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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관점에서 본 하나님 나라
# 언약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나라
김성수 교수
서론
1. 언약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나라(이하에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다스리심, 혹은 통치”라는 말과 혼용하여 쓰고 있음)
A. 원형적 하나님나라
1) 주권(창조주 하나님)
2) 백성(피조물, 하나님의 형상)
3) 영토(안식의 땅)
B. 타락(노아홍수, 심판으로 통치)
C. 노아언약으로 심판받아야 함에도 유지, 보존해 주심
D.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아브라함언약)
1) 하나님의 백성, 자손
2) 민족(공동체)-교회
3) 가나안땅(안식의 회복)
* 바벨탑/세상나라(창11)
1) 인간중심의 나라
2) 말씀을 거역하는 나라
3) 인간이름을 높이는 나라
* 하나님나라(창12)
1) 시작과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이 중심인 나라
2) 말씀 중심의 나라
3)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나라
A. 원형적 하나님나라
우리는 대개 ‘나라’라 할 때 주권, 백성, 영토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나라의 원형적인 모습은 에덴에서 찾아보게 된다. 하나님은 에덴의 주인이었다. 세상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에덴에 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던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고, 또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이 땅에 대한 대리통치자였다. 에덴은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토였고, 이러한 바른 관계들 속에서 에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안식하시는 세계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도였다.
에덴에 하나님의 금령(禁令)이 주어졌다는 것은 에덴동산이라는 곳이 지금의 죄악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제 마음대로 사는 곳이 아니라, 에덴동산은 왕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금령을 어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최초의 하나님나라는 역사적이고, 우주적이고, 보편적이고, 만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 하나님나라의 실패(인간의 범죄)
인간의 범죄는 최초의 하나님나라의 실패를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실패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인간의 실패와 반역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단절된다(한 몸, 부부관계-아담, 하와/형제관계-가인과 아벨). 그리고 인간은 예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고, 땅은 안식하지 못하고(창 3:17), 결국 고통의 땅(창 8:6-7)이 되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땅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실패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다. 하나님은 범죄 이후 즉시로 한 약속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약속이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창 3:15-원복음). 하나님께서는 장차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재창조하시려는 계획과 약속을 세우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구원이란, 단순한 단순히 원형적 하나님나라에 대한 회복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재창조를 의미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다시 우리의 하나님(왕)이 되시고(히 8:10, 구원의 언약), 우리가 다시 서로 하나가 되고 (엡 1:10,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교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안식에 우리가 동참하게 됨으로 구원과 재창조가 이루어진다(주일의 참된 의미).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는 초림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재림 때 완성이 되는 것이다.
C. 노아언약과 세상나라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고, 사람들도 그가 창조한 사람들이지만 이제 세상은 처음과 같지 않다. 모든 피조물(땅)도 안식하지 못하고(롬 8:18-25),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창 6:1-4).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 원했던 세상(땅)과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의 마음대로 살았다. 마치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강포가 지배하는 세상인 것처럼 보였다(노아홍수 때의 상황). 이러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홍수로 심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수가 국지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심판도 전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와의 언약을 통해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그대로 유지시키시고, 보존시키실 것을 약속하셨다(창 9:10,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일반은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노아언약은 지금의 인류가 범죄했지만 당장 멸망 받지 않고, 창조 때와 같이 인간의 생명과 지으신 만물이 유지되어지고 보존되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노아언약 아래 있는 땅의 모든 기식하는 것들과 사람들에게 노아언약의 규례로서 “생육, 번성, 땅에 충만과 생명보존”의 명령(축복)들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창 9:1-7,낙태반대운동과 환경보존운동의 성경적 근거) 이것을 태초에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축복, 창 1;28)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범죄했지만 하나님의 창조 의도가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들에 그대로 실현되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 커녕 바벨탑을 지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창 11장, 롬 1:18-32). 그들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성과 대를 높이 쌓자”고 하는데, 여기서 “성”이란 나라를 뜻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아닌 인간나라 혹은 세상나라를 건설하려 했는데, 이러한 바벨탑에 나타난 세상 나라가 그 후에 일어나는 모든 세상나라에 대한 전형적인 모습이 된다. 즉 지금의 이 세상나라에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통치와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노아언약(일반은총) 아래 있는 바벨탑(세상나라)을 쌓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하나님나라의 은닉성), 오히려 반역하고 거역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사회복음주의 운동의 한계와 모순). 바벨탑(세상나라)을 만드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인 그들 자신이고(창 11:3,4), 또한 목적도 그들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다(창 11:4). 또한 그들의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정반대되는 일이었다(창 9:7, 11:4/흩어지라는 명령에 정면 도전).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이제 하나님은 그의 진정한 통치가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을 택하셨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과 그의 복을 이어받은 언약의 자손들이다.
또한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구약교회)을 만드시고, 그들을 통해서 바벨탑과는 대치되는 하나님나라를 나타내시고,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실현하시고자 하였다.(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증시체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다스리심)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과의 특수한 관계성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통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는 노아 언약에서 나타난 대로, 세상이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유지시키시고 보존시키심으로 나타나고, 또한 그의 약속에서 제외시킴으로서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롬 1:18).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나라의 보편적 공의를 드러내시려 하시는 것이다.(출 19:5-6“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느니.---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나라가 되리라”).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두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주된 메세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 관계성에 촛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편적통치가 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나타난 이스라엘의 실패와 신약교회의 연약성들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회개와 개혁의 메세지의 촛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성이고, 사도들의 메세지의 촛점도 교회의 교회됨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안만 미치고, 세상 가운데는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영지주의적인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D. 족장들의 언약과 하나님나라-약속된 하나님나라
하나님은 족장의 대표인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신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창 17:2, 17:7-8, 18:19,). (2)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창 12:2, 13:6, 15:5, 16:10. 18:18). (3) 이 후손들은 안식을 누릴 땅인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창 12:7, 13:14-15, 15:18-21, 17: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모든 약속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창 12:1-3). 이것은 바벨탑을 짖던 세상의 모습과 극히 대조를 이룬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나라이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다스리는 왕 앞에 그의 백성들이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면 누가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이것이 언약적 축복이고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이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가 창세기 중반부의 주제를 이룬다(창 12-36). 즉 창세기에 나타난 세 명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들의 이야기의 핵심은 누가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누릴 당사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우리도 여기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롬 4:7-8; 9:7-8). 여기서 우리는 누가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를 보았다. <(1)의 약속과 관련>. 이제 이러한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개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 그 과정이 창세기 37장-출애굽기 1장 사이에서 설명되고 있다. 민족(큰 공동체)을 이루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함의 후손인 바로의 압제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출 1:7).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2)의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과 관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마지막의 약속이 땅에 대한 약속인데 이것은 안식을 누림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온전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희년의 의미).
* 하나님나라
주권-하나님
백성-언약의 자손의 공동체(민족)에 대한 약속(교회와 관련)
영토-세상나라인 가나안땅에서 누리게 될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3)은 다윗 시대에 잠정적으로 이루어진다.
* 하나님나라의 약속의 전개 : 족장들의 언약의 신실성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권능에 의해서 전개.
E. 출애굽과 가나안정복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전개되어지는 하나님나라
우리는 위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결국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출애굽사건과 가나안정복의 사건 속에서 성취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 출애굽의 사건
하나님은 출애굽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이 땅에서의 왕되심과 구속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애굽의 바로는 당시의 표면적인 이 땅의 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사건을 통해 자신의 왕되심을 입증해 나가신다. 출애굽시의 10가지의 재앙은 당시의 애굽인들이 섬기던 신들에 대한 징치이다(최종의 신이 인간이다-유월절). 여기서 하나님은 그 신들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결국 마지막의 유월절사건에서 세상에 대한 심판과 언약의 피 아래있는 자들을 구원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 출애굽사건의 마무리는 홍해사건에서 바로의 무리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되어진다. 홍해사건 후에 나타난 모세의 노래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이 단순히 그의 자녀들에 대한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이 세상 주관자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출 15:1-18. 이 세상에 대한 구원의 시작은 종말과 심판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가 현재에 임하여졌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심판과 종말도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예수의 재림이란 세상에 대한 종말이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복음선포는 세상에 대한 심판과 종말의 선포이다).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으로 지켜야될 규례를 말씀하시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ꏒ 성경을 찾아보자.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말을 듣고 잘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의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나라가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이다. 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가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입증이 된다.(교회만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그의 통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2) 가나안땅 정복사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는 사건은 단순히 땅을 정복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싸움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대적을 물리쳐 주신다. 그런데 이것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여부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순종이라 함은 그들이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 아래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아래 있는 자들을 위해 싸워 주신 것이다. 이 승리는 단순한 육신적 원한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언약적 승리인 것이다(시편의 주제. 2편 참고).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오는 문제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는 것으로 해석한다(히 3:18, 4:1; 신 1:34-35).
ꏒ 성경을 찾아보자.
히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가나안땅)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니라.”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안식(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구원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 할 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수아의 가나안땅 정복이 온전치 못하였음을 이야기한다.
ꏒ 성경을 찾아보자.
히 4:8-9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러므로 안식 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이 말은 구약에 나타난 모든 사건은 신약에 대한 모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이 모형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도 분명히 구원과 하나님나라를 계시(豫視) 해 주고 있다.
3) 신정국(神政國) 준비기(사사시대)
a.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지 아니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삼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했을 때 사무엘은 “이것은 나를 무시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된 왕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b. 사울왕의 등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간 왕을 구하는 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재이다.
c.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왕 제도를 부인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왕을 원하셨다(이러한 왕이 다윗왕이었다).
d. 이것은 교회의 제도성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무교회주의는 인간 지도자나 제도없는 교회를 주장한다. 그러나 사사기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의 연약함으로 이러한 형태가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제도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형태가 아닌 하나님의 왕되심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 장로교의 제도, 원탁형의 직분론).
E. 구약에서 성취된 하나님나라:다윗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다윗 시대에 성취된 다윗 왕국은 구약의 하나님나라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자,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모형적 하나님나라이다.
ꏒ 성경을 찾아보자.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 다윗 언약의 내용-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일차적으로 다윗 시대에 이루어진다(삼하 7:1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즉 가나안땅에 대한 약속이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도면상(명목상)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 땅은 그 후(사사기)에도 계속 대적의 위협을 받는다. 그런데 다윗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사방 모든 대적이 물러가고, 가나안 땅에 온전한 안식이 찾아온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은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왕국 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이스라엘왕국은 지상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것이다. 즉 이스라엘왕국의 실질적인 왕은 하나님이었고, 다윗은 대리통치자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왕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안식이 회복된 땅이 된 것이다. 즉 다윗 언약은 민족적 이스라엘에 대한 영원성을 약속한 언약이 아니라,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형적으로 보여주게 된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을 약속한 언약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이스라엘(구약교회)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유일하게 증시해주는 단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드러낼 때만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사울 왕이었다. 처음에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그가 다스리던 이스라엘왕국이 그 자신의 왕국인냥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왕은 그렇지 않았다. 그 왕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 온전히 하나님의 실질적인 통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ꏒ 성경을 찾아보자.
신 17: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열국과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즉 가나안땅의 실질적인 왕은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그 이전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이후에 특정한 지도자를 세우지 아니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율법(율법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표현이다-수 24장)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율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는 결코 그들의 항존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은 특정한 사건에 한시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었다. 그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는 말로 그도 왕의 후계자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은 철저히 배격하셨다. 그 이후에도 삼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요구가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삼상 8:7).
우리는 다윗 왕국에서 왕이신 하나님(주권)과 그의 대리통치자인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백성)과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스라엘왕국은 세상의 왕국과는 달리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얼마나 잘 받아 들이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다윗의 통치방식은 세상의 통치방식과 달랐다. 그 한 예로 세상적인 통치방식은 前왕조의 사람들을 제거시킴으로서 그들의 왕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사울 왕을 끝까지 살려준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울 왕을 죽인 자를 오히려 죽여버린다. 그리고 죽은 사울 왕의 친척들에게도 환대해준다(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 장수 요압이었다. 그는 군대의 힘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이끌어져 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윗이 대리통치자로 있는 이스라엘 왕국에는 결국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된다. 이 나라는 결코 그 나라의 백성의 숫자가 자랑이나 큰 힘이 될 수 없다(말년의 다윗은 백성의 수를 계수함으로 하나님의 책망을 듣는다).
그러면 다윗이 통치한 이스라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1)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신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나라이다.
(2) 가난한 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다. 구약의 다윗 왕국의 기초는 아둘람 공동체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이었으며, 사울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나라는 것은 가난하면 무조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아둘람 공동체의 가난한자들이란 육신이나 혈통을 의지할 것 없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자로 이해해야 한다.(마5:3.결국 이 가난한자도 모형적 의미로 이해야 한다)
(3) 현재적인 고난을 겪고서야 영광에 참여하는 나라이다. 다윗은 왕이었으나 많은 억울한 고난과 환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높이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이것은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왕이지만 많은 고난을 당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높여 만왕의 왕을 삼으셨다. 이와 같이 다윗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시 22; 눅 24:26). 이것은 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우리도 결국 이 땅에서 하나님백성으로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의를 인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마 5:10). 그러나 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4) 모든 땅의 대적을 물리치고, 평강과 안식이 있는 나라이다. 다윗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땅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므로 가나안 땅에 평안과 안식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때 계시된 에덴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다. 타락이후 하나님이 만드신 땅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평안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비로소 다윗 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도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형으로서 하나님나라는 사탄의 권세들을 물리치므로 평안과 안식이 깃드는 나라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권능을 행하시고(특히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행하시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선포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셨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결국에 이 다윗의 왕국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모습이라 볼 수 없다. 다윗과 솔로몬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므로 그들에게 있었던 가나안 땅의 안식은 사라지고 만다. 그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가운데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망하게 한다. 그들이 대망하는 하나님나라는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나라(현재의 하나님나라-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나라)와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나라(미래의 하나님나라-저 땅에서 펼쳐질 하나님나라) 동시에 소망하며,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이와 같이 구약과 신약 속에서 항상 이미(already)와 아직(yet)의 긴장가운데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F. 선지자가 바라 본 하나님의 나라
위에서 언급했듯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 욍국도 온전한 왕국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세상나라인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국의 상황이 다시 세상의 왕(바벨론 왕)이 이스라엘왕국을 지배하는 형태가 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선지자의 영적 안목이 나타난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세상(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왕국)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지만 (바벨론 포로상황),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 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며(단 4:17), 장차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바라본다(단 2:43-45). 그런데 이러한 나라가 언제 이루어지는가? 이것이 초림의 상황을 말하는가? 아니면 재림의 상황을 말하는가? 이것은 둘 다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일명 ‘선지자적 조망’이라고 한다. 즉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으며(막 1:15),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다(요 3:18). 그리고 또한 재림 때 하나님나라가 온전한 형태로 완성이 되며, 세상에 대한 심판<종말>이 완성이 된다.
G. 하나님나라의 도래(초림)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다. 그 증거로 1) 천국복음이 증거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2) 또한 병자가 치유되는 것으로 하나남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눅 8:2, 9:11).
3) 또한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심으로 더욱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신다(하나님 나라의 역동성-마 12:28; 눅 11:20; 고전 4:20).
마 8장에서 마귀가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는데 왜 벌써 나를 쫓아내느냐’고 한다. 여기서 ‘때’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때를 말한다(요한복음). 그러나 이렇게 초림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사탄의 세력이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심장에 칼이 꽂힌 사탄(머리가 상한 뱀-사탄)이 그의 완전한 종말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는 이 땅의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재림 직전의 성도의 대환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성도의 고난은 죽어가고 있는 사탄의 시험이고, 재림 직전의 성도의 대환난은 사탄의 최후 발악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했지만, 죽어가고 있는 사탄의 도전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탄의 도전에 대하여 우리를 위로하시고 지키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검인 말씀과 성령 안에서의 끊임없는 기도로 말미암아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엡 6:10-18). 결국 종말 때 사탄과 그의 나라는 완전한 종말을 고하게 되고, 이러한 성도의 고난과 눈물은 사라지게 된다(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아니하시리라”).
또한 마 13장을 통하여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이것을 재림 때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
1)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인 나라이다(감추인 보화비유). 그러나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성도를 핍박한 사람까지)볼 수 있게 임하여진다. 즉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는 세상나라와 같지 않고 영적인 나라이다. 그러나 미래에 임 할 하나님나라는 이 모든 감추인 것들이 공개가 되어지는 나라이다(계 5:4, 11:15).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올 것인지를 계산하며 살아가지 말고 종말이 이미 도래했다는 종말적 신앙으로 살아가자(마 24:42-46).
2)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그것이 미미하게 보이나 장차 커서 새들이 깃들 수 있는 겨자나무(미래의 하나님나라)가 된다. 즉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종말)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발전하는 형태로 진행 중에 있다가 종말에 완성된다.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 있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보장받을 수 없다. 또한 현재의 하나님나라에 동참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따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자동적으로 보장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과연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동참해 있는지 하나님나라의 현제적 양태(열매)를 살펴보면서 살아가야 겠다(하나님나라에 합당한자. 마 13:43, 21:31, 25:34; 막10:14-15).
3)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는 사탄의 나라와 썩여져 있다(가라지, 그물비유). 그러나 종말에는 사탄의 나라가 없어진다. 초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세상나라가 끝장나지 아니한 것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과 이 땅에 대한 하나님나라의 소명 때문이다.
H. 구약이스라엘 교회의 실패와 새 언약의 공동체로서 신약교회(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이상을 통해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증시체로서 온전한 기능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돌려버리심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 버리셨다(애굽의 상황). 그리고 400년 동안의 계시가 없는 암흑기가 오게 하셨다. 이 400년 동안의 계시의 암흑기 끝에 나타난 인물이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은 마지막 선지자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광야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항상 새 역사의 도래시에 광야에서 부르시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때도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불렀다. 바로가 말하기를 애굽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 않느냐 했을 때 모세는 분명히 광야로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부르셔서 당신의 새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사람들을 부르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의 실패와 심판의 선고의 의미가 있다. 특히 이러한 사실들을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의 성취로서 구약에서 약속되고, 모형으로 보여 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도래시킬 왕으로 오시는 분임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다윗 왕의 가계인 요셉의 가계에서 태어난 분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정혼은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혼인한 관계임) 또한 별이 동방의 박사들을 왕이 나신 곳으로 인도하는데 먼저 헤롯의 왕궁으로 인도하고, 나중에 그렇게 인도한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베들레헴으로 별을 통해 인도한다. 왜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하는 별들이 바로 예수님의 계신 곳으로 인도하지 않고 헤롯의 궁중에 갔다가 베들레헴으로 가는가?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민족적 이스라엘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왕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한 출애굽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바로의 박해와 비견될 수 있는 헤롯의 박해와 모세 시대의 바로의 영아학살과 예수시대의 헤롯의 영아학살이 있다. 더우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예수님이 헤롯에게 쫒기어 애굽으로 도망하는 사건을 호세아의 말을 인용하여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애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자들간에는 예수님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건을 두고 이 예언의 성취가 있다고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예수님이 헤롯에게 쫓기어 가는 것을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고 한다(마 2:13-15). 그러니까 예수님이 출애굽하시는 것은 장소적인 출애굽이라기 보다는 의미상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로 그 의미상의 애굽이 유대종교(실패한 이스라엘)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400년 동안의 계시의 공백기가 있었다. 이러한 신구약중간시대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이스라엘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최상의 종교(?)라는 유대종교와 유대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반성하기를 그들이 이렇게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오게 된 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혈통적 순수성과 모세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는 이스라엘의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으로 말미암은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다윗 왕국과 같은 정치적 하나님 왕국의 도래를 무력(인간의 힘)으로 이루려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먼저 세례요한을 보내심으로 이제 옛 이스라엘(유대주의)의 심판과 회개를 선고하시고, 새 이스라엘의 탄생을 예고하신 것이다.(눅 2:34에 나타난 시므온의 아기 예수에 대한 예언을 참조해 보라) 그래서 마 4장에 보면 옛 아담과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실패와 대조되게 광야에서 마귀에게 승리하심으로 공생애의 문을 여신다(마 4:1-11). 그리고 세례요한의 잡히심을 들으시고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먼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4:17)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새 이스라엘의 새 언약의 공동체로서 구약의 12지파와 비견되는 12제자들의 신약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다(겔 37장).
그리고 마 5-7장에서는 이제 옛언약(모세언약)과는 대치되고, 완성되고, 새로운 새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의 도리를 산 위에서 선포하셨다(모세가 산 위에서 율법을 전함과 비교)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신약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교회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약에서 옛 이스라엘로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의 교회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야 하며, 더우기 신약의 교회는 단순히 바벨론의 세상 나라를 극복하는 그런 정도의 교회가 아니라, 옛 이스라엘의 유대종교와 유대주의도 극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될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들의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오직 힘으로도 되지 않고 인간의 능력으로도 되지 않고, 선지자들이 새 언약를 바라보면서 약속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교회는 가견적으로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임함으로 비로소 신약의 교회가 설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성령을 떠나서는 옛 이스라엘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말한다면 성령의 역사란 다름 아닌 구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명을 교회를 통하여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도들의 선포의 핵심은 성령이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은 우리가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참고. 행 1:3, 8:12, 14;22, 19:8, 20:25, 28:23, 31).
2. 이와 같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교회와 세상을 보는데 미치는 영향
A. 교회에 미치는 영향
1.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교회관도 달라진다.
a. 지상의 교회의 제도적인 면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파악(천주교)
b. 하나님 나라가 교회에만 미친다(영지주의적 교회관-교회와 세상과의 초월적 관계만 증시한다. 이에 대해 골로새서에서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신다고 강조하고 있다).
c.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미래적인 것이다(유대교와 같은 율법주의교회를 만듬).
2.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언약적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이해하고 드러 낼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이다(예. 유리조각/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소금-교회의 본질을 강조, 교회의 세상과의 대조성, 빛-교회의 땅에 대한 사명).
3.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증시체로서 먼저 세상 나라와는 대조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바벨탑사건).
4. 교회의 모든 제도나 행정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사사기 참조) 교회가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 지키는 일이다.
5.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한 주제가 구약의 십계명, 산상수훈, 마13장의 천국비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6. 또한 교회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이 왕 되심을 드러내어야 한다(복음전파와 아울러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도 전파해야 한다).
7. 신약과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가장 좋은 비유는 잔치집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중시하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잔치집과 같은 영적인 풍요로움과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8.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옛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고, 새언약의 공동체로서 하나님나라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성령의 능력아래 있어야 한다.
9.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끊임없이 교회를 도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의 개혁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B.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 미치는 영향(오광만교수의 글 참조한 것임).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시각이 있다.
1. 하나님나라와 세상 : 초월적 관계
a.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철저하게 초월적이고 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며, 현재적이 아니라 철저히 미래적인 것이다.
b.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면 세상에 대하여 탈세상적,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극단적으로는 도피적 태도로까지 발전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내적인 종교생활에만 국한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와 세상 : 내재적, 동일시 관계
a.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도덕적인 가르침들을 이 세상 사람들이 따름으로써 이 세상에 건설 되어지는 인류공동체이다(유토피아).
b. 이렇게 볼 때 복음은 자연히 사회복음주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1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무시했고, 2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을 무시했다<바벨탑사건을 무시했다>. 1의 견해는 신비주의로 기울어지기 쉽고, 2의 견해는 세속주의로 기울어지기 쉽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속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3. 하나님나라와 세상:변혁관계
a. 세상에 대한 견해
a-1 긍정적 견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들에게 그것을 대리자로 다스릴 문화적인 명령을 태초에 내리셨다. 이러한 문화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이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며, 완전을 향하여 나아갈 존재이다. 즉, 이 세상은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창조된 세상이고, 인간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를 받았다(노동의 긍정성-노동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타락이후이다. 그래서 범죄 후 노동은 안식일 제정으로 인하여 우선권에서의 시험을 받게 된 것이다).
a-2 부정적 견해
이 세상이 이처럼 선하게 창조되었고,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존재이나, 이러한 세상에 제동을 걸게 한 것이 바로 죄(罪)이다. 죄의 영향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미치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에 미치게 한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지금도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이나, 죄와 사탄의 실제적인 영향력아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세상참여는 세속주의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언약을 통해서 비록 물심판 받을 이 세상이지만, 계속 유지가 되고 보존이 되도록 하셨다. 그리고 창세기 1장과 같은 이 세상에 대한 문화적인 명령을 내리셨다. 그런데 이러한 명령을 받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문화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만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바벨탑).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죄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세상자체를 죄와 동일시할 수 없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고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내려졌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세상에서의 죄에서 떠나 은혜와 의의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변혁자로서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b. 세상에 대한 사명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소명에로의 부르심이다. 그런데 또한 이러한 소명에로의 부르심은 종교적 소명과 일반적 소명이 있다. 종교적 소명은 전도자(선교사), 혹은 종교인으로서의 소명이다. 일반적 부르심은 직업에로의 부르심이 있다(그런데 이런 구분은 엄밀하게 말하면 나눌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두 가지 소명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굳이 구분을 한다면 두 부분 중에 어느 쪽을 풀타임소명으로 생각하느냐에 있다). 이러한 소명을 위하여 선택과 구원이 있게 된 것이다. 구원받는 자는 모두 소명자이다. 소명이 없으면 구원받은 가 아니다.
b-1 참다운 교회건설의 사명
하나님 나라가 우주적이고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지상에서의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교회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명이라고 할 때 굳이 종교인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회건설의 사명이 우리 모두의 일차적인 사명이다.
b-2 문화변혁자로서의 사명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목표와 실천이 우주적이고 종교생활뿐 아니라 모든 생활에 걸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상에서의 사명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세상을 거부하지도(초월적 세상관과 대조), 세상과 동화하지도(동화적 세상관과 대조) 않으면서 세상의 변혁자로서 태도를 견지했다(그것은 세상이 원래 하나님의 선하신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지금은 타락 때문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차 재창조 될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변혁자로서의 사명이 단순히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를 우리의 모습으로 통해서 이 세상 사람이 변혁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결국에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나라)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하는 것이다. 즉 복음전파라는 것도 단순히 물량적인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동참케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완전히 선하게 되어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죄된 문화의 모습을 방관해도 되지 않는다.(방관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동화자가 될 수밖에 없다-사사시대 실패의 교훈) 결국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이 아니라, 위에서 임하여 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의 현재를 지금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 세상으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누가 이 시대의 개혁자가 인가?(사 6장)
1)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이 교회의 왕이심을 바라 깨닫는 자.
2) 그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개혁의 대상자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자(특히 입술의 죄).
3)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체험하는 자.
4)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과 역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자신을 맡기고 교회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
5) 듣든 듣지 않든 교회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왕 되심과 공의를 몸으로 증거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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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교리개혁:사도신경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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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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