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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의무로서 '신앙고백' 교육
교회의 의무로서 '신앙고백' 교육
- 역사적 개혁교회 계승을 위한 당위론 -
장수민 교수(홍은개혁신학연구원)
I. 성경 교육의 중요성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열심히 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이기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성경을 연구하려는 자세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깨달은 바 진리에 성립되는 삶이 나날이 향상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이 없이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거나 혹은 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격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해졌다(렘 17:9).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지혜를 얻지 못하며, 그럴 능력도 없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동시에 계시를 주셨다. 그리고 이 계시로 말미암아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계시사색신앙(啓示思索信仰)을 하여야 한다.
만일 성도나 교회가 이 계시를 저버리고 자기 멋대로 열심을 내게 되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만들어 왜곡되게 섬기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롬 1:18-32).
그런데 사실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이나 혹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리공부 과정을 한번 이상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 신앙고백 같은 교리 학습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는가를 가르쳐 준다.
교회는 긴 역사 속에서 박해와 고난을 통하여 또한 이단의 공격을 받을 때에, 생명을 걸고 성경의 진리를 고백하고 사수하며 변증해 나왔다. 이 과정 속에서 신앙고백의 출현이 필연적으로 뒤따랐으며, 따라서 신앙고백이란 역사 속에서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신앙의 성격을 설명하는 바, 성경적 진리에 대한 교회의 공적인 고백과 선포이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상고한 이유는, '이것이 그러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즉 바울이 선포한 메시지가 과연 성경적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던 것이다.
현대의 성도들에게서는 이런 자세가 더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성경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이론들이 온 사방에 널려 있고, 검증되지 않은 채로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쉽게 퍼져나가고 받아들여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되, 무조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올바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II. 신앙고백 학습의 중요성
어느 한 사람의 성도가 신앙 생활을 한다 할 때에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리에 성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신앙과 생활의 원천인 성경에 집중한다는 의미이고, 둘째, 성경에 대한 이해는 정통성, 곧 주연된 사고 체계를 가져야 하므로 이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원리이다. 셋째, 성경이 가르치는 일정한 생활 체계를 갖게 된다.
경건으로 연결되지 않는 신학은 철학이요 사변일 것이다. 반면 경건으로 연결된다 할지라도 일정한 질서 체계가 있어야 한다. 성도와 교회는 반드시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는데 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요리문답이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자신을 보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요리문답은 죽지 않고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 번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씨앗(seed)과도 같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란, 마치 정신 없는 육체와도 같아서 '죽은 교회'요 '거짓 교회'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신앙고백 학습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두 가지 적절한 실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고전적인 실례로서 종교 개혁 시대 당시 스위스에서 일어났던 자유 방만한 주관적 성경 해석이 초래한 '뮌스터 시의 재난' 사건이다.
1522년 루터에 의하여 최초로 독일어 신약성경이 번역되고, 츠빙글리 일행이 1530년에 신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하여 보급하게 되자,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한 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주말 성경공부 모임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루터 이전에도 독일어 성경이 있었지만 루터의 성경이 가장 큰 호응을 받았다. 루터는 라틴어 성경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1519년에 나온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두 번째 판을 사용했다. 신구약 합본의 루터 성경은 1534년에 완역되었다.
이후 1533-35년도에 이르러 극단적 개혁을 주장하던 일부 재세례파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뮌스터 시를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면서, 시 청사와 시 의회를 차례로 장악하여 뮌스터 시를 점령한 후, 자칭 '압제 당하는 자들의 피난처'라고 선포했다. 이들이 시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운 합법적인 광란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두 번째 사례는 최근의 것으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다미 선교회의 '1992년 10월 28일 세상 종말 선포'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다미 선교회 사람들이 종말 준비에 쏟은 숱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당시 이장림 목사가 주도한 다미 선교회의 오류가 한국 기독교에 끼친 해악과 부작용은 다양한 형태로 발생했다.
이상 두 가지 실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두 가지 사건 모두 '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 곧 '교회가 역사적으로 보전해 나온 정통 신앙'이 없거나 있어도 무시한 데서 발생한 사건들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오늘날에도 이런 저런 형태의 다양한 변신 형태로써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의 사상과 배치되는 각양 인본주의 수단으로서 부흥을 이룬 대형 교회들과 이런 저런 명칭을 앞세워 제멋대로 신앙의 형태를 조성해 나가는 사설 선교회들이 역사 속에서 개혁교회가 진술해 나온 신앙고백과는 도무지 일치되지 않는 것들을 앞세워 복음의 영역을 형성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날 인터넷의 발달에 편승하여 얼마나 다양한 개인적인 신앙 형태들이 유행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III. 역사적 개혁교회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
지금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대중들의 인기를 휩쓸고 있는 '자칭 개혁교회'가 아니요, 역사 속에서 생명의 피값을 지불하면서까지 신앙고백을 지켜 나온 '역사적 개혁교회', 바로 그 개혁교회의 생명력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지난 중세기의 역사 속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서서 자칭 교회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개혁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도저히 교회가 아니었다. 즉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 부재의 시대가 무려 10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종교 개혁은 일어났고, 개혁교회가 출현함으로써 초대교회 이후 몇 세기 정도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린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금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하지만 겨우 3-4세기도 넘기지 못한 채, 오늘날 교회는 또 다시 사라지고 있는 경향이다. 왜냐하면 교회들마다 마치 신앙고백에서 이탈하기를 경주하듯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다 위협적이고 전율을 느끼기까지 하는 것은 '거짓 개혁교회들의 범람 현상'이라 하겠다. 즉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과 전혀 상관없는 신앙활동을 하면서도, 자기네가 전통 개혁교회라고 주장하며 나서는 사이비 교회들인 것이다.
이들은 '교회 성장학'과도 같은 희한한 세속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교회의 외적인 덩치를 내세우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데서 되어진 역사라고 치장하며 나선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한다.
신앙고백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로 말미암아 교인들은 갈수록 우민화(愚民化)될 수밖에 없다. 목사들이 저마다 설교라고 쏟아내지만, 사실 신앙고백에 비추어볼 때 이단과 사이비로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엉터리 설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신앙고백은 성경의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조직화시킨 '교리의 체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한다면 당연히 신앙고백의 교리를 배워야 한다. 어떤 학자는 '교리는 우리를 하나의 교회로 연합시키는 공통된 지식과 믿음'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신앙고백을 교인들의 신앙을 위한 기본으로 삼지 않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어이없게도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교인들이 허다해진 실정이다. 그러면 신앙적인 삶도 없기 마련이다.
IV. 신앙고백 없는 허위 교회들
신앙고백은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잡아주는 푯대와도 같다.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이고, 이때 성경의 내용은 방대하고 사상이 심오하기 때문에, 어떻게 믿는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근거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역사를 달려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이 한결 같이 우려했던 '거짓 교회들', 즉 자신들이 믿는 바의 도리에 충실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이탈해버린 세속적 기업형 교회들이 사방에 난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현대 교회가 세속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방황하고, 그래서 심지어 교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비참할 정도로 순전히 인간적인 종교 기업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신앙고백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의 거짓된 교리로부터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 종교 개혁 시대의 사명이었다면, 지금은 교회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사실상 인간적인 종교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거짓 교회들의 홍수 속에서, 종교 개혁 시대의 신앙고백을 온전히 간직하고 서 나가는 '올바른 교회' 하나가 제대로 나타나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러한 때에 이제 그토록 수많은 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의 피값까지도 기꺼이 지불하면서 회복시킨 교회, 그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은 믿음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이며, 사실상 구원과도 직결되는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인 것이요, 칼빈도 말했듯이 올바른 교회를 이루는 일을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1529년에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소요리문답서를 작성했고, 1년 뒤인 1530년에는 성인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만든 대요리문답서를 작성한다. 이후로 이것들은 많은 교회들의 공식적인 교육지침서 역할을 했으며, 요리문답서를 보편화시키게 되는 기원 역할을 하게 된다.
루터는 소요리문답 서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소요리문답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 없고, 성찬의 상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장인이 자신의 직업의 법과 규칙을 모르면 쫓겨나고 무능한 자로 여겨지는 것과도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의 기능은 성경을 뒤로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은 성경을 보존하고 보호한다, 성경을 자유분방하게 사용하는 바르지 못한 영들의 미혹을 제재하면서, 모든 논의를 성경으로 돌아가게끔 해주는 것이 신앙고백의 목적이다.
V. 신앙고백 없이 시작된 한국 교회
지금까지 성도가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성경 공부의 당위성과 더불어 역사적 개혁교회가 전개해 나온 신앙고백 학습의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회는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할 당시, 영국교회의 39개 신조의 형식을 답습하고, 인도 장로교회의 경우를 따라 '12 신조'라고 하는 간결한 형태의 신앙고백을 작성했다.
그러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 대해서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 요리문답은 우리 교회 문답책으로 채용하는 것이다"고 하는 부가적인 설명 정도로서 받아들였다.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 일부 장로교단들이 비로소 교회의 공식 신앙고백서로 채택하게 되지만, 직분자들을 임직할 때만 비로소 신앙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을 뿐이고, 일반 성도들이 세례를 받는 조건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 '간단 신조주의 경향'은 근본적으로 처음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유럽의 개혁교회 신앙이 아니라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기독교였다는 데서 나타난 아쉬움이다.
오늘날 신조와 신앙고백을 무시하는 '초교파주의'라는 명분아래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지만, 이런 주장은 말 그대로 자체에 참으로 많은 함정을 내포한 무책임한 선동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해야 한다. 이런 운동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그 숱한 신조들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종교개혁 운동은 다른 말로 하여 신조 작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지지를 받는 진정한 연합과 일치는 신조 혹은 신앙고백의 일치를 전제하는 것이다. '하나의 신앙고백'과 '하나의 교회정치'와 '하나의 공동생활'에 대한 신앙고백의 일치가 없이 '교회 연합을 이루겠다'는 '성경적 교회의 본질과 성격'이라는 성격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무책임한 생각으로, 교회의 본질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일장춘몽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한국 장로교회는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들과는 아예 처음부터 친할 수가 없는 구조를 형성해 나왔었다. 이런 까닭에 이제 최근에 들어와서 그로 말미암는 부정적인 영향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교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열심만을 내세워 앞 다투다시피 복음의 전선에 나서다 보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성경적인 신앙 형태들이, 버젓이 신앙생활의 정도인 듯이 유행병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덧 "무엇이 진리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더 크고 성공적이냐?"에 집중되어버렸다. 버젓이 성경을 옆에 두고 있는 기독교 안에서조차 '크고 많으면 옳은 것'으로 여기는 혼란이 횡행하고 있다.
하지만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란 존재할 수 없다. 신앙고백은 성경이 그 방대한 내용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들을 상호 충돌이 없는 사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다. 신앙고백의 안내를 받아 성경을 읽을 때라야 성경에 대한 성도의 구원론적인 지식은 보다 간결해지고 보다 명확해지게 된다.
역사적 개혁교회가 간직해 나온 신앙고백들의 뒷받침을 받지 않으면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이루어낼 수 없다.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무시한 채로, 자기 소견에 옳은 방식대로 교회 성장을 추구한 후유증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살았다 이름하지만 사실상 죽은 교회가 되고 말았다.
원칙적으로 교회의 경영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해 나가시는 당신의 참된 교회는, 당신의 참된 백성들의 신앙고백적인 삶을 통하여 여전히 역사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의 터 위에서 교회를 이루는 일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드러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성도라 한다면 기독교적인 성향의 종교인들이 만들어 내는 시대의 유행으로부터가 아니라 필히 살아 계신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마 17:3). 이를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딤후 3:16), 이렇게 하기 위한 첫 걸음은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것임에 다름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을 누리는 방법일 것이며, 가장 정확하게 교회를 구현하는 실력일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VI. 마치는 말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가히 성경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학습하자. 그리고 성경 읽기에 착념하자.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학습하는 것도 동일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의 사상적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빈이 성경의 재미에 대해서 묘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
인간의 저작이 아무리 기교 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만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이 특수한 힘은 명백해진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나 키케로(Cicero)의 글을 읽어 보라. 플라톤(Plato)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책을 읽어 보라. 그것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들을 매혹시키며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며 또 황홀하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읽은 후에는 이 성경을 읽는 데 전념하자.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우리 마음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골수에까지 새겨짐으로써,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에 수사학자나 철학자들의 힘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Inst. 1. 8. 1).
노파심에서 반복하지만 성경 공부를 재미로 한다는 사고방식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성경 학습은 우리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의 근간이다. 육체는 맛의 어떠함을 떠나서 생존을 위해서 음식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 학습도 우리의 진정한 생명의 존속을 위한 근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순결한 우리 개혁교회 성도들은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신조)들을 학습하고, 개혁파 교회권의 교리서들을 학습하며, 특별히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근간 역할을 한 기독교강요를 학습하고, 무엇보다도 더더욱 성경 자체를 학습하는 데 일로 매진함으로써 오늘날처럼 우리의 영혼을 호리는 온갖 감언이설들이 난무한 시대에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확실하게 누리는 지혜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겠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소중한 개혁교회의 유산에 대해 성도들이 관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견지해야 한다. 학습 내용에 대한 학습자의 흥미 유발은 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 역량의 몫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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