고 있는 진리를 바로 찾아낼 때에 그것이 영적 해석이 되는 것이다.
-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