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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 기도의 본의
야베스의 기도의 본의
김성주목사
말씀:역대상 4:9-10
Ⅰ. 도입
수년 전 브루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란 책자가 종교서적 판매부수 1-2위를 다투더니 그 후광을 업고 동일 저자에 의한 ‘야베스의 기도 그 후’란 책이 다시 출간돼 독자들의 관심을 고조시킨 적이 있다. 그 여파의 일환으로 인터넷 상에서는 현재까지도 야베스란 이름으로 다양한 기독교 모임이 결성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야베스의 기도란 책자가 적잖은 한국 기독신자들 사이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결정적인 계기는 본 책자를 집필하게 된 성경의 증거본문인 대상 4:10의 내용을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자극시켜 자신의 육신적이며 현실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필요 적절한 기복적 성격의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 기도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기도가 응답의 첩경이다’란 확고부동한 명제를 확립하기도 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다.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 하셨더라.”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 해석한다면 야베스의 간구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복에 복을 더 해 부족함이 없는 부귀영화와 무병장수의 삶을 누리게 해 달라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지경(地境)을 넓혀 주셔서 더 많은 토지의 확보를 통한 재산의 증식을 해 달라는 것이며. 셋째는 일체의 근심걱정으로부터 해방돼 무사(無事) 안일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와 같은 기도의 내용이 응답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축복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음에 틀림없다. 사실상 야베스의 기도란 책자가 기독교계에서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 동기 또한 본문에 근거한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이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현실적인 욕구충족의 기대심리를 십분 자극했던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대상 4:10의 소위 야베스의 기도 내용의 본의(本意)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육신적이며 현세지향적인 소원성취의 심정을 담고 있는 기복적인 기도의 실례요 전형인가 하는 관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된다.
적어도 역대기 저자가 역대기서를 기록하게 된 저작동기와 관련해 야베스의 기도 내용을 ‘삽입’(insertion)하게 된 의도가 어디에 있는 지를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관점에서 상호 연관시켜 해석하지 않는다면 야베스의 기도가 의미하는 바 그 본의를 바르게 해명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상,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사욕의 수단으로 본문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야베스의 기도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신정왕국의 정체성을 띠고 존재했었던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를 제반 신적 언약과의 관계 속에서 구속사적 관점으로 재해석하게 될 때 그 본의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Ⅱ. 전개
1. 역대기서 기록 배경과 동기
다윗과 솔로몬 통치 하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르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된다(왕상 12장). 이들 분열된 신정왕국은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1차, 2차, 3차에 걸쳐 침략당한 끝에 BC 586년에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함으로 마침내 신정 왕국사에 종말을 고한다.
이처럼 이방인에 의한 남북 이스라엘의 철저한 멸망사건은 그 동안 차별화 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부해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민족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깊은 시름과 심한 회의 및 엄청난 충격에 빠지는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에 의해 멸망당할 수가 있으며(합 1:5-6, 13절), 더욱 다윗언약에 약속된 대로 다윗의 위가 영원히 보장되어야 하는데(삼하 7:11-17),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방인의 침략으로 중도에서 파기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민족적이며 신학적인 딜레마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쓰여 진 책들이 다름 아닌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라 할 수 있다. 즉 열왕기서는 통일 이스라엘이 왜 이방인들에 의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선지자적이며 신정(神政)사적 관점으로 기록함으로 남북 이스라엘의 열왕들의 통치 행적을 고발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반면에 역대기서는 선지자들의 새 언약 속에 예언된 대로 70년이 마치매(렘 25:11, 29:10, 단9:2, 대하 36:21)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족보의 내용을 기술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요 선민인 사실을 새롭게 재인식시켜줌으로써 오랜 기간 동안 잃어버렸던 선민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과 사명감 고취 및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을 재정립해 다윗언약(삼하 7:12-16)에 근거한 참 다윗왕조의 회복 및 영원한 계승을 대망케 하려는 데 기록 목적을 두고 있다 하겠다.
2. 야베스의 기도내용 삽입의 의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요 신정왕국인 사실을 족보를 통해 혈통적으로 확인시켜 줌으로 포로귀환을 통해 가나안 고토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민족적 정체성과 자부심 및 자긍심을 고취시켜 주던 역대기서 저자는 특별히 대상 4장부터 유다지파의 자손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대상 4:9-10을 통해 야베스의 출생 내력과 응답이 약속된 기도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집약해 의도적으로 삽입한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말이다. 여기서 야베스의 기도내용 삽입이 의도적이란 관점은, 첫째로 문맥상 유다지파의 후손들을 기술하는 내용 속에 문맥과는 무관한 야베스의 기도 내용이 돌발적으로 삽입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의 이름에 함의된 출생 내력과 관련해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되었다는 기술이다(9절). 셋째로 이런 사실들은 야베스의 출생 내력과 기도내용의 성격이 70년이 지나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하게 되는 당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입장과 처지 및 미래적 전망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룸으로 저들의 심정을 한껏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스 1:1-4)에 의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귀환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이제 고토(古土)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윗언약(삼하 7:12-16)에 약속된 다윗의 위(位)를 새롭게 회복시키기 위해 쇠락한 솔로몬 성전 건축을 재건하는 것을 통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을 재수립하는 데 모아진다 하겠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남은 자 귀환사건은 바벨론에서의 70년 포로생활의 역경과 악몽(시 137:1-9)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가리키는 것이며, 나아가 가나안 고토에서의 신(新)다윗왕조의 재건을 다윗언약에 근거해 새롭게 확약 받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야베스의 간구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보증의 응답(대상 4:10)은 바야흐로 가나안에로의 귀환이 시작된 당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는 선지자들의 새 언약(렘 31:31-34, 겔 37:24-28)에 근거해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안정과 회복을 보장받는 셈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야베스의 기도가 역대기서 기자의 의도된 삽입기사로 보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
3. 야베스의 기도에 함의된 구속사적 본의
그렇다면 역대기서 기자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야베스의 기도가 갖는 본의는 무엇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육신적이며 현세지향적인 소원성취를 위한 기복적이며 구복(求福)적인 기도의 내용일까.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적인 바른 기도의 의미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하나님과 갖는 인격적인 교제의 수단으로서, 본질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데 기도의 필요성과 근본 취지가 집중된다고 하겠다(마 6:9-13, 요일 5:14). 더구나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궁극적인 필요인 죄로부터의 구원을 은혜로 보증하고 있기에, 현실적인 제반 필요들은 사실상 근본에서 구원에 종속되는 것으로 인해 기복적인 심정을 가지고 현실적인 필요를 욕심을 발동시키면서까지 구하는 데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마 6:31-33).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우선하여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이다. 구약의 제사제도에 소위 기원제(祈願祭)가 없다는 사실도 기도의 본질과 본의가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한 예(例)라 하겠다.
물론 기독교에 기복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이고 지엽적일 뿐 기독교 신앙에 근간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와 복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온 천하’보다 더 귀한 목숨 곧 구원과 영생하는 부활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이미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5:24, 11:25-26). 따라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정작 목숨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사실상 온 천하란 일시적인 만족을 줄지언정 본질에서 무의미 할 뿐이다(마 16:26). 반면 구원의 생명을 이미 소유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은 자는 온 천하를 소유한 것과 다름이 없기에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먹을까/입을까/마실까의 현실적인 문제에 필요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세속적인 유혹에 쉽게 미혹당하지 않는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시기에 더욱 그렇다(마 6:31-32, 빌 4:19).
이런 관점에서 이제 야베스의 기도가 내포하고 있는 구속사적 본의를 살펴보자. 대상 4장의 문맥에서 살펴 볼 때, 야베스는 유다지파의 후손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의 기도의 내용 중 핵심 되는 부분이 땅의 지경을 넓혀달라는 것임을 감안할 때, 가나안 정복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충분히 추정케 한다. 물론 본 기도 내용 중 땅의 지경을 넓혀달라는 것은 다른 이스라엘 동족 지파의 땅까지도 넘본다는 의미에서 욕심을 발동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단지 유다지파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을 남김없이 모두 정복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간절한 소원이란 관점에서 해석할 문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각 지파는 자신들의 소용(所用)에 따라서 가나안 땅이 분배되었을 뿐만 아니라(수 14:1-5), 이 과정에서 유다 지파의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정탐지역 곧 아낙자손이 거주했던 헤브론 지역을 분배받아 기업으로 삼게 된다(민 14:24, 수 14:6-9, 12-13절). 이후로 유다지파와 그의 후손들은 헤브론을 중심으로 실지(實地)회복을 위한 지속적인 정복전쟁에 돌입하게 된다(삿 1:1-3, 8-10절). 이 과정에서 유다지파의 후손인 야베스 또한 자신들의 지파에게 할당된 지경을 온전히 정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이 다름 아닌 야베스의 기도의 주(主) 내용인 것이며, 이 과정에서 가나안 현지 족속들과의 불가피한 전투로 인한 불상사가 야기될 수밖에 없음으로, 전투에서의 승리를 보장해 주심으로 전쟁의 환난과 위경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나 평안히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에서 ‘복에 복을 더 하사’란 표현은 정복전쟁을 통해 유다지파에게 분배된 가나안 지경을 온전히 탈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이 담긴 강조의 표현이라 하겠다. 결국 이런 야베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허락받게 되는 바, 후에 다윗과 솔로몬 통치하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 이라는 신정왕국의 실현을 통해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른다. 내용은 이렇다.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5). 본문에서 단과 브엘세바까지의 지경은 본질에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가나안 땅의 전(全) 지경(창 15:18) 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곧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바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신 11:24)는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킨다.
따라서 대상 4:10의 야베스의 기도는 본질상 철저하게 아브라함 언약, 특별히 횃불언약식(창 15:12-21)을 통해 갱신되고 재 확약된 하나님의 가나안 정복사건에 대한 신적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마치 삼하 7:29에 소개되고 있는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란 다윗의 기도의 내용이 단순히 다윗 일개인의 가문의 영광과 행복을 간청하는 기복적인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삼하 7:12-16에서 나단을 통해 주신 소위 다윗언약, 곧 미래의 메시아 왕국의 구체적 성취를 앙망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다윗 자신의 계보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 질 것을 열망하는 심정에서 나온 신적 언약에 근거한 신앙 고백적 간구의 내용인 것처럼 말이다.
4. 야베스의 기도의 현대적 적용
그렇다면 야베스의 기도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야베스의 기도는 결국 가나안 정복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아브라함 언약의 온전한 성취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윗과 솔로몬 통치하의 통일 이스라엘의 신정왕국의 실현을 통해 마침내 응답을 받게 되었음을 살펴봤다(왕상 4:20-25). 그러나 통일 이스라엘의 신정왕국은 이내 남북으로 분열되는 것으로 인해 역사적 이스라엘은 구약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단지 예표적이고 모형적으로만 반영해 냄으로서 한시적인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사실은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언약이 선지자들의 새 언약(렘 31:31-34, 겔 37:24-28)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성취될 것을 전망하게 된다.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 진행의 관점에서 신정왕국으로 존재했던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체는 구약의 제반 언약의 총화인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눅 22:19-20, 히 10:9-18), 곧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고 가시화된 신약의 교회공동체 속에서 성취의 절정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 존재해야하며 본질에서 하나님 나라를 적극 반영해 내는 천상적 기관으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사실로 인해 야베스의 기도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가시화된 교회공동체의 출현을 통해 실질로 응답된 셈이다. 신약의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친 백성 된 자들로서 사실상 현재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마 12:28, 눅 17:20-21)를 가장 극명하게 받아 누리는 천상적 공동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속적으로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은 더욱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계속 교회에 더해져 감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여기서부터 현재적으로 더욱 풍성히 소유해 누리게 될 것이다(롬 14:17). 그런 의미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현재적으로 이미 응답되었고(already), 다른 한편 종말론적 응답을 향해 계속해서 응답되고 있다 하겠다(not yet).
Ⅲ. 결론
야베스의 기도는 기독교계 일각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기복적인 기도응답의 모범적 사례가 아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기도응답의 전형은 더더욱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 기복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복적인 요소가 타종교에서 강조하듯 우선적인 신앙의 동기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마 6:24).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신 사실에 기초한다(롬 5:8, 요일 4:10). 그래서 이 사랑에 깊이 접촉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심(感心)으로 수납해 소유함으로 감사와 보답의 심정을 발휘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기독교 신앙은 출발되며 그 본질적 정체성(진정성)이 확인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은혜가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임을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마 13:44-46)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임마누엘)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직 전인적으로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가지고서 말이다(눅 17:10). 이런 무익한 종의 신앙 여정 속에서 기복적인 요소는 사실상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오직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신앙의 동기와 목적으로 삼을 뿐이다(고전 10:31, 전 12:13).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은 근본에서 이미 복의 본질인 하늘의 신령한 복을 값없이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엡 1:3-6, 히 11:24-26).
이런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관점에서 야베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 곧 아브라함 언약 중 땅 언약의 성취로서 유다지파에게 허락하신 가나안 정복을 기도의 방식을 통해 적극 구한 것이다. 이기적인 욕심의 발로에서 나와진 기복적인 기도의 내용이 아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었기에 다윗과 솔로몬 통치하의 신정왕국인 통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마침내 예표적이나마 응답을 받았던 것이다(왕상 4:25).
그런 의미에서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과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신약교회공동체 속에서 응답의 절정을 실제로 맛보게 되었으며, 미래지향적인 남은 구속사의 진행과 더불어 오늘도 응답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야베스의 기도는 최종적으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증인된 삶을 부단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딤후 4:2, 딤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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