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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개혁 활동과 제네바 학당
특강
칼빈의 개혁 활동과 제네바 학당
1559년은 칼빈의 제네바 사역에서 여러 가지 영광스러운 일로 관이 씌워진 해였다. 프랑스 개혁교회가 총회를 열어서 조직되었고, 1536년에 초판을 간행한 이래로 계속 수정한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이 출간되었다. 여기에 더하여서 제네바 학당(Geneva Academy)이 6월 5일에 문을 열었다. 이것은 일찍이 1537년에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 규정”에서 밝힌 것이 열매를 맺는 일이었다. 칼빈의 평생의 노력으로 제네바 학당이 문을 열었고, 이곳에서 훈련을 받은 사역자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제네바를 모델로 한 개혁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프랑스, 독일, 특히 네덜란드나 스코틀랜드와 같이 개혁 신앙이 뿌리를 내린 나라들은 제네바 학당을 모델로 삼아서 대학들을 세웠다. 제네바 학당의 설립은 “칼빈 사역의 절정이었고, 그것은 동시에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제네바 학당은 칼빈의 사역의 정점(頂點)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개교식의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6월 5일 생피에르 교회에서 열린 개교식에서 칼빈이 사회를 하면서 권면의 말씀과 기도의 순서를 맡았고, 시의 비서관 미쉘 로제(Michel Roset)가 제네바 학당의 학칙과 신앙고백서를 크게 낭독하고 교사들이 그 규정과 신앙고백서에 동의하기로 서약한 후에 목사 회의에서 학장으로 추대된 베자가 개원 연설을 하였다. 칼빈은 자기가 준비한 바통을 그렇게 다음 세대에 넘겨준 것이다. 그 바통을 이어 받은 베자는 족장들과 모세와 솔로몬과 다니엘을 언급하면서 구약 시대부터 어떠한 정신으로 교육을 하였는가를 개관하였다. 역사를 통하여서 흐르는 주류의 신앙과 신학을 검토한 후에 취임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교육 기관의 목표를 이렇게 밝혔다:
수많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헛된 힘겨루기 시합을 관전하려고 경기장에 몰려갔지만, 여러분은 그러한 목적으로 이 학교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참된 신앙과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으로 잘 준비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높이고 또한 여러분의 조국을 영광스럽게 하고 여러분의 가족을 부양하려고 이곳에 모였습니다. 여러분이 이 거룩한 군병으로 소집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여러분을 이곳으로 부르신 지존자 그분께 직고(直告)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군인으로 훈련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수사학적인 표현만은 아니었다. 제네바 학당의 시간표를 보면 아침 6시에(겨울철에는 7시에) 시작하여서 오후 4시까지 계속 공부와 토론을 하고, 매 주 수요일마다 구두시험을 보았고, 시험 성적을 따라서 앉는 자리도 정하였다. 포도 추수기에 세 주간만 방학을 하고 나머지 49주간은 계속 학문을 연마하였다. “우리에게 나무를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날카로운 화살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칼빈이 말한 대로 거기에서 반듯하고 예리한 화살로 마광(磨光)되는 과정을 겪었다. 거룩한 군병으로 소집된 그들은 유능한 군인이 되는 훈련을 그렇게 강도 높게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설립되고 가르친 제네바 학당은 곧 유럽 대학의 중심이 되었고, 제네바 교회에서 꽃을 피운 개혁 신앙이 다른 지역에 전파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제네바 학당이 개혁교회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 역사를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어떤 학교의 역사를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제네바의 교회 개혁과 함께 이 학교에 대하여서 공부하려고 한다.
제네바의 초기 사역(1537년의 교회법)
제네바의 개혁을 시작한 사람은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인 파렐이었다. 파렐이 그 시를 개혁할 때에 사용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앙투안 프로망(1508-81)이라는 청년을 보내어서 프랑스어를 가르칠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고, 그 학교에서 복음도 함께 가르쳤다. 파렐의 노력으로 제네바 시는 1536년 2월에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런데 로마 교회가 물러난 이후에 제네바는 더 큰 어려움에 빠졌다. 기존의 권위가 물러나면서 방종주의자들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를 쫓아내는 일은 괄괄한 성격의 파렐이 잘 감당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풍부하게 잘 가르치는 일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었다. 자기의 한계를 잘 알았던 파렐은 제네바 시에서 하룻밤 유숙하려던 칼빈을 붙잡아서 개혁의 일에 동역하기를 강권하였다.
칼빈은 처음에 ‘교사’로서 제네바에서 일을 시작하였다(1536년). 그는 목사로 임직되기 전에 파렐이 시작한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칼빈은 교회 안에 야만주의가 팽배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과목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에서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칼빈은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과 함께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구체적인 방향도 제시하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가르치는 직분에 임명된 사람이 교회를 섬기는 학교를 설립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칼빈은 목사로 임직된 후에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1537년)을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거기에서 자녀들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칠 것을 규정하였다. 이 규정에서는 특히 부모와 목사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개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칼빈과 파렐은 시의회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고,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하였다.
스트라스부르의 경험(1538-41)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 마르틴 부서는 ‘진정한 경건은 무지에서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스트라스부르 시 당국을 설득하여서 학당(김나지움과 대학을 합한 것)을 세우는 일을 하였다. 부서는 슈투름(Sturm)을 교사로 청빙하였고, ‘지혜와 언변이 있는 경건’(sapiens atque eloquens pietas)을 교훈(校訓)으로 삼고서 1537년에 학당을 세웠다. 먼저 유능한 교사들을 청빙하였고, 장취성(將就性-앞으로 진보하여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을 보내도록 권하였다. 또한 교육을 제대로 시행하려고 학제를 셋으로 나누었다. 6세 이하는 유치원에서 가르쳤고, 6-15세는 김나지움에서, 그리고 16세 이상의 학생은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에서는 교회의 개혁이 좌절되면서 학교의 개혁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것이 꽃을 피운 곳은 교회의 개혁이 온전히 이루어진 제네바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 피난민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였을 뿐 아니라 스트라스부르 학당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경제적으로 궁핍하여서 책을 팔기도 하였지만, 교사로 임명되면서 재정적인 상황이 다소 호전되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학당에서 요한복음,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로마서 등을 강의하였고, 그 결과가 그 책들의 주석으로 빛을 보았다.
중간 시기(1541년의 교회법과 1559년의 학당 설립 때까지)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의 일을 재개하면서 두 가지 교육을 염두에 두었다. 첫째는 요리문답 교육이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가 신앙고백적인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 강요』 초판(1534)을 중심으로 제1요리문답을 작성하였었다(1537). 칼빈은 전에 자기를 추방하였던 제네바 시의회가 자기를 다시 청빙하자, 권징권이 교회에 있음을 인정할 것과 요리문답을 가르치도록 할 것을 청빙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신앙고백적인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교회가 (제네바) 정부로부터 독립하는 것과 요리문답 교육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의 조건을 수용하였고, 칼빈은 돌아온 후에 곧바로 제2요리문답을 작성하였다(1541-42). 칼빈의 개혁은 복음의 강설뿐 아니라 요리문답 설교나 교육을 통하여서 열매를 맺었다.
둘째는 말씀의 사역자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강설할 목사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1541년의 “교회법”에도 잘 표현되었다. 칼빈은 특히 신학 교육과 자녀 교육을 위한 직분으로 ‘박사’를 목사에 이어서 언급하였다. 이 교회법에서는 무지와 야만스러운 일이 많은 도시에서 개혁의 일을 이루려면 박사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 가르칠 학당을 세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밝혔다. 여기에서 교육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말씀의 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에서 일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 두 가지 목적 가운데서 말씀의 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다. 말씀의 사역자를 양성하는 데에 더 마음을 기울였던 것이다.
칼빈은 기존의 학교를 정비하는 것뿐 아니라 학당을 새로 세울 뜻을 가졌지만, 1541-56년까지는 제네바 시의 개혁에 힘을 기울였다. 그 기간에는 성찬 논쟁, 시의회와의 논쟁 등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학교에 대하여서는 1550년에 흩여져 있는 초등학교를 넷으로 줄이고, 시의 관리 아래에 두는 정도로 일을 하였다.
제네바 학당과 제네바 대학
1555년 이후 제네바 시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가자 칼빈은 제네바 학당을 개교하려고 힘을 기울였다. 먼저 1557년에 루터파의 지배 아래에 들어간 스트라스부르를 방문하여 슈투름과 대화를 나누었고 돌아온 후에 본격적으로 제네바 학당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1558년 1월에 위원회를 구성하고, 레망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학교 부지를 구입하였다. 시의회는 재정난을 이유로 학교 부지의 구입과 건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제네바는 많은 피난민이 모여든 곳이고 재정적으로 넉넉한 곳이 아니었다. 그는 추방된 자들의 몰수 재산도 학교를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6개월 동안 시민들을 상대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모금 활동도 하도록 하였다. 과부의 두 렙돈처럼 지극히 적은 액수를 기부하는 경우도 많았고, 칼빈의 저작이나 시편 찬송을 출판한 인쇄업자들은 칼빈의 권유로 상당액을 기부하였다. 시민들은 칼빈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유능한 교수를 확보하는 것이 재정적인 문제보다 더 큰 일이었다. 칼빈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을 교수로 모시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해결책은 가까운 곳에서 나왔다. 베른의 츠빙글리 파 지도자들은 그들의 관할 아래 있는 로잔의 신학부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 결과로 로잔 학당의 학장인 베자와 다른 교수들은 사임하게 되었다. 칼빈은 그 교수들을 청빙하여서 그들을 중심으로 교수회를 구성하였던 것이다(1559년 3월 16일).
베른 사람들은 제네바 아카데미가 실패할 것이라고 하였다. 재정적인 적자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처음부터 제네바 학당은 유럽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등록을 하였고, 내실 있는 교육이 널리 알려지면서 더욱 번성하여 갔다. 1559년에 개교하였는데 칼빈이 소천한 1564년에는 300명의 학생이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미 개혁의 중심에 서 있던 칼빈의 명성이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경건과 학문을 겸전한 교육으로 말미암아서 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칼빈의 사후에는 법학부와 의학부를 두어서 제네바 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제네바 학당의 교육 - 경건과 학문
학장과 교수와 교사의 서약문에서는 교육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좋은 시민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회생활을 위한 ‘학문’을 갖추도록 가르쳤다. 경건과 학문의 관점에서 제네바 학당의 교육을 요약해 보겠다.
1) 경건
학교 설립에 대한 칼빈의 이상은 ‘온전한 사람’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한 군사적 복무이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태도로 사는 사람이 ‘참된 경건’(vera religio)의 사람이고, 온전한 사람인 것이다.
참된 경건을 가르치는 것은 수업 시간표에도 나타났다. 제네바 학당의 하루 일과는 경건회로 시작하고, 점심시간 전에는 한 시간씩 시편을 부르고, 마칠 때에는 강당에 모여서 차례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십계명을 암송하고 교장의 기도로 마치고 돌아갔다. 성경과 요리문답을 읽거나 암송하고 기도와 찬송을 하는 것이 하루 일과에서 정규적으로 반복되었다. 중세 수도원에서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한 것처럼, 제네바 학당에서도 규칙적으로 은혜의 수단을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수업의 내용과 태도에서도 경건함이 나타나도록 하였다. 교육의 목표는 주님을 섬기는 온전한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 과목에서 어떻게 주님을 섬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가르쳤다. 학칙을 보면, ‘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구절의 전후를 보면, 교실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학생들이 자기를 주장하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 나온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겸손한 태도를 갖추도록 가르칠 것’을 서약하였고, 수업 시간에도 이러한 태도가 나타나도록 하였다. 교실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품성을 함양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학교의 조직에서도 영적인 면이 나타난다. 학교의 운영은 교사와 교장과 이사회에서 하지만, 어려운 문제는 목사회에 의뢰하였다. 교사들도 엄격히 교회의 치리 아래 있도록 하였고, 목사가 추천하고 신앙고백에 서명한 사람만이 교사로 임명되었다. 경건함의 덕목이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데에서도 나타나게 하였던 것이다.
2) 학문
제네바 학당은 초중등 교육 기관(schola privata)과 고등 교육 기관(schola publica)으로 나뉜다. 초중등 교육 기관은 7년 동안 기초 어학과 인문학을 가르쳤고, 고등 교육 기관은 목사 후보생을 가르쳤다. 제네바 학당은 일차적으로는 목회자 훈련 기관이고 기초가 되는 인문학을 강조하였다. 제네바 학당이 개교하던 날에 낭독한 “학칙”을 보면 얼마나 철저히 가르쳤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김나지움은 7학년으로 구성되는데 처음 두 학년에서는 불어와 라틴어의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5학년에서는 수사학과 라틴어 작문을 배우고 4학년은 구문론을 배우고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3학년과 2학년에서는 그리스와 라틴 저자들을 읽고 1학년에서는 다른 저자들을 읽으면서 수사학을 익히고 글을 쓰는 것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성의 자율성을 믿는 인문주의자들과는 다르지만, 교양 과목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사회에서 봉사하는 도구로 사용하라고 그러한 과목도 강조해서 가르쳤다.
둘째, 가르칠 때에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고대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에도 정확히 이해하도록 하였고, 이해하지 않고 비판하려는 자세는 엄격히 금하였다. 또한 궤변이나 호기심에서 논쟁하는 것을 금하고 설득력이 있게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능력을 함양하도록 하였다. 인문주의자들과 같은 교재를 사용하지만 그들을 넘어설 수 있도록 겸손한 태도와 뛰어난 실력을 갖추도록 하였다.
끝으로, ‘학문’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연마한 원동력이 “경건”에서 나오도록 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겸손하게 학문 활동을 한 결과, 그들은 다른 사람의 글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고 또한 자기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학교생활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에 봉사하려고 공부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의 멸망과 그들의 국가의 쇠망에 무의식적으로라도 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베자가 개교 강연에서 밝힌 것처럼, “언젠가 여러분을 이곳에 부르신 지존자 그분께 직고(直告)하게 될 것”을 의식하면서 경건하게 학문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교회의 개혁과 교육의 개혁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 학당의 교육에 대하여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그 학당은 칼빈의 개혁의 열매이자 다음 단계를 위한 도약이 되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개혁할 때에 교회뿐 아니라 학교도 개혁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제도’를 개혁하였다는 말이 아니고 ‘사람’을 말씀과 성신으로 개혁하되, 전인(全人)을 개혁하였다는 말이다.
제네바 학당의 교육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육’을 목표로 삼고, 그 안에서 성경과 일반 학문에 대한 것을 모두 통합하여서 가르쳤다. 또한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을 온전하게 훈육하고 그러한 사람으로 형성해 가는 곳이었다. 달리 말하면, 전인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훈련하는 영적군사 학교였다.
참된 경건이라는 이 목표가 칼빈의 학교를 온전히 지배하여서 그 학교는 그저 ‘지적으로 가르치는 기관’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양육하는 교육 기관’(Erziehungsanstalt)이 되었다. 학생들이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고르게 형성되도록 양육하였다. 특히 종으로서, 직분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어진 일을 감당할 만한 실력을 갖추도록 가르쳤다. 학교는 학교의 방식, 곧 가르치는 방식으로 그 일을 수행하였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최고의 목표에서 잠시라도 눈을 떼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전인을 양육한다’는 생각으로 경건과 학문을 통합하여서 가르쳤고, 경건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학문을 연마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목재는 화살로 마광(磨光-갈아서 빛이 나게 함)되어 갔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수행한다는 명백한 의식을 가지고 제네바 학당에서 가르쳤을 때에 제네바에서 이루어진 개혁이 이 학당을 통하여서 유럽의 각 곳에 전파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이 정신을 배워서 자기 나라에서 교회를 개혁하는 일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교회의 개혁’이 온전히 이루어진 제네바에서 ‘교육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또한 좋은 학교를 세움으로써 제네바 교회는 그 시대를 향한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까지 개혁교회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말씀의 본의를 따라 사는 법을 배웠다. 이제 우리 교회는 우리 가정에 허락하신 언약의 자손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가 칼빈의 개혁과 제네바 학당을 통해 믿음의 선배들이 힘쓴 그 일을 본받아 오늘날 우리도 이 시대에 충성스럽게 그 일들을 감당해 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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