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학기 특강(개혁주의 교회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신실하게 받드는 교회(2)
-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목표 그리고 방식 -
말씀:갈라디아서 5:16-26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를 받는 삶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목표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목표
어느 누군가가 행동하게 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과 그 행보에 관계되는 까닭에 그것에 대하여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라는 말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며 인도하실 때에는 거기에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목표가 있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목표와 관련하여 성도를 인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 목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전진과 관계가 됩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현실적인 생활이란 것이 잘 되어가지고 그의 인생길에 평안이 찾아오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는 성령 하나님의 목표라는 것이 설정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영위해 나가는 현실 생활이란 것이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보탬이 된다거나 하는 등의 일과 관련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목표를 가지시지 않으십니다. 성도의 인생길이 순탄해진다거나 병마와는 무관하게 그의 건강이 유지된다고 하는 차원에서도 성령 하나님의 목표가 설정되는 일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 속에서 역사하시거나 그의 속에서 소욕을 일으키실 때에는 항상 목표를 가지시는데, 이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가 완성의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에 기여할 수 있게끔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의 목표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가 그 완성과 정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서만 항상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보다 완성적으로 이루어지는 일과 관련하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목표를 가지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이 목표를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그의 속에서 부단히 역사하시고, 그를 인도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웁게 완성되어져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계시며, 특별히 이와 관련하여 역사하심에 있어서 성도들의 인격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본성의 지배하에 있는 까닭에 이런 일을 능히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이런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를 받게끔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성령 충만이란 것은 어떤 일순간의 드라마틱한 현상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 사상을 은사주의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오로지 이 시대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성도의 인생의 행보 기간 전체를 통하여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이란 것은 성도의 존재와 생활이 일평생에 걸쳐서 하나님의 일에 드려지는 것을 가리키며, 곧 성도가 속한 거룩한 은혜의 왕국인 교회로 하여금 정점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끔 자신이 기여되는 데서 찾아진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적인 행복 문제와 관련하여 성령 충만한 역사를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구원을 받은 성도가 이후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충만한 모습과 능력으로 증시되어지도록 하는 일에 자신이 전인격적이며, 전체적인 삶으로서 기여되어지는 데서 성령 충만의 정체성이 찾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지식적인 생활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품는 감정적인 생활에 있어서나,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내는데 있어서, 항상 좀더 고차원적이고 좀더 신국적인 성격을 더더욱 드러내며 살아나가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물론 성도는 때로는 자신의 일상적인 문제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위하여 간구할 수 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참조. 마 6:11). 그러나 이와 같은 건강이나 경제 문제와 같은 현실의 필요라는 것도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에 기여되려고 하는 목적에 종속될 때에 비로소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기도라는 것도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 혹은 얼마나 오래 하느냐 하는 등의 문제에 앞서서 그것의 정당성의 문제, 곧 합당한 기도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의미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교회답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 성도들이 성령의 소욕을 좇기 보다는 육신의 소욕을 좇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저급한 도덕성에서 타락한 교회의 정체성이 찾아지지 아니하고, 이것이 다른 무엇에 앞서 성도들이 말씀으로부터 이탈한 데서 찾아집니다. 동일한 관점으로 교회의 타락의 또 일면으로 성도들이 성령의 소욕을 좇지 아니하고 육신의 소욕을 좇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즉 특별하게 지적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죄악이나 잘못 때문에 교회가 타락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대다수 구성원들이 가진 삶의 태도와 방향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거나 부족한 까닭에 이렇게 됩니다. 한 사람 개인을 놓고 볼 때에는 그가 성령을 적극 좇아 행하는 삶을 진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이 별로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지만, 그와 같은 사람들이 대다수를 형성하여 그 교회 전체를 대변하는 생명력으로 나타나게 될 때에는 문제는 참으로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 각기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이 성령의 소욕을 좇는 생활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데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교회다운 능력과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령의 충만한 역사와 인도 하심을 받고 싶은 성도의 경우 기존 제도권이 취하는 관점을 벗어버리고 생각부터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 몇몇 구절에 나와 있는 특정한 현상들만을 의지하는 데서 성령 충만을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건들이 내포하고 있는 깊은 사상에 대해서는 등한시 하고, 또한 다른 부분들과의 연결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해보지 못한 채로, 그냥 덮어놓고 기도하고 매달리면서 부르짖기만 하면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도하고 부르짖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나는 과연 어떤 정도의 영적인 존재인가 하는 점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즉 나는 과연 하나님의 백성다움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로 조화 있는 인격을 가졌는가? 그리고 계시를 아는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덧붙여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내 정서는 균형이 있는가? 또한 이런 것들은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과 어떻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실들을 세심하게 짚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교회라고 하는 것이 가진 이상과 신분과 내용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목표를 생각하면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자기의 의미와 가치 및 존재 상태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런 큰 시야와 안목을 가짐이 없이 천편일률적이며 판에 박힌 듯한 몇몇 가지 기독교적인 행위들에 머무르고 그래서 새벽 기도에 나가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날마다 성경을 읽거나 혹은 규칙적으로 큐티를 하느냐 하는 등의 것들과 관련하여 성령 충만을 생각하면 사실상 해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것들을 증대시키고 확장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성령 충만을 생각하고,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을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유치한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제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에 열심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아직도 ‘자기’라고 하는 태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인 것이요, 사실상 대단히 육적인 사람이며, 성령의 소욕과는 상관이 없이 육체의 소욕만을 좇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자기’라는 것이 있게 되면 어떤 예외도 없이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서 역사하시거나 인도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무엇입니까? 이는 지나치게 종교적인 자기, 적극적인 자기, 억척스러운 자기, 과신하는 자기, 고집피우는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 비슷한 성경지식을 진리인 듯이 착각하는 자기 등입니다. 진정으로 성령 충만에 이르려면 이와 같은 ‘자기’는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좇으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하셨습니다(눅 9:23). 사실상 적극적인 신앙생활이란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하고 나아가는 태도를 가질 때부터 비로소 시작이 되어집니다. 이런 자세가 없는 데서 나오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자칫 잘못 외식주의자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광대한 사람인 것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이 또한 성령 충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가능케 하려면 적극적으로 성령 하나님을 좇아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목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잠깐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으셔서 이와 같은 명령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실 때에 중요한 목표를 가지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애가 더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전진시키는 일에 쓰여지게끔 하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를 따를 때에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능히 이루어내게 됩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명령들을 주실 때에 성도들 개개인의 능력에 이것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것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이때 조심할 것은 지금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수준과 정도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방종하지 않습니다. 항상 주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소원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이런 성도는 항상 성령의 소욕을 좇게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교회의 성숙에 기여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
다음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방식에 대해서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소욕이란 것은 하나의 이성적 인격과 또 하나의 이성적 인격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6절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자기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여기에 보면 두 인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라고 하는 인격’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인격’입니다. 두 인격이 성도 안에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항상 ‘나’라고 하는 한 인격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아 자기가 나타날 때에도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나’인 것이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성령 하나님의 인격이 나타날 때에도 ‘나’가 나타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묘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까닭에 여간 세심하게 주의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이 사실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빌립보서 2:12-14절을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2:12-1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달성해야 할 나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목표요, 의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의지로 이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참여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14절에서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덧붙여집니다. 왜 갑자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나의 인격적 기능 속에 작용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도록 하시게 합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소원도 품게 되고 그것을 행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 안에서 항상 이렇게 우리에게 역사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무엇을 행할 때라든지,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나가게 될 때에, 그 배후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러한 소원과 의욕을 품게 되고, 또한 힘도 얻어서 실행하게도 됩니다. 이것이 정도라는 것이요, 그러므로 원망이나 불평이 없이 하라’는 말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인격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볼 때에 항상 행동의 주체는 나요, 행하는 자도 나입니다. 내가 행하는 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인격과 성령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인격의 두 인격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유기적(有機的)으로 움직입니다. 공동의 의사가 하나의 인격으로 나타나는 것이 유기체(organism)입니다. 그래서 조직체(組織體)인 교회를 가리킬 때에 단순히 조직체(organization)라고만 하지 아니하고 덧붙여 유기체라고도 합니다. 유기체란 하나의 동식물, 또는 인간의 몸과 같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말합니다. 반면 조직체는 비록 움직이는 기관으로 구성되기는 하나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기관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내는 까닭에 유기체인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조직체적인 성격도 가집니다. 어느 한쪽만 주장하게 되면 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것은 논의를 벗어날 수 있기에 생략합니다.) 바로 이 유기체적인 특성으로서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의사는 나의 의사가 되어 지정의적인 활동 곧 인격적인 활동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가실 때에 그것은 나라고 하는 사람의 인격적 기능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나의 기쁨이 되고, 성령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며, 급기야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행위로 나타나는 데까지로 연결됩니다. 물론 성령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나의 측면에서 보면 내가 주도적으로 기뻐하는 것이고, 내가 주도적으로 소원을 가진 것이요, 내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한 것이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논지를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성령 하나님의 작용 앞에 의존시키는 삶의 태도를 견지해 나가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기쁘신 뜻을 심어주셔서 우리로 이것을 품게 하시고 나아가 이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결국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주관해 나가시게끔 하는 생활을 부단히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나의 성품과 인생의 행진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나를 지배하시게끔 할 때에 나는 성령이 충만한 자가 됩니다. 이와 같은 나의 존재와 삶의 행진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그 완성을 향하여 전진해 나가는 일에 기여되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더더욱 구현해 내게 되고,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당신의 존재의의를 더더욱 구현해 내게 됩니다. 즉 나의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더더욱 닮아가며, 나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당신의 인생의 목표를 두셨던 그것을 닮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삶이란 것은 다른 말로 하여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인격을 빌려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인격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으로 인격이 변하게 되는 것이요, 삶의 행진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그 방식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구현해 나가도록 내 속에서 부단히 역사하시며, 나의 삶 속에서 부단히 인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러한 역사와 인도를 베푸실 때에 ‘나’라고 하는 인격을 제쳐놓고 독자적으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나와 유기적으로 연합하신 가운데 나의 인격적 기능에 참여하시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는 ‘나’라고 하는 인격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