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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성화 사역에 대한 청교도적 이해
성령의 성화 사역에 대한
청교도적 이해
Puritan Understanding
of the Sanctifying Works of Holy Spirit
배 본철
1. 서론
21세기를 맞이하는 현대 기독교계는 저급한 교회의 윤리적 수준과 침체된 교회의 영성을 치유해야 할 성령론의 새로운 강조점을 찾아 모색해야 할 때를 만났다. 성령론의 여러 주제 중에서도 특히 성령의 성화 사역에 대한 논제는 교회의 사회적 사명의 자각과 함께 최근 교계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성령의 성화 사역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19세기 미국의 근대 복음주의 성결론으로부터 받은 영향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근대 복음주의 성결론의 출발을 18세기 웨슬리의 성결론에서부터 찾으려고 하는 일반적인 시각은 이 논제에 대한 만족스런 이해를 위해서 무언가 재고의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이같은 경향성은 신학자들이 주로 칼빈주의는 중생론 중심으로, 그리고 웨슬리신학은 성결론 중심으로 그 초점을 맞추어 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렇게 고착된 시각을 갖고 성결론의 역사를 다룰 때 칼빈주의 계통에서 다루었던 성결론의 핵심들은 필연적으로 간과되어질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볼 때 17세기 청교도들의 성결론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들의 영향이 웨슬리에게 끼친 중요한 감화에도 불구하고, 성령론 또는 성결론의 전개에서 별로 부각되지 않고 있는 사실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청교도들의 성화 사상이 지닌 중요한 의미를 간과한 채 현재 한국교회의 성령론의 약점을 치유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를 정립하려 하는 것은 큰 무리가 있는 일이라고 본다. 성령 사역에 있어서 특별히 양심의 기능, 성령의 증거, 그리고 이중적 확신에 대한 교리 등은 교회의 신학적 유산에 가장 값비싼 기여를 이룬 청교도들의 업적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이같은 관점에서, 17세기 청교도들의 성화 사상에 대한 필자의 연구가 특히 갈등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윤리 문제의 해결과 영성운동의 바람직한 전개를 위해 하나의 작은 보탬이 되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2. 성령의 증거
1) 성령과 인간 양심의 증거
청교도들은 실제로 양심에 대하여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그들이 양심이란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하시는 지적(知的) 기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치 평가에 있어 양심의 조명과 교훈과 정화를 받아 영혼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보다 인간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양심을 향한 해설자들이었다. William Ames는 양심이란 “하나님의 판단하심에 따른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a man's judgement of himself, according to the judgement of God of him)이라고 양심에 대한 정의를 하였다. 양심의 작용은 하나의 실제적 삼단논법(practical syllogism)의 형태로 논리적 논의의 과정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판단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의 양심은 이 사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 나의 양심이 이를 역시 알려준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양심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기 위한 반향판으로서, 인간 안에 두신 기능,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비취는 도덕과 영적 진리의 빛을 받아 우리의 행위와 욕망과 목표와 선택들에 집중시켜 반영하는 거울로 보는 청교도의 양심 개념을 충분히 정당화해준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신학이 양심을 일깨우지 않고 심령을 부드럽게 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그것은 양심과 심령을 모두 완악하게 할 뿐이다. 만일 우리의 신학이 믿음의 헌신을 조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신(不信)의 이탈을 강화한다. 만일 신학이 겸손을 고무하는 데 실패한다면 필연적으로 오만을 조장한다.
성령의 역할은 중생하지 않은 자들을 은혜의 상태로 이끌어 내는데 있어 동반자의 기능이 가장 많이 강조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역사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을 때 그의 양심은 악한 상태와 잠든 상태 사이에서 마치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은혜의 첫 번째 사역은 그의 양심을 일깨워 그에게 강제로 하나님의 명령들을 직면하게 하여 그의 범죄, 무력, 패역, 부정, 소외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깨닫게 한다.
칭의(稱義) 교리는 인간 양심에 대한 실제적 지시이다. 신앙을 저버린 상태에 마땅히 내려질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심을 하나님께 적용시키고 그 영향력으로 복음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 칭의의 목적이다.
양심은 하나님 자신의 영(靈)과 함께 연합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길로 우리를 지도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성령께서 증거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의 증거란 단지 인간 자신의 영의 증거 또는 간증을 확증하고 강화하고 분발시키고 풍성하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성령께서도 증거하시는 것인데, 더 이상 간접적으로 하시지 않고 즉각적이고도 직관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2) 성령과 성경의 증거
청교도들은 교회의 증거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진정한 근거라는 로만 캐톨릭의 잘못된 명제에 반대하여, 믿음의 진정한 근거는 성경의 증거라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성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 속에서는 이 경건이 찾아질 수 없는 것이고, 역시 교회 안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떠한 제도에도 정결함과 정통성을 준 적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모든 창조 드라마의 모든 것이 인간들에게는 온전히 이해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죄인들이 신령한 구주로 받아들이고 또 인간이 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역이 성령이 하시는 사역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라고 보았다. 그래서 성령에 의해 그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신령한 구주이심을 증거 받는 모든 사람은 사실상 정경의 ‘신적 기원’에 대한 분명한 증거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었다.
모든 성경의 직접적인 저자이신 성령은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라는 이중적 효력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신령한 믿음에 역사하신다. 성령의 내적 증거는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는 성령의 내적 역사’이며, 성령의 외적 증거는 ‘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해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에 의해 증거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외적 역사’이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경을 개개인의 의식에 침투하게 하여 각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이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의식하게 한다.
3) 구원의 확신
청교도들은 참으로 중생한 자들에게는 어떤 싸인이 주어진다고 믿었다. 죄로부터 은혜로 나아갈 때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이를 알 수 있는 것이고, 남들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증거들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우선 자기가 은혜 가운데 있는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고, 외부적으로는 이에 따른 도덕적 삶을 열매 맺게 되어야 한다.
그들은 참된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가장 단순한 열쇠는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에 감정적인 체험의 필요보다는 더욱 성경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되었다.
청교도들은 이성에서 오는 확신과 믿음에서 오는 확신 사이를 구분했다. 그들은 이성적인 확신이 성경을 단지 역사적인 태도로 대하고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역사적 신념’이라고 표현하면서, 이같은 신념을 통해서는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으며, 이는 타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직 자기 중심의 발로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연적 이성은 그 자체가 부패해 있기 때문에, 은혜가 주는 것처럼 그렇게 높은 단계에 인간을 이르게끔 할 수 없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한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게 해주며, 은혜는 불가능한 것을 믿을 수 있게끔 해준다.
믿음은 영적 조명(illumination)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은 마음을 밝혀 신령한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시는 그 일들의 객관적 진실에 대해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신다. 이렇게 영적 실재들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감각에 의해 획득하는 물질들에 대한 지식처럼 나름대로의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지식은 감각 인식이 주는 바와 유사한 직접적인 확신이라는 특성을 함께 가져온다.
Goodwin은 말하기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성령께서는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 첫째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지각(요일 5:20) 즉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주신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령 자신께서 이 새로운 지각 위에 빛으로 오심으로 영적인 시야를 부여하신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이 영적 지식은 사실상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다. 이 영적 지식이 유혹들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는 수도 있으나, 그러나 진정한 영적 지식은 변함없는 구원의 확신과 함께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3. 성화의 과정
1) 중생과 내주하는 죄성
청교도 설교자들이 가장 자주 사용한 설교 주제는 죄에 대한 책망이었다. 청교도들의 영성(靈性)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개인적인 죄와 결함에 대한 강한 의식과 영적 자기 반성의 실천이었다. 그러므로 종종 겸손과 자기 비하(卑下)는 참된 영성의 표시로 인정되었으며, 설교자들은 성도들에게 실제로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증오하라’고 외쳤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내적으로 자신을 더욱 싫어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영혼의 강팍함(deadness of heart)은 청교도인들에게 지독한 죄로 간주되었다. 어떤 죄보다도 영혼의 강팍함과 냉냉함과 공허함은 더 애통할 만한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개신교, 특히 칼빈주의 계열에서 목사들이 인간의 육성(肉性)에 대한 고발을 한 것은 중세 금욕주의적인 발상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은 청교도사상의 대전제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오염되지 않도록 보존하신 것이다. 타락이 비록 온 피조계에 미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의 일일 뿐이다.
중생은 인간의 심령을 전투장으로 만든다. 이 전투에서 육체(옛사람)은 영(새사람)의 주권을 뺏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운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와의 충돌 없이 영을 만족시킬 수 없다(갈 5:17; 롬 7:23). 그리스도인이 회개에 의해 정식으로 스스로를 죄로부터 분리시킨 후, 그 안의 죄성은 마치 목숨을 내놓고 덤비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이 죄를 스스로의 능력과 특성들, 곡 지혜와 술책과 교활함과 힘을 가진 한 인물 곧 ‘옛사람’에 비유했다.
청교도사상에 있어서의 성결 교리는 전적으로 개혁주의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즉 성화는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주어지는데, 성령께서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화의 길을 추구해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청교도의 성결론은 후기 완전주의(later perfectionism)와는 매우 다른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로마서 7장의 경험을 로마서 8장의 신실한 신자들의 상태와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신자는 은혜를 통해 로마서 8장의 구원의 확신을 지니면서 또한 동시에 자신의 죄성과의 지속되는 싸움의 과정을 지나게 된다는 것이다.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로 갱신되고 나서는 그 의지가 감정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서 청교도 목사들이 계속적으로 강조하던 한 문제가 있는데, 이는 자유의지 자체가 거듭난 이성을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이같은 이론을 따르게 된다면 중생할 때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내적으로 새로워질 필요는 없다고 보게 될 것이요, 대신 인간 이해의 기능에 빛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성령의 사역을 통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시는데, 이때 인간은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죄의 길을 버리게끔 양심을 각성시키신다. 거듭나지 못한 자의 양심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거듭난 자는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각성된 양심이 자유의지를 선으로 향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중생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행위와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행위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나타난다. 참으로 중생한 자들에게는 어떤 믿음의 열매 또는 증거가 나타나는데, 이는 중생한 자들의 영혼 속에 지속되는 참된 회개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그리고 온전한 사랑 가운데 나아가기를 열망하는 마음 등이다.
도덕이라고 하는 문제는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나 중생 이후의 부차적인 이슈였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청교도들의 행위는 그들의 환경이나 경제적 관심에 의해서 크게 좌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 영혼의 상태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다. 윤리는 믿음을 준비케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일시적인 양상이었다.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될 때, ‘성화는 칭의에서 흘러나온다; 의롭다함 받을 때 우리는 성화된다’. 이것은 중생이 없다면 덕이나 도덕성 따위는 가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만일 누군가가 은혜를 받았을 때, 그는 결과적으로 선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고 본다. 칭의의 순간에 신자는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어지고, 성화를 통해 그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진다. 죄와 도덕성의 깊은 골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메워진다.
앤 허친슨(Anne Hutchinson)은 하나님의 편재성과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원리를 가지고 극단적인 이론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녀가 생각하기를, 인간은 전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무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셔서 그의 인도와 능력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렇다면 이후 인간의 모든 노력과 행위는 부질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인간의 행위는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청교도 용어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결론은 곧 중생한 자에게 아무런 성화의 증거도 없다는 말로 통하게 되기 때문에, 이런 그녀의 신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2) 성결론의 발전 - 은혜계약
청교도들은 성결론에 있어서 그들 내부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난 두 그룹을 상대해야만 했다. 하나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이고 또 하나는 도덕률폐기론(Antinominianism)이었다. 이 두 사상 그룹은 원래 정통 칼빈주의에서 퍼져 나와 결국에는 칼빈주의에 대한 반대의 입장으로 결론을 지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완전을 추구하는 이상론에 반대하여,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성화될 수 있는 성도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도덕률폐기론자들에 대항하여,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 확신이란 또한 의심할 수도 있고 또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것임을 역시 강조하였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과 함께 또한 계명을 온전히 지속적으로 지키기에는 부족함을 동시에 말해야 했다. 그들은 어떻게 선택된 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지, 그러나 동시에 연합된 자들이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의 육체로 되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구별해서 말해야 했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을 너무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분으로 보며, 인간이 생각하는 옳음과 정의의 관념을 그대로 수용하는 분으로 만들었다. 도덕률폐기론은 하나님을 생명 있고, 무소부재하며, 신비적으로 인간 속에 내주하며, 적어도 선택된 자들을 하나님 자신과 연합시키는 분으로 묘사했다.
만일 은혜계약의 교리가 이 두 가지 사상으로부터 오는 지적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려면, 최소한 전통적 신학의 체계 이상의 무언가를 수립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은혜계약의 교리는 도덕적 복종과 인간 구원의 확신의 두 가지 영역에 대한 공통의 기반을 제시하기 위한 17세기 청교도들의 노력의 결실로서 다가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자 마자,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도덕법을 특수한 방식으로 아담의 영혼 속에 심으셨는데, 이것을 첫째 계약 즉 행위계약(Covenant of Works)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아담은 이를 지키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두 번째의 계약, 즉 은혜계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셨다. 그러나 이때의 조건은 행위가 아닌 믿음이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도덕법을 성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하나님 스스로가 그 짐을 지신 것이다.
이 새 계약은 첫째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다; 창세기 17장은 계약론의 중요한 장이요, 신명기는 ‘계약의 책’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의 계약의 조건은 믿음이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역시 적용되는 것으로서, 아브라함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도록 조건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으며, 그 분이야 말로 진정한 새로운 계약이시라는 점을 믿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은혜계약은 합리적으로도 납득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째서 성도가 불완전하게 성화되어지며(imperfectly sanctified),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지를 합리적으로 말해준다. 성도는 대단히 불완전하게 성화되어질 수 있으나 그러나 그의 영혼에 확증이 있는 한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이 계약에서 벗어난다면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잃어버리게 된다.
이처럼 성결(sanctification)은 칭의(justification)의 아주 명백한 증거로 되어진다. 사죄(forgiveness)와 거룩(holiness)이 둘 다 은혜계약이 준 선물이지만, 인간의 의지는 사죄의 선물을 받아들인 후에 곧장 거룩함의 은총으로 자신을 연관시켜가기에, 성결은 하나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또한 신자 자신의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도덕률폐기론과 알미니안주의가 잘못된 점을 발견하기란 매우 쉽게 되었다; 도덕률폐기론은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것을 기대했고, 알미니안주의는 모든 것에 인간의 승낙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계약 신학은 은혜와 인간의 승낙을 모두 품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모든 의무를 함께 수용하며, 죄를 지음에도 불구한 확신과 확신에도 불구한 도덕성을(assurance in spite of sin and morality in spite of assurance) 모두 나타낸다.
그러므로 여기에 경건의 근본적 요소를 보존하는 숙련된 논리에 의한 칼빈주의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이 있었다. 절대적 주권의 하나님, 인간의 타락, 구속의 한량없는 은혜 - 이 모든 것을 간직하면서도 또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상태가 도덕적 방종을 낳지 않게 하는 길, 그 길이 바로 은혜계약의 길이었다.
3)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승리
청교도 신학의 정수는 바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로서 구약과 신약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되었다. 성경은 청교도의 안내서였고 그리스도는 이 안내서의 핵심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가 성도의 생존과 애정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격려되었다. Wakefield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라고 했둣이, 청교도들은 그들의 성례전이나 예배, 또는 설교 등 모든 교회 기능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중시하였다.
신자에게 거하는 죄는 원칙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조만간 죄의 죽음이 된다. 죄는 사실상 중생에 의해 왕좌에서 쫒겨났다. 그리고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인은 죄의 생기의 근원을 말리며 평생을 보내는 것이다(롬 8:13).
“신자 속에 있는 성화의 은총은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려고 하는 열심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신자가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께 의뢰함으로 죄는 약화되고 위축된다. 갈보리에서처럼 죄가 가증스러운 곳은 없다. 그리스도인이 갈보리에서 눈을 떼지 않는 동안 그의 심령 가운데서 정욕은 사라지게 된다.
성서에 나오는 σαρχ는 단순한 몸(bod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죄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성화의 과정은 의식의 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죄에 대한 지속적인 억제(mortification)를 통해서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억제는 죄의 충동에 대한 단순한 억압이나 저지 이상으로서, 죄의 충동을 완전히 죽이는 것처럼 점차적으로 박멸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사상에 있어서의 성화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성화의 적극적인 면은 활기를 주는 것 즉 새사람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것이며, 소극적인 면은 억제하는 것 즉 옛사람을 약화시키고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는 점차적으로 우리의 평생에 걸쳐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4) 충만한 확신
Goodwin은 구원에 대한 이중의 확신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방법은 대화식이다. 사람은 연기가 있기 때문에 불이 있다고 추단하는 것처럼, 중생의 표적들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추단한다. 다른 한 가지 방식은 직관식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체가 부분보다 더 크다고 아는 것과 같은 지식이다. 사람의 영혼에 임하여 그 영혼을 압도하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이시고 그가 하나남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그를 사랑하셨다고 확신을 주는 빛이 있다.”
이 초자연적 확신이 나타날 때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변화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이 확신은 새로운 회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확신은 사람을 과거의 그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그 과정은 회심에 의해 그가 회심하기 전의 사람과 달라진 것과 거의 똑같이 인간의 모든 장점들이 새롭게 수정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John Wesley의 올더스게이트 체험(Aldersgate Experience)에 대한 심리적 이해의 배경은 직접적으로 청교도들의 충만한 확신의 교리로부터 이어진 것임을 확증할 수 있다. 웨슬리의 이 체험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통하여 주어졌고, “이보다 3일 전에 그의 동생 Charles Wesley가 회심하게 될 때에는 역시 루터가 쓴 갈라디아서 주석을 통하여 되어졌는데, 이 갈라디아서 주석이 John Bunyan의 회심의 도구이기도 했다”는 점도 역시 Luther의 구원의 확신의 교리에 입각한 이 체험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충만한 확신은 믿음에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보았다. “사실상 이 종류의 확신은 믿음이 최소한의 구원의 실행 범위를 훨씬 넘어 최고의 발전에 이르렀을 때에만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한 국면이다.” 확신이 생겨나면 영적 이해력이 자극받아 그로 인해 영혼의 눈이 강해져서 진리를 더 자세하게 파악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모든 진리를 더 명확하게 알게 된다. 확신은 사람이 기도할 때 담대하고 능력을 갖게 한다.
청교도들이 이 확신이 직접적인 증거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말씀이 없는 증거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확신은 약속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확신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은혜를 증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약속, 어떤 절대적인 약속을 심령에 깊이 명심시키신다. 그러므로 이는 광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에 적용시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확신을 갖기 전에도 거룩하였으나 확신은 그를 더욱 거룩하게 한다. “참된 모든 확신은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 성령의 영광스런 증거보다 마음을 거룩에 대한 사랑과 연구와 실현과 성장 가운데 더 많이 거하게 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확신은 뻔뻔함과 게으름을 조장하기는 커녕 사실상 가장 강력하게 죄를 금하는 동기이다. 왜냐하면 이 확신의 소유자는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께서 확신을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위험을 알고 있고 그것보다 그가 더 피하고 싶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확신의 가장 중요한 열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양심을 통한 간접적인 증거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증거를 알게 되기까지 확신의 온전한 풍성함을 향유하지 못한다. 따라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극하여 하나님께 확신을 구해야 한다.
4. 하나님과의 교제
1)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과의 교제 사상이 청교도사상의 핵심이라는 점을 간파하는 일은 청교도들이 관심을 두었던 다른 주제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요긴한 일이 된다.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에 “인간의 최고 목적은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줄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생각에 있어서 인간 실존의 온전한 목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은혜 언약의 직접적인 목적은 인간들을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Owen은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하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도움에 의해서 되어진다; 이는 가장 크고 근본적인 복음의 원리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곧 신약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교제(fellowship, communion)의 의미라고 보면서, 이 교제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의 결과이며, 또한 하나님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피에 의해 준비된 평화의 언약 가운데 동행하면서 가장 거룩하고 신령한 방식으로 주고 받는 상호 전달이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주도권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는 관계이다. 좁은 의미에 있어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전달하신다는 보다 넓고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 교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청교도에게 있어 경건은 본질적으로 양심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알려진 복음 진리에 대한 충성스럽고도 신중한 응답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선한 양심을 소유하고 유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고 귀를 기울이며,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구하며, 자기 경계와 자기 비판에 민활하게 부단히 활동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을 경계해야 하며, 마음을 감시하고, 훈련된 묵상의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은혜와 거룩한 삶의 진정한 성장의 온상인 신령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성화란 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그들의 본성을 죄의 오염과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정화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함으로 그들이 은혜의 신령하고 습관적인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바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화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선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명해진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도 이 의무를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듣고 읽고 묵상하고 경계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 그는 ‘완전한 순종’ 곧 모든 일에 언제나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고무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결의와 활력을 가지고 이 일을 끈기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는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모든 일을 기도로 의존하는 심령 가운데 행해야 한다.
청교도들은 모든 신학의 주제를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연관시켰다. 그 이유는 예배의 제일 목적이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예배의 이차적 목적은 예배자를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햇빛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 말씀하시는 하나님 - 성경과 설교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중심을 이루며, 교제의 수단으로서는 성경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청교도의 하나님과의 교제 개념은 중세 신비주의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중세 신비주의는 프라토적 신비주의와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정화(purification), 관상(contempla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일(union)의 세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종류의 전통적 신비주의(classical mysticism)를 청교도들은 매우 염려하였다.
그런가 하면 ‘내적 빛’(inner light)에 호소한 퀘이커파나 도덕률폐기론(Antinominianism) 노선의 앤 허친슨(Anne Hutchinson)과 같은 영적 신비주의(Spirit mysticism)와의 충돌 속에서, 청교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수단으로서 신자들의 주관적 영적 체험에 호소하기 보다는 객관적인 계시로서의 성경에 중점을 두었다. 이처럼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장 중요한 객관적 수단으로 강조함을 통해 열광주의를 극복하였다.
청교도들의 설교에는 종종 기록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들은 성경 그 자체만으로도 신자의 삶에 있어서의 모든 요구가 충족된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이런 점에서 내적 계시를 말하는 퀘이커교도들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계시를 주신 것은 모든 신적 계시들의 직접적인 장본인이신 성령의 역사였다. 성령의 영감(靈感)에 대해서,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당대의 표준적인 개혁주의 가르침이었다. 영감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구두로 그리고 기록으로 주어져 받아 전달되는 성령의 고취(inbreathing)로 정의한다. 이 과정 동안에 영감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비독창적이라는 의미에 있어 수동적이다. 비록 심리학적 의미에 있어서 그들의 정신은 능동적이지만, 그들은 성령에 의해 작용되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있는 것이다(벧후 1:21).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은 내용적이며 축어적이다. 즉 내용 뿐만 아니라 단어들도 직접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즉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계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적 기원’을 언급할 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성경이 쓰여지게 하실 때 그 내용을 ‘말씀하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다’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은 모든 세대에 걸쳐 그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성경은 구원의 길임과 동시에 일상생활의 진정한 인도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생활의 규범과 모범이다. 따라서 모든 청교도인들은 정기적인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에 전념하라는 권면을 받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 그 길은 우리의 양심에 성경의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에게 완전히 계시된다. 이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계시 그 자체였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믿음과 생활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모든 시대의 교회에 분명한 지시를 주시기 위해, 인간 대리자들을 통해 성령께서 기록하신 하나님 자신의 구속의 활동과 계획에 대한 신령한 간증이었다.
청교도들은 그들 신앙에 있어서 설교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는 “참된 설교야 말로 하나님 말씀의 주해(exposition)이다. 이는 단순한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리의 주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기 설교자들은 설교에 있어서 거룩한 맹렬함(holy violence)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 설교자로 하여금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문을 참고로 읽어보는 것조차 금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최소한 설교자는 설교에 앞서서 자기 안의 ‘내적인 감정’(inward affection)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과는 비교가 되는 점으로서, 청교도들은 설교할 때 온통 경건적인 용어들을 사용했으며, 종종 설교 중에 다른 일반 학문이나 체계에 대한 관심 따위를 조롱하기 조차 했다. 또한 제 아무리 신학적으로 훈련되었다고 해도 회심의 명확한 체험이 없는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목사 후보자는 목사 안수 받기에 앞서 설교할 때 자기의 영혼이 청중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설교는 곧 하나님 말씀의 주해이기 때문에 신자의 삶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음성은 성경에 의해서 기록되어졌고, 그 성경은 강단으로부터 외쳐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역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기 때문이다.
5. 결론
청교도들은 중생이 언제나 인간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체험으로 다가온다고 믿었다. 즉 자기가 중생했는지 안 했는지를 깨닫고 또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결론은 은혜의 실존을 언제나 외부적 현상에 의해 구분지을 수 있다고 본 Augustine의 것을 뛰어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로만 캐톨릭을 향한 가장 힘있는 무기였던 구원의 확신의 교리였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 심령의 사악성과 기만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겸손과 자기 부인(self-denial)의 변치 않는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고자 했고, 죄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영적으로 늘 깨어서 정규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옛사람의 죽음을 묵상하며 유혹과 정욕에 대한 억제에 힘썼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성결론은 나중에 도덕주의로의 진보를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미국에서의 청교도 제 2세대들의 교회 회원 신분을 위한 반계약(Half-Way Covenant)은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에 대한 의존보다는 일종의 ‘방편들’(예배 출석, 성경 읽기, 기도 등)이 참 신앙의 자리를 대치하게 되는 것을 용인해 준 하나의 실례였다. 결국 이것은 냉정하고 비감정적인 종교로 이끌었고, 그때에 갈급한 교회는 Jonathan Edwards의 대부흥과 같은 반동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추구하면서, 이를 위하여 여러 가지 은혜의 수단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특히 그들이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위해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것은 현대 성령운동의 건전한 성숙을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성령과의 동행하는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 구체적인 영성을 규정해야 하며, 구체적인 복음적 영성의 깊이는 그 가장 요긴한 수단으로서 언제나 성경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청교도 성결론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신자들의 미숙한 성화의 상태, 즉 부정한 마음과 제어되지 않은 감정과 불안정한 의지를 지닌 신앙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무분별한 영성운동에 매료되어 종교혼합주의와 비이성적이고 감상적인 낭만주의에 강요 당하고 있는 이때에 과연 바람직한 성령운동의 향방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좋은 대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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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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