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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를 따르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천우 목사(부천개혁교회)


칼빈주의에는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가 있습니다. 사실 하이퍼 칼빈주의란 말은 일상적으로 말하고 듣는 용어는 아닙니다. 칼빈주의란 말처럼 자주 듣는 말이거나, 그렇기까지는 않을지라도 종종이라도 듣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드물게 듣는 정도입니다. 나 자신도 이 말을 최근에 듣기 전에는 십 년 이상이 되지 않았나 싶을 만큼 오래 전에 들었으니깐요.


그런데 하이퍼 칼빈주의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분명히 존재해 온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이었습니다. 즉 고운 시선으로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럴까요? 하이퍼 칼빈주의에서 '하이퍼'(Hyper)는 「건너편의; 초월; 과도히, 비상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을 매우 '과도한 자', '과격한 자', '극렬한 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편협하게 이들을 생각할 수 있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 중에는 심지어는 칼빈주의자들을 전체적으로 나쁘게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이퍼 칼빈주의를 '칼빈주의를 추종하는 극단주의자'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이퍼 칼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를 않을까요? 이들은 역사적 전통을 잇는 개혁교회의 정통 칼빈주의자 곧, 순수한 칼빈주의자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선 하이퍼 칼빈주의를 말하는 사람들, 곧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칼빈주의 예정론을 말하는 자들'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예정론을 따르는 칼빈주의자들 중에서 극단적 예정론에 치우친 사람들이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예정론을 말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 예정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예정론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싸잡아서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특히나 극단주의자들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인터넷에서 하이퍼 칼빈주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극단적인 칼빈주의의 예정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장로교회가 너무 예정론에 치우쳐있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퍼 칼빈주의를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칼빈주의 예정론과의 연관 속에서 구원론의 핵심 요약이 되는 칼빈주의 5대교리까지도 함께 싸잡아서 극단적인 칼빈주의라고 비판과 비난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우선 칼빈주의 예정론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특히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지만 이로 인해서 이들의 사상을 '하이퍼 칼빈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정론은 칼빈에 의해서 비로소 말해지고 그 견해가 주장된 것은 아닙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과 사상이 아닌 어거스틴의 사상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박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칼빈에게서만이 아니라 루터나 칼빈만큼이나 유명한 베자에 의해서도 더욱 더 그 견해가 확고해졌습니다. 베자는 칼빈의 예정론을 그대로 전수 받아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굳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칼빈의 신학 사상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예정론에 대한 사상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칼빈의 예정론을 지지하였으며 그 자신이 가진 예정론에 대한 견해에서도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칼빈과 일치합니다. 그렇지만 칼빈이 볼섹하고 예정론 논쟁을 벌이고 있는 막바지에 그가 제시한 '예정론 도표'에 따르면 그가 가진 예정론 사상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작정 교리와 예정론을 뿌리로 하여 칼빈의 예정론 사상과 당대의 개혁교회가 가진 신학 사상으로서의 예정론을 '타락전 선택설'의 견해에서 다루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그는 '타락전 선택설'이라든지 또는 '타락후 선택설'이라든지의 견해를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타락전 선택설'을 말하는 것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타락후 선택설'을 말하는 듯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해 보이는 것은 그가 일관되지 못한 신학 사상에 있어서가 아니라 예정론을 구원론의 신학적 시각에서와 또는 때로는 신론의 신학적 시각에서 다루는데 따른 것일 뿐이지 결코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또 저렇게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의 구원을 논함에 있어서 이를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는 족보에서부터 다루는 것과 그리스도에서부터 시작하여서 아담에게로 올라가는 족보에서부터 다룬다고 할 때 구원의 예정이 사람의 타락에 앞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부터 드러내기도 하는가 하면 또는 감추어진 상태에서 다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자는 어거스틴에서 칼빈과 개혁교회에 이르는 예정론을 지지하는데 이를 이중 예정[선택과 유기의 예정]으로 제시하면서 사람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과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서 창조된 사람의 창조를 다루고 이들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음을 강조함으로써 선택과 유기의 근거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좀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무관한 상태에서는 결코 어떤 바른 신학 사상도 나올 수 없기에 베자의 예정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을 말하고 '타락전 선택설'을 따르는 자들이기에, 단지 이런 자들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이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타락전 선택설'의 신학 사상을 가진 베자(Teeodore Beza)를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퍼킨슨도 동일한 신학 사상을 가진 자인데 그 역시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타락전 선택설'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신학 사상이 아닌 칼빈주의자들, 나아가서는 개혁교회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신학 사상입니다. 그리고 또한 '타락후 선택설'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이퍼 칼빈주의'는 이들이 가진 '타락전 선택설'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정통 칼빈주의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가 정통 칼빈주의와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은 세세한 것은 놔두고 큰 틀에서 볼 때 다음의 두 가지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하이퍼 칼빈주의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첫째,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과 달리 반율법주의에 서 있으면서 태동된 자들이었습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칼빈주의라는 신학 사상이 구교(舊敎)에 맞선 신교(新敎) 노선으로 형성되어 내려왔습니다. 이때 칼빈주의는 세월을 거듭하면서 여러 형태로 다양하게 발전해 왔는데 그들 모두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신학 사상을 띤 칼빈주의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세기에 이르러서 두 형태의 서로 대립된 신학 사상이 형성되었는데 반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가 그것입니다.


먼저, 반율법주의는 율법에 반대하는(against Law) 사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상을 가진 자들을 칼빈주의적 반율법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칼빈주의에 서 있는 자들로서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하면서 반율법주의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율법에 반대하는 사상을 가지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약화시켜 버린 데서입니다. 반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구속 언약과 예정론을 다루어 가는데, 칭의가 믿음을 갖기 전에 주어진다고 하는 믿음에 선행하는 칭의의 개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 이들이 이렇게 보는 것은 칭의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구속 언약의 '영원한 칭의'와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속과 부활의 의에서 얻은 '실제적 칭의'와 성령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하는 '구체적 칭의'로서 이 칭의가 적용되는 것은 믿음보다 선행하며 칭의의 결과로 믿음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 구원의 확신 교리로서의 두 가지 증거인 성령의 내적인 증거와 성화의 외적 증거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받는 수단이 되는 성경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영원토록 성도들을 죄로부터 보호하시며 구원받은 자들의 내적인 생명 속에 거룩함으로 역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들에게서 율법은 단지 사람에게 죄를 알도록 할 뿐으로서 믿는 자들은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까닭에 죄가 더 이상 정죄하지 못하므로 율법은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필요 없고 다만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는 인식을 가지는데서 거룩함이 증진된다는 반율법주의의 사상을 가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율법주의가 형성되었습니다. 신율법주의는 17세기말에 형성된 새로운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인데, 반율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왔습니다. 신율법주의의 핵심은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여기서 행위언약이 주어졌는데 아담이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행위언약에 실패함으로써 그 후손으로 오는 모든 인류도 함께 행위언약에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시대에 새로운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제정하여 주셨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율법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언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보여주신 모범을 좇아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이를 믿음으로 용납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회개와 선행을 반드시 동반해야 하며 이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에 이른다는 사상을 가졌습니다.


반율법주의이든 신율법주의이든 이들의 사상은 정통 칼빈주의 신학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을 칼빈주의 신학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상은 서로 대립되어서 반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의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율법주의와 논쟁을 벌이며 이들과 대항하였는데 이들 중 강성을 띤 상당수는 새로운 칼빈주의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들을 '극단의(과격한, 극렬한) 칼빈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며, 바로 그들이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에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극단의 침례교도인들이 많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최초의 사람은 리차드 데이비스(Richard Davis)인데 그는 회중교회 복음 전도자였으며, 역시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요셉 허세이(Joseph Hussey)도 회중교회 목사인데 그 허세이의 제지로서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유명한 존 스케프(John Skepp)는 침례교에 속한 최초의 하이퍼 칼빈주의자였고, 그 뒤를 이어 존 브라인(John Brine)이 존 스케프의 사상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리고 18세기에 칼빈주의의 영향 속에 있던 자들 중에서 조나단 에드위드와 함께 가장 유명한 존 길(John Gill)도 침례교 목회자로서 하이퍼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이들의 영향 속에서 칼빈주의적인 침례교도인들이 하이퍼 칼빈주의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는 영국에서 발생하여 뉴잉글랜드로 그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에로 퍼져나갔는데 신율법주의자에 대항한 반율법주의자들보다는 한층 강성의 성격을 띤 까닭에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는 여느 칼빈주의자와 같이 칼빈주의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매우 강조합니다만, 이것을 지나치게 다루어서 비록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 없이도 직접 회개와 중생 사역을 통해서 선택한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심지어는 선택된 자들에게는 복음 전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까지도 말하였습니다. 선택된 자들은 선택의 씨앗을 갖고 태어나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열매에 이르며 유기된 자들은 저주받은 씨앗을 갖고 태어나 궁극적으로 멸망의 열매에 이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파[선포]하는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복음을 제시하고 초청하는 것은 반대를 함으로써 반선교의 입장에 섰습니다. 그것은 구원은 선택된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며 일반인들에게 제시하거나 초청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반인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선택의 교리에 위배되고 속죄의 보편성을 내포하게 되어서 보편 구원성을 띠게 되기 때문에 이는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교리에도 위배된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이 정통 칼빈주의자들과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은 일반은총론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영국에서 발생하였으며 주로 침례교도인들인데 미국의 개혁주의 주류인 네달란드계 칼빈주의 개혁교회에서 일어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쪽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 사상을 영향을 받은 칼빈주의자들이었기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일반은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주류인 네달란드계 칼빈주의 개혁교회에 있으면서도 하이퍼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헤르만 훅스마(Herman Hoeksema)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보다도 한층 더 높은 칼빈주의자라고 불리웁니다. 그러니까 하이퍼 칼빈주의보다 '더 극단의 칼빈주의'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을 이들도 말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일반은총의 교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일반적으로는 일반은총의 교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선택자나 불택자나 곧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자연을 통해서 내려주시는 은총은 차별이 없습니다. 선한 자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이 일반은총 교리는 구원에 관련한 특별은총 교리와 함께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훅스마와 그를 따르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을 부정합니다. 그런 까닭에 타락의 작정 이전에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을 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시고 유기된 자들을 미워하신다는 것만을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것의 역설적 설명으로 선택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으며 반대로 유기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상은 특별은총의 영역과 일반은총의 영역을 구분 지으나 역사 속에서 수레바퀴를 이루고 있는 역사사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상에서 하이퍼 칼빈주의가 왜,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이퍼 칼빈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칼빈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론을 말하고 타락전 선택설을 말하고 칼빈주의 5대교리를 말하고 이 모두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한다고 해서 칼빈주의는 아닙니다. 사실 하이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 노선에 서 있으면서 칼빈주의에서 이탈한 비칼빈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칼빈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이퍼 칼빈주의에서 보듯이 칼빈주의에서도 여러 형태의 다양한 칼빈주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실정에서 개혁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잇고 잇는 바른 칼빈주의에 견고하게 서 있는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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