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학기 특강
교회의 완성
말씀:베드로전서 2:1-25
지난 시간에 우리는 교회의 본분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의 완성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1. 복음의 대상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복음의 대상과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2)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예정과 선택)에 따라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중생과 성화)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은(칭의) 사람들에게 역사해서 그들을 구원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유효한 효과를 드러냅니다.
구원의 서정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과정을 읽을 수 있는데, 먼저 ‘하나님의 예정과 택정함’이 있습니다. 예정과 택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입니다. 따라서 이 것만은 천사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참여하거나 간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미리 아실 뿐만 아니라 선택하신 후에는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것을 소명(calling)이라고 하는데 소명은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외적 소명’이란 전도나 혹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듣고 부름을 받는 외적인 초청을 말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면 그것이 외적 소명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외적 소명에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 소명이 임하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소명)이 작용합니다. 곧 성령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 안에 역사하셔서 그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이것을 ‘내적 소명’이라고 합니다. 이 내적 소명이 있어야 비로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데에는 ‘믿음’이라는 요소가 개입되어야 합니다.
중생
이때의 ‘믿음’은 하나님의 경영을 다 알고 분별하고 차근차근 쪼개어서 이해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신자가 중생할 때 갖는 신앙의 출발점으로서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시작을 가리켜서 ‘중생’(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주장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초보의 단계로서 중생에 이르게 되는 첫 관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생했을 때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죄가 없다는 선고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지는데 그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이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근거한 것인데,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비추어 영원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결핍된 모든 부분을 대신 그리스도께서 채워주심으로써(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라고 하는데)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칭의
그렇지만 우리가 칭의를 입었다고 해서 당장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결핍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죄 아래에 있던 우리가 죄가 없는 상태로 옮겨져서, 다시는 죄 아래에 있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하던 자리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죄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곧 다른 말로 말하면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다시 말하면 죄의 영향력이 지배하지 못하는 의의 자리에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즉, 죽음이라는 곳에 있던 사람이 그곳에서 이제 완전히 옮겨져서 생명이 약동하는 의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이 사람에게는 새 생명이 생명력을 발동해서 그 사람을 인도해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인도하시는 실제적인 역할이 시작됩니다. 중생의 과정을 거쳐 칭의의 상태로 옮겨진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 생명을 발휘하며 살기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모든 것을 가리켜 ‘성령의 인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께 의뢰하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순서적으로, 마치 초시계를 누르면 1초, 2초, 3초...가는 것처럼 일률적인 순서에 의해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 변화의 속도가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훨씬 느린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것, 부르심과 거기에 대한 믿음으로써의 정당한 반응과 또 중생과 칭의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택정함이 발현되어(이것은 만세 전부터 있었지만) 그 부르심에서부터 중생을 거쳐 칭의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자기 가 부르심에 응답해서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중생했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생한 사실이 자기에게 있지만 ‘칭의’ 곧 의롭다 함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순서적으로 놓고 볼 때는 적어도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논리적인 절차를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다고 해도 점차 시간이 흘러 ‘중생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자꾸 깨달아 갈수록 무엇인가 더 새로운 점이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중생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생각했다가도 나중에는 그때의 생각과 사상이 빈약한 것처럼 생각이 들고 ‘이제야 겨우 내가 중생했나 보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이루어진 중생의 사건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만큼 깊이 있게 알지 못해서 그랬을 뿐이지, 중생한 사실이 분명하다면 다시는 변동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또 중생시키시고 칭의하신 사실은, 우리가 미처 못 깨달아서 중생을 했는지 의심이 가거나 새롭게 중생한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중생의 사건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의문이 가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생은 이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합력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중생의 사실에 참여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부르심에 대한 반응 또 중생, 칭의 이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여하거나, 하나님과 타협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의지를 변화시켜서 나를 중생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 중생의 사건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건과 또 중생케 하신 일과 칭의를 받은 일만은 언젠가는 명확하게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꾸 자라고 성숙해져서, 중생이나 칭의 등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자꾸 알아가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 소명’을 받았는지 혹은 ‘중생’한 사실이 있었는지 그리고 ‘칭의’를 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보증해 줄 수 있는 유형의 권위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확인해 주지 않고 보증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에 접촉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에 참여되었다는 명확한 판단과 보증을 할 수 있는 공적인 기관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 작업을 수행하는 기관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어떤 사람에게 직,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면, 이것을 ‘외소’(外召)라고 하는데,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내적인 부름이 있는가, 또 그가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가 친히 그에게 효력을 발생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는가 하는 제반 구원의 문제를 판별해 주고 그 사실을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신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사람을 충분히 관찰하고 그 사람에게서 구원의 사실이 분명하게 발견되고 그러한 사실이 특징적으로 확인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은 중생한 사람이 확실하다는 의미로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면, 이러한 절차를 거쳐 교회가 인정하는 구원의 사실들이 확인되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이 있음을 또한 확인하고 교회 앞에 신앙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헌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사람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헌신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부르심과 중생, 칭의에 대한 명백한 깨달음이 있을 때에만 온전한 ‘헌신’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즉 구원에 대한 명백한 지식이 없이는 헌신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헌신’이란 말 속에서 특징적인 의미는 ‘펼쳐 놓는다’(display)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목수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아무 데나 놓고, 그 연장을 쓸 때는 일일이 뒤져서 찾아다 쓰지는 않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연장을 다 정비해 놓고 작업을 시작하는 것처럼, 헌신이라고 할 때는 나 자신이 그러한 기구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편리할 대로 나 자신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드리라”(롬 6:13)고 할 때에도 ‘드리라’는 말이 ‘헌신한다’ 곧 ‘파리스테미’(parivsthmi)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병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병기일 뿐입니다. 병기를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 병기는 쓰일 만한 조건과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성경은 ‘살아 있다’ 혹은 ‘산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헌신을 할 때는 이미 그러한 모든 조건이 확인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화
그와 같이 헌신되었을 경우, 하나님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이루시는 일에 동참하게 하시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 그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가 발생해서 그를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합당하게 사용하실 때에, 그 사람에게는 ‘생명력의 진전’이 발생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헌신’에서부터 비롯되어서 ‘성화’가 시작되는데, 이 성화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합작으로 이루어집니다. ‘칭의’에서부터 ‘새 생명’을 얻을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사역하시는 일이지만, ‘새 생명’을 얻고 헌신하여 점차 하나님의 의의 군사가 될 때까지의 장성해 나가는 일은 하나님과 우리가 합력하여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 나가기 위하여 말씀에 따라 내 삶을 경영해 나가는 그 모든 일들은 이제부터 나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자유 의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를 발동시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과 합력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자 했던 그 본래의 목적을 완수해 나가야 합니다. 한편,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의 경영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쓰임 받고, 그 일을 성취하여 나가는 사람만이 가지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 ‘시대적 사명’이라고 합니다. 어느 시대에 어느 한 특정한 지역에 나를 보내셨을 때에는 그에 따른 하나님의 의도가 있으며 우리는 그 일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명확하게 각성한 성도에게 자기의 자유 의지를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이런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하여 명확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할 경우 필요에 따라 힘과 지혜를 주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함에 있어 모든 적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위치에 서 있어야, 성령의 인도를 경험하고 성령의 권능을 의지하는 신앙이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신앙하는 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성화’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종교적인 열정은 될지언정 결코 신앙의 자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교회로써 구원의 서정을 바르게 인식함으로 참된 교회로 세워져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