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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2장에 나타난 구속사에 의해 산상설교의 팔복에서 선언 되고 있는 복에 대한 이해
# 이사야 52장에 나타난 언약적 구속사에 의해 산상설교의 팔복에서 선언 되고 있는 ‘복’에 대한 이해
이천우 목사(부천개혁교회)
1. 시작하는 말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에서 다룬다. 마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라고 기록함으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의 나심에까지 이른다.
마태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에서 다루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 계보에서 원천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계시해 주신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 약속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그리고 다윗과 맺은 언약에 있는 ‘약속의 씨’를 따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해 온 중심 사상에 있는 메시야에 의한 구원 약속을 따르며, 그 성취 개념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나심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1장 1절을 읽는 것은 “아브라함과(맺은 언약의 자손이며) 다윗(과 맺은 언약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라고 하시는 것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임을 의식하고서 이를 염두에 두고 읽도록 해야 한다.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에까지 예수께서 자신이 함께 하는 제자들에게 산상설교를 말씀하시는 것에서 가장 먼저 8복을 언급하심은 언약에서 약속되고 있는 메시야의 실현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들 가운데 오신‘임마누엘’사건이 가져다주는‘복’에 대하여 선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복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를 통해 이루게 하신 이스라엘이 그들의 삶의 근거가 되는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이거하고 또한 바벨론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거하며 마침내 그리스도에까지 이른다는 설명을 하는 것에 연결되어 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 왕조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겪는 바벨론 포로생활과 그로부터의 해방과의 관련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이 문제가 예언되어 다루어지고 있는 구약성경의 선지서 중에서 이사야 52장을 택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따름에 있게 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산상설교에서 선언하신‘복’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2. 이사야 52장 이해
구약성경 이사야서는 66장으로 그 분량이 많다. 이사야서가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성경에 선지서 중에서‘대선지서’로 분류하는 것은‘소선지서’로 구분해 보는 호세아서에서 말라기서의 내용에 비해 그 분량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량이 많다고 해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 방대한 것은 아니다. 모세의 글부터 시작하여 선지자들이 기록해 놓은 구약성경의 모든 글은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해 준다(눅 24:25-27). 선지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영광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통해서 이룰 것을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 받을 것을 알게 해주시는데 있다. 이사야서는 1장에서부터 66장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 본 글에서 비록 이사야 52장에 한정하고 있을지라도, 이것은 이사야서 전체 문맥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말씀하게 하신 중심 사상을 따른다.
이사야 52장은 종결 부분인 13-15절에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 시리즈(1-4)’중에서 마지막인‘제4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52:13-53:12)의 ‘서막’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이것은 51장 9-11절에서 시작하여 52장 11-12절에서 끝나는 단원과 이것과 연계되는 새로운 단원이 시작되는 52장 13절-53장에 의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사야 52장은 ‘제4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전개되는 배경이 되는 역할과 그 시작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제4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무엇 때문에 불려지게 되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52장은 (1) 포로 되었던 딸 시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시온아, 깨어 일어나라’(1-6절) (2) 시온의 왕으로 입성하신 하나님의 통치 :‘네 하나님이 통치하시다’(7-10절) (3) 바벨론에 포로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시온의 백성에게 거듭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 :‘너희는 떠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호위하신다’(11-12절) (4) 여호와의 종의 등장과 사역 :‘지극히 존귀하게 될 나의 종을 보라’(13-15절)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포로 되었던 딸 시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 ‘시온아, 깨어 일어나라’(1-6절)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에 거류하였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1절에서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는 51장 9절에서 여호와의 팔을 향하여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명령을 사용하면서 이사야는 이제 시온에게 탄식과 술취함의 무감각으로부터 깨어나라고 명령을 한다.1) 시온(Zion)은 예루살렘(Jerusalem)의 한 산으로서 수도(首都)인 예루살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시온에게 ‘깰지어다’라고 명령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깨어 일어나라’(Awake)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는 것은 11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바벨론에서 즉시 떠나 이스라엘이 있어야 할 시온<예루살렘>을 향하여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바벨론은 할례 받지 않은 부정한 자들의 억압이 있는 곳이다. 할례 받은 정결한 자들인 이스라엘이 이처럼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것은 수치스럽다. 하나님은 이 수치에서 이스라엘을 벗어나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인 시온으로 떠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는 바벨론에게서 억압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머무르며 앉아 있었던 티끌2)을 툴툴 털어버리고 일어나 그들의 목에 매인 줄(멍에, 굴레)를 풀고 이스라엘에 약속으로 주신 다윗 왕조의 보좌3)에 다시 앉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왕과 맺은 언약에 의해 그의 왕조와 그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이끌어내어 다윗 성 예루살렘에 그의 백성들을 있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결코 바벨론에 언제까지나 억압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을 나타내시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사상이 3-6절에 깔려 있는 ‘속량’ 이다. 그것은 “너희는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는, 이스라엘이 값없이 팔렸으므로 또한 그들은 돈 없이 속량될 것이라는, 즉 종<노예>으로 사는 값이 지불되는 것에 의해서 속량되지 않을 것이라는, 값으로 속량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팔려 나간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종<노예>으로 팔려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팔리는 것에서 치러져야 할 몸 값을 받지 않았다. 아무런 대가의 지불 없이, 곧 값없이 팔려간 것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에 어떠한 값도 치를 이유가 없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하나님의 것이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주로서의 권능을 행사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때 은과 금, 또는 그와 같이 값으로 매겨질 수 있는 어떠한 재물로 속량하는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옛적에 행하신 일을 들어서 확인케 하신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가 그곳에 종 되어 있던 때와 그리고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쳐 포로로 사로잡아 갔었을 때를 들어서, 이제 바벨론이 똑같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노예로 끌고 가면서도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았다. 그런 바벨론은 오히려 기고만장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조롱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무능한 신이라며, 이스라엘이 헛되이 하나님을 섬기므로 망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말이죠. 그러한 신을 무엇 때문에 섬기느냐는 하나님을 멸시하여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러한 바벨론 앞에서 하나님은 당당하게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7절). 여기서‘그 날에’는‘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고 하는 백성들이 알 때,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시는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그 날을 말한다.4)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해방 받는 그 날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에 있는 권능을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7장, 14장에서 다루시고 있는 ‘임마누엘’로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임재해 계시니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어 수치를 당하는 그들을 값없이 속량할 것 - 값/돈으로 속량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이신 권능을 행사하여 이스라엘이 당한 수치를 보응하심으로 되찾을 것- 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값없이 속량될 것이라는 사상은 신약 시대에서는‘그리스도의 속량’에 의한 구속 개념으로 발전하여 나타난다.
(2) 시온의 왕으로 입성하신 하나님의 통치 :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7-10절)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이사야 52장에서 두 번째 단락인 본문은 전형적인 찬양시의 형식인데,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을 이미 이루시고 시온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아름다운 시로서5), ‘얼마나’, ‘어찌’의 뜻을 지닌 의문사로 시작하여“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앞서의 단락에서 보게 되는 것인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에 따라 이제 본문에서는 전령이 그 놀랍고도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달음에 산을 넘어 달려와 하나님이 구원하심으로 나라가 해방되었고 마침내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너희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라고 복된 희소식을 전함에 따라 예루살렘 성의 파수꾼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을 눈에 선하게 보면서 기쁨의 감격으로 성 안에 있는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 희소식을 들은 온 백성은 환호하여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는 아름다운 광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선지자에 의하여 전해지고 있는 예언으로 앞으로 먼 훗날에 있을 일을 내다보고 전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죄악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겪는 참담함에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먼저 보고 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모든 이방 나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실 것이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나타난 결과 땅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볼 것이다. 이 모두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보고 있는 이스라엘은 자신들 눈앞에서 장엄하게 펼쳐질 하나님의 구원을 깊은 신뢰를 가지고 바라보며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의 기쁜 소식을 접하는 이스라엘이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3) 예루살렘의 구속으로 바벨론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시온의 백성에게 거듭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 : ‘너희는 떠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호위하신다’(11-12절)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바벨론에 포로 될 시온의 백성이지만, 그러나 그 기간은 다니엘서에 예언된 대로 70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하면,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시온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속하심으로 더 이상 바벨론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앞서 그들에게 깨어 일어날 것을 명령하신 것에 이어서 본문에서 거듭하여 명령하신다. “너희는 떠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호위하신다.” 하나님은 시온의 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인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하시며, 이런 그들의 생명을 안전히 보호하여 지키실 것을 그들을 통치할 왕의 호위를 받음에 있다는 것에서 든든히 하신다. 이런 이스라엘은 더 이상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므로 신속히 자신들이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고 떠나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은 바벨론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도망치듯이 앞뒤 살핌이 없이 황급히 나서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러내심으로 당당히 자신들의 주께로 나아가는 것이며, 머뭇거리며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신속히 나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따라 나설 이스라엘은 그들이 티끌로 깔고 앉아 있던 바벨론에 어떤 미련도, 아무리 조그만 미련이라도 가질 필요가 없으며 그곳의 부정한 것을 소유하여 부요하고자 하는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들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성전에서 약탈하고 노략질해 간 여호와의 기구들을 되찾아 이것들이 있어야 할 곳인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메고 올라갈 하나님의 정결에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 정결한 자들의 앞에 가시면서 인도하시며, 또한 뒤에서 지켜 주시니, 이들의 안전이 하나님께 있다. 이런 그들을 힘 있는 나라의 권세와 군대도 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며, 되돌려 놓을 수가 없다. 이들의 진행은 그 앞과 뒤에 주 하나님께서 계신 것으로, 하나님이 나아가시는 앞길에 그 누구도 가로 막아 서 있으며 대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여호와의 종의 등장과 사역 : ‘지극히 존귀하게 될 나의 종을 보라’(13-15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본문에 이르러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52장의 마지막 부분인 결론이면서, 그러나 53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제4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시작되는 서막에 대하여 말한다. 그 첫 마디는‘보라’(Behold)는 뜻인 감탄사다. 이사야는 이 말을 하는 것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이 관심을 갖고 집중하여 바라보게 하는 한 분에 대하여 말하여 나간다. 그분은 ‘나의 종’, 곧 ‘여호와의 종’이다.
‘여호와의 종’은 이사야 42장부터 53장에 걸쳐‘여호와의 종의 노래 시리즈(1-4)’에 의해 모두 네 차례 등장한다.6) 이 모두에서‘여호와의 종’으로 불리는‘종’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왔다.7)‘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불리는 네 곳에서의‘여호와의 종’에서‘종’은 모두 같은 한 인물을 지칭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각각에서의 ‘여호와의 종’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구분과 그 이해가 필요하다. : ① ‘제1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불리는 첫 번째에서는 바사왕‘고레스’를 지칭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에 있는‘종’의 이미지는 고레스에게서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행하는 일은 메시야가 행하실 것을 맡아 수행하는 것이어서 여호와의 종이 나타내는 궁극적인 종은 메시야 이다. 따라서 고레스가 행하는 이스라엘의 해방은 궁극적으로는 메시야와 그 구원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 주고 있다.8)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서 말해지고 있는‘종’과 ‘그 종의 사역’에서도 그대로 보게 된다. 따라서‘여호와의 종의 노래’에 나타나고 있는‘종’은 이것이 예언되고 있는 이스라엘이 처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근거리적 관계에 의한 종의 이해에 의하여 바사왕 고레스를 비롯하여 선지자 이사야, 이스라엘로 지칭되나, 여기에 예언되고 있는 메시야 사역은 장차 있을 일인 종말론적 상황에서는 원거리적 관계에 의한 종의 이해에 의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약속된 씨인 메시야가 염두에 두어지고 있다. ② ‘제2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서는‘이사야’와‘이스라엘’을 지칭한다. ③ ‘제3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서는‘이사야’자신이다. ④ 그리고 마지막인‘제4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 이르러서는‘메시야’를 가리킨다. 이 모두를‘나의 종/여호와의 종’이라고 통일되게 부르는 것은‘그 종’이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다 할 메시야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부르심을 받아 그 메시야가 하는 일을 맡아 수행하는 메시야적 인물이기 때문이다.‘여호와의 종의 노래’는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메시야가 수행할 것을 찬양하는 것인데, 그 노래의 마지막인‘제4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 이르러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인 메시야가 말해지기까지 앞서에 나오는‘여호와의 종의 노래(1-3)’에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맡아 수행할 것에서 등장시키고 있는‘메시야적 인물’이다. 메시야적 인물은 그가 메시야가 아니다. 따라서 그가 행하는 일은 메시야가 행하시는 구원 사역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단지 메시야가 등장하여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행하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메시야가 하실 일을 맡아 수행하는‘의로우신 여호와의 도구’로 사용되게 된다. 그래서 메시야가 하는 일을 모토(motto)로 하여서 임무를 맡아 수행 하는 자로서‘메시야적 인물’로 말해진다. 하나님께서는‘제1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서부터‘제3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사용되고 있는‘여호와의 종’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셨다. 그것은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위대한 계획이다. 하나님은 이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으로 올라오게 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를 구현하여 나가실 것에서 모세의 인도에 의해 있게 하신‘출애굽 사건’을 이미지로 하여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어 포로 되어 있는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을 값없이 속량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제2의 출애굽 사건’, 곧 ‘출바벨론’을 바사왕 고레스를 사용하여 행하실 것을 예언하여 말씀하며, 이‘제2의 출애굽 사건’의 실현에 있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온 세계에 주인이심을 선양하여 세계 만민을 주 하나님에게로 나아오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할 것에 있게 할 것에서 마지막 출애굽 사건이 될 ‘제3의 출애굽 사건’, 곧 ‘출세계’를 일으키실 종말론적인 출애굽 사건의 예언에 있어오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제3의 출애굽 사건’으로 불릴 구원 사역을 하나님께서 시킨 대로 할 일을 다 할‘나의 종, 곧 여호와의 종을 보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 종을 높여 사람들에게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종은 사람들이 바라볼만한 모습을 띠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마다 흠칫 놀라며 외면하여 고개를 돌릴 정도로 몰골이 상하였으며, 그런 그의 상한 모습은 너무나도 커 사람들은 그를 도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선지자 이사야는 53장 2-3절에서 그 모습을 표현하여 묘사하기를,“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이런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사람과 조금도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여길 정도로 많이 상한 모습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외면당하고 관심 밖으로 무시되고 있는 그 여호와의 종을 하나님은 온 세계 만민이 그를 보고 감탄하여 입을 쩍 열고 다물지 못하고, 온 세계 나라의 왕들은 그를 보고 아무 소리 못하고 그저 놀라워 할 뿐이지 입을 열지 못함에 있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귀로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일을 겪게 하며 전에는 꿈엔들 조차 생각도 못했던 일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있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전개되는 것이‘제4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서막인 본문 52장 13-15절에 이어서 본론인 이사야 53장이 말해지는 것이다. 이것의 첫 구절인 1절은“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이다. 이것은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대답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놀라움에 감탄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종이 고난 받음을 통해 행할 메시야 사역에 의해서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질 것이지만, 그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은 그 놀라움에 감탄에 있을 뿐이지 정작 그들이 전해들은 사실에 눈과 마음을 돌려 믿음에 있어야 할 것에는 미처 아무런 생각도 갖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의도한다. 우리가 이사야 52장의 결론에 이르고, 또한‘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불리는 서막을 이사야 53장 앞에서 대하면서‘여호와의 종의 노래’의 본론이 되는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알게 되는 것이 이것이다.
3. 마태복음 5장 3-12절에서의‘팔복’중‘사복’에서 이사야 52장과 갖는 상관성을 생각함
마태는 산상설교에서 첫 번째인‘팔복’(마 5:3-12)에서 이것의 대반전<대전환>이 전개됨을 전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예언하신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로 오심으로 있게 된 것으로,“~~이런 너희는 참으로 행복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가 선언되고 있는 것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팔복에는 제목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이 여덟 번의 선언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복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두 번째 복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세 번째 복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네 번째 복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다섯 번째 복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섯 번째 복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일곱 번째 복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덟 번째 복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렇게 여덟 번에 걸쳐서 선언되고 있는 복을 대개는‘팔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팔복’을‘여덟 가지의 복’으로 이해하며 대체적으로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적절치 않다.‘팔복’이란 주제는 전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용어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기에 관용적으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팔복’은 여덟 가지 종류의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는 것에서“너희는 복 있다”라고 선언하며 그 가르침을 주는 복은 여덟 가지의 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는 일관되게 하나의 복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팔복’은 여덟 가지 종류의 복, 곧 복의 여덟 가지 종류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복은 이것이고, 두 번째 복은 또 이런 것이고, 그래서 마지막 여덟 번째 복으로 이것을 주실 것이라는 것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팔복은 오직 하나의 복인 “너희는 복이 있다(또는 너희는 참으로 행복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으로,‘하나님의 나라’를 복으로, 그래서 하나의 복을 선포하고 있으며 이 복이‘너희 것이다’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중에서‘사복’에 한정해서 이것이 이사야 52장과 어떤 상관성에서 연결을 갖고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 뒤따르는 나머지‘사복’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회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나갈 것이다.
팔복 중에서 전반부에 해당하는 처음 네 번에 걸쳐 선언되고 있는 복은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선언하신 복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3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심령’, ‘가난’, ‘복’이 어떤 것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 ① 먼저, ‘복’이란 것은‘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려주셨다. ② 다음으로, 이렇게 천국을 소유한 복에 있는 자를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한 오해가 있다. 첫째는 심령이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이다. 둘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천국을 차지한다는 오해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대개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이해를 하고 있다. 현대어성경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이해에 의한 번역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라고 번역을 하였다. 그러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을 하였다. 이는 영역본인 킹제임스 성경(KJV)이 ‘in spirit'라고 영역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는 KJV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본들도 동일하게‘in spirit'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영이(가난한 자)’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영으로’, ‘영 안에’, ‘영에게’라고도 번역할 수가 있다. 영역본이 이렇게 in spirit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은, 헬라어 성경 원문이 ‘바람’, ‘숨’, ‘영혼’, ‘영’(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성령)을 뜻하는 단어인‘프뉴마’(pneuma)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글역 성경이 사람의 영혼의 개념에서 이해하고서 ‘심령이’, ‘마음이’, ‘영(혼)이’라고 번역을 하였다. 그렇다 보니, 본문의 의도를 완전히 바꿔 놓는 오역(誤譯)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심령’, ‘마음’, ‘영(혼)’의 개념에서의 ‘in spirit’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그래서 ‘in spirit’가 아닌 ‘in Spirit’, 또는 ‘in the Spirit’라고 영역이 되어야 하고, 한글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에게’라고 번역이 되어야 옳다.
따라서 사람의 ‘심령’, ‘마음’, ‘영혼’이 가난한 사람을 복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 하나님의 영에 관한 한 가난한 사람, 하나님의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복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심령으로서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영으로 보아야 하며, 이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여기서 ‘가난’에 사용된 원문적 의미는 “두려워하여 ‘움츠러들다, 쭈그리다, 웅크리다’”의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거지’, ‘빈민’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문자적인 뜻은 이런 것이지만, 이것이 본문에서는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에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재산으로 살 수가 없어 손수 일하여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상대적인 빈곤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빈약한’, ‘부족한’, ‘무력한’ 사람을 뜻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렇게 생각해 보지는 않는가? 왜 “영으로 가난한 자는 복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영으로 부요한<부자> 자는 복 있다”고 해야 옳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그런데“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오직 그 영이 있어야만, 그래서 그 영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오직 그 영이 있어서, 그래서 그 영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복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가 복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난한 자’는 구약성경에서의 ‘가난한 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 16-19절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한 예언의 성취로 있는 일로서“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사야 61장 1-2절에서 하신 예언에 따른 성취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였으며, 이러한 일이 있게 되는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어야 할 사람을 ‘가난한 자’라고 예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가난한 자란 말의 본래적 의미는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할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강자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심리적으로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를 깊이 의존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개역성경에서는 이‘가난한 자’에 대한 관주를 달아놓기를‘비천한 자’라고 하였다.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인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는 거의 대부분 특수 집단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나온다. 시편 34편 6절은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호와의 응답을 받아 구원받은 ‘가난한 사람’에 대해 언급한다. 시편 40편 17절에서는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묘사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억하고 구원해 주도록 요청한다. 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유일한 피난처요 구원자로 찾는 궁핍한 포로이다(시 69:32-33). 그런 까닭에 ‘여호와의 가난한 자’라고 말한다.
이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다음의 한 예로 설명할 수 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에게서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음을 믿게 하시는 것(신 4:39)에서 만나를 내리시며 이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에게서는 다만 여호와이신 하나님으로만 살게 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그러니까 여호와이신 하나님으로만 그들의 생명이 공급되고 그 생명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이 광야의 이스라엘에게서는 ‘유일한 생명’이었다. 이 ‘유일한 생명’이 이스라엘에게서는 영생케 하는 ‘참생명’이다. 이 ‘생명’만이 존재하는, 이것 외에는 그 어떤 아무 것도 가치로 가지고 있지 않는, 그래서 여호와이신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아무 것도 가치로 소유한 것이 없는 그런 참으로 ‘가난한 자’, 곧‘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겪은 그 가난을 다시 한번 겪는다. 그것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 받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유한 자가 누리는 생명의 기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서 은혜로운 이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름으로 해서 그분 안에 있는 참생명인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만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자에 있는 것이다. 이것에서 있은 이적이 예수님은 ‘생명의 떡-살리는 떡’이심을 나타내시는 오병이어의 이적이었다. 그 그리스도의 영이시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재 해 계시며, 오직 그 영으로 살게 하신다. 이렇게 “영으로 가난한 자”인 우리는 “참으로 복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고 하신 선언의 축복에 있다.
(2) 두 번째 선언하신 복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다”(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언하신 팔복의 두 번째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통상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웃는 자는 복 있다”는 것이 사람들이 갖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역설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에서 ‘애통하는’에 해당하는 동사는 흔히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없게 된 참으로 큰 슬픔 속에서 소리를 높여 우는, 곧 통곡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라는 것은 “우는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라고 말씀하신 ‘애통 한다’는 것을 대개의 경우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오해하여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이해를 한다. 그것은 이 ‘애통’을 자신이 잘못을 행한 때문에 하는 것으로, 그래서 자신이 잘못한 그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에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온 이런 저런 악한 죄에 대해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가 복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불러내서 제자 삼은 자들이 어떤 자인가 할 때, 먼저는 “너희는 영으로 가난한 자들이다. 영으로 가난한 너희는 복되다!. 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렇게 ‘영으로 가난한 자’에 있는 복에 있는 제자들인데, 그들이 그러한 복에 있음으로써 그들에게는 ‘애통함’이 있다. 우리는 이 애통함을 알기 위해서 이것의 구약적 배경과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참으로 애통에 있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시게 되는 애통하는 자의 첫 번째가 되신 예수님의 애통하심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의 애통도 이것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라고 하나님께서 예언하게 하시는 말씀을 전한다. 그는 여기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를 위로 하겠다”고 ‘마음이 상한 자’, 곧 ‘슬픈 자’를 언급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나 있어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는 유다 백성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있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약속으로 주신 땅에서 다윗에게 허락한 왕권에 의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에 있는 이스라엘, 곧 야곱의 집의 그 마음을 ‘상한 자, ’애통하는 자‘로 표현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그 기다림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떻게 그 마음이 위로를 얻지 못하는 참으로 ’상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해서, 이사야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므로 긍휼과 탄식이 없어진다”(사 35:10) 라고 예언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어 제2 출애굽 사건을 겪는 것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날이 오면 그들의 ‘상한 마음’은 고침을 받을 것이며, 슬픔과 탄식, 곧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위안을 얻어 씻은 듯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서 그 눈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보내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칠 것을 예언하셨으며, 그 예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분에게 하나님의 영(신)을 부어주심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이 예언하신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의 위로가 되시는 일을 하시는 것에 온전히 성취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애통함을 씻겨주심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겪어야 할 애통에 있었다. 그것은 ‘제4 여호와의 종의 노래’(사 52:13-53:12)에서 보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시는 것에서이다. ‘간고’란 ‘질병’, 또는 ‘슬픔’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가 있다. 그리고 ‘질고’란 ‘고통’이란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고통을 아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슬픔을 겪고 고통을 아는 자가 되시는 것인가?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아시는 것에서이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면서 큰 부르짖음에 있으심으로 시편의 예언에 응하셨다(막 15:34; 참고. 시 22:1). 이 모든 슬픔에서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애통하심은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악한 죄를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어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삼으시는 것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의를 입히실 것이었다(롬 8:3).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주님으로 섬겨 따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며 그 은혜를 구함에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이기에. 그래서 다시는 그 눈에 눈물이 없게 하실 것이기에. 그러한 그들의 눈에는 의로우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는 것으로 가득할 것이기에. 이것이 애통에 있음으로 인해 받는 위로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누리는 복이 이것이다.
(3) 세 번째 선언하신 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5절)
예수님은 팔복에서 세 번째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온유한 자가 복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다와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는 말씀에 이어서 하신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자는 또한 그 마음이 자기를 부인함과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인정함에서 애통함에 있는 것인데 이는 그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성격에서 그 마음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온유함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는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주님으로 섬겨 따르는 자를 온유한 자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온유하다고 하신 것은 왜인가를 보아야 한다. ‘온유한 자’라는 말에 사용된 “온유한”(meek)은 이 외에도 “겸손한”, “온순한”을 뜻한다. 이것은 양처럼 순하다는 것에서인데, 예수님은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에서 그 말하고자 하는 온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시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것 역시 구약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① 온유함의 첫 번째 전형(典型) : 모세 - 예수님이 온유한 자를 말씀하심은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 첫 번째로 구약성경은 온유함의 전형으로 모세를 든다.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미리암과 아론은 그 사실을 비난하면서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하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라고 말하며 비난하였다.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비난을 들으셨다. 그런데 모세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경은 그런 모세를 “이 사람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말하여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는 사실을 나타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이 세 사람에게 회막 - 만남의 장막 - 으로 나오게 하고서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가운데 선지자가 있다면 나 여호와가 환상을 보여 내 뜻을 알리고 꿈속에 나타나 말을 하겠지만, 나의 종 모세에게는 나의 온 집을 맡겼다. 내가 모세하고는 얼굴을 마주하고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다 말해 준다. 심지어 모세는 나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너희가 감히 무서워하지도 않고 함부로 나의 종 모세를 비난하느냐?” 라고 하시며 진노하시고 그들에게서 떠나셨다. 그리고 그 증표로 구름이 장막에서 걷히고 미리암의 몸에 문둥병이 번졌다. 그러자 모세는 크게 두려워하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미리암을 고쳐줄 것을 간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온유함에 아론과 미리암을, 그리고 온 이스라엘을 두고서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자비를 베풀어 가셨다.
② 온유함의 두 번째 전형(典型) : 다윗 - 구약성경에서 온유함의 두 번째 전형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이는 다윗이다. 구약성경에는 온유한 자에 대한 예언을 주시고 있다. 그 예언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시 76:9) 이다. 이러한 예언을 하게 된 배경은 다윗이 이 시를 지은 데서 알게 된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온유한 자’를 ‘행악자’와 대조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다. 하나님은 행악자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더 잘 산다고 할지라도 걱정하지 말고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한다. 그것은 그들은 쉽사리 말라 버리는 들풀과도 같이 사라질 것이며, 곧바로 시들어 버리는 나무와도 같이 죽어갈 것이라고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망할 것인지를 예언하여 알려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길 것을 말씀하며, 하나님은 그러한 그를 대낮의 환한 햇빛처럼 바르고 정직하다는 것을 드러내 주실 것이므로, 그는 행악자들이 못된 짓을 일삼아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는 땅을 차지하고 살 것이지만 행악자는 그 땅에서 쫓겨나고야 말 것이라고 하였다. 다윗이 말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란 행악자들의 횡포로 가진 것 없어 서러움을 당하며 늘 불행 속에 있던 가난한 자들이 안식<평화>을 고대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림으로 마침내 땅을 차지하고 그토록 고대하던 평화를 누리며 기쁨에 가득 차 살 것이란 것이다.
따라서 시편에서의 온유한 자는 단순히 양처럼 순하여 온순하고 겸손하다는 사람의 인격, 인품, 성격을 가진 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악자의 횡포에 의하여 압제를 받으며 착취당하는 불행에 있는 힘없고 나약한 가난한 자들로 그들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분노가 일어나고 불평을 토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신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갚으심이 되어서 자신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을 고대함으로 참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행악자들은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이제 아주 조금만 기다리면 그들은 다 없어져서 그들을 보고자 하여도 그들을 결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있으며 그 약속을 의지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말하여 전해주고 있는가 하면 다윗왕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다윗왕은 자신에게 있는 일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르기까지 사울 왕을 비롯하여서 많은 대적과 원수들에게 쫓겨 가나안 땅을 떠나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나안 땅에 돌아오게 하여 그 땅을 차지하게 하는 복을 누리게 하실 것인데, 이는 그와 언약을 맺어 그의 나라와 집을 견고히 세워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에게 온유함에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터져 나올 수 있는 분노와 불평을 토로할 활화산 같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정작 하나님이 주신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고 그곳에서 영원히 복된 자로 살아갈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해 주셨다. 그는 다윗이며, 그의 집에 살고 있는 자이며, 그의 나라의 백성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대적하는 자와 원수들을 그 땅에서 내쫓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자들의 것이 되게 할 것이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곧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참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사실 다윗의 대적자요 원수들을 다윗과 그 집, 그 나라에서 내쫓아 몰아내기까지, 그래서 그때를 오게 하기까지 온유함으로 참고 계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온유함에 다윗을 두고서 다윗에게 그가 화를 가라앉히며 분을 삭이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하게 여실히 볼 수 있기까지 참음으로 기다릴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라고 예언한 것이며, 다윗에게 행하신 그 온유한 자를 하나님은 자신이 보낸 아들을 통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일으키실 것임을 시편 76편을 쓴 아삽의 입을 의탁하여서 “하나님이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일어나신다”라고 예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으로 다윗을 통해 말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온유한 자에게 복을 선포하심은 구약의 시편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그 대상이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심으로 예수님을 주로 따르는 제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구약의 시편에 예언되고 있는 온유한 자와는 동격이다. 다시 말해서 같은 성격의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구약의 시편에 예언되고 있는 온유한 자가 어떤 자인지를 알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째서 온유한 자로 복 있는 자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다윗에게 말씀하신 그 온유함으로, 그리고 아삽에게 말씀하신 그 온유함으로 이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한다. “온유한 자는 복 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온유한 자가 되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은 예수께서는 그들을 자신을 따름에 있게 하심으로 그들의 주이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로 불러 제자 삼은 자들을 자신의 나라 속에 두고 계신다. 그런 그들은 비록 이 땅에서 잠시 나그네와 같은 몸으로 있지만 그동안에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몸은 결코 평안에 있지를 못한다. 그것은 그들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은즉 주님을 따르는 그들 또한 배척 - 대적 - 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며,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정해진 운명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 앞에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육에서 나오는 죄성의 성격이 아니라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오는 온유함에 있는 의로움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대적자 앞에서 온유함으로 있다. 그것은 세상 앞에 주님의 증인이 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마 10:17-18). 주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나라를 주실 것을 확정하시고 자신의 의 속에 그들을 두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의 주님에 의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차지하게 할 날이 오게 하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다시는 그들의 대적자요 원수들을 두 눈을 씻으며 아무리 찾아보고자 하여도 찾을 수 없도록 영원히 내쫓아 몰아내고 영영한 불못에 내던질 것이다. 그때가 가깝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하여 애통하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일이 많을지라도, 그래서 당장에 분노하며 불평할 상태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그 화를 가라앉히고 분을 삭이며 불평하지 말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이라고 말씀한다(참고. 마 24:-25:46).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당하게 될 죽음의 모든 고난을 묵묵히 받으시는 온유함에 있으실 것이며, 그 온유함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행사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온유함 속에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 있다” 하시며,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가 우리에게 왜 말씀되어진 것인지를 알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들은 다윗과 맺은 언약 백성으로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러한 우리는 대적자요 원수에 의해 고통을 받는 것 속에서도 그 모든 것에서 온유함으로 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의 도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온유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예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 무죄한 자신을 고소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을 작정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의 대꾸도 변증도 하지 않고 잠잠하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진리가 아니면, 진리를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참으신’예수님의 온유함이 대적하는 자들과 원수들의 행악함을 헛되게 만들었으며, 그들이 악을 행한 죄값인 예수님을 죽인 피값은 그들과 그들의 자손 대대로 그들의 머리에 쏟아지는 것으로 그들에게 되돌아갔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오른팔의 권능을 행하셔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의 오른편에 앉게 하신 것이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은 온유한 자의 의로움은 그를 따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온유한 자의 의로움이 되어 그들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계신 그들의 주 예수께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참으로 복 있다. 이 온유는 기분 좋을 때, 또는 마음이 넉넉할 때 갖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음으로 인하여 배척을 받아 온갖 멸시와 모욕과 핍박을 받아 목숨을 내놓게 되는 위험 속에서 그 너머에 있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기뻐하고 그 즐김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서의 믿음의 선진들이 있어온 것이 그 온유함이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으며, 또한 이들의 믿음을 좇는 모든 믿음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들 모두의 온유함은 그렇게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의해서 있었다.
(4) 네 번째 선언하신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배부를 것이다”(6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복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네 번째로 선언하신 복에 그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배부를 것이다.”이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가 주리고 목말라 했던 그 의로 배부를 것을 -그 의로 채워질(충만할)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선언하신 말씀에서 이것의 근거가 되고 있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의가 지닌 의미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자기 백성을 위한 완전한 의를 자신의 의에 두시고 그 의를 주리며 목마른 자들에게 보내시는 일을 하셨다. 선지자 이사야는 포로 되어 있는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제2 출애굽에 있게 되어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며 마음에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다”(사 55:1-2)라고 희망을 주는 예언을 하였다. 그는 또한 “흑암에 있는 백성들이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므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사 49:9-10)라고 예언하였다. 이사야의 이 예언은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신다”(잠 10:3) 라고 예언한 것에서도 보게 된다. 구약성경에서‘의인’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사야는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인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주리고 목마른 언약 백성에게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다윗과 맺은 견고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을 회복케 해주시는 풍족한 배부름의 복을 예언한 것이다. 이사야가 전하는 예언을 통해 하나님은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를 하지 말고 나를 청종하라”(사 55:2) 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언약 백성은 양식 아닌 것에다가 아닌 양식인 것에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그것은‘나를 청종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사야는 다윗 왕국에 있는 언약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청종할 것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에게 그들이 먹어야 할 좋은 것이 있고 그들의 마음이 기름짐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에서 좋은 것을 먹고 그들의 마음이 기름짐으로 즐거움을 얻을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 있다. 이들에게서의 배부름과 목마름의 해소는 은을 자루채로 매달아 달고 온갖 수고를 하여 얻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두에 풍족해 있어도 이것이 그들에게는 배부르게 하며 마음에 기름짐이 되는 양식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에 그들의 주린 배와 목마른 목을 내걸고 있는 것은 거기에서 그들이 배부름으로 있어야 할 그들의 의가 되는‘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구약성경의 예언과 신약성경에서의 그 예언의 성취에서 보아 알 수가 있다. 이사야서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떨어지게] 할찌어다.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8) 라고 하였다. 여기에 보면 하늘에서 의를 쏟아내려 부어주고 땅이 입을 열어서 구원을 토해 낼 것에서 ‘의’는 이것과 댓구가 되는, 즉 동일한 의미에서 ‘구원’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구절에서도 확인 된다.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원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 46:12-13).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 51: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웠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사 56:1).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라”(사 61:10).
위에서 보게 되듯이,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구원과 동의어로 말해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으로 주림이 채워져야 하고 목마름이 해소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같이 쏟아내려 부어져야 하고, 땅이 갈라짐으로 그 입을 열어 물을 토해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의한 의가 임하지 않고서는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느니라”(렘 2:22)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주홍같이 붉은데, 이 죄는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또는 매일같이 제사를 드릴지라도 없앨 수가 없다. 죄가 흰 눈 같이, 그리고 양털 같이 희고 깨끗하게 씻김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어떤 제사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에 있으며, 그 구원이 되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의 의로 입히시는 것에 있다. 이것 외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있게 하는 양식이 없다.
그런데 이 유일한 양식이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양식을 내려주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결코 주림과 목마름으로부터 배부를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거한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우리는 어떤 자인가 하면 '의에 주리며 목마름에 있는 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에 우리의 구함이 있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의의 채움, 그 충만인 배부름에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주리고 목마름의 채움을 하나님이 보내신 의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서 받는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너희는 복 있다. 왜냐하면 너희가 구하는 의로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게 된 시점에 이를 때까지,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항상 기근과 기갈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 마냥 죄만 드러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의가 단 한 방울이라도 자신의 혀에 적셔져서 서늘함만이라도 느끼게 했으면 하는 갈망이 배고픔을 갖게 하고 목마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애써 구하고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애써 구할지라도 얻지 못하고 힘써 찾을지라도 그들은 결코 찾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이스라엘은 그 어디에서도, 그 무엇을 통해서도 의로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의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구하고 찾은 대로 날마다 그 충족에 있으며 충만에 있다. 의로우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구하는 거기에 항상 계시며 우리가 찾는 거기에 항상 계신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구하고 찾는 간절함에 있는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으로 제공되고 있고 생수로 솟아나 주어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 끝날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다시는 목마름이 없을 것이며 다시는 굶주림이 없을 것이란 약속이 실현된 온전에 있게 된다. 다시는 목마를 일이 없고 굶주릴 일이 없게 우리를 영생의 부활에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 날이 이르기까지 우리는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너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왔으나,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배고픔과 목마름의 괴로움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너희를 더 이상 괴롭히며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배고픔에 있어왔고 목마름에 있어왔던, 그렇게 너희에게 없이 있어왔던 그것이 이제는 너희와 함께, 그것도 항상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항상 배부름에 있을 것이며 만족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너희는 복 있다” 라고 말씀해 주심 속에 있다.
4. 끝맺는 말
산상설교의 팔복에서 선언 되고 있는 ‘복’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 이것의 근거가 되고 있는 구약성경 이사야서 중에서 52장과 상관성을 갖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여기에서 의도하고 있는 뜻을 알아보았다. 팔복 중에서 이것의 전반부인 ‘사복’(마 5:3-7-6)에 한정하여 살펴보았지만, 이곳에서 예수께서 선언하신 ‘복’의 의미는 오직 한 가지를 두고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머지인 후반부의‘사복’(마 5:7-10)에서도 동일하다. 예수님은 “이러 이러한 자는 복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문장 형식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구약성경 이사야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있는 메시야 사상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 사역에 의해 있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는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의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임하였으며,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으로 복 있음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오늘날 산상설교의 팔복이 예수님이 선언하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엉뚱하게 해석되어 신자의 마음을 자극하여 열심을 갖게 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실정에서, 팔복에서 선언되고 있는 “이러 이러한 자는 복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을 알고, 이 하나님의 나라를 온 세상에 실현해 나가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의로우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 속에서 바라보고 의존하는 믿음에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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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dward J. Young, The Book of Isaiah, vol.Ⅲ, 장도선, 정일오 공역, 『이사야서 주석(Ⅲ) : 40-66장』(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8), 360.
2) 이사야 52:2의 상반절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에서의 ‘티끌’에 사용된 단어는 ‘아파르’(rp;[;)로 문자적으로는 ‘티끌’, ‘먼지’, ‘흙’, ‘땅’ 등을 의미하나, 여기에서의 문맥적 의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있어 이스라엘이 깔고 앉아 있는 이방 국가 바벨론을 의미한다. 따라서 티끌을 털어버리라는 것은 “이방 국가인 바벨론의 멍에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 “이스라엘이 처해 있었던 엎드러져 있었던 위치(바벨론)”, “바벨론의 잔재나 부정한 흔적들”을 의미한다. 한정건,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 Ⅱ : 종의 노래』(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186.. Edward J. Young, 위의 책, 361., 오택현, “포로기 이사야가 바라본 희망” 『그 말씀』(두란노, 2008. 7), 105. ; 이것은 이어지는 문장인 하반절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에서 예루살렘, 곧 바벨론에 사로잡힌 딸 시온이 목에 묶여 있는 ‘줄’로 언급되고 있다.
3) 이사야 52:2 하반절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에서 예루살렘에게 ‘일어나 앉을지어다’에서 명령되고 있는 것은 “너의 보좌에 앉을지어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Edward J. Young, 위의 책.) 여기서 예루살렘이 앉을 자리, 곧 보좌는 사무엘하 7:8-16에서 보게 되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전한 하나님께서 다윗왕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다윗 왕조, 또는 다윗 왕가의 보좌를 뜻한다.
4) Edward J. Young, 위의 책, 363.
5) 오택현, 앞의 책, 106.
6) 이사야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서 ‘여호와의 종’이라는 어구는 구약성경의 곳곳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사야 42:1-53:12에서만큼 집중적으로 강조된 곳은 없다. John D. W. Watts, Word Biblical Commentary: Isaiah 34-66,(Word Books, Publisher: Waco, Texas, 1987), 116.
7) ‘여호와의 종’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하는데 공헌을 한 주목 할 만 책이 1892년에 출판되었다. 바젤 신학교수인 ‘둠’(Bernhard Duhm, 1847-1928)이 쓴 주석 ‘이사야서’이다. 둠은 이 책에서 이전의 이사야 연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주제인 ‘여호와의 종의 노래’를 다루었다. 둠이 4개의 본문(42:1-4; 49:1-6; 50:4-9; 52:13-53-12)을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확인한 이래 ‘여호와의 종’에 대한 토의는 이 구절들에 집중되면서 이후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둠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란 네 개의 본문으로 구분하면서 이 네 본문을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묶는 주제인 ‘여호와의 종’을 부각시키며 관심을 집중하게 함으로써 이후 ‘여호와의 종’, 또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 연구에 새로운 시도를 갖게 한 공헌이 있다. 한편, 둠에 의해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분류하는 네 본문에서 첫 번째인 40:1-4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다. 40:1-9, 또는 40:1-13을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 것이다. 필자는 첫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 본문은 40:1-9로 보는 것이 문맥적 흐름의 내용과 그 의미에서 옳다고 본다.
8) ‘제1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 등장하는 ‘종’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어왔다. 선지자 이사야라고 주장하거나,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거나, 바사왕 고레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한 다리오 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수주의 학자들이 주장해온 전통적인 견해는 메시야라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 예언되고 있는 ‘종’의 개념과 그 성격에서 볼 때 예언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 원근법적 원리의 관계에 의해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서 겪게 되는 시대의 가까운 거리에서는 곧 겪게 될 일의 성격인 바사왕 고레스를 지칭하면서, 종말론적 시대의 먼 거리에 처한 시대적 상황인 장차 겪게 될 일의 성격에서는 메시야를 말하고 있다는 한 눈에 두 시대적 종의 개념이 겹쳐 병행되는 ‘병행적 여호와의 종의 개념’을 갖는다. 이는 ‘제2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와 ‘제3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불리는 것에 있는 ‘여호와의 종’ 모두에게서 공통적이다. 이 모두에 나타나고 있는 ‘여호와의 종’은 메시야적 인물로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것에서 그가 행하는 일에는 메시야의 사역을 예시하면서 ‘제4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에 나타나고 있는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되고 있는 ‘메시야’에게로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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