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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란 자유대학 설립자 아브라함 카이퍼와 설립 이념 및 발전 과정

손한나(고신대, 중국어 교육학과)


I. 들어가며


화란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기독교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이념 아래 1880년 아브라함 카이퍼(Abrahm Kuyper, 1837-1920)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개혁파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설립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열정에 의해 화란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중요한 고등 교육기관이 되었다. 현재는 약 2만 2천명 가량의 학생과 2천 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의과대학과 대학 병원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 대형 대학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이념을 가지고 설립된 이 학교는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의 미션 스쿨이 그러하듯 미션 스쿨로서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다. 우리 고신대도 개혁주의 이념에 따라 설립되었지만 지금은 그 의미를 많이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런 시점에 화란 자유대학의 설립 이념과 그 발전 과정 그리고 그 설립자를 연구 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시간에 우리는 1) 설립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를 살펴보고, 2) 화란 자유대학교의 설립 이념과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 고신대학교의 설립 이념을 살펴보면서 우리 학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II. 본론


1.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10월 29일 화란의 마슬라의스(Maasluis)에서 국가교회(NHK)의 목사인 아버지 얀 프레드맄 카이퍼(1801-82)와 어머니 헨리에트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같은 해 12월 3일 아버지의 집전 하에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1841년에는 제이란트(zeeland)주의 항구 도시 미덜부르크(middelburg)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 교육 대신에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어머니에 의해서 훔 스쿨링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공식적인 학교 교육은 아버지의 목회지인 레이던(Leiden)에서 김나지움(Gymnasium, 문법학교)에 입학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849년에서 1855년까지 인문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1855년 18세의 나이에 레이던 대학(Rijksuniversiteit te Leiden)에 입학하여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전 문학을 공부하여 최우수 성적으로 문학사를 받았고, 나중에 신학부의 학생으로 등록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레이던 대학은 독일의 근대주의적인 신학을 그대로 수입하여 가르치는 자유주의 상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신학부에서 현대신학의 조상으로 일컬어진 자유주의 신학자 스콜턴(J.H. Scholten, 1811-85) 교수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다. 그는 약관 25세의 나이에 「요한 칼빈과 요한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 연구」(Disquisitio historico-theologica, exhibens Joannis Calvini et Joannis a Lasco de Ecclesia Sententiarum interse compositionem)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고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근대주의와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그는 점차로 부모들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인 신앙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카이퍼는 그 시대의 상황과 교육으로 인해 자유주의 신학자로 일생을 바칠 뻔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은 그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개혁신학과 신앙으로 전향하도록 일련의 계기들이 청년 카이퍼를 위해 준비해 두고 계셨다. 그는 26세에 결혼을 하였는데 약혼녀로부터 선물로 받은 한 권의 소설책이 그를 칼빈에게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 책은 영국의 여류 소설가인 샤를로테 메리 용어(Charlotte Mary Yonge, 1823-1901)가 쓴 「The Heir of Redclyffe」(1853)라는 책인데 소설 형태로 된 경건 서적이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생 역정을 비교함을 통하여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가 한 인간의 출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감동적으로 으로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을 통해 카이퍼는 교회를 진심으로 사모하게 되었다. 또한 카이퍼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4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묘사한 것을 회상하게 된다. 그가 감명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성례, 가정 및 공적 예배의 확실한 형식, 감동적인 예배 프로그램, 그리고 영국 교회가 ‘기도서’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 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카이퍼의 이상적인 교회관의 기원으로 작용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가 개혁주의 신학자요, 목회자로 전환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첫 임직지에서 개혁파 신앙인을 만난 일이었다. 카이퍼는 학위를 취득한 후 원래 학자와 교수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회자로 길을 가게 된다. 그의 첫 임직지는 헬더란드 주에 속한 베이스트(Beesd in Betuwe)라는 작은 마을 교회였다. 그는 1863년 그곳에 임직하여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목회 초년기에 그는 아직도 레이던 대학에서 배운 자유주의와 역사적 연구를 통하여 접하게 된 개혁주의 사이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카이퍼가 부임한 교회 회중의 대다수는 철저한 개혁주의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 교회 내에 옛 개혁주의 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소수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래된’ 개혁주의 신앙체계를 갖고 있었지만, 질서정연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인간적인 행위나 공로는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완전한 주권적 은총’만이 인정될 수 있다는 확신에는 타협할 줄 몰랐다. 젊은 카이퍼 목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이들을 상대하면서 종종 논쟁도 벌였다. 하지만 그는 그 만남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고, 점점 그들의 호의를 얻어 논쟁이 아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그의 반(半)정통주의적이고 반(半)자유적이었던 신학적 견해는 건전한 정통주의로 옮겨갔고, 본질적으로는 개혁주의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간 막연하게 꿈꾸었던 교회개혁과 교회건설에 대한 꿈은 좀더 구체적으로 승화되었다. 카이퍼는 더 풍부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지식을 얻기 위해 화란과 외국 신학자들의 책을 접하였고, 그렇게 칼빈과 재회하게 되었다. 특히 그들 중에 방앗간 주인의 딸로 노처녀였던 삐쳐 발투스(Pietji Baltus, 1830-1914)는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를 반겨주지 않았다. 카이퍼는 그녀를 심방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개혁주의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베이스트에서 목회와 연구에 힘을 쏟던 카이퍼는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1867년 6월 네덜란드 중부에 있는 아름다운 중세 도시 우드레흐트(Utreht)의 돔교회(Domkerk)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게 된다. 카이퍼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교회개혁의 지도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우드레흐트 교회 재직시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교단총회에서 시행하는 형식적인 교회 시찰(Kerkvistatie)문제였다. 영적인 실체를 빼놓고 일상적인 일상적인 설문 조사로 방관하는 총회를 비판했다. 또 하나 그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활동한 공적 활동은 소위 ‘학교 투쟁’(de Scholenstrijd)이라는 것이었다. 카이퍼는 교육제도, 곧 국공립학교로부터 독립하려는 기독교국가교육협의회에 참여하여 개혁주의적인 기독교 학생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 때 카이퍼는 사상적인 스승이며, 칼빈주의적 정치 운동에 동기를 부여했던 그 협회 명예회장이었던 흐룬 판 프린스터(Groen van Prinsterer)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흐룬 판 프린스터의 문하생이 된 카이퍼는 칼빈주의적인 세계관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기독교인의 활동을 강하게 주장한 걸작인 「불 신앙과 혁명」이라는 책을 읽음으로서 더욱 칼빈주의에 매혹되었다. 흐룬 반 프린스터는 카이퍼에게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교회, 국가, 학문, 그 밖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가능한 형태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항하여 나타나야 한다고 확신시켜 주었다. 흐룬 반 프린스터는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오자 교회와 국가에서 개혁주의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영적인 지도자로서 아브라함 카이퍼를 지명하게 된다. 그후 카이퍼는 ARP(반혁명당)에 가입하여 정치의 길로 들어선다.


카이퍼는 1870년 그의 나이 33세에 네덜란드 국가 교회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게 된다. 이로서 카이퍼의 본격적인 활동의 기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카이퍼는 완전히 복음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사상으로 무장한 목회자요, 사상가가 되어 있었다. 1872년 카이퍼는 ARP(반혁명당)당의 공식 일간지인 ‘데 슈탄다르트’(De Standaard)의 편집 부장이 되었고, 바로 이어서 매주 금요일에 발행되는 기독교 주간 신문인 ‘데 후라우트’(De Heraut)의 편집장을 맡았다. 카이퍼는 이 두 신문을 편집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매체들을 통해 그의 명상록과 방대한 신학연구물들을 연재하였다. 이 두 신문은 그의 개혁신학과 사회개혁을 위한 그의 정치 사회사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또한 그의 그들은 수많은 화란 기독교인들의 영의 양식이 되었다. 그는 이제 종교계, 교육계, 정치계, 언론계를 아울러 목소리는 내며 ‘개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874년까지 지속된 그의 암스테르담 목회는 그의 목회 사역으로서는 마지막 기간이 되었다. 왜냐하면 1874년 그는 선거를 통해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목사직을 사임하고 정치가가 되고자 한데에는 반 혁명당의 당수였던 흐룬 판 프린스터와의 사귐이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제한된 목회 사역보다는 기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여정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부딪힌 중요한 현안은 바로 기독교 정신을 가진 학교 설립을 국가가 법적으로 인정하고 다른 공립학교들 처럼 재정 지원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카이퍼는 장기간의 투쟁을 통해 마침내는 어떤 종교적인 여념을 표방하는 학교이든지 국가의 법적인 인정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서 카이퍼는 세속화된 국립대학들에 반하여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인 토대에 근거한 학문을 수행하고 교육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할려고 몸부림을 쳤으며, 그 결과 바로 1880년에 암스테르담에 설립한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였다. 개혁신학자 카이퍼는 단순히 개혁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신학교 설립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원했던 것은 개혁신학적인 원리에 근거하여 모든 학문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교육하는 종합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강의하던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1880년과 1883년의 총회 결의안으로 인해 다시금 교회내적 위기에 내물리게 된다. 그것은 총회가 결정하기를 각각의 지교회들은 신임목회자의 개인적인 신앙이 복음적인지 아닌지를 시험하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결정은 참으로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암스테르담 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던 카이퍼는 이와 같은 총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개혁교회의 교리적 탈선을 애통해 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애통해 하다는 라틴어 dolore에서 비롯된 돌레안치(doleantie)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내적 개혁운동이기를 원했으나 총회파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국가교회 총회는 1886년에 카이퍼를 비롯한 암스테르담 교회에 속한 개혁인사 78명을 정직시켰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전국적으로 200교회 76명의 목회자와 18만명의 교인들이 국가교회를 이탈하여 카이퍼의 개혁에 동참하였다. 카이퍼와 지도자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미 1834년에 국가교회에서 분리하여 소규모의 교단을 이루고 있던 화란 기독교 개혁측과 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연합운동은 성공하여 1892년 화란개혁교회(GKN)라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1898년 그의 나이 61세 때 미국 프린스톤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를 받았고, stone-lectures의 강의를 했다. 그가 행한 강의의 제목은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이었다. 카이퍼는 강의 초두에 자신은 칼빈주의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고 고백하였으며, 칼빈주의가 어떤 교파의 이름이나 신학체계의 이름으로만 사용되는 것을 반대하고, 칼빈주의는 당당한 세계관임을 천명함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1901년 카이퍼는 그의 나이 67세에 생애에 있어서 최정상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것은 카톨릭당과 연합전선을 편 반혁명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네덜란드 수상이 된 것이다. 1905년까지 그의 수상 재임 기간 동안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남아프리카 문제 등이 일어나 적지 않은 고욕을 치루었지만 그와 반혁명당 당원들에게는 기독교적인 정치를 시험대에 올려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카이퍼가 수상 재임 기간 동안에 이루어 놓은 입법상의 업적 가운데 가장 의미 있고 유명한 것은 1905년 고등교육법이다. 이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비공립학교의 법적 지위가 처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05년 선거에 패배한 후에도 여러번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다시 수상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인생 말년에 그는 지중해의 여러 지역들과 성지 순례를 하였으며, 예배의식에 대한 중요한 책을 우리에게 남겼으며, 반혁명당의 오랜 지도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원용하고 정리하여 「반혁명당적인 정치학」이라는 두권의 방대한 정치학 관련 저술을 출간하였다. 그는 45년이 넘도록 목사요, 교육가요, 정치가요, 언론인이요, 개혁가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다. 1920년 11월 8일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2. 자유대학교 설립


2-1. 설립 배경과 이념


카이퍼 박사가 신경쇠약으로 남부 유럽에서 요양을 하고서 1877년 5월 화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립학교에 대해 재정 보조를 하지 않겠다는 헤임스케르크 내각의 고등교육 법안이 입법화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 법안에는 학교에 5개 학부(교양, 신학, 법학, 의학, 자연과학부)를 설치한다는 조건으로 사립대학 설립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는 했다. 개혁교회들은 모더니스트들이 판치던 대학 신학부의 폐지를 주장하였지만(순수한 신학교 설립의 방편을 위하여), 자유주의자들을 옹호하던 국회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학’이란 명칭을 유지한 채 ‘종교학’을 가르치면서도 기존의 대학에서 신학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정부는 국가교회 총회에서 지명하는 교수들을 재정 지원하도록 하였으나, 그 대상이 된 6명의 교수들 중 5명이 자유신학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퍼는 ‘온건하고 자유로운 칼빈주의적 국가대학’의 설립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가 꿈꾸는 대학은 신학부만을 포함한 신학교가 아니었고,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회복과 정화를 이룰 기독교 대학이었다. 그리고 소유, 운영, 통제 등에 대하여 어떠한 외부 간섭도 허용하지 않는 ‘자유’를 갖기를 원했으며, 하이델베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를 신학교육의 토대로 인정하는 개혁주의적 학교여야 했다. 또한 그 학교는 국가의 장래를 책임지는 국가대학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주어진 여건은 아주 나빴다. 재원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았고, 학교 이념에 맞는 헌신된 교수들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졸업 후 뚜렷하지 않은 장래를 보면서 그 학교에 지원할 학생들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1878년 12월 5일 개혁주의 원리에 기반을 둔 고등교육협회가 우트레히트에서 조직되었다. 그리고 3개월 뒤 협회규칙을 국왕에게서 동의를 받았다.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이퍼는 헤라우트지와 소책자 발행 등으로 논쟁을 벌여나갔다. 암스텔담을 대학 설립 도시로 채택을 하고서, 1879년 11월 7일 지도위원들은 카이퍼 박사와 루트헤르스 박사를 대학의 신학부 교수로 미리 임명하였다. 그리고 두 교수는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힘썼다. 드디어 1880년 10월 20일 ‘자유대학’(Vrije Universiteit)을 개교하였다.


카이퍼 박사는 대학 설립에 즈음하여 행한 강연에서 자유대학 설립이념을 천명했다. 그의 강의 제목은 ‘영역주권론’(sovereignty in distinctive spheres of human life)이었는데, 그의 주요 논지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1)전능하신 하나님 만이 모든 피조물들 위에 홀로 주권적이며, 2)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었으며, 3)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모든 삶의 개별 영역들에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개교 강연은 특히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는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치도 없다.”


2-2. 발전 과정


1880년 12월, 자유대학은 5명의 교수와 5명의 학생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카이퍼 박사는 자유대학의 초대 초장으로 섬기면서, 주로 조직신학과 ‘신성한 신학의 백과’를 강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설교학, 화란문학, 미학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890년대에 자유대학의 학생수는 90명에 이르렀다. 학교는 교수도 부족했고, 의학부와 자연과학부도 신설해야 했다. 자유대학은 재정적으로도 빈약하고 법적제한이 비참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괄목할 만한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현재는 약 2만 2천명 가량의 학생과 2천 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의과대학과 대학 병원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 대형 대학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이념을 가지고 설립된 이 학교는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의 미션 스쿨이 그러하듯 미션 스쿨로서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다.


III. 나가며


우리는 이제까지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그가 세운 하란 자유대학교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카이퍼 당시에는 근대주의와 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적 상황 가운데서 개혁주의 사상에 기초한 교육을 위해 자유대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고신대학교도 개혁 사상에 기초한 교육을 위해 설립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설립 이념을 많이 상실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번 발제를 통해 우리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개혁주의 사상에 기초한 교육에 대한 열정에 도전을 받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학교에서 바른 교육을 받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이 위대한 교육가로 쓰임 받았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고신대학교가 그 설립이념을 따라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바른 교육에 귀하게 쓰임 받는 학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 참고 자료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김기찬 옮김.(크리스챤 다이제스트)

데이빗 F. 웰스, 「웨스터민스터 신학과 화란개혁주의」, 박용규 옮김.(엠미오).

류호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목회와 신학, 1996).

정성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과 삶」, (킹덤북스).

최영식, 「영역주권 이론의 적용에 관하여」, (경산열방교회).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기독신보, 1988).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역”, (인터넷 자료, 글쓴이:Gen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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