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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십자가에 같이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강도의 영혼은 그날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글쓴이:고경태 목사(형람서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Ἀμήν σοι λέγω, σήμερον μετ’ ἐμοῦ ἔσῃ ἐν τῷ Παραδείσῳ.
“Truly I tell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Truly,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Verily I say unto thee, To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
Truly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Amen I say to thee, this day thou shalt be with me in paradise
43 耶穌對他說:「我實在告訴你:今日你要同我在樂園裡了!」
재림교회의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그날에) 낙원에 있으리라”는 번역은 의미 번역으로 제시했습니다. * 재림교회가 성경본문 분석을 상대적으로 잘 소개하는 것 같습니다.
낙원(paradise)과 천국(the kingdom of heavens). 낙원(파라다이스)는 죽음과 부활의 중간으로 봄으로 연옥에 대한 개방성을 놓지만, 우리의 사후 중간상태와 천주교의 연옥의 차이는 변화가능성에 있습니다. 연옥은 정화과정으로 변화를 추구하지만(죽은자를 위한 기도), 우리의 중간상태에서는 변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페르시아의 정원(pairidaeza, garden: “정해진 영역”(pairi-daēza))을 모티브로 한다고 합니다.
구둣점(punctuation, comma)에 대한 사본분석은 상당히 있습니다(참고로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는 구둣점을 사용하지 않음). 구둣점이 you 다음에 있는데, today이 다음에 있으면 의미가 전혀 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림교회에서는 today이 다음에 구둣점을 놓고 번역한 것입니다(Truly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구둣점이 없이 번역하면, “Amen I say to you today with me you will be in Paradise.”이 됩니다. In the Hebrew Delitzsch Gospels, the text reads “and speaking Yeshua to him Amen say I to you the day will be with me in Gan-Eden.”
오늘(σήμερον), "오늘" 시간에 대한 이해가 해석의 관건 중 하나입니다. ἡμέρα, 낮. 낮의 여신으로 밤에 대비되는 낮.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오늘에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주 예수께서 구속주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비록 낙원 보좌에 좌정하시지 않았지만 예수의 권위로 죄사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구속주이심을 명확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예수께서 계신 장소는 눅 23:43에서 낙원에 계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림교회는 그 날에 예수께서 낙원에 있지 않았을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그것은 번역을 다르게 하면서 제언한 것입니다. 번역을 "오늘 네게 이르노니,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본들은 43철과 44절을 생략했다. 어떤 사본들은 이 귀철들을 마태 복음 26장 39-40철에 삽입했다는 주장도 있다. 서방계열(WH)은 포함시키는 경향이고, 오래된 사본에는 없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본 문제는 창작으로도 볼 수 있고, 교리적 작동으로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국제성경주석).
17세기 후반에 살았던 존 밀(John Mill, 1645-1707)은 TR과 다른 3만여 개의 “상이독본”(相異讀本, variant reading)들을 모았으며, 이에 충격받은 벵겔(J.A. Bengel, 1687-1752)은 평생 동안 사본 연구를 했다. [※Westcott-Hort의 그리스어 성서에서 영국에서 영어번역을 하여 Revised Version(*1911년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대본)이 나왔다. 또 미국에서 영어번역을 하여 ASV가 나왔고 이것 역시 1911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대본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RV와 ASV의 영어-한국어 번역본이다.
누가복음 23:43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에서 문자적으로 오늘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음부강하와 충돌한다. 음부강하가 없다해도 무덤문을 여시고 나오셔서 제자들과 함께한 40일의 여정에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이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낙원에 가셨다가, 음부에 내려가셨고, 3일에 다시 부활하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낙원에 오르셨을 때에 문제점은 다시 내려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죽으심 후에 승천하셨다가 다시 내려오심은 재림(second coming)이 됩니다. 신천지에서는 초림처럼 다시 오신 상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눅 23:43이 사본학에서 일치되지 않은 문장일 때에는 그 문장을 근거해서 확고한 신학 체계를 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본학적으로 일치되지 않은 문장에 근거해서 신학할 때에는 제시도 다양성을 줄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합니다.
‘하데스’(Hades, ᾅδης)는 히브리어 ‘스올(sheol)’을 번역한 것으로 ‘형벌의 처소’를 뜻한다.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한글 성경에는 주로 “음부”로 번역한다(구약성경 65회).
지옥, Hell, 게헨나(신약성경 12회), gehenna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인데, 힌놈의 골짜기는 시체 등을 태우던 쓰레기 소각장이었다. 지옥( Hell)이란 영원한 형벌의 장소에 대한 신약성경에서는 세 단어가 사용되었다. 1) 하데스(Hades, 10회), 2) 게헨나(Gehenna, 12회), 3) 탈타루스 (Tartarus, 1회)이다.
연옥(燃獄, 라틴어: Purgatorium). "연옥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죽은 뒤에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충만히 누리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흠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거쳐야 하는 정화 과정의 상태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0항) 합니다."
재림교회는 어떻게 해석합니까?
예수께 간청한 강도는 그날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갔는가? 사람이 죽으면 즉시로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는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 일 후 예수께서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요 20:17)다고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것이 문제입니다. 영혼불멸설에 의하면 예수님 같으신 분은 돌아가시자마자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을 터인데 왜 아직 가지 못하셨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좌우편 강도는 처음에는 군중과 함께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은 점점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고 마침내 흉악한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는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23:42)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행악자의 이 소원을 예수께서는 시원스럽게 들어주셨습니다.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가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그날 당장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갔다면 예수께서는 왜 며칠 후에도 아직 하늘에 가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중요한 주석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성경 해석에 참고하는 그랜드 종합주석은 누가복음 23:43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강도에게 “오늘” 즉 십자가에서 운명하면 곧바로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는 낙원이 성도가 사후에 곧바로 가는 처소임을 암시한다. 즉 낙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사후에 가서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과 함께 부활하여 영육을 다가진 존재로서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머무르는 “중간기 처소”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낙원에서 사후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그랜드 종합주석, 13:520).
그랜드 종합주석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온건한 주석을 한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부분만큼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임시로 중간 장소인 낙원에 가 있는다는 것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교리로서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연옥을 연상시킵니다. 왜 육체 없는 영혼들만 배회하면서 마지막 구원을 기다리는 낙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또한 성도들에게 필요할까요? 더구나 예수께서 강도에게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께서도 천국에는 못 가셨는데 낙원에는 가셨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황당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7 말씀 즉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는 구절을 그랜드 종합주석은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그 해석은 싱겁기 그지없습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은 “내가 하늘에 가서 할 일이 많으니 나에게 매달려서 하늘에 못 가도록 말리지 말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만나 그저 놀라기만 했을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늘에 못 가시도록 붙들었을 리도 없을뿐더러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이나 함께 계셨기 때문에 위의 해석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호크마 주석도 역시 “오늘”과 “낙원”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은 천국과 낙원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 구원의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오늘 낙원에 간다”는 말의 구체적 의미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호크마 주석 3:672).
핸드릭슨 주석은 중간 상태인 낙원을 인정하지 않고 천국과 낙원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고린도후서 12장을 예로 들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에서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말합니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최고의 하늘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입니다. 그런데 12:4에서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7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낙원이 천국이 아니고 영혼들이 육체를 만날 때까지 대기하는 중간 장소라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육체가 없는 영혼들은 생명나무 과일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핸드릭슨 주석은 이렇게 낙원이 즉 천국임을 잘 밝히고 있지만 “오늘”에 대해서는 역시 다음과 같은 약간 애매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맙니다. “그는 먼 미래의 축복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날에 속하는 약속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오늘’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하권, 408). 핸드릭슨은 아마도 오늘 낙원에 갔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오늘이란 말은 즉각적인 구원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그날에 낙원에 가시지 않았으므로 “오늘”이란 말은 그날에 낙원에 갈 것이라는 말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여기서 어떤 의미로 쓰였을까요? 헬라어는 원래 구두점이 없고 단어의 순서 역시 문장 중 어느 곳에 두어도 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때로는 혼란이 오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앞의 문장 “네게 이르노니”에 붙을 수도 있고 뒤의 문장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에 포함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오늘”이 앞의 문장 “네게 이르노니”에 붙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약속하는데 그 나라에 임할 때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강도에게 죽은 후 오늘 당장 낙원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도 그날 낙원에 가시지 않고 무덤에 계셨던 것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낙원에 가지 않으셨으니 강도도 역시 낙원에 가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그날에)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https://www.ministrymagazine.org/archive/2013/06/the-significance-of-a-comma:-an-analysis-of-luke-23:43
[출처] [난제]눅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작성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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