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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안에 들어온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칼럼
한국 교회 안에 들어온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이승구 교수(합신, 조직신학)
<목회와 신학>이 종교개혁의 달인 10월을 맞으면서 우리 한국 교회의 여러 개혁 과제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에 이번에는 우리 안에 들어 온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의 문제를 드러내어 그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바에 깊이 동감하면서, 먼저 우리 교회 안에 이런 것이 과연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일단 물질과 세속적 의미의 성공을 추구하는 우리의 현상을 다음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누가 보아도 문제인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간단히 살펴보고, 이와 함께 (2) 성도들의 판단을 어렵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배후에 숨어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드러내어 보고, 그와 함께 (3) 겉으로는 이것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 안에 여전히 잔존해 있는 “아주 교묘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셋을 모두 다 문제가 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 혹은 (2)까지가 물질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사실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간과하여 우리 자신도 외식(外飾)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문제를 노골적(露骨的)으로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낸 후에 우리는 과연 무엇이 우리들을 이끌어 이런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지향하도록 했는지 그 근원적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나아 갈 길이 바르게 제시될 수 있다.
문제 1: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누가 보아도,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아도 심각한 문제인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즉 우리가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라고 이름 붙인 것은 개교회나 그 교회의 성원들, 그리고 교단이나 기독교 단체가 소위 “번영의 복음”(a gospel of prosperity)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번영의 복음은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는 세상에서 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모든 면에서 잘 된다고 믿으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삼박자 축복을 강조하며 오중 복음을 말하는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면과 죽음 이후에도 관심을 기울이나, 대개는 건강과 재물과 행복을 강조하니 상당히 현세 중심적인 강조점을 지니고 나타난다. 미국에서 번영의 복음을 앞서서 주창하던 여러 교회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의 문제를 비롯해서, 그것을 추구하다가 온갖 추태(醜態)를 다 노출시킨 모든 다른 사례들에서 이 번영의 복음의 문제는 쉽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문제는 결국 교회가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무시하고, 오직 개인과 교회의 성공을 지향해 가다가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근자에 우리나라 안에서 사회적으로 나타난 여러 사건들과 관련하여 자살로 그 생애를 마친 사람들의 상당수가 교회의 장로(長老)라는 직함을 가졌다는 것에서나 여러 대형 교회의 문제에서나 빚을 빌려 지은 커다란 예배당이 결국 이런 저런 이단에게 팔린 사건들에서 이 문제는 잘 드러난다. 사회적으로 저명인사이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인데,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도 장로로 선임되고 한 사람들인데 결국은 이런 사회 문제의 핵심에 선 인물로 드러나서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친 것에서 한국 교회가 개인적으로도 성공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 성공의 기준이 세상의 지위와 물질적인 부(富)였다는 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교회가 성도들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치고, 그것을 어떤 말로 포장하든지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개인이 이 세상에서 잘 되고, 건강하고, 그리고 소위 신앙생활도 잘 하기를 요구해 왔음이 드러난다. 개인이 잘 되기를 바라고, 그 척도를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하고, 그러면서 교회의 여러 종교적 행사에 열심인 것으로 제시하는 교회들은 결국 그 교회 자체가 점점 커지고 융성하는 것을 바라게 되는데, 이때도 그 기준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출석하는가, 재정이 얼마나 많은가, 그 교회의 건물이 얼마나 되는가, 어떤 현저한 일을 하는가 등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이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의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 세계적인 대형 교회들이(mega churches) 많이 나타난 것,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추구하는 교회들과 그런 목회자들과 그런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이것을 잘 드러내어 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낸 곳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지향성 자체가 문제이다. 각 교회가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그런 방향을 지향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그런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느냐, 얼마나 많은 재정을 사용할 수 있느냐,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많은 돈을 들여서 할 수 있느냐 등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면, 우리는 심각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여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은 한 대형 교회의 목사님이 있다고 해 보자. 그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비판하고 있으니 그의 목소리와 말씀을 우리가 더 듣고 그것이 기준이 되고 있다면, 사실 그것도 우리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그가 큰 교회를 섬기기에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가, 과연 그가 하는 말과 제시하는 바가 성경이 말하는 바이기에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가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상태에 있는 지가 잘 드러난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가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문제 2: “배후에 숨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그러나 이런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배후에는 성도들의 판단을 어렵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배후에 숨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배후에 숨어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때로는 “고지론”(高地論)의 형태로 아주 의미 있는 듯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믿는 사람이 그래도 잘 되어야 복음 전도에 유익이 되며, 또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잘 되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지 않으시겠느냐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지론이란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든 노력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높은 곳을 차지하면 이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의이다. 일단 믿는 사람들이 사회의 높은 곳을 차지해야 복음 전도가 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논의들은 대개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는 말씀 같은 것을 성경 전체의 빛에서 균형 있게 이해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아주 단순하고 기계적인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나타난다. 잠언서와 시편에 나타나고 있는 성도는 결국 잘된다는 큰 원칙의 선언을 성경 전체의 조망 없이 선언하고 성도들은 그것에 동의하면서 확대 재생산된 것이 “배후에 은밀하게 숨은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이다. 현재 우리들의 교회에 이런 은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보다 배후에 숨은 이 은밀한 성공추구주의가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게 된다. 이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대개 다음 같은 생각의 과정이 나타난다. 1.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려” 달라는 간구(시 3:8)의 성경 전체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믿는 사람들과 교회는 이 세상적 의미의 복을 많이 받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2. 따라서 다음 같은 말씀을 그 맥락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하려 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시 16:9). 그러므로 3.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같은 말씀을 그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고 한다.
이러한 “배후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성경이 곳곳에서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 도다”(시 12:8) 또는 시편 73편과 같이 인생사의 복잡함과 애매모호함을 잘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하도록 한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탄식시의 본질,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열고 간절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다음 같이 기도하는 그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편 13:4). 따라서 이런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 즉 이 세상에서 참으로 의지할 것이 없는 주의 백성의 모습을 이 말씀 속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주의 참 백성이 왜 이 땅에서 가난한 자와 곤고한 자로 언급되고 있는 지를(시 14:6, 시 18:27 등 참조)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일반화 되면 자신들이 믿는 바가 성경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개인의 행복과 교회의 번영과 교단의 힘을 자랑하는 일이 나타나게 된다.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비판하는 보통의 한국 성도들 가운데 상당수,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참된 신자들은 이런 의미의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도 잘 되며, 그리하여 날로 생활이 윤택해지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날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그런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요 부흥하는 교회라는 생각을 하고, 따라서 그런 교회들이 많은 교단이 옳고 바르며 힘 있는 교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얼마나 큰 세력으로 있는 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는 성도의 고난에 대한 이해도 그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부합하게 해석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아주 저질(低質)적인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잘못했기에 물질적으로 가난하며 세상에서 잘 되지 못한다고 까지 생각하고 말한다. 그 보다 나은 이해를 가진 사람들도 지금의 이 고난이 다 쌓여 후에는 자신이나 또는 그 자녀들에게 더 큰 물질적 축복과 세상적 복이 오게 된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죽음 후에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것도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성향을 나타낸다. 성경이 말하는 상급을 매우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도 이런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아주 철저하게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사로 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도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해서조차도 이런 물질적 이해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을 현혹하는 “배후에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이다. 처음 생각한 “아주 현저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이와 같이 배후에 있는 숨어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일종의 기초 자산을 제공하며, 전체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 3: “아주 교묘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
그런가하면 아주 교묘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겉으로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지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비판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나아 갈 바를 제시한다. 그런데 (1) 그 제시하는 바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사실은 다른 것이고, 그저 인본주의적인 것이며, (2) 그 심정 깊은 곳에 이렇게 바른 것을 지적하는 자신이 옳고 바른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이 “아주 교묘한 성공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중의 첫째 조건은 우리가 제시하는 바가 과연 성경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것을 따르는 것이냐의 “객관적 기준”의 문제이고, 둘째 조건은 각자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것이기에 극히 “주관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관적 기준에 대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중요하다. 우리는 항상 마음에 판관(判官)을 세우고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는 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판관이 하나님이셔여 만 한다. 우리가 바르게 하고 있다고 할 때에도 그리해야 마땅하다. 시인과 같이 우리들도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 하리로다”(시 16:8)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한다(stand before God alone!).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는 우리가 분석하는 것과 지시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부합하는 지를 살펴야 한다. 성경만이 객관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셨다. 그 앞에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과 교회 공동체는 재물을 경(輕)히 여기며, 재물 자체에 대한 집착을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지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단언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냐 물질이냐에 대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고, 우리도 그렇게 결단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할 때에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결단코 물질주의에 물 들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렇게 가르쳤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예수님을 잘 믿으면 재물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다(소위 말하는 물권, 인권, 영권)”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결국 물질주의를 허용한 것이니 잘못이다. 자기 자신은 예수님과 교회를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은 예수님과 교회를 해(害)하는 결과를 낸 것이 된다. 이 때 예수님을 위하는 기준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서 성경의 기준이 아닌 세상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것을 말하고 제시하는 일이 많이 있다. 그것이 “가장 교묘한 형태의 세속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의 근원적인 문제는 결국 우리가 과연 주님과 그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면 이 세상을 따르느냐 하는 것이다.
근원적 문제: “이 세대를 본받아 나감”
그러므로 온갖 형태의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문제인 것은 이것을 따라가는 것이 나쁜 의미의 세속화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과는 구별된 공동체이다. 십자가로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구속하셔서 그에게 속한 공동체로 만드시고, 이 세상과 구별되게 하셨다. 물론 구속된 우리가 이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간구하시기를,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고 하셨다(요 17:15).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이 세상이 하는 것처럼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구속받은 우리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이다(요 17:14, 16).
우리의 정체성이 구속함을 받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므로, 이제 우리는 이 세상과 구별되며 이 세대를 본받아 가지 않아야 한다(롬 12:2). 모든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따라 가는 것은 결국 이 세대를 본 받아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대를 본받아 가는 것이 모든 것은 근원적 문제이다.
해결책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다 드러내고 우리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비정상성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모든 기독교적인 것의 현관이다. 그리고 그 회개는 그야말로 철저한 것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 모든 논의가 진정한 회개의 과정의 일부일 수도 있다. 이를 논의하면서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저런 좋은 동기에서 그리했노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우리의 존재 전체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잘못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께서 구속하신 후에도 이런 저런 세속화의 요구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물질과 성공을 추구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런 자신들에 대해서 무한히 슬퍼하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미워하면서 그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성경의 철저한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음을 다 드러내야 한다.
그것과 연관된 행위가 주님을 참으로 믿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동시에 일어나는 이중적 운동(double movement)이다. 회개하고 그 후에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구속을 믿기에 진정한 화개를 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기에 하나님을 더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셨음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기로 해야 한다. 이 세상을 본받아 가지 않는 일을 위해서 (1) 끊임없이 성경을 상고하고, (2)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성공을 지향하는 것”으로부터 성령님께 의존해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애를 써도 스스로 이루지 못하던 그 집착을 끊어 버리는 그 일을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이루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가 과연 주께서 요구하는 이 일을 항상 힘써 나아가 우리 주변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세속화의 방도가 우리 주변에 있으니 그와 더불어 계속해서 싸우는 영적 전투를 힘 있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병(精兵)이며, 그런 성도들이 바로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인 것이다. 그런 교회는 항상 회개하면서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기를 온전히 믿는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는 바울의 이런 믿음의 기도가 헛된 것이 되지 않음 확신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세속화의 뿌리를 근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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