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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과 그리스도인의 헌신 : 십일조 본문 재검토(오광만 교수)
헌금과 그리스도인의 헌신: 십일조 본문 재검토
Offering and Christian Devotional Life: Rethinking Passages on the Tithe
1. 서론
구약성경에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는 본문이 많이 있다. 대부분의 현대교회에서 이 본문들은 교인들의 헌금 납부의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일조 납부를 훌륭한 신앙의 척도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요즈음 젊은 성도들 사이에서는 십일조 무용론이 거론되고 있다.
십일조 옹호론자들은 십일조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기에 오랫동안 교회에서 실행되어 왔으며 교회의 재정 수입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몇몇 본문(창 14:20; 28:22; 말 3:10)을 근거로 십일조가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창세기 본문은 십일조가 모세 율법 이전에도 실행되었기 때문에 설령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십일조의 유효성의 근거가 되는 성구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오늘날에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주의 사업을 위해 드리라고 명령했으며, 또 요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십일조 시행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과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빚 또는 세금과 같아서, 이 의무를 감당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말라기 3장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으로 십일조가 중요한 잣대로 사용된다. 코올스는 이런 사람들의 입장을 핵심적으로 잘 요약하였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일종의 신성한 세금과 같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되갚기를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수입의 십분의 일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것인 그 분량을 하나님께서는 내라고 요구하신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다. 나는 하나님께서 책정하신 신성한 세금을 내야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세금을 납부해야만 나는 비로소 하나님께 무엇인가 바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주장의 근거로 구약성경, 특히 항상 말라기 3장을 인용한다. 십일조의 요구가 무조건적인 구속력을 지닌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오직 이 구절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성경적일까? 십일조가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청지기의 규율과 규범이 되는가? 구약에 명확하게 기록된 십일조에 대한 본문을 신약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옛 시대 독특한 상황에 국한되는 잠정적인 명령으로 이해할 것인가? 결국 이 문제는 십일조 시행이 십계명처럼 도덕법에 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규범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아니면 구약의 여느 제사제도처럼 당대에 유행하다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 외형은 폐기되고 그 정신만이 전해지는 것인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어떤 의미에서 십일조 납부는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의 사역에 헌신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의미 있는 방법일 수가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십일조 시행은 율법시대보다 더 충만한 계시가 주어진 신약성경에 비추어 재고해보아야 할 구약시대에 속한 예배 방법에 속한다. 십일조를 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윤리, 청지기의 삶,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의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 글에서 십일조와 관련된 구절을 중심으로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청지기의 삶의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주장하려 한다. 이 글은 성경의 구속사적인 패턴에 따라 주해할 것이며, 십일조와 관련된 본문의 배경적 연구를 통해 십일조에 대한 균형 잡힌 의미를 도출해내도록 할 것이다.
십일조와 관련된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 필자는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율법과 예배에 대하여 가르치는 부분을 소개하고, 신약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언급하는 본문들을 중심으로 구약 계시와 신약 계시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에 근거하여 제3장에서 십일조를 언급하는 본문들이 당대에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으며, 신약시대에 와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밝힐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 율법 이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9장은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해당 장(章) 2항에서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계속해서 의에 대한 완전한 법칙이 되게 하는 십계명을 주신 것을 언급하고, 이어서 3항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술한다. 일반적으로 도덕법이라 부르는 이 율법 외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의 미숙한 교회로서 의식법을 제정해 주기를 기뻐하셨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예표적인 규례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예배에 대한 것과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들, 그분의 은혜와 행위들 및 고난과 유익들을 예시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다양한 지침들을 주고 있다.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새 언약 아래에서는 폐지되었다(참조. 갈 2:4; 골 2:14, 16, 17; 단 9:27; 엡2:15, 16. 히 7-10장; 막 7:18, 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율법에는 영원한 효력을 발휘하는 도덕법과 일시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장차 올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의식법들이 있음을 천명한다. 도덕법은 신약시대에도 유효한 반면에, 의식법은 신약시대에는 폐지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유효하고 다른 시대의 다른 백성들에게는 “일반적인 정당성이 요구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지킬 의무가 없는” 시민법에 대해서도 언급한다(WCF 19장 4항). 성경에는 율법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단순히 “율법”이라고 지칭되며, 율법이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등으로 나뉜다고 분명하게 언급되거나 지적된 곳은 없지만,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율법을 이와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십일조 조항이 의식법이나 시민법에 해당하는 것일까 아니면 영원한 법인 도덕법에 속한 것일까? 이 문제는 구약의 제사장 제도와 제사 제도를 그리스도와 비교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자연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 이해와 이 문제를 다루는 본문을 탐구하는 데로 나아가게 한다.
한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여전히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규범과 표준으로서 도덕법을 제시한다. 십계명은 이 도덕법의 대표이며, 이 법은 어느 시대에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하는 율법이다(마 5:17-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요약으로 제시하셨다(신 6:5; 레 19:18; 마 22:37이하; 요 13:34, 35).
그러나 다른 한편,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와 관련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 옛 언약 하에서만 통용되던 법이 있음을 제시한다. 그것은 의식법과 시민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에서 사는 삶을 규율하는 법이다.
그래서 율법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규범적인 법이지만, 동시에 율법 중에는 새 언약의 사건 때문에 적용에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 것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율법의 세 유형 중에서 십계명과 관계된 도덕법이나, 대인관계의 법을 규정한 시민법과는 달리 십일조를 의식법에 분류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구약의 십일조는 전형적인 의식법의 하나인 봉헌물이나 예물 드림과 관련하여 언급되기 때문이다(레 27:30, 33; 민 18:20-32; 신 12:6, 11, 17; 14:22-29; 26-12; 말 3:8). 십일조가 의식법으로 분류되고 그런 특성을 지녔다고 해서 십일조의 도덕법적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돕거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비용을 지출하거나 하나님께 자기 것을 드린다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곡식의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행위자체와 관련해서는 십일조를 구약의 다른 예물 드림이나 제물 드림과 관련된 의식처럼 의식법으로 분류하는 것이 바르다.
3. 계시의 점진성과 관련 본문들
성경에는 구원역사가 점진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과 통일성 속에 다양성이 있음을 믿는다. 신약에 충만히 드러난 계시의 내용은 구약에 암시되어 있고, 구약의 교훈은 신약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성경은 이처럼 희미한 계시에서 분명한 계시로 나아가는 계시의 역사, 즉 구속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구속사의 중심이시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그 전에 주어진 계시는 준비 단계로 주어졌고, 그리스도께서 그 의미를 확연하게 알려주어야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고후 1:20; 갈 1:1-11).
히브리서 1:1-2이 이 사상을 잘 전해준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였으니.” 휴스(P. E. Hughes)는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계시의 독특성과 최종성은 옛 질서를 성취할 뿐만 아니라 옛 질서에서 수행되던 것과 대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탁월한 선지자이시며, 그분이 오심으로써 과거의 모든 예언과 약속들은 절정에 도달하였다(고후 1:20).……그래서, 구약 계시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 반면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최종자이시며 완성자라는 점에서 구약 계시와 대조된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의 점진성을 암시하는 내용을 본다. “(계시의) 점진성”에 대해 브루스(F. F. Bruce)는 이렇게 말한다. “점진성은 약속에서 성취로 이어지는 것이다.……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계시의 일련의 모든 행위들과 다양한 모양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완전하게 이뤄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예”가 되며,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만함을 보증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점진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리스도를 넘어서는 (계시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아니 한다.“
이 설명에서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성경 전체의 계시가 그리스도에게 이르기 전에는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이었다는 것과 그 안에서라야 이전에 주어졌던 계시의 의미가 충만히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속사의 점진성에 대한 내용은 구약의 의식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한 히브리서 7-10장에 잘 표현되었다. 7장 18절에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엣 규율이 연약하고 소용없는 것이므로 폐하고”(7:18). 그리고 우리는 8장 13절에서도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충만한 모습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의식법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옛 언약은 율법이 장차 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효력을 상실하였고(10:1), 새 언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어(9:15-17. 참조. 7:22, 27; 10:9, 10, 12) 옛 언약을 대체하였다.
옛 언약 하에서 살던 하나님의 백성은 실체가 아직 오지 않은 상황에 있었으며,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히 10:1)인 상징적인 예언, 모형, 의식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알았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과 더불어 새 언약의 계시가 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어 그러한 그림자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옛 시대 하에 있는 신자들의 삶에서는 본질적인 비중을 차지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충분한 중보자로 계시되고, 옛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었기 때문이다(롬 10:4; 갈 3:24). 십일조가 의식법에 속하는 것이고 의식법이 분명하게 폐지되었다면 다른 교리와 마찬가지로 십일조도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역사적인 흐름을 추적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참조. 행 15:5, 10). 11).
구속사의 절정이요 완성인 예수님의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일적인 계획과 연속성 속에서 거대한 불연속성이 생겨났다.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목적과 사역에서 진리의 통일성을 다루면서 미크(J. Meek)는 그의 신학석사 학위 논문에서 모형론의 패턴에 나타난 이 일관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했다.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패턴들 간의) 이러한 유사성들이 장차 올 것에 관하여 분명하게 예언하지는 않았지만 과거에 속한 것들에 나타난 패턴이 장차 올 것 안에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목적의 작용은 각각의 시대가 그 시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일단락이 되면서, 그 다음 시대는 이 전에 있던 것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다.”
이 언급에 따르면, 이전 시대에 속한 의식법은 그것이 시행되던 시대에 국한되거나 잠정적인 특성을 지니며, 그것 자체에는 완전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참조. 히 10:1). 이러한 까닭에 성령께서는 친히 의식법을 대신할 더 좋은 것을 증언하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의 모든 의식법의 부족한 것을 완전케 하고, 잠정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리셨다(히 10:16, 17; 렘 31:33, 34). 첫(의식)법은 낡아지는 것이요 없어질 것이며(히 8:7, 13), 약하고 무용한 것이기 때문에(히 7:18) 새로운 질서가 오기 전까지만 적용되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규정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으며, 폐하여지며(히 7:18; 10:5-7),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 제물과 두 번째 언약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히10:9).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 12).
그리스도께서는 의식법과 관련한 이전의 모든 질서를 끝내셨고, 구약의 성도들이 장차 올것이라고 기대하였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외적인(또는 형식적인) 율법들은 내적인 율법으로 바뀌었다(히 8:10; 10:16; 렘 31:33, 34). 이러한 원리에 따라 시편 기자는 의식적인 율법과 도덕적인 율법 간의 차이를 잘 파악하면서 그들이 매일 드리는 제사를 대신하여 “한 몸을 드리실” 분이 오시기를 대망하였다(시 40:6-8; 51:16-19; 참조. 삼상 15:22과 렘 7:22-23). 특히 시편 40편 6-8절에 언급된 내용은 어떤 것의 폐지와 다른 것의 출현 및 계속을 예상하였으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전 것을 폐지하고 온전한 것을 가져오신 분이시라고 밝힌다(히 10:6-7).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는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히 8:9-10).
갈라디아서 4:3과 골로새서 2:20에서 바울은 의식법을 “초등학문”(first rudiments of the world) 또는 “세상의 기본적인 원리”(basic principles of the world)라고 명명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갈 4:3). 여기서 바울이 염두에 둔 세상의 “초등학문”이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 즉, 의식법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갈 4:10). 골로새서에서는 이에 더하여 정결예법과 먹는 것도 포함되었다(골 2:16, 21). 바울은 이런 법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이런 것들은 장래 일(신약시대에 일어날 일들)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골 2:17).
그래서 구약의 모형을 해석하면서 이에 대한 신약의 원형과의 관계는 그것이 등장하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연구해야 하며, 구속사에서 그것이 등장하는 독특한 시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보스가 지적한 것처럼, “상징되는 사물들이나 (모형에 의해) 예표 되는 사물들은 서로 다른 사물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다만 그것들이 구속의 발전 단계의 낮은 단계에서 먼저 나타나고, 그 다음에 후대에 더 높은 단계에서 다시 나타난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그러므로 앞에 고찰한 바에 의하면, 모형화 된 것이나 또 이전 시대에 속한 것만을 가지고는 어떤 교리를 세우는 데 사용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모형이 미래에 대해 불확실한 지침인 것처럼, 그것은 교리를 세우는 데에도 불확실한 지침서인 것이다. 모형은 반드시 원형(또는 대형), 즉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이것을 근거로 다음 장에서 십일조 본문을 주해할 것이다. 또한 본 주해는 옛 언약과 새 언약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패턴을 염두에 둘 것이다.
4. 십일조에 관한 본문 탐구
여기서는 구약성경과 유대문헌, 그리고 신약성경에 언급된 십일조 자료를 주경학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A. 구약의 자료
(1) 창세기 14:18-20
창세기 14:18-20은 “십일조”가 처음으로 언급된 본문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십일조 제도를 세우거나 십일조의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언급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으로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 사건이 본문의 배경이다. 아브라함은 개선의 귀향길에 소돔 왕과 멜기세덱을 동시에 만났다. 멜기세덱의 존재는 신비였고 심지어 그가 왕으로 있는 “살렘”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았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쳐 그의 호의에 보답 한다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율법 이전에 있었던 십일조 제도 때문이 아니라, 당시 성소나 왕에게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고대에 널리 퍼졌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리자가 전리품을 다 가질 수 있었던 것이 관례였으니 아브라함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제사장이요 왕인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써 멜기세덱이 선포한 축복과 하나님을 찬양한 것을 암묵리에 받아들이고 그의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위엄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어쩌면 창세기 12:1-3에 언급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일 것이다.
그 후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준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나머지 부분을 소돔 왕에게 주었다(창 14:21-24). 이 나머지를 소돔 왕에게 준 것과 처음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같은 종류의 주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여기서 멜기세덱과 관련하여 강조된 것은 멜기세덱이 가지고 있던 왕 됨과 제사장 됨에 있다. 다윗은 시편 110편에서 왕으로서 멜기세덱을 후에 등장할 다윗 왕조의 원형이요 선구자로 설명한다(시 110:4).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복 빎을 받고 그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인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인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복종시킨 것을 암시한다.
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써 멜기세덱이 보유하고 있는 성소를 인정한 것이 된다. 그가 드린 십분의 일은 당대에 유행한 성소에 드리던 정기적인 공물 또는 조세였음이 분명하고, 이것은 그 후 이스라엘 농부가 가나안 땅을 사용한 대가로 십분의 일을 바치던 풍습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아브라함이 그가 믿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멜기세덱이 보유하고 있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연결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특히 히브리서 7:1-9은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던 제사장 직을 그 후에 나타날 완전한 제사장 직과 관련하여 본문의 의미를 밝혀준다. 히브리서 7:1-9은 창세기 14:18-20을 해석하면서, 십일조를 드리고 받은 예를 통하여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아브라함으로 인해 아브라함을 대표로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으므로, 멜기세덱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구약을 지배하였던 제사 제도를 주관했던 레위인보다 더 크고 위대하시다고 주장한다. 설령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브라함의 본으로 말미암아 그들보다 높으신 또 다른 분에게 십분의 일을 드리고 그분에게서 복 빎을 받았다는 전례를 남긴 것이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시다. 롱게네커(R. Longenecker)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과 혈통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물에 근거한 영원한 제사장 직의 선례와 원형으로서 멜기세덱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선례와 원형을 확정하고 난 후 이런 용어로써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4장은 사실 예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십일조 사건은 장차 올 그리스도를 예시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위대하시다는 증거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레위인의 제사장보다 더 크심을 보여주는 예이지, 십일조 제도 자체에 대한 것과는 무관하다.
이런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창세기 14:18-20은 어떤 의미에서 십일조를 언급한 성경의 다른 본문과 상당히 다르다. 첫째, 본문의 십일조는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 다루는, 땅에서 생산되는 소출이 아니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관련되었다(히 7:2, 4).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후에 십분의 일을 반복해서 드렸다는 언급이 없고, 그 당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행위 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둘째, 본문의 상황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진해서, 그가 주도권을 잡고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어떤 종교적인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고대에서 자기 소유의 십분의 일이 제의와 정부 유지를 위해 바치는 고대의 널리 퍼져 있던 문화 또는 풍습에 따른 것이다. 이런 식의 풍습은 당시 가나안, 페니키아, 아랍, 카르타고 그리고 리디아에서 실행되었으며, 헬라인들과 로마인들도 관례적으로 전쟁의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기증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은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소득의 10%를 드리는 것이 헌금의 표준을 가르치는 본문이 아니다.
(2) 창세기 28:20-22
성경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창세기 28:20-22에서 발견된다. 본문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가면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맹세한 내용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피난 생활 동안 자신과 함께 해주신다면 하나님을 자신의 개인적인 신(또는 하나님)으로 삼겠으며, 그분께 예배하겠다고 맹세하였다(21절). 또한 야곱은 만일 하나님께서 훗날 자신을 건강하고 갑부가 되게 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기가 얻은 재물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22절).
여기서도 야곱에게는 십일조를 바치는 데 어떠한 종교적인 의무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직까지 십일조 제도의 종교적인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야곱의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부과한 의무를 수행해야한다는 생각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는 단지 자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음식과 의복을 주어) 보호하고 여행 중에 지켜 무사히 귀환하게 하는 등 자기에게 은총을 베풀 경우 그가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고 지금 그가 있는 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겠다고 하면서 자기가 얻게 될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십일조는 서원금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야곱이 한 맹세의 성취와 관련하여 우리는 창세기 35:7에서 야곱이 제단을 쌓았다는 것에서 배울 수 있다. 카일과 델리취(Keil and Delitsch)는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도 드렸을 것이라”고 제안하지만, 우리로서는 야곱이 여러 다양한 종류의 가축과 생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맹세한 약속을 어떻게 성취했는지, 아니, 성취하기나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적어도, 창세기 기자는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한다. 즉, 십일조 법칙의 실행 여부가 창세기 기자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성경 어디에서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든가, 그렇게 하려고 어떤 절차를 밟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 후에 하나님께서 야곱이 한 약속의 말을 꼬투리 잡아 십일조를 했는지 또는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였다는 암시도 전혀 찾을 수 없다. 또한, 구약에서는 야곱이 한 말을 근거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십일조를 주장하거나 야곱 시대에 십일조 제도가 존재했다고 가르치는 근거를 삼는 본문이 없다.
십일조 체계는 야곱의 맹세 사건으로부터 400년이 지나서야 등장하였는데, 그것도 한 나라 전체가 공동으로 생활하던 시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는 특정 지파의 생활을 지지하기 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주어지는 모세 율법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모세 율법에 십일조가 언급된 곳은 레위기 27:30-33, 민수기 18:21-32, 신명기 12:4-19, 14:22-29과 26:12이다. 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자.
(3) 레위기 27:30-33
레위기 27:30-33에는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거룩한 것”으로 따로 떼어 놓으라는 명령이 있다. 십분의 일은 “여호와에게 속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할 근거로 제시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삶과 관련이 있다.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물건에는 동물의 십분의 일도 포함되었다. 그것은 열 개 중에서 임의로 하나를 고르는 방식으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바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선발하지 못하도록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 번째를 바치게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5분의 1(20%)을 더 바치도록 하였다.25) 이 본문은 여호와께서 짐승의 초 태생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또 다른 계명에 연이어 등장하는데(예를 들어 출애굽기 13:2, 12-15; 22:22, 29-30; 34:19; 레위기 27:6; 민수기 3:13; 8:16, 17; 18:15; 신명기 15:19; 누가복음 2:3), 코울스(Cowles)는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들이다. 만일, 십일조 계명이 오늘날도 구속력이 있는 말씀이라면 왜 가축의 모든 초 태생을 여호와에게 돌려야 한다는 계명에 대해서는 주의를 하지 않는가? 두 계명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두 계명 모두 같은 근거로 하나님께 바칠 것을 요구하는 계명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레위기 27장의 문맥에서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모든 개인에게 부과된 일반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어떤 계층, 예를 들어 땅 주인들에게만 부과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십일조가 땅 주인의 순수 수입의 십일조가 아니라 전체 추수한 분량의 십일조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 땅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일하는 품꾼이었다는 전제에서 주어진 명령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5장에서 이 문제를 분명하게 언급하셨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레 25:23).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레 25:55). 그래서 레위기에 각종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대한 규정이 제시된 후 본문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생산되는 것(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심지어 소나 양이라도)은 다 십분의 일 분량을 하나님께서 의당 받으셔야 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십분의 일은 이 땅을 하나님께 빌려 쓴 대가로 지불하는 토지 사용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4) 민수기 18:21-32
민수기 18:21-32에는 십일조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며,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가 구체적으로 명기되었다. 민수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그분이 레위인에게 주시는 기업이라고 밝히신다(20, 21절). 제사장은 배제되고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모든 십일조를 받는 유일한 사람들로 지명되었다.28)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1). 이것은 다른 지파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는 대신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분깃과 기업으로서 “여호와께 속한 것” 즉, 땅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민 18:20). 다시 레위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것의 십의 일을 여호와께 예물로 드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낸 십일조의 십일조인 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에서 경작한 것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주의 것”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주께 돌려드린다는 표로 그들이 받은 십일조 중에서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돌려드려야 했다. 이를테면, 그 십분의 일의 십분의 일은 아론 제사장의 기업이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18:28). 이 최종 십분의 일은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다(민 18:29. cf. 민 18:12-13). 그리고 남은 십분의 구(아홉)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원들인 레위인에게 주어야 한다(18:30). 이것은 말하자면, 밭에서 생산되는 소출이 없는 레위인이 회막에서 일한 대가(보수)였다(민 18:31).29).
민수기 본문은 레위기 27장 본문과 달리 십일조 규정을 농산물에만 한정한다(18:27, 30). 그리고 십일조는 제사장들을 위한 예물과는 달리 어디서든지 먹을 수 있었다(18:31). 본문은 십일조의 목적이 성소에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유지에 있음을 강조한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레위인에게 주심으로써 땅이 없음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레위인들을 공동체의 보호에 맡겼던 것이다.
(5) 신명기 12:4-19
신명기에서는 십일조에 대해 다른 관점이 강조되고 있다. 본문에 언급된 십일조는 가나안 여러 족속들이 여기 저기 아무 곳에서나 제단을 쌓는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한 곳을 정하여 그곳에서 제물을 드려야 하는 예배의 중앙화 문제를 다루는 12장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십일조를 비롯하여 여러 제물들을 드릴 때 모이는 중앙 장소가 있었다. 이곳은 나중에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백성들은 그 중앙 성소로부터 아무리 먼 곳에 산다고 해도 모두 그곳으로 가서 십일조 음식을 먹어야 했다(신 12:5-7).
본문은 영원한 예배 장소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야 하는 성스러운 식사를 강조한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한 장소에서 레위인과 함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네 우양의 처음 낳은 것과 너의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너의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을 먹어야 했다. 여기에 열거된 예물들은 원칙상 자기 고향이나 집안이나 다른 어느 곳에서 먹어 없애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신 12:17, 18). 이런 행동에서도 레위인에 대한 배려가 나타난다.
신명기 본문에서도 십일조는 농산물에 한정하고, 다른 소득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것은 당대의 십일조가 식료품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도 백성들이 아니고는 달리 식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레위인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더 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신 12:19). 이렇게 공동 식사를 하면서, 그들이 그것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기쁘게 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씀 때문이다(신 12:18). 레위인과 아울러 언급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추수의 당사자만 추수한 것으로 즐거워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소출의 십분의 일 사용은 이런 사람들과의 나눔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신명기 14:22-29; 26:12-15
신명기 14:22-29에서는 신명기 12장에 언급된 규율이 다시금 강조되었다. 아주 오래 전에 실시된 풍습인 농산물의 십분의 일을 내는 것이 일종의 제사였기 때문에 그것을 중앙 성소로 가져와야 했던 것이다. 중앙 성소로부터 먼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들을 가져오는 부담을 줄여주려고 소비할 곡식들을 돈으로 바꾸되 중앙 성소에 와서 반드시 그 액수에 해당하는 음식물을 사서 하나님께서 지정한 장소에서 다 소비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가족끼리만 음식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없는 레위인과 함께 그리해야 했다(14:27, 29). 레위인에게는 분깃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레위기 27:30-33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며(14: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을 즐거워하는 길이다.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신 14:26-27). 그렇다면 십일조는 처음부터 열한 지파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여러 명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십일조를 받은 중앙 성소의 책임자들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눠 주어야 했다.
이런 풍습은 매 삼년마다 소위 “불쌍한 사람들”의 먹을 것 공급을 위해 추수의 십분의 일을 사용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들 중에는 레위인, 나그네,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고아), 남편이 없는 여자들(과부들)이 포함되었다. 이런 십일조는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소비하였다(14:28). 여기 열거된 3년 차 십일조 수혜자들은 사회보장의 형식으로 공동체에서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런 유의 십일조에 대해서는 신명기 26:12-15에 좀 더 자세하게 명기되었다. 삼년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그 해 소득의 십분의 일을 사용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지켰다”고 선언하였다(신 26:14-15). 이러한 선서는 성소가 아니라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행해졌는데, 추측컨대 자기 집에서 이러한 선언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선언에는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자기가 삼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와 관련된 율법을 성취했다는 것(26:13b, 14b), 둘째 그 십일조를 죽은 자에게 주지 않았다는 것(26:14b), 셋째 이스라엘과 가나안 땅에 복을 주실 것(26:15) 등이다. 특히 14절에 언급된 십일조를 죽은 자에게 주지 않았다는 고백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지만, 이것이 의식상 정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는 폰라트의 제안은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cf. 호 9:24; 학 2:13).
여기서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율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토지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 등 자기의 의무를 다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써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올바르다는 것이 증명되며, 그가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그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모세오경에는 십일조에 대하여 약간씩 다르게 언급되었다. 레위기에서는 십일조에 곡식과 가축이 포함되는 반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는 십일조의 품목이 밭에서 생산되는 것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부분으로서 전체를 대표한다는 원리(pars prototo)가 적용되었다. 그가 자기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에서 농사지어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과 십일조는 땅의 기업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땅은 있어도 그곳에서 나는 소출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을 그들에게 주어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행위의 실천을 의미했다.
특히, 신명기의 문맥에서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려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어 소비하는 것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배웠다(신 14: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셨다(신 8:2, 11, 14, 18; 12:6, 12, 18; 14:23; 16:3; 26:10, 13-15).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소득이 없는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서 그들이 행할 행동 중의 하나였다(신 14:2, 21; 26:18; 27:9, 10; 28:9, 10).
(7) 모세오경 이외의 자료들
모세오경 이외에 십일조가 언급된 곳은 사무엘상 8:15, 17; 역대하 31:5, 6, 12; 느헤미야 10:37, 38; 12:44-47; 13:5, 12; 아모스 4:4; 말라기 3:8-10 등이다. 이 본문들은 율법으로 주어진 십일조에 대한 교훈이 실제로 가나안 땅에서 삶을 사는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삶에서 어떻게 시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본문들이다.
ㄱ. 사무엘상 8:15, 17.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갖기로 결정한 것을 두고 백성들을 경고하는 본문이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왕이 등극하게 되면 왕은 백성에게서 땅의 소산물과 가축 중에서 십분의 일을 취할 것이라고 왕권 제도를 도입하게 될 경우에 백성들이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당하게 되는 부담을 설명한다. 사무엘이 지적한 것처럼, 왕이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십분의 일은 고대 여러 나라들 중에서 관례화되어 있던 부가적인 시민세(市民稅)이다. 그러므로 말할 필요도 없이 본문에 언급된 십분의 일은 모세오경에서 레위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십일조와 아무 관계도 없을뿐더러 종교적인 의미도 지니지 않았고 오히려 창세기 14장의 경우처럼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는 일종의 세금이다.
ㄴ. 역대하 31:5, 6, 12
역대하 31장은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을 언급한다. 유대 왕 히스기야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잊혀왔던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섬기고 생활을 지지해주는 것과 관련하여 개혁을 감행하였다(2-4절). 이런 개혁은 새로울 것이 없고 전부터 있어왔던 것을 회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예를 들어 레위기 27장; 민수기 18:20-32; 신 12:15, 16; 14:24),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요구에 따라 곡식의 십일조를 풍성히 가져왔고 레위인에게 이것을 나눠주었다(31:11-19). 이에 대해 제사장 아사랴가 “우리가 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다”(31:10)고 말한 것으로 보아 제사장들이 그 전에 가난에 허덕였다는 것과 십일조가 생계비와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레위인들이 백성들에게 잊혀 방임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백성들은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먹고 남음이 있을 정도로(5, 10절) 자신들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가져왔다.
ㄷ. 느헤미야 10:37-39; 12:44-47; 13:5, 12.
느헤미야에는 십일조를 언급하는 본문이 세 곳 있다. 이 본문들은 포로 후기에 십일조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느헤미야 10:37-39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가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이 예물로 드리는 밭의 소산물을 받고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집(성전)에 갖다 놓으라는 명령에 백성들이 반응한 것이 묘사되어 있다.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 이 의무를 잊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레위인에게 스스로 십일조를 거두어 그 중의 십분의 일을 다른 여러 예물들(헌물들)을 받아 넣어두는 창고에 두라고 함으로써 레위인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지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느 10:37-39). 그 창고를 성전 옆에 둔 것으로 보아, 십일조는 예루살렘 성전에 집중적으로 모아졌고, 거둬들인 십일조를 사용하는 것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거둬들인 십분의 일 중의 십분의 일을 성전 창고에 있는 각 방에 두어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에도 성전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제 체계적인 십일조와 헌물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12:44-47에서는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위해 율법이 요구한 거제물, 처음 익은 곡식, 십일조 등을 여러 마을에서 수집하여 성전 창고에 쌓으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왜 주어야 하는지도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결례의 일에 힘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이 바로 십일조의 수혜자들이다(느 12:45). 민수기 18장의 규정이 여기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명령에 따라 십일조를 거둬들이는 창고가 지어져 체계적으로 레위인들을 돕는 장치가 마련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십일조의 혜택을 받아야 할 레위인은 정작 생계 문제 때문에 성전을 버리고 자기들의 밭으로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느 13:10). 이 때문에 제의가 중단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이 방치되었다(느 13:11). 이렇게 된 것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관장하던 제사장이 성전 창고에 모아둔 십일조를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 13:7-9에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가 소상히 밝혀져 있다. 레위인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게 된 원인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아서가 아니라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횡령과 분배 체제의 문제에 있었다. 당시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 창고를 관리하던 책임자는 제사장 엘리아십이었다. 그런데 엘리아십은 도비야라는 사람과 공모하여 레위인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성전 옆에 마련한 성전 창고에 있던 십일조를 비롯한 식량과 예물들을 자기들의 개인 창고로 옮겨놓았다(느 13:4-9). 그 결과 성전 창고에는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최초로 제사장이 주도한 십일조를 도둑질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말 3:8, 9과 비교).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 할 수 없게 되자 성전을 떠나 각각 자기 고향으로 도망갔던 것이다(13:10). 느헤미야는 몹시 화를 냈다. 그는 창고 책임자와 부책임자를 당장에 교체하여, “제사장 셀레먀와 율법교사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다”(느 13:13). 새로 뽑힌 감독관은 충직한 자로 인정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들이 하는 일은 형제들에게 거둬들인 십일조를 분배하는 일이었다. 그 후부터 다시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십일조가 성전 창고에 쌓이기 시작하였다(느 13:12).
이렇게 하여 포로 후기 시대에 와서 이 시대에는 레위인 보호 장치와 같은 십일조가 세금과 같이 정기적으로 드려져 그것이 레위인의 생계를 지원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본문에서도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의 생계의 수단으로 자리한다.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레위인들의 생계를 도울뿐더러, 자신들이 예배의 중심인 성전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했다.
ㄹ. 아모스 4:4.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인들이 자행한 하나님에 대한 배역 행위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예전 그들의 성소 자리인 벧엘에서 제의를 행하는데 심지어 그들의 성전 제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구체적인 일례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는다. 본문에 언급된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보려무나”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율법주의를 비웃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의식과 같은 것으로도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삼 년마다 행하던 십일조를 삼 일에 한 번씩이라도 하면서 복을 얻으려 하였다. 잘못된 기복신앙이 십일조 시행과 연루되어 나타난 대표적인 예이다. 아모스는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을 비꼬았다. 코울스는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들의 악한 생활 때문에 그들이 드리는 십일조가 여호와 앞에 가납되지 않는데도 그들은 십일조를 꼬박 꼬박 드렸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자동적으로 복 받는 비결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의 생활이 항상 악하므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그들은 주장할 수 없었다.“ 이렇듯 십일조를 단순한 종교행위와 복을 받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명백한 종교적인 타락이다. 북 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이 십일조 정신의 타락과 무관하지 않다.
ㅁ. 말라기 3:7-12.
구약성경에서 마지막 십일조 언급이 등장하는 본문은 말라기 3:8-12이다. 본문은 십일조 강조론 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인용하는 본문이다. 심지어 이 본문을 근거로 복을 받는 비결까지 제시되기도 한다. 이 본문은 반드시 말라기 전체의 맥락에서, 그것이 불가능 하다면 최소한 3장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는데도 대부분 십일조 옹호론자들은 주로 “십일조”라는 용어가 단독적으로 등장하는 9절과 10절만을 인용하는 경향이 있다.
말라기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둑질하였다고 비난하였다(3:8-9). 십일조 옹호론자인 사무엘 영(S. Young)은 이 본문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맥락에서 이해하면서(말 2:17; 3:14),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십일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드리지 않는 것은 널리 퍼져 있던 전적인 부패였다. 고대에는 드리는 것이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부주의한 드림과 반짝 드리고 마는 것은 헛되고 널리 퍼진 죄악의 증후이다.” 한편 이것은 맞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레위인이 사람들에게 잊혀져 왔고 그들은 기업의 땅에서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 역시 백성들에게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 하였다”고 백성들의 양심을 자극하여 죄를 깨닫게 한 듯 보인다(3:7).
그런데 과연 말라기 본문에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향한 말씀일까? 말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몇 군데(말 1:2; 3:9) 그 대상이 모호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라기의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이 “제사장들”이라는 게 분명하다(1:6; 2:1, 7). 이들은 특히 하나님께서 성전 제의와 관련하여 레위인과 세운 언약을 파기하면서(2:4, 5, 8)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더럽힌 사람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더러운 떡을 드리고(1:7) 병든 짐승들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림으로써(1:8)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다(1:10). 그런데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발뺌을 하거나 그렇게 한 것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뻔뻔스럽게 둘러댔다(1:1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저주하시고 그들의 복을 저주하리라는 말씀을 내리신다(2:2).
다시 말해서 말라기 3:8-9의 모호한 표현인 “도둑질하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바치지 않았다고 꾸짖으신 경우는 없다. 오히려 이사야 1:11-13처럼, 말라기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바치는 일을 행하였다(말 1:8, 10, 14. cf. 3:3, 4). 더욱이 본문은 단지 “십일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제사의 대표적인 “봉헌물”이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말 3:8) 십일조를 봉헌물을 취급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십일조와 봉헌물은 제사장들이 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것이었다(말 1:13; 2;13; 3:4). 더욱이 말라기 2장에 제사장들의 도덕적 부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3장 내용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말라기 3장에는 성전에서 일하는 당사자들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의로운 제물을 드리게 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언급되었다(3:1-3). 3장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헌물이 원래 수혜자에게로 돌아가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였던 사람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을 선포한다(3:4-6).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3장 7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즉 회개하라는 요청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둑질 한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 역시 1, 2장에서 제사장들에게 행한 심판 내용의 연속이다. 제사장들이 2장에서 “저주”를 언도받은 것은 하나님의 것, 좀 더 구체적으로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둑질한 것임이 밝혀졌다(3:8). 이것은 제사장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그리하였다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표현했지만(3:9), 그것이 성전에 있는 “창고”와 관련되어 언급된 것으로 보아(3:10) 백성들보다는 이 일의 당사자가 성전과 관련이 있는 제사장, 레위인, 지도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라는 강한 말로써 백성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밝히신다. “도둑질하다”(qaba)라는 단어는 성경에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서 정확한 의미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cf. 잠 22:23). 몇 가지 이해가 가능한데, “강압적으로 탈취하다”(표준새번역; “to take forcibly, defraud”, REB), “속이다”(공동번역; “to cheat, Jerusalem Bible), “강탈하다”(to rob, NIV, RSV) 등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소극적인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잠 22:23).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십일조와 헌물을 전혀 하나님께 드리지 않든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을 그리로 넣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훔치려 했다”고 설명한 카일 델리취(Keil-Delitsch)는 본문의 의미를 약화시켰다고 생각된다. 카일과 델리취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의미로 본문을 이해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말라기 시대의 잘못을 당사자인 제사장들은 빼고 그 잘못을 일반화시켜 백성들에게 전가한 대표적인 예이다. 소득이 없이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마련된 성전 옆 곡식 창고가 비어 있어 레위인이 가난에 허덕일 정도로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종들은 더 이상 생활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역을 그만두고 자기가 밭을 갈아 생계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말라기에 언급된 십일조는 봉헌물(테루마, terumah)과 떼어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와 봉헌물 모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출 25:1-7; 레 6:20; 15:17-21; 18:8, 11, 19).
그런데 만일 이것이 백성들의 문제였다면 이처럼 강한 의미를 지닌 “도둑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느헤미야 13장의 상황처럼 제사장이 레위인에게 돌아가야 할 창고의 물건을 제사장이 강탈하여 레위인이 성전 제의를 집행하는 데 어려움이 왔을 가능성이 더 많다. 예물과 십일조(민 18:24; 신 12:6, 11, 17; 느 10:37, 39; 12:44; 13:5)는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고(레 27:30; 민 18:24), 그 중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전의 창고에 쌓아놓아 제사장에게 관리하기를 요구하였었다(느 10:37, 38; 12:44-47; 13:12). 그런데, 느헤미야 때에 제사장 중에서 성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예물과 십일조를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레위인들이 자기의 밭으로 도망가는 일이 있었던 일이 있었는데(느 13:4-9), 이것이 “도둑질 한다”고 표현된 말라기의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의 종들(레위인)과 동일시하셨으며,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성전 창고 강탈 행위를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제사장이 레위인들의 몫을 자기들이 챙겼다는 것은 느헤미야에서뿐만 아니라 말라기 전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드리는 좋은 봉헌물을 빼돌리고 흠이 있는 것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재산을 축적했고(말 1:6-8, 14; 2:2, 14-16; 3:8-11),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은 레위인에게 주어야할 성전 창고에 축적되어 있는 것을 착복함으로써 레위인이 의로운 제사 직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다(참조. 말 3:3-6).
말라기 3:10은 십일조가 어떤 종류의 십일조인지를 암시하며, 말라기서의 분위기는 느헤미야의 상황과 비슷하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본문에 언급된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레위인을 비롯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창고에 저장해두어야 하는 십일조이다(참조. 느 10:37-39). 그리고 계속해서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착에 이르는 과거에 내리신 하나님의 복을 회고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지금도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지 아니 주시는지를 시험해보라”는 말씀을 받는다.
여기서 “그것으로”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 “온전한 십일조”를 가리킬까 아니면 “창고에 음식을 넣어두어 필요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 하라”는, 즉 창고의 물건 빼돌리기를 하지 말라는 말씀일까? 문맥상 후자를 가리킨다는 것이 분명하다. 제사장들의 탐욕으로 십일조를 저장한 창고에서 빼돌리기를 염두에 두면서 이 말을 했음에 틀림이 없다. 밴게메렌은 본문에 담겨 있는 문제가 탐욕, 이기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믿지 못함과 불순종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본문의 상황이 제사장들의 문제인 것을 암시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레위 언약을 어긴 그들(말 2:5)이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는 모든 부분에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제사장들)에게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라”고까지 말씀하신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라기 선지자가 본문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말 3:6-8, 13),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지만(말 1:9-10),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씻으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다(3: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3:4),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1:11. 비교. 롬 9;25, 30; 11:11, 12, 25; 15:9-13; 16:26). 과거에 바쳤고 또 지금 말라기 시대에 바쳐지고 있는 봉헌물과 십일조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한 제물을 드리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받으시는 것이 될 것이다(히 7:21-25; 8:1, 9-14, 23-25; 9:9, 12-14). 우리를 포함하여 만국(이방인)이 온전한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말 1:11. 비교. 3:12).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제사장과 제사 제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바른 봉헌물과 제물과 심지어 십일조의 의미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구약성경에서 가르친 십일조에 대한 교훈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구약의 십일조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경륜인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과 이웃을 위한 의무인 한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는 십일조에 대한 각기 다른 기원이 있었다.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배려하는 것과 백성들이 얻은 것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구약시대 말기에 들어서면서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일조 제도라도 얼마든지 타락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일종의 경고가 된다. 아모스 시대에는 십일조가 물질적인 복을 받는 수단으로 악용되었고, 느헤미야와 말라기 시대에는 특정한 제사장들의 탐욕으로 인해 수많은 레위인들이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소수의 종교 지도자가 백성들이 낸 것을 독차지함으로써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십일조 본문에서 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재산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직의 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구약의 여러 경우들을 신약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내용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 외적인 자료(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문헌들)와 신약성경에 나타난 십일조 문제를 살펴보자.
B. 성경 외적인 자료
신, 구약 중간기에 나온 자료들은 그 시대에 유대인들의 드림의 원칙에서 십일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약성경과 유사한 것도 있지만 좀 더 세분화되든지 다른 의도로 빗나간 경우가 많다.
주전 2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는 외경 토비트 1:6-9에는 세 종류의 십일조가 언급되어 있다. 제사장에게 드리는 첫 번째 십일조(비교. 민 18:20-32; 유디트 11:13), 예루살렘에서 소비해야 하는 두 번째 십일조(비교. 신 12:6-17; 14:22-27),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세 번째 십일조(비교. 신 14:28, 29)가 그것이다. 백성들은 소출의 십일조(유디트 5:13)를 기쁜 마음으로 대제사장에게 드렸다(시락 35:6-11). 그들은 십일조를 거룩한 것으로 생각했다(마카베상 10:31). 십일조가 정치적인 세금과 함께 언급된 경우도 있었다(마카베상 3:49; 11:35). 이렇듯 외경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구약의 십일조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요세푸스는 그의 책에서 주후 1세기에도 위와 같이 세 종류의 십일조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주후 1세기에는 십일조가 레위인보다는 제사장들에게로 돌아갔다( 『고대사』xi,5, 8; 『아피온 반박문』I, 22. 참조. 히 7:5). 좀 더 권력을 쥐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현물 가치가 있는 십일조를 관리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는 십일조를 자기나 측근 사람들만 전유하는 바람에 많은 평제사장들은 빈곤에 허덕이거나 심지어 굶어죽는 일까지 있었다.
미쉬나(Mishnah)에는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을 마아세롯(Masseroth) 항목에서 다룬다. 거기서는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드려야할 일반적인 규정이 나열되어 있다. “알리기에 좋고 관상용으로 사용되는 것과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은 십일조를 할 만한 것이다”(Masseroth 1:1). 이 말은 식사 목적으로 재배되는 모든 생산물이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대상이라는 의미이다(1:1이하; 3:9; 4:6).52)
미쉬나에는 가축의 십일조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두 번째 십일조라고 불리는(Masser Sheni 1:2) 가축의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무 가운데 하나이다(Hagigah 1:4).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므로(Shekalim 1:7; 3:1) 팔거나 다른 것과 교환해서는 안 되었다(Masser Sheni 1:2).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미쉬나에 언급된 십일조 규정을 그대로 행하였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마 23:23; 눅 11:42; 18:12).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정확하게 십일조 내는 것에 관심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율법에 명기한 십일조 규정을 엄격하게 지켰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C. 신약의 자료
신약성경에서는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 서너 구절밖에 되지 않는다.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18:12 그리고 히브리서 7:1-10이 “십일조”라는 단어가 언급된 유일한 본문들이다.
(1) 복음서(마 23:23; 눅 11:42; 18:12)
복음서에 기록된 십일조와 관련된 언급은 예수님께서 엄격한 십일조를 내는 데 관심이 있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으시는 상황에 등장한다.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두 종교 집단을 꾸짖으시면서 언급하신 말씀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a).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러나 이것도 해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23:23b). 이 후반부의 말씀은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님의 공인된 말씀으로 이해되고 있다. 본문을 이후 시대에도 이와 똑같이 십일조 생활을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일까? 비숴(L. Vischer)가 바르게 관찰하였다시피, “신약성경 어디에도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기를 요구하는 곳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제자들도 그런 요구를 알지 못했다.” 마태복음 23장에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왜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십일조를 실행했다거나 적극적으로 실행하라고 가르친 언급이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저것(엄격한 십일조 행하기)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본문을 예수님께서 랍비들의 성경 해석을 지지하셨고 후대에도 그대로 행하라고 권장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을까? 아니면 예수님은 다만 모세 율법에 명기된 십일조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을까?
마태복음 문맥으로 보아서는, 후자(랍비들의 해석과 관련된 언급)가 더 그럴 듯해 보인다. 그 후 계속되는 바리새인들에게 가해지는 화의 내용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와 상관없이 그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보다는 랍비들이 가르친 율법 행함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마 23:24이하). 그러므로 마태복음 23:23만으로 너무 성급하게 십일조가 신약 시대에도 신자들에게 부과된 의무 규정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본문의 의미를 찬찬히 살펴보자.
마태복음 23:23은 예수님께서 율법교사들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과 일상생황에서 자행되는 율법주의를 다루고 계신 맥락에서 주신 말씀이다.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14:22-23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장로들의 유전(미쉬나)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가장 작은 식물 중에서라도 엄격하게 십분의 일을 내려는 생각에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내려 하였다. 물론 이것은 율법(특히 신명기 14:22-23)이 요구하거나 율법의 의도에서 벗어나고 과도한 율법 준수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율법교사들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었으니, 예수님도 그것 자체로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셨고 그런 행위 자체를 비난하실 의도는 없으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지키는 엄격한 십일조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셨다. 엄격하게 십일조를 하는 여부에 관한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다른 부분에서도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율법에 명기된 것 이상의 것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단지, 예수님의 비난의 핵심은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의 행위로 인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세부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과도한 열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하였으며 성경에서 좀 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고 가르치는 일은 무시하였다. 그들이 무시한 것은 “더욱 무거운 것” 즉, “좀 더 핵심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것,” 또는 주변적이거나 사소한 것에 대해 “더 중요한 것”이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참 종교의 강령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며, 이 세 가지는 자비 또는 이웃 사랑이라는 말로써 요약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제의 또는 의식법을 준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사람들이 유대교 자체 내에서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하는 한, 율법의 수많은 세부적인 것을 엄격하게 지키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폭로하는 데 있다. 바리새주의가 관심을 갖는 세심한 율법주의는 “기껏해야 약간 선심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런 종교 행위가 중시되는 곳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자비가 발붙일 곳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외적인 규정을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내용과 의미가 이러한 모든 규정의 기초라는 것을 말씀하는 데 더 관심을 두신다. 본문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바리새인들이 부차적인 것에 집중하느라 우선적인 것을 잊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과 같다(마 23:24). 하루살이와 낙타 둘 다 유대인에게는 부정한 동물이지만,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은 부정한 하루살이를 걸러내면서, 하루살이보다 덩치가 훨씬 더 큰 부정한 동물인 낙타를 삼키는 모순을 저질렀던 것이다(레 11:4).
이런 의미에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정말 두 가지를 실행할 것을 권하였느냐의 여부에 대한 문제 또는 예수님께서 구약과 예수님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안에 있는 자료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카슨은 이 어구 속에 예수님은 바리새인으로서 마땅히 행했어야 하는 것-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서술하시는 것뿐이지(Jesus describes what the Pharisees should have done-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 “저것도”로써 바리새인들이 어떤 것이든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듯이 엄격하게 십일조를 낼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고 바르게 지적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언어의 표현 방식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뱅크스(Banks)가 잘 요약하였듯이 “너희가 하고 싶다면 그런 사사로운 규칙들을 지켜라. 하지만 정말 문제시되는 것들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63)
그러므로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취한다면 예수님은 율법주의, 엄격한 십일조를 인정하시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단지 엄격한 십일조 준수와 자비를 요구하는 율법 사이에 어떤 모순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심지어 가장 작은 식물에까지 십일조를 하기를 원한다면 잘 하는 짓이고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들 즉,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이라”는 의도가 내포된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율법교사들이 생각하는 사소한 것들은 그것이 원리와 상충만 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하는 행동은 정당성이 인정된다. 당대의 신학자로서 율법교사와 그들이 만든 신학에 따라 생활 속에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은 가벼운 것(즉 사소한 것)에 목숨 걸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공의를 간과하였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이웃 사랑, 즉 구제라고 한다면 속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이 주님의 의도이다(눅 11:41). 결국 슈바이처가 핵심을 잘 밝혔듯이 “십일조를 지켜야 한다는 명제는 제거된다.”
이와 같은 마태복음의 중심 사상은 누가복음에서도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과 동일한 말씀이 누가복음 11:42에도 나오는데, 마태의 문맥과 누가의 문맥이 다르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본문을 이해하는 문맥은 누가복음 11:37-52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종교의 외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영적인 것을 간과하는 사람들을 언급하신다. 바리새인과 관련된 본문은 37-44절이고, 율법교사와 관련된 본문은 45-52절이다. 37-52절에는 여섯 개의 화(禍)가 언급되었는데, 바리새인에게 주시는 화가 세 개(42, 43, 44절), 율법교사에게 주시는 화가 세 개(46, 47, 52절)이다.
42절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화를 바리새인들에게 내리면서 하신 말씀이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신학자인 율법교사와 율법 실행자인 바리새인 모두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신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실행자인 바리새인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셨다. 이런 맥락에서 42절은 십일조 목록에 구체적으로 열거되지 않은 박하를 비롯하여 십일조 대상의 식물이 아닌 운향까지 포함할 정도로 엄격하게 십일조를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은 세부적인 법조문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마음의 더 중요하고 무거운 문제(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를 무시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선언하신 화이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마땅히 행해야 할 것과 (덜 중요하지만)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 사이의 대조”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23:23에도 동일하게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에서 당위적인 말씀으로 보이는 “할지니라(εδει)”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놀란드(J. Nolland)는 본문의 의미상 미완료과거 “에데이”(εδει)가 “사실과 반대되는 현재 조건의 귀결”을 가리킬 개연성이 짙다고 밝힌다. 그 의미를 번역어로 정확하게 옮기기는 어렵지만 본문의 의미는 이렇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사실은 그렇지 않지만)……말아야 한다(If you were to do the will of God, it would be necessary to……)”가 될 것이다.
특히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2, 14에서 바리새인이 자기가 “십일조를 엄격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것의 허점을 지적하셨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면서, 자기가 행하는 몇 가지 일들(금식, 엄격한 십일조 등)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의 행위가 조금도 의롭지 않았다(눅 18:14).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당장에 십일조 행위를 금하거나 그것을 폐하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을까?
마샬은 바리새인들의 정결 예법을 분명히 파기하신 예수님께서 십일조 율법을 이런 식으로 견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정결 예법에 관한 구전(장로의 유전)을 거부한 것과 이웃 사랑과 같은 인간애를 목적으로 하는 구약의 십일조 원리를 견지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단커(Danker)는 신약 계시의 흐름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누가가 이 글을 여기에 언급한 것은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조상의 풍습대로 행하지만,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점에 있어 자유로웠으며(행 15장),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라는 갈라디아서 2:10에 따라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사람이 일반적인 관심사로서 가난한 사람을 책임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신약 교회에게는 유대인들에게 요구하던 십일조가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cf. 약 1:27).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의 십일조 본문은 신약시대가 아니라 구약시대의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상이 바리새인이라는 점이 이러한 결론에 더욱 무게를 실어준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당시 그분의 구속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 있고, 여전히 구약의 엄격한 요구들이 유효한 시기에(비교. 롬 8:3, 4; 갈 4:4, 5),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드리는 데 충실해야 함을 묵과하셨을 것이다. 십일조는 의식법적인 문제이고, 그 당시 모세 율법의 명령들이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에 의존하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기 전에 하신 그분의 다른 비슷한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자신이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마 15:24. 비교. 롬 15:8). 그분은 구약시대의 용어로써 가나안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시대가 복음의 우주성(보편성)이 강조되는 시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구(舊) 시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하시는 동안과 그분의 죽으심 이후에 발생한 변화의 차이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는 옛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고 사람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었다(참조. 히 9:15-17). 예수님의 사역은 “때가 찼다”는 선언과 함께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나(막 1:15), 옛 시대로부터 새 시대로의 실제적인 전환점은 그분의 죽으심,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써 분명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옛 언약자의 죽으심이 새 언약을 유효하게 만든 것이다(히 9:17). 우리는 유월절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기 때문에 새로운 떡덩이가 되었다(고전 5:7). 구약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후 오신 오순절 성령 강림이다(행 2:1-4. 비교. 1:4, 5, 8. 이 본문을 요한복음 14:16, 17, 26; 15:26; 16:7-13과 비교해보라). 성령께서 오신 것과 예수님께서 실제로 영광을 받으신 것은 그분의 죽으심으로써 가능하였다(요 12:16, 23; 13:31, 32; 17:1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영광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는 자신을 (의식법을 비롯한) 율법의 규정에 복종하셨으며(갈 4:4), 그분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구약의 요구의 정당성을 지지하면서, 구약시대의 문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부탁을 하신 것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마 10:6). 그래서 십일조와 같은 의식법과 관련된 언급들은 새 언약에서는 구약시대에 적용하던 것과 동일한 모양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더욱이 누군가 “십일조가 신약의 어디에서도 폐하여지지 않았다”라고 주장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동일한 것이 안식일과 제사 제도나 봉헌물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폐지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의 폐지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거나, 십일조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십일조와 관련해서는, 위에 언급한 예들과는 별도로 또한 어느 곳에서도 적극적으로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신약성경에서 요구한 곳이 없다고 말이다.
구약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상황(성직자, 가난한 자 구제 등)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은 다른 면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특히 바울이 교회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연보할 것을 부탁한 것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초대교회사 사전에 “십일조” 논문을 기고한 윌리스(Willis)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도들과 그 직계 후계자들 시대에는 기독교회 내에 거룩한 목적을 위해 바치는 소유의 십분의 일 또는 십일조가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비숴는 이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들(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지녀왔던 것보다도 고상한 삶의 기준이 있었고 그것을 가장 깊은 도덕적 영적 상황에 옮겨놓았다. ‘완전한 율법’(약 1:25), ‘자유케 하는 율법’이 어느 곳에서나 지배하였으며(갈 5;1, 13; 벧전 2:16; 요 8:32 등등), 하나님의 다른 은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기쁨의 자유함은 신약 교훈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도덕적 의무를 의식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삶을 살았다.”
(2) 바울 서신
바울 서신에는 “십일조”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약성경 기자들 중에서 헌금과 관련하여 가장 교훈을 많이 내린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은 물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문제(고전 16:1-3; 고후 8-9장; 엡 4:28)와 기독교 사역자들의 생활 지지와 관련하여 헌금 사용 문제를 언급하였다(고전 9:9-11. 참조. 갈 6:6; 딤전 5:1-18).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위해 자기 수입의 얼마를 떼어 그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일은 권할 만한 일이고 좋은 일이며, 바울은 이런 일을 할 때 넉넉하게 하라고 권하였지만(고후 9:6; 8:1-5),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를 헌금하라고 제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교회에게 자신을 물질로 돕는 것이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므로 일정액을 헌금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고전 9:15, 18), 몇몇 지역에서는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18에서 감독이 복음을 전하면서 수고비를 받아야 할 것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으로 수고비를 받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구약의 기업이 없던 레위인들이 하던 방식이 아니라 개략적으로만 언급하였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또한 바울 사도는 가난한 자를 교회가 생각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를 수집하려고 오래 전에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특히 고린도)에 알리고 그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할 것을 호소하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 그대로 따를 것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롬 15:25-27). 그는 한 두 차례 자신이 이방인 교회에서 거둬들인 연보를 예루살렘에 갖다 주었으며, 그것이 그 교회에 큰 기쁨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행 11:27-30; 21:17-21). 마지막으로 일 년 전에 연보할 것을 부탁한 고린도 교회에게 그가 부탁한 대로 연보를 거두러 몇 사람을 보낸 상황에서도(행 19:21, 22; 고후 8:6; 9:2, 4) 형제 사랑의 표현으로 드리는 연보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자기 수입에 맞추어 일정량의 돈을 따로 떼어 매주 돈을 거두는 것이 좋다”(私譯)고 권하였지 구체적인 비율을 제시하지 않았다(고전 16:1, 2).
그리고 여기서 바울은 동일한 교훈을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도 가르쳤다고 쓴다. 고린도 교회에게는 이런 식으로 드리는 헌금의 정신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라고 규정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참 연보” 즉, 넉넉히 주는 선물(“generous gifts”, NIV)이라고 명명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헌금을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 하시리라”라고 말함으로써 현대 교회가 일괄적으로 “십분의 일”을 부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헌금 방법을 실시하였다(고후 8:12).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구약의 십일조 정신과 비슷한 “물질 걷는 것”을 표현할 때에도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시종 일관 “연보”(collection, λογεια)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한다(고전 16:1-3; 고후 8:2, 4, 20; 9:5, 11, 13 ). “연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다른 단어로 표현되었다. “은혜”(χαρι?, 고전 16:3), “성도 섬기는 일”(διακονια, 고후 8:4; 9:1), “동정” 또는 “나눠 가짐”(κοινωνια, 롬 15:26, 27) 등이다. 이 모든 용어들은 자원해서 하는 행위와 자유로운 의지의 행동 등을 의미하지, (하나님께 바치는) 세금이나 십일조 등과 같이 일괄 정액의 물질적인 소유물을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물질 나눔의 정신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물질을 내는 새로운 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얼마를 낼지를 전적으로 개인이 정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9:7은 이 정신을 잘 표현한 본문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개개인이 스스로 마음에 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갈 5:1)와 그리스도인 자신이 하나님(또는 그리스도)의 종이며(롬 6:16; 고전 7:22; 엡 6:6; 벧전 2:16), 자신이나 자신의 소유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고전 6:20).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청지기 직이 동시에 강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히브리서(히 7:1-10)
히브리서에 언급된 십일조의 경우, 히브리서 저자는 7장 본문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아브라함과 레위를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독자들에게 그런 것을 본을 삼아 십일조를 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고대의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세금을 비롯한) 일정량의 소유물을 바치고 대신 그는 그 사람으로부터 복 빎을 받는다는 위계질서를 언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제사장보다 높으신 분으로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4) 야고보서(약 1:27; 2:15-17)
신명기에 언급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십일조와 같은 상황이 야고보서의 본문에 언급되었다. 야고보는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을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약 1:1)라고 언급을 하였으나 구약시대에 이들을 돕기 위해 요구했던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나안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언약 공동체들의 결속을 다지는 십일조의 의미가 신약시대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5. 맺는 말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십일조를 강조한다. 그리고 십일조 납부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목표요 교회의 직원이 되는 표준으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교회는 십일조 이외에 다양한 명목의 헌금을 신자들에게 부과한다. 월정헌금, 주정헌금, 감사헌금, 특별 감사헌금(생일, 입학, 졸업, 결혼, 회갑, 장례, 심지어 새해맞이<신년> 감사헌금까지), 서원헌금, 일천번제 헌금, 건축헌금 등등 헌금 종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모든 삶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그 구실을 대면서 말이다.
이 헌금들이 복 받기를 바라는 성도들에게는 즐겁게 질 만한 것이고, 그들로서는 이것을 통해 감사를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것을 배우게 될는지는 몰라도 각종 명목의 헌금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짐이다. 이 쯤 되면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가르치는 교육적인 목적보다는 헌금 징수 그 자체에 더 관심이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더군다나 많은 신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것은 십일조가 원래 레위지파와 제사장 몫이었는데 현대에는 목사가 제사장이니, 교회에 내는 십일조는 모두 목사의 몫이라고 주장하면서 십일조를 목사 개인 금고로 넣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폐해는 실제로 교회의 헌금 강요 그 자체보다는 헌금과 관련하여 헌금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다른 점, 왜 헌금을 하는지 또 헌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과 청지기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에 십일조가 언급된 것을 헌금에 대한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헌금에 대한 지침으로 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헌금의 의미나 청지기직에 대한 교훈이 없이 헌금 내는 것만을 요구할 경우 성도들은 율법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가 있다.
현실적인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교회의 70%가 목회자의 생계비를 지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교회가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지 못한 반면에, 대형교회의 경우에는 성도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돈으로 점점 부유해지고, 교회의 재정은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써야 좋을지 모를 만큼 넘쳐나고 있다. 헌금을 거두는 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풍요로움을 누리는 중에서 많은 목사들은 가난에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많은 성도들이 힘을 다해 헌금하고, 교회에서는 돈과 관련된 용어를 많이 외쳐대지만, 정작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헌신적인 삶을 찾아보기 힘들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그가 돈을 바침으로써 고백한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쯤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샤마니즘에 근거한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 헌금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판단을 떨칠 수가 없다. 심지어 터놓고 그렇다고 주장하는 교회나 성도도 있다. 십일조는 수입의 열 배를 보장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헌금으로 표현하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첫째, 전적인 헌신의 삶과 관련하여
신약시대는 어떤 요구나 약속에 있어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그 강조가 바뀌었다. 이것은 제사나 예물을 드리는 제도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그림자의 시대에서 행해지던 제사와 예물은 새 언약 하에서 드림(giving)의 체계나 그 의의가 상실되었다(골 2:17; 히 8:5; 10:1). 사실, 신약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표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옛 시대와 새 시대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연속성은 드림의 원리에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의 소유 전체가 하나님에게 속했으며,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며 자신을 전체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불연속성은 십일조 제도와 같은 드림의 의무와 관련된 것이다. 특히, 우리 자신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구약시대에는 레위인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은 상황에서 나머지 열한 지파가 이들의 생계를 보호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던 반면, 레위인도 존재하지 않고 제사 제도도 없으며 중앙 성소도 없고 땅의 기업과 관계없는 신약시대에서는 구약과 동일한 의무를 부과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바울 서신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들은 교회에게 십일조를 부과하지 않았다.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문제이다.
필자는 드림의 연속성 문제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서에서 십일조를 언급한 7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논의의 결론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히 7:19)과 연결시키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케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10:19, 20).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참조. 히 9:9; 10:1, 11) 우리는 율법 그 자체에 의존하여 우리 자신을 전체적으로 드릴 수가 없다. 우리가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히 9:15)와 모든 세대를 위한 한 영원한 제물이 되어(히 10:12)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온전케 하는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이다(히 10:10, 14).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나가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성전이 아닌)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로 더불어 당당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다(히 10:19, 22. 비교. 13:15). 이제 신약시대에는 드린다는 원칙과 그 정신이 의식법처럼 외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또는 영적으로) 표현되었다(히 10:16. 비교. 8:6; 롬 11:27; 렘 31:33). 바울의 “그리스도 안” 개념에는(롬 6:21, 14; 7:4, 6)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빌 1:13; 3:9; 4:7). 그리스도에게 발생된 것이 우리에게도 발생했으며(롬 5:11; 8:1, 17), 우리의 참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바로 찾을 수 있다(고전 1:3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물질의 특정한 분량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한다.
로마서 12:1에 이 진리가 대단히 잘 표현되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몸”은 자신의 총체이며 전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에(창 2:7. 참조. 롬 5:12; 8:23; 빌 3:21) 단순히 돈만 아니라 우리의 전체 삶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어야 한다(히 13:15, 16).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우리는 삶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전 6:19, 20. 비교. 사 43: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소유의 어떤 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0:31; 골 3:17, 23).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할 것은 “부분”이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이다(벧전 1:15, 16. 참조. 2:9, 10). 우리가 드리는 몸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며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6:15, 19).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고(엡 2:20. 비교. 요 2:21) 그분이 성령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요 7:37-39) 우리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영원히 거룩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요 4:24).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인 성전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셨던 것처럼(히 9:11, 23이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함께 연합하여 주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어간다(엡 2:21, 22; 고전 6:19).
이것은 돈 문제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금전적인 가치가 창출된 액수의 십분의 일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에 헌금함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과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해서 고민해야 할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예물로 드리도록 창조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롬 8:22; 약 1:18).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잘 실현하는 것이다(마 10:8). 이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교회에 정해진 비율(10분의 1)을 교회나 성직자에게 바침으로써가 아니라 그의 삶전체에서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고 이웃 사랑(예컨대, 구제나 선한 사업에 후원함)을 실천함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이 광범위하고 충분한 헌신, 드림, 제사에 관한 교훈 이외에 돈을 하나님의나라를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성경에서 돈의 사용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본문이 있다. 성경은 재물을 가족의 필요를 공급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 5:8. 참조. 고후 12:14; 딤전 6:7-10). 이것은 가장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또한 재물은 교회의 사역자들의 생활과 복음 사역 지지를 위해(마 10:10; 고전 9:9, 14; 갈 6:6; 딤전 5:17, 18), 궁핍한 가운데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과(롬 12:13; 고후 9:1이하)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써야 한다(갈 2:10; 마 26:11).
둘째, 헌금 방법과 관련하여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성경적인 기초에 근거하여, 오늘날 십일조 문제를 다룸에 있어 교회는 회중들에게 단지 그들의 수입의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그들의 전체 삶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청지기 직에 대해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것처럼(고후 8:9) 또한 그들에게 교회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가르쳐(고전 3:16; 엡 2:21, 22) 교회가 서로 경쟁하거나 분리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고전 12:12-27).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에 속했기 때문에 지체들이며(롬 12:4, 5), 그들은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며(요 15:1-8), 하나의 성전이다(벧전 2:4-5). 그러므로 각 사람은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있어 자기가 가진 것을 사용함에 있어서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는 존재들이다(갈 6:2, 10).
어떤 의미에서 부자는 그들의 소유물을 교회를 위해 써야 할 더 많은 책임이 있고(딤전 5:17, 18; 마 19:23, 24; 막 10:22-25), 지혜가 있는 사람은 두뇌를 사용하는 데에서,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가르치는 일에서,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 재능을 사용하는 것에서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책임이 있다. 실제적인 문제로, 어떤 교인이 교회에 돈을 적게 내고 심지어는 거의 낼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른 재능을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하여 자신을 전체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충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 즉, 하나님께 헌상(獻上)한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자신의 몫을 충실하게 행한 사람으로 인정된다(참조. 막 12:43-44). 모든 것을 재화(財貨)의 가치로만 측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물 가치만을 비중 있게 취급하지만, 교회는 그것보다 더 높은 헌신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다른 지체를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구체적인 예이기도 하다(고전 12;24, 25).
만일 교회가 회원들에게 십일조를 내기를 강요한다면 그들의 모든 관심은 돈을 얼마나 내야 하는 지에만 쏠려 있게 되고, 그에게는 강제적으로 또는 타의에 의해 물질을 내놓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럴 경우 그들에게서 어떻게 전적인 헌신의 삶을 살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많은 교회가 이 문제에서 시험을 받는다. 성경은 물질을 내는 문제와 관련하여 자원하여(고후 8:11, 12), 넉넉하게(고후 8:2), 준비해 두었다가(고전 16:2), 기쁨으로(살전 1:6; 2:14) 하기를 가르친다. 헌금은 하나님께 내는 세금이 아니다. 마음이야 어떻든지 세율을 내면 자기의 의무를 다한 것이 아니다.
신약시대의 삶의 특징은 자발성과 자유함에 있다(요 8:32; 갈 5:1). 그래서 교회는 회중들을 격려하여, 억지로 또는 강제로 드리도록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따라 즐겁게 바치도록 권유하는 것이 필요하다(행 11:29; 고전 8:3; 고후 9:7). 사람마다 물질을 내는 액수는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공평함이 있다는 원리를 알려야 할 것이다(고후 8:13, 14).
성경은 우리에게 가난한 형제에게 물질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롬 12:13; 15:17; 약 1:27; 2:15-26). 궁핍한 형제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 사랑(요일 3:17)과 살아 있는 믿음의 여부를 시험하는 일이다(약 2:15, 16).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이다(히 13:16).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가난한 자를 도울지(살전 5:14), 우리의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지를 배워야 한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이다. 이것이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는 교훈의 의미이며(행 20:35), 자신을 넉넉하게 주신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삶이다(고후 8:2).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우리가 적어도 수입의 10%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돈을 주를 위해 사용하는 최소한의 표준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십일조 바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주경학적, 구속사적 연구의 결과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십일조가 신약시대에는 폐지되었다”는 사실이다. 혹시, 정말 십일조가 성경적인 개념이라고 고수하려면, 구약대로 해야 한다. 모든 십일조는 중앙 교회(총회)에 갖다 바치고, 모든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줘야 한다. 헌금을 많이 거둔 교회의 목사는 부자로 살고, 가난한 교회의 목사는 가난하게 사는 것은 “네 떡 네가 먹고 내 떡 내가 먹는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고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십일조가 구약시대에 속한 것이며, 어떤 종류든 액수를 정하여 성도들을 구속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준 자유함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예수님은 의식법을 비롯한 율법의 멍에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마 23:4)에게 쉼을 주려고 오셨다. 바울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때의 충만(종말의 때)에 살고 있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더 이상 율법의 멍에를 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종의 멍에”란 물론 율법의 멍에를 가리킨다(갈 4:14; 5:1, 2; 골 2:17, 20-23). 우리를 어떤 유든 의식법을 지키게 강요하는 것은 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로 그들을 끌고 가는 행동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하리라”(갈 5:18). 우리는 자유를 주는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고후 3:17).
교회에 돈을 바치는 문제만 놓고 볼 때 십분의 일을 바치든 형편이 어려워 백분의 일을 바치든 아니면 형편이 넉넉하여 이분의 일만 바치든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와 가정의 형편과 교회의 형편에 달려 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말한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라고 말한 것은 교회의 어느 누구도 성도에게 재산의 처분, 헌금 액수 바치는 문제와 관련하여 강제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행 5:4). 즐거이, 넉넉하게, 능력대로 바치는 것이 신약의 원리이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의 헌금 시행과 관련하여 두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하겠다. 교회에서 십일조나 헌금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는 것들을 불식시키기 위해 교회에서는 (무슨 세금 내듯이) 돈을 바친다는 암시 주는 것을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헌금 시간은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는 시간이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전체를 바치는 것이어야 한다. 십일조나 헌금이라는 용어는 이런 면에서 율법적인 의미와 돈을 낸다는 의미를 풍기기 쉽다. 이런 용어 대신에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의 “드림”(봉헌)이나 “헌신” 또는 “헌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봉헌” 또는 “헌상” 순서에 성도들에게 자신 전체를 드린다는 것을 생각하고 돌아보도록 권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헌금을 집사가 아닌 장로나 목회자가 관리하게 하는 것이 상례화 되면서, 목회자는 헌금 액수로 교인을 판단하고 교인은 목회자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헌금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각종 명목의 헌금 봉투를 없애고, 헌금 명목이나 헌금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지 않은 봉투 한 종류만을 교회에 비치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헌금 수입액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헌금 봉투에 이름 쓰기를 권장하고 있지만, 교회가 사업체도 아닌데 헌금액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교인들은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고(마 6:1-6), 목회자는 교인들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도하는 데 모든 관심을 쏟아야 한다.
성경적인 내용이라고 하면서 구약시대에 시행되던 것을 완전히 구약적이지도 않은 방식을 신약시대에 어중간 하게 적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한 새 시대의 영광과 신령함을 희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광만 /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신약신학.
*출처/ 기독교세계관학교(http://www.rcw.co.kr/curriculu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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