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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학기 교회론 특강] 교회의 좌표
2017년 봄학기 특강
교회의 좌표
말씀:에베소서 1:3-6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교회의 품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나타내 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져 가게 되고, 교회다움을 나타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좌표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그 아들로 하여금 친히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온 집에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사도행전 2:34-36절을 보면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이 말처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주’(kuvrio", 퀴리오스)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이 선포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심상치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主)’라는 말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여 사용하는 ‘주’(아도나이)와 동의어로서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을 적용하여 ‘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을 보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은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소망해 왔던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약에서 예언했던 메시아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곧 하나님이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아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오시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교회와 한 몸이 되실 것을 기뻐하셨고, 장차 그 아들과 한 몸 곧 한 지체가 될 교회의 성도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여 주실 것을 위해서 기도하신 바 있습니다(참조. 요 17장).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신 이 내용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참된 목표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 모습을 이 땅에 드러내는 것과 우리가 그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는 자태를 드러내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한 부자 청년과 어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서 알 수 있습니다(참조. 눅 10:25-27). 누가복음 10:25-27절의 예수님의 답변에 보면 영생에 이르는 길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랑’을 그 사람의 성품으로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근거나 발출 곧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자기 자신의 가치를 파악해야만 가능하며, 그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할 만한 가치를 확인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란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자기 안에 참된 보화를 가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그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인적인 경건의 면에서부터 (지금까지 개인적인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질에 관한 것에서 좀더 확대하여) 교회라는 단체가 또는 하나의 유기적인 이 생명체가 가야 할 길에 관한 문제로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꼭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나타내는 품격이나 그 교회의 성도로서 드러나는 품성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나눌 필요는 없지만 좀더 우리의 시선을 넓게 하여 교회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교회가 존재하는 위치의 좌표를 확인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1. 교회를 세우신 목적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에베소서 1장 말씀에서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3-6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라는 말은 성도 각 개개인이 합하여 형성된 ‘우리라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하여 기본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기에 일명 ‘교회론’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처음부터 한 개인을 상대로 하지 않고 ‘우리’라고 하는 ‘교회 공동체’를 그 바탕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근원은 곧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불러냄’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카할’과 헬라어의 ‘에클레시아’라는 말입니다. 즉 교회란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부르시어 모아 놓은 사람들을 지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에게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을 가지고 불러내시며, 하나님 나라를 그 기업으로 주시고,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본래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셨던 그 영광과 지혜가 충일한 나라로 재창조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께서 창조한 그 본래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곧 하나님의 선과 의를 구현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곧 창조된 원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선과 의를 이 땅에 구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과 의를 구현하는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실감하고 찬미하는 독특한 나라이어야 합니다. 그 백성들은 바로 이러한 복에 참여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2. 교회는 세상과 구별됨
(교회의 거룩성)
교회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르셨을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시고자 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특이한 성격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특성이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됨을 말하는데 그것은 이미 창세 전부터 그렇게 구별되어졌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에베소서 1:7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죄사함’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에베소서 1:7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죄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되어진 은혜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교회의 거룩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신 이유는 본래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는데 그러한 숭고한 위치에서 죄로 말미암아 오히려 죄의 종이 되어 본래의 고귀한 위치를 잃어버리고 그 자유를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고의 능력과 가치를 발휘하고 드러낼 수 있기 위하여 타락한 세상과 구별을 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자리에 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영광된 하나님 앞에 나갈 수도 없고, 그 본래의 능력 곧 자유함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죄 아래 있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여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들이 짊어진 죄의 대가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속량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에게 죄의 값을 치른 것처럼 오해하는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속량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댓가를 속량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죄는 대가를 요구함
죄란 그 본래가 죽음을 가져다주는 지독한 독이라서 죽음을 대가로 하지 않고서는 한 번 그 자리에 들어온 사람을 결코 풀어주지 않습니다. 누구나 죄로부터 해방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법칙입니다. 아무도 이 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죄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로마서 6: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공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 것인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셨고, 결코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창세기 2:17절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아담에게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풍성하게 주심으로써 아담의 가치를 이 세상에 충만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보장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죄의 자리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인류가 자기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그 죽음의 자리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는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원히 그 자리에서 나올 능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 대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량의 피를 죽음의 대가로 지불하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이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사실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이라고 말하고, 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자리로 옮기어 자유의 상태를 회복된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의 본좌(本座)
‘중생’이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자유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죄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부터 적극적으로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그 영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유인들이 모여 인생의 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세상과 구별되어 그 본연의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불리움을 받은 성도들로 무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한 지체로 들어오는 사람이나 그 지체를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서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성도의 한 무리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참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신앙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신앙을 고백하고 확인한 성도라면 이제는 자기 자신 혼자서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구별된 성도의 한 거룩한 무리가 되었음을 각성하고 그 지체된 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알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결코 자기 혼자가 아님을 자각해야 합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성도들의 한 무리 속에 소속되었다는 사실과 그 무리들이 이루는 교회 안에서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참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으며, 자기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함을 받았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에 소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교회와 상관없이 자기 혼자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든지, 본연의 가치를 충분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고 그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 소속된 것이 곧 중생했다는 하나의 증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한 무리를 이루었다는 그 구성 자체가 중생의 사실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중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중생의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증표(證票)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속 받았다는 사실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자기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죄 아래 팔려있는 노예와 같이 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효로 말미암아 자유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속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도리는 성경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상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로 교회의 지체된 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잘 받아가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교회의 좌표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로 중생한 자들의 모임임을 알게 하시고, 교회의 가르침을 잘 받아감으로 중생한 자들로써 십자가의 공효를 온전히 나타내 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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