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칼빈의 이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칼빈의 이해
-로마서 9-11장을 중심으로-
한국개혁신학회-양신혜
칼빈이 루터주의자 훈니우스에 의해서 친유대주의자란 별칭을 얻었다는 것은 교회사에서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스타인메츠는 한 논문에서 칼빈의 친유대적 입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였다. 여전히 칼빈 연구자들은 칼빈의 친유대적 입장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이 대립 구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하나의 과제로 떠오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로마서 9-11장에 나타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칼빈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봄으로써 칼빈의 유대인에 입장을 간접적으로 규명해 보는 것을 본 논문의 목적으로 삼는다.
본 논문에서는 첫째, 칼빈이 로마서 주석에서 하나님의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진 소명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에 근거하여 그가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의 구분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구원의 길을 마련하였다는 점과 내적 소명에 근거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육체적 혈통의 외적 소명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소명을 지배하는 것으로, 내적 소명을 통해서 그 선택을 이루어가는 역사라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둘째, 칼빈이 로마서 주석에서 개인의 선택과 유기를 넘어서 민족의 선택과 유기를 표현하는 말라기 구절을 인용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 구절을 통해서 그가 개인의 선택과 유기가 민족의 선택과 유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였다. 그렇지만 칼빈이 로마서 주석에서 말라기의 본문 주석을 인용한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한없는 은혜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셋째, 칼빈은 역사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문법적 해석과 바울의 해석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하였고, 이 간격을 언약과 약속이라는 개념을 구분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는 약속을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구체적 실현의 과정이며 언약과 선택의 토대가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 달리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은 종말론적 보편성을 함유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서 그가 성경해석의 역사적 간격을 극복했다는 점을 보였다.
넷째, 로마서 11장 26절에서 칼빈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공동체가 지닌 우위성을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적 차원에서 이방 민족을 포괄하는 구원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이해하였다는 점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종말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섭리의 차원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역사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개념을 구원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민족적 개념을 넘어서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영적 토대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로써 칼빈은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을 구분하였고, 언약과 약속의 개념을 구분하여 역사적 적용과 종말론적 구원 사역의 조화를 시도하였다는 것을 도출하였다. 이는 역사적 개념이 영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개념을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간격을 인지할 때 칼빈 연구에서 나타난 유대인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간격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1. 들어가는 말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루터주의자 훈니우스(Giles Hunnuius, 1550-?)로부터 ‘친(親)유대주의자’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사실은 교회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에 대한 반론이 최근 스타인메츠(David C. Steinmetz)1)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데니스(Denis the Carthusian, 1402-1471) 그리고 칼빈의 창세기 49장 주석을 비교 분석하여, 그들이 성경해석의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드러내었으나 동일한 것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루터는 영적 의미에서 실로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해한 반면, 칼빈은 다윗의 왕국에 내재된 숨겨진 의미에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동일한 것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스타인메츠는 칼빈이 동시대의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달리 기독론적 해석을 소홀히 하여 친유대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또한 그는 칼빈이 성경의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두었고 기독교의 경전으로서의 히브리 성경을 존중하였다는 점을 들어 칼빈이 친유대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로빈슨(Jack Hughes Robinson)2), 최근에 이르러 박수진(G. Sujin Pak)3), 번스(Peter Barnes)4) 등은 칼빈이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우선 칼빈과 루터가 유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루터처럼 ‘강력한 어조로’ 유대인들을 거부하지 않고 있으며 성경해석에서 유대인의 해석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칼빈이 그의 유일한 문서인 “어느 유대인의 반박과 질문에 대한 답변(Ad quaestiones et obiecta cuiusdam repsonsio)”에서 유대인들을 날카롭게 비난 하고 있다는 점5)과 그의 다니엘서 주석에 나타난 유대인에 관한 발언들을 어떻게 이해할지를 또 하나의 과제로 제기하였다.6) 이 문제에 대하여 박수진과 번스는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구약의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사역이 완성된 이후의 유대인들을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러한 대립구도에서 유대인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우호적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루터의 경우와 같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관련된 문서를 칼빈이 언제 기록하였는지, 그 저작 연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내용을 어디까지 소급하여 적용할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기 때문이다.7) 데트머스(Achim Detmers)8)의 사회적 정치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따르면 칼빈이 유대인과 접촉하였을 가능성에 대해서 추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루터와 유대인의 논쟁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부터 칼빈이 유대인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 추적하는 것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 또한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동시에 구약 성경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문제는 기독론적 관점에서의 해석학적 문제이자 기독교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논쟁의 중심에 있는 로마서 9-11장을 칼빈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봄으로써 간접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지금까지 유대인에 대한 칼빈의 입장에 대한 연구에서 나타난 대립적 입장을 조율할 수 있는 답변을 찾고자 한다.
2. ‘이스라엘’과 ‘남은 자’
2.1 로마서 9: 6;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는 바울의 주장은 혈통을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로 나누어, 약속의 자녀가 지닌 언약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이 구분을 칼빈은 언약과 선택의 차원에서 “일반 언약”과 “은밀한 선택”9)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일반 선택은 육체적 혈통을 따라서 자연적 출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선택으로, 이 언약의 증표가 바로 할례이다. 이 관점에서 이스마엘과 에서는 혈통을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며 약속의 자녀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특별하게” 부르지 않았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부른 자들은 바로 이삭과 야곱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반 언약과 은밀한 선택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은밀한 선택은 일반적 부르심과 달리 ‘특별하게’ 부르셨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경계가 믿음으로, 믿음의 수용이 육체를 따라서 태어난 이스라엘 공동체와 ‘남은 자’의 경계 지점이 된다. 그러므로 육체적 출생으로 이루어진 할례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이방 민족들을 구분하는 외적 상징으로, 이는 세례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선택의 수용이 바로 믿음이며, 칼빈은 믿음을 “신령한 씨와 육욕적 씨를 구별해 주는 것”10)으로 이해한다.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인 자에게는 성례의 효력이 드러나게 되며 교회의 참된 구성원이 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믿음은 “구별하는 원리이지 그것을 외부적으로 입증해 주는 상징이나 표지가 아니”11)라는 점이다.
이러한 구분에 따라서 육체를 따른 자연적 출생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칼빈은 “외적 소명”12)이라고 칭하고, 믿음에 의해서 특별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내적 소명”13)이라고 명한다. 믿음이 없으면 외적 소명 그 자체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일반 언약에 근거한 외적 소명은 하나님의 약속이 자연적 출생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믿음을 통해서 특별하게 부르시는 내적 소명은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과 효능”이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서 “확정”되고 “완성”14)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 언약에 근거한 외적 소명은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반면 이 언약은 믿음을 통한 개인의 내적 소명에 토대를 두고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내적 소명에 근거한 약속의 성취가 우선시되기 때문에 내적 소명을 받지 못한 ‘개인’은 바로 참된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며 이스라엘인이 아닌 것이 된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칼빈이 선택의 개념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인 소명에 근거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결코 내적 소명에 근거한 은밀한 선택이 육체적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외적 소명을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내적 소명에 근거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육체적 혈통의 외적 소명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외적 소명을 지배하는 것으로, 내적 소명을 통해서 그 선택을 이루어가는 역사이다.15)
둘째, 칼빈은 ‘언약’과 ‘약속’을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약이란 명백하고 엄숙한 말로 표현되고, 상호 간의 의무를 포함하고 있는 바,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맺어진 언약이 있다. 그러나 약속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옛 백성과 언약을 한 번 맺으셨으면, 그는 수시로 새로운 약속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자기 백성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쉬지 않으셨다. 이로 보건대, 약속들의 유일한 근거가 언약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는 특별한 도움이 선택이라는 유일한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과도 같다.16)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적 적용이 바로 약속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은 본질적 차원에서 종말론적 보편성을 함유하나,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종말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약속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 사상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 그렇지만 그 언약은 개인이 믿음으로 수용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무조건적인 구원의 성취가 아니라 개인을 통해서 믿음으로 성취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역사적 과정에서 ‘남은 자’가 형성되며 이 언약은 다시금 이방인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성취되는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2.2 로마서 9장 13절: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바울은 창세기 25장 23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둔 말라기 1장 2절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는 자신의 논제를 논증하였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바울의 인용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의 자손 에돔 족속을 버렸다”는 구절까지 언급하는 점이 흥미롭다. 왜 칼빈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다루는 로마서에서 민족의 선택과 유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선, 창세기에 기록된 이야기에서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두 민족’의 기원이 될 것이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개인의 선택과 유기 그리고 민족의 선택과 유기와의 관계를 칼빈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칼빈이 말라기 주석에서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 로마서 주석에서 말라기의 구절을 인용한 목적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두 민족’을 야곱과 에서의 자손으로 이루어지게 될 혈연공동체로 이해한다. 에서와 야곱은 개인이지만, 그들은 육체적 혈통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민족 공동체를 ‘대표하는 자’ 또는 ‘창시자’이다. 이러한 표현을 칼빈은 “강조법”17)이라고 칭하였다. 왜냐하면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날 자들이 훗날에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는 것으로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은 개인이지만 이 개인의 존재에는 미래의 공동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 미래의 공동체로 확장되는, 다시 말해서 개인의 삶에는 공동체의 미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칼빈이 개인의 선택과 유기, 민족 공동체의 선택과 유기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칼빈이 로마서 9장 13절을 주석하면서 말라기 1장 2-3절의 “에서의 자손 에돔 족속을 버렸다”고 인용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에서와 야곱의 선택과 유기가 민족의 선택과 유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논증하였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왜 칼빈은 이방인의 구원을 다루는 이 장에서 말라기의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일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선 그가 말라기 주석에서는 어떤 맥락에서 이 문장을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을 건네셨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었던 호의적 언약을 기억하고 회상하라는 의도에서 이 말씀을 건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칼빈은 개인의 선택과 유기가 민족의 선택과 유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간섭하시고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하나님의 호의적 언약을 깨닫게 하여 다시 하나님의 백성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인용하였을 뿐이다.18)
이러한 칼빈의 의도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길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택받은 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수많은 난관과 경쟁을 만나야 한다.”19)는 언급과도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으나 그 부름이 그들의 삶의 평탄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들은 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좌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호의적 언약을 기억하며 그 약속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그 과정의 ‘평탄함’ 또는 선택된 자의 ‘안일함’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칼빈의 예정론은 “결정론적 예정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개인의 선택과 유기가 민족의 선택과 유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서 주석에 나타난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적인 언약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결정론적 선택 사상은 로마서 주석에서 뒤로 물러나게 된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칼빈의 관심은 개인의 선택과 유기 그리고 민족의 선택과 유기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회상하고 그 섭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2.3 창세기 주석과 로마서 주석의 비교
칼빈은 모세가 기록한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야기와 바울의 해석에 놓인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하였다.20) 심지어 칼빈은 바울이 모세의 의도를 바꾸어 버렸다고 언명한다.21) 바울의 관심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특별 선택의 관점에서 ‘남은 자’에 관심을 둔 반면, 모세는 단지 일반 선택과 특별 선택의 구분이 존재한다는 점을 나타내는 데 멈추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한 교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선택된 자와 그 구원에서 유기된 자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한 반면, 모세는 특별 선택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야곱과 그의 전 자손을 선택하신 것이기 때문이다.22)
그렇다면 바울이 모세의 글을 왜곡한 것인가? 바울이 왜곡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바울과 모세의 말을 조화시켜야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칼빈에게 주어진 성경해석의 과제였다. 칼빈은 우선,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이 그가 속한 교회의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야곱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이것이 바울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였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바울이 “일반선택에서 특수 양자설로” 한 걸음 진보하여, 그 관점에서 “교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모두 교회의 참 회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23)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답변한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칼빈은 바울의 해석에서 그의 목회적 관심과 시대적 적용이라는 차원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러한 해석은 모세의 의도를 벗어난 것인가? 이에 칼빈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모세가 오직 야곱의 인격에만 하나님의 동의를 위임했기 때문에 바울이 확대하여”24) 해석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칼빈은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가 야곱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바울이 그 의도를 적절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이 두 민족을 구별하여 내신 후에 그 선택이 야곱의 모든 자손에게 무차별하게 귀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까 하는 염려에서 출발한다. 이 염려에 대한 답변으로 그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들여 그 말씀을 재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긍휼에 근거하여 자유롭게 야곱의 아들들 중 일정한 수효만을 선택하여 특별하게 구원에 이르도록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은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인 하나님의 의도에 해석의 잣대를 두었다는 점이다.
칼빈은 창세기의 이야기와 바울의 해석의 갈등을 바울의 목회적 관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로서의 하나님의 뜻을 근거로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칼빈에게 있어서 창세기 주석에서는 기독론적 사고가 뒤로 물러난 반면25)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시간 전에 이루어진 불가해한 섭리의 차원에서 종말론까지 아우르는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역사적 적용이라는 두 차원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3. 로마서 11장 26절: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약 성경은 언약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표현하는 암(am)과 혈연적 공동체를 나타내는 고임(goym)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물학적·종족적 정의에 근거한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 간의 구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한 공동체와 하나님의 언약을 내적 소명으로 받아들인 ‘남은 자’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경계는 무엇인지 로마서 11장 26절에 나타난 ‘온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로마서 11장 25c-26a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이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 구절을 칼빈은 “이방인의 충만이 들어오는 한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부분은 완악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리라(caecitas ex parte Israeli contingit, donec plentitudo gentium ingrediatur. Atque ita universus Israel salvus fiet).”26)고 번역한다. 칼빈은 부문장에서 “도넥(donec)”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시간적 선후관계를 의미하는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하기보다는 “이방인의 빛이 들어선다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이러한 방식으로 눈먼 유대인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들은 복음의 빛을 거절한 반면, 그 빛이 이방인들에게 옮겨 비치게 되고 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27)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칼빈에게는 유대 민족과 이방 민족이 구원받게 되는 시간적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유대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 비추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칼빈이 언급한 복음의 “빛”이라는 비유에 주목하고자 한다. 칼빈은『기독교강요』1권 6장 1절28)과 베드로후서 1장 19절 주석29)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으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보편성을 나타내었다. 이처럼 복음의 ‘빛’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 지닌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방 민족과 유대 민족에게 모두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유대인들은 그 빛을 거절하였을 뿐이고 이방민족들은 그 빛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부분’이 복음의 빛을 거절하였다는 표현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여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민족적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민족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에 속한 구성원의 몇몇이 약속의 말씀을 거절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결단 차원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부분’은 이방 민족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남은 자’와의 대립 구도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포한다. 여기에서 ‘온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을 칼빈이 민족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개인적 차원에서의 유대 민족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문제로 대두된다. 우선, 칼빈의 라틴어 번역을 살펴보면 그는 그리스어 “파스 이스라엘(온 이스라엘)”을 “우니베르수스 이스라엘(universus Israel)”로 옮긴다. 이는 불가타 성경이 “옴니스 이스라엘”(omnis Israel)”로 번역한 것과 대비를 이룬다. 라틴어 “옴니스(omnis)”는 개개인을 포괄한 모든 사람들을 뜻하는 반면, “우니베르수스(universus)”는 집합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전체를 나타낸다.30) 칼빈의 헬라어 번역을 통해서 볼 때 그는 바울의 ‘온 이스라엘’을 집단적 공동체의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당시의 주석가들 가운데 ‘온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의 종교가 “다시금 이전처럼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으로 이해한다.
나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일컫는 것으로 본문의 말씀은 ‘이방인들의 충만이 들어왔을 때 유대인들 또한 동시에 그들의 변절을 돌이켜 믿고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온 이스라엘-이 온 이스라엘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서 모아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 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백성은 하나님의 집에서 맏아들이기 때문에 첫 자리를 차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 같은 해석이 더 적합하다고 내가 생각한 것은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왕국의 완성을 지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며 온 세상을 포함한다.31)
칼빈은 ‘온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들과 유대 민족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모든 백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여기에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라면, 민족적 개념으로서의 이스라엘 공동체에 어떻게 이방 민족이 들어설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로 이해한다. 그런데 왜 유대 민족과 이방 민족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갈라디아서 6장 16절을 그 근거로 든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믿음으로부터 멀어진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자녀들과 대립하여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칭하고 있다”32)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서 태어난 자녀들과 교회가 대립 구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칼빈이 여기에서 ‘온 이스라엘’을 믿음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방 민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의 어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칼빈은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어떤 하나의 씨를 남겨 두셨다(quibus verbis diserte sibi venidicat Deus aliquod semen, ut redemptio in electa et peculiari gente ist efficax)”는 표현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씨(semen)’라는 단어 앞에 부정관사(aliquod)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용례는 이방 민족에게도 드러난다. 하나님의 약속을 변절한 백성들을 다시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회심”하도록 기대한다는 표현에서 위의 표현과 같이 회심(conversio) 앞에 부정관사(aliqua)를 사용하고 있다.33)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는 민족적 개념의 공동체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칼빈은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방인이 포함된 “하나님의 영적 백성”34)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이스라엘을 영적 의미를 지닌 상징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개념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은 이스라엘 민족의 탁월성, 다시 말해서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특징과 역할”35)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순수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그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높이 평가”36)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칼빈은 바울의 “온 이스라엘”을 집합적 개념에서 이해하였고, 그 집합의 구성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들인 유대인의 남은 자와 이방인들로 보았다. 여기에서 그의 기독론적 해석이 돋보인다. 이스라엘이 민족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 안에 이방 민족을 포괄할 수 있었던 것은 칼빈이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문자적 의미에 내재된 영적 개념으로 승화하여 교회의 역사적 표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과의 시간적 간격을 뛰어 넘어서 교회와 동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그의 구약해석의 원칙이 드러난다.37) 칼빈은 구약을 해석할 때 한편으로는 역사적 관점에서 문자적 의미를 중시하여 무조건적인 기독론적 해석을 조심스럽게 거부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역사적 해석의 의미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영적 의미로 승화시켜 다시금 시대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독론적 해석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맥락에서 아브라함의 약속에 근거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교회의 표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민족적 공동체이나 그 공동체는 영적 의미에서 지금 현재의 교회와 연속성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스라엘이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민족적 공동체의 의미를 지속하면서도 종말론적인 영적 차원에서 교회에 적용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교회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4. 유대인에 대한 칼빈의 태도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 나타난 유대 민족을 바라보는 칼빈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우선,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기꺼이 견디어 낼 수 있지만, 여전히 죄악 중에 머무는 그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유대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금욕적인 무관심”과 “고통에 대한 무감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38) 그러므로 칼빈은 바울이 육신적으로 자신의 동족인 유대 민족을 위해서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다”고 한 기도를 “친구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르는 (…) 완전한 사랑”39)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칼빈은 바울과 유대인과의 민족적 동일성에 부각시키지 않고 단지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친구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인에 대한 그의 사랑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부르심”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이는 그의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유전적 거룩”40) 또는 “초자연적 특권”41), “복의 씨가 남아 있”42)는 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각종의 수단에 의해, 그리고 또한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해서 다른 모든 민족들 위에 그 백성을 뛰어나게 해주신 그 탁월성”43)을 주신 하나님의 작성에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임무로 간주한다.
문제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선점한 육체적 차원에서의 민족적 우위성이 칼빈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이다. 로마서 11장 29절 주석에서 칼빈은 민족 공동체의 차원의 “일반 수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일반 수양은 외관상으로는 잠시 폐기되어 버렸던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뿌리째 찍혀 버렸던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특권과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상실했었기 때문에 남은 자에 대한 소망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해 주셨던 하나님의 그 계획이 지금도 확고하게 불변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 7)는 말씀으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그가 결코 파기하실 수가 없다고 하면, 그는 유대 민족에게서 그의 자비를 전적으로 거두셨을 리 없다.44)
여기에서 칼빈은 첫째,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차원에 주목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하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해 나가기로 한 그 섭리의 역사는 “지금도” 확고하고 불변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종말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로마서 11장 26절의 “모든 이스라엘”의 해석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선택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구원을 얻은 이방인이 그 민족적 차별성을 넘어서 종말론적 차원에서 성취될 이스라엘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둘째, 그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적 본성의 차원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사랑을 파기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 언약은 지금까지 유효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칼빈은 당시의 유대인들을 두 차원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와 하나님의 본성의 차원에서 유대 민족에 대한 관용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칼빈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현재에 대한 판단에 따라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으로, 그 구원의 선택은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그의 기다림의 관용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의 회심이 독특하고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례가 적었던 것으로 보이며, 칼빈도 그러한 일이 생기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유대 민족을 향한 구원의 계획은 완전하게 폐기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빈이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원칙은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적 판단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비밀로 두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 사람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로 이방인이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처럼 유대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미칠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며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민족적 동정을 하나님의 구원사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이 지닌 민족적 특권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을 설명하고, 종말론적 관점에서 유대인의 구원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유대 민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은 현재 비밀이라는 하나님의 관용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Ⅴ. 결론
칼빈은 그의 로마서 9-11장의 주석에서 기독론적 해석을 전면으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통한 통일성을 주장하기보다는 언약과 약속의 구분, 일반 언약과 특별 언약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통해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서는 결정론적 선택 사상이 뒤로 물러남으로써 이방인들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용어의 구분과 결정론적 선택 사상의 약화는 한편으로는 역사적 관점에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우위성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론적 구원의 사역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영적 의미를 지시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적 개념인 이스라엘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교회’에 상응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역사적 민족 공동체를 표현하는 용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에서의 영적 의미를 지니게 됨으로써 이방 민족을 포괄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칼빈의 영적 의미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문자적 의미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근거로 첫째,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 통일의 관점에서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공동체의 우위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종말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선택된 남은 자를 통해서 유지되고 그 계획은 지금도 유효하며, 더 나아가 그 계획은 유대인과 이방 민족에게 열려있어 보편성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원칙을 이해할 때 그리고 문자적 해석과 더불어 그 안에 내재된 상징적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의 갈등 구조를 이해할 때 한편으로는 루터주의자 훈니우스가 칼빈을 왜 ‘친유대주의자’라고 칭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타인메츠가 시도한 것처럼 영적 해석에 근거하여 칼빈이 기독론적 해석을 수용하였다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게 되며 칼빈이 당시의 종교개혁자들과 동일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결론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참고문헌
Barnes, P. "Calvin and the Jews."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2009): 175-93.
Calvin, J. Joh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CO]. Edited by W. Baum. Bd. 23. 43. 55. Scheitschke, Braunschweig, 1863ff.
. Opera Selecta [OS]. Edited by P. Barth and G. Niesel. 3 Bd. 1927ff.
Detmers, Achim. Reformation und Judentum Israel-Lehren und Einstellungen zum Judentum von Luther bis zum fruehen Calvin. Stuttgart · Berlin: W. Kohlhammer, 2001.
Gibason, David. Reading the Decree Exegesis, Election and Christology in Calvin and Barth. New York: T&T Clark, 2009.
Hesselink, I. John. "Calvin's Understanding of the Relation of the Church and Israel based Largely on His Interpretation of Romans 9-11." Ex Auditu 4 (1988): 59-69.
Pak, G. Sujin. "A Break with Anti-Judaic Exegesis: John Calvin and the Unity of the Testaments." Calvin Theologicla Journal 46 (2011): 7-28.
Robinson, Jack Hughes. John Calvin and the Jews. New York · San Francisco: Peter Lang, 1992.
Steinmetz, David C. "John Calvin and the Jews: A Problem in Political Theology." Political Theology 10/3 (2009): 391-409.
Von Ravenswaay, J. M. J. Lange. "Calvin und die Juden." In Calvin Handbuch. Edited by Herman J. Selderhuis. Tuebingen: Mohr Siebeck, 2008: 141-46.
주
1) David C. Steinmetz, "John Calvin and the Jews: A Problem in Political Theology," Political Theology 10/3 (2009): 391-409.
2) Jack Hughes Robinson, John Calvin and the Jews (New York · San Francisco: Peter Lang, 1992).
3) G. Sujin Pak, "A Break with Anti-Judaic Exegesis: John Calvin and the Unity of the Testaments," CTJ 46 (2011): 7-28.
4) P. Barnes, "Calvin and the Jews,"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2009): 175-193.
5) 데트머스는 칼빈의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으 이스라엘과 칼빈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분을 박수진은 다시 한 번 그의 논문에서 칼빈의 유대인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구분이라고 평가하였다. Achim Detmers, Reformation und Judentum Israel-Lehren und Einstellungen zum Judentum von Luther bis zum fruehen Calvin (Stuttgart · Berlin : W. Kohlhammer, 2001).
6) 다니엘 주석 2장 44절에서 칼빈은 “나는 많은 유대인들과 종종 대화를 해왔으나 그들에게서 추후의 경건함이나 진리, 또는 정직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에게는 결코 상식조차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J. M. J. Lange van Ravenswaay, "Calvin und die Juden," in Calvin Handbuch, ed. Herman J. Selderhuis (Tuebingen: Mohr Siebeck, 2008), 146.
7) Peter Barnes, "Calvin and the Jews,"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2009): 187.
8) Achim Detmers, Reformation und Judentum Israel-Lehren und Einstellungen zum Judentum von Luther bis zum fruehen Calvin.
9) CO 42, 176; 롬 9: 7; ... communis adoptio ... electio areana...
10) CO 23, 350; 창 25: 23; Fides quidem spirituales filios a carnalibus discernit: sed nunc de principio discretionis, non autem de symbolo vel nota quaestio est.
11) CO 23, 350; 창 25: 23; Fides quidem spirituales filios a carnalibus discernit: sed nunc de principio discretionis, non autem de symblo vel nota quaestio est.
12) 롬 9: 7.
13) 롬 11: 2.
14) CO 42, 176; 롬 9: 7; ...ad eius confirmationem ac complemetum tendere.
15) 롬 9: 7.
16) CO 42, 173; 롬 9: 4; Quoniam pacta hic a promissionibus distinxit, hanc differentiam observemus, ut pactum nobis sit, quod disertis ac solennibus verbis concipitur: habetque mutuam stipulationem, nempe foedus cum Abrahamo ictum - et alterum cum populo in monte Sinai. promissiones vero sint quanccunque in scirpturis sparsim occurrunt.-Pacto velut percutit foedus nobiscum Deus: promissionibus simplicius suam nobis gratiam offert. Itaque pactum est pormissionis species magis splendida et authentica. Legislatio videtur ad iudicia specialiter referri debere.- Nam ubi Deus semel foedus cum veteri populo percussit, novis subinde promissionibus non destitit gratiam suam offerre. Unde sequitur, promissiones ad pactum, tanquam ad unicum caput referri: sicuti specialia Dei auxilia, quibus favorem suum Deus erga fideles testatur, ex unico electionis fonte manant. Quia autem lex nihil aliud quam foederis illius renovatio fuit, quae eius memoriam melius sanciret: videtur hic legislatio peculiariter ad iudicia debere restringi.
17) CO 23, 349; 창 25: 23; Emphatica autem est loquutio quum dicit duae esse gentes.
18) David Gibson, Reading the Decree Exegesis, Election and Christology in Calvin and Barth (New York :t&t clark, 2009), 113.
19) CO 23, 349; 창 25: 23; Nam quum aegre cedant reprobi, necesse est Dei filios pro sua adoptione multas molestias et certamina subire.
20) CO 23, 350; 창 15: 23; Sed alia semper viguit peculiaris continebatur, ut in communi interitu servaret Deus quos vellet.
21) 창 25: 23
22) CO 23, 350; 창 25: 23; Deus ergo totum semen Iacob sine exceptione elegit, sicut pluribus locis testatur scirptura: quia omnes pariter iisdem gratiae suae testimniis dignatus est, verbo nempe et sacramentis.
23) CO 23, 351; 창 25: 23; Quis non videt Paulum a communi adoptione ad particularem descendere: ut sciamus non omnes qui locum occupant in ecclesia, pro veris ecclesiae membris reputari?
24) CO 23, 351; 창 25: 23; Quod Dei beneplacitum in persona unius Iacob Moses commendat, merito Paulus longius trahit.
25) 야곱과 에서의 탄생 이야기에서와는 달리 야곱의 사다리 이야기에서 칼빈은 적극적으로 기독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이러한 변화는 칼빈도 바울처럼 야곱으로부터 시작되는 공동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근거한 특별한 선택을 야곱의 이야기에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의 창세기 주석 28장 10-22절을 참조.
26) CO 42:225; 롬 11:25.
27) CO 42:226; 롬 11:25; Et donec non infert temporis progressum vel ordinem, sed potius valet perinde ac si dictum foret, ut plenitudo gentium. Sensus ergo sit: Israelem ita quodammodo excaecavit Deus, ut dum illi evangelii lucem respuunt, ad gentes tracferatur: et illae quasi vacuam possessionem occupent.
28) OS Ⅲ, 60; I. 6. 1; ...verbi sui lumen....
29) CO 55, 457; ...nisi nobis Dominus subeniret verbi sui luce.
30) J. M. Stowasser, Lateinisch-deutsches Schulwoerterbuch (Muench: Oldenbourg, 1994). omnis 351과 universus 532 참조.
31) CO 42, 226; 롬 11:26; sed ego Israelis nomen ad totum Dei populum extendo, hoc sensu: Quum gentes ingressae fuerint, simul et Iudaei ex defectione se ad fidei obedientiam recipient: atque ita complebitur salus totius Israelis Dei, quem ex utrisque colligi oportet: sic tamen ut priorem locum Iudaei obineant, ceu in familia Dei primogeniti. Haec intereptatio mihi conveinentior ideo visa est, quod Paulus hic consummationem regini Christi designare voluit, quae in Iudaeis minime terminatur, sed totum orbem comprehendit.
32) CO 42, 226; 롬 11:26; Et eodem modo ad Galats cap. 6, 16, Israelem Dei nuncupat ecclesiam ex Iudaeis et gentibus pariter compositam, populum ita ex dissipatione collectum opponens carnalibus Abrahae filiis, qui ab eius fide disciverant.
33) CO 42, 227; 롬 11:26; Huc enim tantum respicere satis habuit Paulus, quia Christi proprium munus est reconciliare Deo populum apostatam et foedifragum, certo spernadam esse aliquam conversionem, ne omnes simul intereant.
34) CO 42, 227; 롬 11:26; ... spirituali Dei populo ....
35) CO 42, 171; 롬 9:3; ... quia electi populi persona atque (ut vulgo loquuntur) qualitate ipsos induit.
36) 시 47:9.
37) 칼빈의 알레고리적 해석이 지닌 영적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양신혜, “ 칼뱅의 영적 해석 - 문자적 의미와 알레고리적 해석의 긴장 사이에서,” 장신논단 38 (2010), 120-139.
38) CO 42, 170; 롬 9:2.
39) CO 42, 170; 롬 9:3; Haec enim perfecta demum est dilectio, quae nec mortem pro amici salute refugiat.
40) 롬 11:16.
41) 롬 11:16.
42) 롬 11:11.
43) 롬 9:4.
44) CO 42, 228; 롬 11:29; Sicuti nomine electione paulo ante arcaneum Dei consilium notavit, quo Iudaie olim a gentibus discreti fuerunt. Tenendem est enim, non de privata cuiusquie electione nunc tractari, sed de communi adoptione totius gentis, quae externa specie collapsa videri potuit ad tempus, sed a radice excisa non fuit. Quia exciderant suo iure et salute sibi promissa Iudaei, ut spes aliqua de reliquiss maneat, contendit Paulus firmum et immutabile stare Dei consilium, quo semel sibi illos in gentem peculiarem eligere dignantus est. Si ergi fieri non potest ullo modo ut Dominus a pacto illo discedat, quod cum Abrahanmo sancivit: .
45) 롬 11:25 과 단 2: 44.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7 | 2018년 가을학기 특강(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경륜) | 손재호 | 2019.02.11 | 516 |
26 | 2019년 봄학기 특강(개혁교회의 예배, 헌상, 친교, 권징) | 손재호 | 2019.02.11 | 551 |
25 | 성경에서 말하는 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 | 손재호 | 2019.06.05 | 4525 |
24 | 말라기 3장에 등장하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의 바른 이해 | 손재호 | 2019.06.05 | 1676 |
23 |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점 | 손재호 | 2019.09.30 | 39395 |
22 | 세대주의란 무엇인가 | 손재호 | 2019.09.30 | 1401 |
21 |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세대주의의 문제점 | 손재호 | 2019.09.30 | 2675 |
20 |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 손재호 | 2019.10.01 | 830 |
19 |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의 문제점과 극복 방안 | 손재호 | 2019.10.31 | 667 |
18 | 세대주의 성경해석의 원리와 종말론 | 손재호 | 2019.10.31 | 1915 |
17 | 개혁주의 교회 주일오후예배(화란개혁교회) | 손재호 | 2020.03.30 | 782 |
» |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손재호 | 2020.05.09 | 1256 |
15 | 주의 만찬을 은혜의 방도로서 시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손재호 | 2020.05.09 | 756 |
14 | 주의 상에 손님을 참여시키는 것에 관하여 | 손재호 | 2020.05.09 | 601 |
13 | 종교개혁과 교리개혁:사도신경을 중심으로 | 손재호 | 2020.05.09 | 350348 |
12 | 제1치리서와 제2치리서를 통해 본 장로교회의 특성 | 손재호 | 2020.05.09 | 85710 |
11 | 칼빈-칭의와 성화 구별할 뿐 분리할 수 없다. | 손재호 | 2020.05.09 | 771 |
10 | 언약의 관점에서 본 하나님 나라 | 손재호 | 2020.05.09 | 1099 |
9 | 2020년 여름학기 특강(리차드 십스의 설교-개혁) | 손재호 | 2020.07.23 | 729 |
8 | 루터의 노예의지론 | 손재호 | 2022.12.09 | 3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