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통계시와 계시의 종료성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
최병규(예장고신총회 유사기독교 상담소장)
대부분의 이단 주창자들은 정경으로 간주되어온 ‘성경’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관적인 체험과 해석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마치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1) Hoekema교수는 이단들의 특징들 중의 첫째로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2) 그는 이단들의 이러한 특징을 설명하면서 Hutten의 말을 언급하고 있다. 즉 Hutten은 바로 이러한 이단의 특징 즉 ‘성경 외적인 권위’(extra-scriptural source of authority)를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적절히 묘사하기를 ‘왼손에 하나의 성경’(a Bible in the left hand)'이라고 한 것이다. Hutten은 오른 손에는 성경을 그리고 왼손에는 ‘스웨덴보르그(Swedenborg Emanuel, 1688-1772)의 책’을 쥐고 있던 어느 스웨덴보르그3) 사역자를 회상하면서, “모든 이단(cult)은 왼손에 그와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4)
이러한 또 다른 하나의 성경은 곧 이단자들이 가지고 있는 소위 ‘직통계시의 결집물’인 것이다. 자신들은 정통기독교가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을 해석할 수 있도록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적인 부분들에 대하여 자신들만이 ‘바른 풀이’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교주가 풀이한 해설서를 성경과 동일한 권위 혹은 성경 위의 권위로 간주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 성경은 정경화의 과정을 통하여 이미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고대교회는 정경(正經, canon)에5) 포함될 책들에 관한 논쟁들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공의회로 모였다. 그러나 R. Laird Harris가 그의 책 『성경의 영감과 정경성』(Inspiration and Canonicity of the Bible)에서도 잘 언급하고 있듯이, 성경은 교회의 결정이나 혹은 고대의 것들에 대한 숭배의 결과로서 권위있게 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됐기 때문에 권위있게 된 것이다.6)
정경성의 기본적인 구비요건들은, Bruce M. Metzer가 그의 책 『신약의 정경』(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에서 잘 요약하고 있듯이, 신앙의 규칙(regula fidei), 사도성(apostolicity) 그리고 교회 전반에 걸친 계속적인 수용성(continuous acceptance)이나 사용(usage) 즉 교회들 간의 일치(consensus) 등이다.7) 물론 F. F. Bruce는 그의 책 『성경의 정경』(The Canon of Scripture)에서8) 고대성(Antiquity) 즉 사도시대에 속한 것, 정통성(Orthodoxy) 즉 사도적 신앙, 보편성(Catholicity) 보편적인 교회들에 의한 것, 영감(Inspiration)의9) 문제 등을 고려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계시의 충족성을 논함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여러 부적절한 견해들을 비평하고 있는데, 박 박사가 계시의 영속성 즉 ‘성령의 계시는 전에 있은 것같이 지금도 있다. 하나님이 한때 자기를 계시하시고는 자기 계시를 중지하였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하여 제시하는 반박 성구는 갈 1:8-9이다. 즉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으니, 이는 분명히 이미 온 계시의 완성되었음과 다른 계시의 불필요함을 선언함이라고 한다.10)
특별히 계시의 충족성과 관련하여 박형룡 박사는 A.A. Hodge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즉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노라고 공언한다. 그 목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성경이 반드시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다. 만일 유전과 같은 어떤 보충적 법칙이 그 목적에 필요하면 성경은 반드시 우리를 그것에 참조시켰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성경의 충족성 즉 완전성을 확언한다.11)
A.A. Hodge는 그의 Outlines of Theology에서 어떤 의미에서 신앙의 규칙으로서의 성경의 완전성(completeness of Scripture)을 주장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이 계시는 신앙과 실제, 그리고 예배 양식 등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안내자로서 풍성하도록 충족하다(abundantly sufficient)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인간적 고안들(any human inventions)의 필요성과 권리를 배제한다고 밝힌다.12) 물론 개혁주의적 견해와는 달리 로마교는 교회의 전통을 앞세우면서 성경의 충분성을 부인한다.13)
박윤선 박사는 그의 『개혁주의 교리학』에서 성경의 충족성을 성경의 완전성으로도 지칭하면서 말하기를, “로마 가톨릭교는 성경이 불완전한 점이 있다는 의미에서 거기에 교황들의 유전(遺傳)을 보충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성경 그것만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교도하기에 언제나 총족하다고 본다”고 했다.14) 그러면서 신약계시의 최종성 혹은 완전성의 근거로서 히 1:1-2을 언급한다.15)
Robert Shaw도 그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성경의 완전성(perfection of the Scripture)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성경의 완전성 개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성령의 새로운 계시들(new revelations)을 가식하는 열광주의자들(enthusiasts)의 가식된 계시(pretended revelations)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16)
물론 성경은 어떤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과 상징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이 많다.17) 그렇지만 성경은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받고 성장해가기에 충분한 지식을 주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 그리고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완벽한 권고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면 성경으로부터 정당하고 필연적인 결론으로 유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18) 게다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그 자체가 동일하게 평이한 것도 아니며 모두에게 동일하게 분명한 것도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꼭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은 성경의 여기저기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열려 있어서, 유식한 사람뿐 아니라 무식한 사람도 평범한 수단을 바르게만 사용하면 그것들의 충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9)
즉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때라도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유전으로서는 아무것도 성경에 더할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3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Johannes G. Vos는 이 부분에 대한 주석 가운데 Vos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전통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익하게(void) 했으며,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의 추종자들은 그녀의 저술인 Science and Health with the Key to the Scriptures를 성경과 나란히 하나의 권위로써 둠으로써 에디의 책이 그들의 진정한 권위(their real authority)이며 성경은 무효화되었다(nullified)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런가 하면 신우회(the Friends)나 퀘이커교도들(Quakers)은 그들의 신비적인 내적의 빛(mystical inner light)을 그들의 신앙과 삶의 안내자로( as their guide for faith and life) 강조함으로써 성경을 ‘내적인 빛’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지적하고 있다.20)
거기에 대해 Johannes G. Vos는 그의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주석』에서 인간이 성경에다 나란히 다른 어떤 규칙(some other rule)을 첨가할 때에 이것이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어떤 효력을 발생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하여 답변하기를, “필연적인 결과는 성경이 두번째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그 다른 어떤 것(규칙)이 인간의 신앙과 삶을 위한 진정한 권위(real authority)로 될 것”이라고 한 바 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은 ‘성경’ 이외에 어떤 책을 성경의 권위로 추켜세우거나, 혹은 성경을 가지고 주장하지만 기존교회의 성경해석을 배제하고 독단적인 해석을 한다.22) 이 양자는 다 ‘계시론적 문제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성경을 억지로 풀려고 할 때 대부분 오류에 빠지게 된다. 신자는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억지로 풀려고 하다가는 주관에 치우쳐 자칫 잘못하면 이설을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다.
직통계시 형태에 대한 칼빈의 견해
물론 칼빈이 ‘직통계시’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기독교강요』 I.ix.에서 성경 계시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던 그러한 부류 즉 ‘광신자들’(the fanatics)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23) 광신자들은 성경을 배척하고, 계시를 넘어가며, 모든 경건의 원리들을 넘어뜨린다고 지적한다. 이 광신자들이란 칼빈의 소논문 「환상적이고 광적인 종파 리버린당을 반박함에 대하여」 Contre la secte phantastique et des Libertins (1545)에서도 다뤄진 리버린당을 의미한다고 John T. McNeill은 주석한 바 있다.
그들은 성경을 저버리며 하나님께 다가가는 어떤 길이(some way or other of reaching God)이 있다고 상상하는 이들이다. 그들에 대한 칼빈의 평가는 신랄하다. 칼빈은 그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들은 오류(errors)에 빠져 있는 것보다 오히려 광란(frenzy)에 빠졌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24) 칼빈은 이 글의 말미에서 딤후 3:16-17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에까지(even to the final goal) 인도하시는 것인 성경의 목적을 덧없는 것(fleeting)이며 일시적인 것(temporal)이라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마귀적인 광란(devilish madness)인지를 냉소적으로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25) 교만으로 가득찬(swollen with pride) 광신자들(fanatics, 헬음. enthousiastai)은 부주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뒤흔들어 놓으며 작별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코를 골고 있는 동안에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응시할 때 어떤 탁월한 조명(excellent illumination)을 고려하는 이들이라고 지적한다.26)
그리고 칼빈은 그러한 광신적 그룹과는 전혀 달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건전성(soberiety)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성령 없이는 모든 진리의 빛을 잃기 때문에 말씀(the Word)이란 그것을 가지고 주님이 신자들에게 그의 영의 조명을 시사해주는 기관(instrument)임을 모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27)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 즉 신자들은 사도들 속에 거주하고 말씀하시며, 그리고 그분의 말씀(oracles)에 의하여 그들이 계속적으로 말씀 청취에로 부름을 입고 있는 그분 외에 또 다른 영(no other Spirit)을 모르기 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28) 사실 칼빈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견해를 견지한다. 그는 광신자들에게 혹시 그들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그분 외의 다른 영(another spirit)에 취해있는지를 묻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그 언급에 대한 결론으로 칼빈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은 새롭거나 들어보지도 못한 계시를 고안하거나 어떤 새로운 류의 교리(new kind of doctrine)를 강요하려는 과업을 지니지 않으며, 복음에 의하여 명령되어진 바로 그 교리(very doctrine which is commended by the gospel)로써 우리의 마음을 봉인하기 위한 과업을 가지신 것이라고 단언한다.29) 즉 칼빈은 철저하게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하기 원하셨던 것을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the efficacious confirmation of the Word)이라는 문제와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30)
현재 한국교회에는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직통계시자들이 출현하고 있다. 심지어는 정통교단들 내에서도 비밀이 보장된 모임들에서 재림의 날짜를 예고하는 등 자신이 직통계시 수여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기관들이 계속하여 추적하고 연구중에 있다. 비성경적인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하며 반성하도록 한다. 물론 복음전파의 역사가 왕성한 우리 사회에서 사탄의 역사가 또한 강하다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실로만 위안을 얻으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성도들이 직통계시자들을 찾아다니도록 만든 것에 대하여 겸손하게 자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직시가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른 교리 교육의 강화’이다. 완성된 정경인 성경 말씀에 나타난 진리들과 그 진리들이 체계와된 교리들에 대한 교리문답서들과 신앙고백서들을 성도들에게 심도있게 가르쳐야 할 시기를 맞이 한 것이다. 특히 신자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칙은 바로 ‘성경’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바이며, 개혁자들이 회복한 것이며, 그 후예들이 견지해가고 있는 견고한 ‘규정하는 규범’(norma normans)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포함하여 특히 신비적 체험들은 성경 말씀에 의하여 규제되어야 한다.
요 14:16과 15:26절에서 밝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보혜사(paravklhto")이신 성령께서는 성도들인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meq! uJmw'n)),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들(pavnta a} eipon uJmi'n)에 대하여 가르치시고(didavxei) 생각나게 하실 것(uJpomnhvsei)이다.31) 여기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부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라는 부분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주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들에 대하여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가르치시고 또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거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marturhvsei peri; ejmou').
그런데도 많은 직통계시자들은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깊은 단계에 들어가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도 진정하고 고상한 영적인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성경이 필요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깊은 영적 경지에 도달하기 원하는 이들일수록 오히려 성경 말씀에 더욱 집착해야 한다. 주님의 뜻을 담고 있는 성경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 잘 이해하며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경건의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정상적인 신앙의 과정이 무시되는 경우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전술한 바 있는 Vos의 표현처럼, “필연적인 결과는 성경이 두 번째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그 다른 어떤 것(규칙)이 인간의 신앙과 삶을 위한 진정한 권위(real authority)로 될 것”이다.32) 사실 소위 ‘직통계시자들’은 성경을 믿는다고 하겠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직통계시를 성경의 권위 보다 상위(上位)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을 통하여 예고된다고 하는 그 직통계시를 최상의 권위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직통계시를 정경인 성경에 의하여 검증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분은 위에서 언급된 주님의 말씀에 상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직통계시자들 혹은 빈도수가 낮지만 직통계시 실습자하는 자들은 물론 자신이 영적인 깊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확신하겠지만,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그것을 외면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온 ‘개인적인 사건’임을 자각해야 하겠고, 나아가서 그 개인적 사건은 과연 성경적인가를 말씀에 비춰 검증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단 성경과 같은 계시의 형태를 띤 것은 아닌 어떤 형태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성경에 의하여 점검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칼빈 선생이 『기독교강요』에서33) “사탄이 성령의 이름을 빙자하여 잠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께서는 성경 속에 인처놓은 형상에 의하여 우리가 인식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므로 달라지거나 변화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처음 나타난 모습 그대로 영구하게 존속될 것”이라고 하면서 경계한 바와 같이, 성령께서는 새로운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모든 ‘직통계시’는 거짓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직통계시자’들의 권위를 존중하고 직통계시를 통하여 생활의 열쇠를 발견하려고 하는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칼빈은 소위 오늘날의 직통계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광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기를, “그들(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도들 속에 거하시고 말씀하신 성령, 즉 그 성령의 말씀에 의하여 날마다 말씀을 듣도록 부름을 입고 있는 성령 외에 다른 영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34) 이 사실은 바로 성도들의 일상생활은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자의로 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며, A.A. Hodge의 말처럼,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노라고 공언한다. 그 목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성경이 반드시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다. 만일 유전과 같은 어떤 보충적 법칙이 그 목적에 필요하면 성경은 반드시 우리를 그것에 참조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계시는 성도들의 ‘신앙과 실제, 그리고 예배 양식 등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안내자로서 풍성하도록 충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인간적 고안들의 필요성과 권리가 배제되는 것이다.35)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들과 목회자들은 소위 직통계시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간혹 직통계시를 가지고 선포한 경우들이 있다면 그 실습을 중단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계가 연합하여 직통계시자들을 경계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인간은 독특한 소리(그것이 설교이든 세미나 강의이든 성경공부를 통한 것이든)를 듣고 싶어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특히 한국교회는 대부분의 건전한 교회나 교단들의 신학사상과 메시지들에도 불구하고 일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소위 직통계시에 미혹된다. 그러나 직통계시는 반기독교적인 것임을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바른 교리를 가르쳐 순수한 복음에 기초하여 생활하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실 뿐 ‘우리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깨닫게 하시며 가르쳐가시는 것이다. 유해무 박사가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배포하셨듯이, 동일한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을 효과적으로 확증하심으로 당신의 일을 완수하신다.36) 이처럼 주님께서 성령의 조명을 배포하시는 방편은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적 스승(interior magister)이신 성령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그것의 기원이 신적이라고 하는 내적 증거를 지니고 있다.”37)
“신앙생활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중요한 요소이며, 성경을 통독하여 신자가 신령한 지식과 신앙생활의 힘을 얻는 사실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은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신자의 심령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화로써 이루어진다." 38)
미주
1) Cf. Augustine, City of God, 11.1.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성경은 모든 글을 능가하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인간의 모든 판단을 지배함을 말하면서, 성경은 인간의 지적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2) Anthony Hoekema, op. cit., p. 378. Cf. Edmond C. Gruss도 그의 책 Cults and the Occult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74), p. 4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3) 과학자, 신비가. 스톡홀름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 하나님은 형상이 있는 인간이라고 하며, 다처를 두어 무한 수의 영들을 생산하여 공간에 거주케 한다고 함. 그들의 중요한 원리는 그가 쓴 '천국과 지옥'이다.
4) Hoekema, op.cit., p. 378에서 재인용. 원 출처: Hutten, Die Glaubensweld des Sektierers. 어거스틴도 『마니교도 파우스투스에 답하여』 11.5에서 이와 유사한 주제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지만, 성경은 신성불가침성을 지니고 있음을 명백하게 했다: “후대에 기록된 수많은 책들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권위는 서로 다르다. 성경은 독특한 신성불가침성을 가지고 있다.”
5) F. F. Bruce, The Canon of Scripture (InterVarsity Press, Illinois, 1988), p.17. 여기서 Bruce는 ‘canon'이라는 은 히브리어의 qaneb에 기원을 두고 있는 셈족 단어로부터 빌어온 헬라어의 kanon에서 유래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이 canon이라는 것은 교회에 의하여 신적 계시 문서들로 인정된(acknowledged) 저술들의 목록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사용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Athanasius에 의해서 AD 367년경에 회람된 편지에서 처음이었다고 한다. Bruce가 동의하고 있는 이 견해는 R. P. C. Hanson, Origen's Doctrine of Tradition (London, 1954), pp.93, 133과 역시 Hanson의 Tradition in the Early Church (London, 1962), p. 247에 의한 것이다.
6) R. Laird Harris, Inspiration and Canonicity of the Bible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7. 10th printing), p. 294.
7) Bruce M. Metzger,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Oxford: Clarendon Press, 1987), pp. 251-254.
8) F. F. Bruce, op. cit., pp. 255-269.
9) Cf.Archibald Alexander, op. cit., p. 290, 308. 여기서 프린스턴 신학부의 교수였던 아키발드는 성령의 완전영감에 대하여 강조하고 또 확신하고 있다. ‘영감’에 대한 간략한 이해는 유해무, op.cit., p. 117. 참조하라.
10) 박형룡, 『박형룡 박사 전집』1권. 교의신학.서론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pp.295-296. `
11) Ibid., p.288. 그는 여기에서 A. A. Hodge의 Outlines of Theology, p.85를 참조하고 있다.
12) A. A. Hodge, Outlines of Theology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2), p.84. Hodge는 p.85에서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They furnish all necessary principles for the government of the private lives of Christians, in every relation,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 and for the administration of the affairs of his kingdom."
13) 유해무, op.cit., p.122. 여기서 유해무 교수는 로마교가 제2바티칸회의 후 트렌트회의와는 달리 성경의 충분성에 근접하지만, 올바른 성경 해석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종전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14) 박윤선, 『개혁주의 교리학』 (영음사, 2003), p. 46. Cf. Robert Shaw, An Exposition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ristian Heritage, 1998), pp.50-52.
15)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Cf. 박형룡 박사는 계시의 완전성을 말할 때 딤후 3:15-17; 요 20:31 등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그는 A.A.Hodge의 견해에 줄곧 동의하면서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것은 Hodge의 Outlines, p. 85에 서술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계시의 명쾌성(perspicuity)에 대한 근거로 Hodge가 제시하고 있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p.86): 시19:7,8; 119:105,103; 고후 3:14; 벧후 1:18,19; 합 2:2; 딤후 3:15,17.
16) Robert Shaw, op. cit., p. 50. 여기서 Shaw는 이 부분을 거짓 선지자들의 일어남에 대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씀(마 24:11,24)에 근거하여 새 계시들이 성경에 첨가될 수 없음을 확언하고 있다. "No new revelations are to be added to the oracles of God, for Christ and his apostles have foretold the rise of false prophets, and warned us not to give heed to their pretended revelations."
17) Ibid. 여기에서 Shaw는 성경의 완전성 개념에 대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성경의 완전성을 주장한다고 할 때 그것은 성경에는 종교에 대한 모든 조항들이 그렇게 많은 말들로 담겨져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데,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연역되는 좋고도 필요한 결과들은 신앙과 실제의 규칙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1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 Cf. James Bannerman, Inspiration: the infallible Truth and Divine Authority of the Holy Scriptures (Edinburgh: T. And T. Clark, n.d.), p.587.
19) WMC 1.7
20) Johannes G. Vos, 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Phillipsburg. New Jersy: P & R Publishing, 2002), p. 10.물론 보스는 여기에서 퀘이커교도들 가운데는 다양한 부류가 있으며 모두가 다 같은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21) Ibid.
22) Ronald M. Enroth, Youth, Brainwashing and the Extremist Cult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7), p. 206. 여기서 Enroth는 Thielicke의 Between God and Satan을 인용하며 말하기를, 거짓 스승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자들을 모방할 뿐 아니라 정규적으로 성경을 인용하고 그리고 성경을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곡해한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는 p. 208에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Most cult groups display great skill in using biblical language and Christian terminology." 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3은 ‘외경’은 성경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아무 권위도 가지지 못하며, 어떤 방식으로도 다른 인간의 저작물과 다르게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에서 조명해 볼 때, 성경 이외의 그 어떠한 인간의 저작물도 ‘성경적 권위’를 지닐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23) Inst. I.ix.1.
24) Inst. I.ix.1.
25) Inst. I.ix.1.
26) Inst. I.ix.3.
27) Inst. I.ix.3.
28) Ibid.
29) Inst. I.ix.1.
30) Inst. I.ix.3.여기서도 칼빈은 요16:13절 이하의 진리의 성령은 자기가 말하지 않고 이미 말씀으로 전한 것을 사도들의 마음에 시사하여 또 가르쳐 준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31)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이승미 교수의 학위논문 The Parakletos in the Gospel of John, Chapters 14-16 (PU vir CHO, 1982)를 참조하라.
32) Johannes G. Vos, 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Phillipsburg. New Jersy: P & R Publishing, 2002), p. 10.
33) Inst., I.ix.2.
34) Inst., I.ix.3.
35) A. A. Hodge, op. cit., p.84. Hodge는 p.85에서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They furnish all necessary principles for the government of the private lives of Christians, in every relation,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 and for the administration of the affairs of his kingdom."
36) 유해무, op. cit., p. 124.
37) Archibald Alexander , Evidences of the Authenticity, Inspiration and Canonical Authority of the Holy Scriptures (Philadelphia: n.p., 1838) p. 235.
38) 홍반식, 『성경의 핵심교훈』 (교회교육연구원, 1984), p. 8.
최병규
예장고신총회 유사기독교 상담소장
한기총 이대위 부위원장
한장연 이대위 위원장
Th. D.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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