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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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손재호 목사



                

I. 서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삼위일체(Trinity) 교리만큼 기본적인 교리도 없고, 해석하기에 어려운 교리도 없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우리의 유머를 잃어버릴 위험에 빠질 것 같고, 동시에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지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주제를 가지고 위대한 연구에 착수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어렵고 애매한 주제를 통해서 나의 길을 찾도록 강요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연구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어거스틴은 이 주제에 대한 오류보다 더 위험스럽고, 그 연구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진리의 발견이 더 유익한 다른 주제는 없다고 했다. 시릴 C. 리처드슨, 「삼위일체의 수수께끼」, p 283


   어거스틴이 약 20년(400~419)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삼위일체론은 초대교회가 약 4백년에 걸쳐 논쟁을 거듭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종합하여 가장 성서적이고 복음적이며 정통적 삼위일체 신앙을 체계화한 불후의 역작이다. 그는 이 저작을 통하여 어거스틴 이전에 있었던 삼위일체론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정립시켜, 삼위일체론을 한걸음 나아가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Ⅱ. 본론

1.  셋과 하나

   어거스틴의 신관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절대자, 단일자, 분할될 수 없는 자,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단일적이고 분할할 수 없는 한 행동과 의지를 가진다. 그의 사역은 분할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같은 하나의 본질로 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창조주 하나님, 전능한 삼위일체 같은 활동 속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이 활동이 매우 다르고, 물리적으로 창조된 것들을 통해 작용할 때 분할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리적인 소리를 내는 우리의 목소리라는 수단에 의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단지, 각 이름이 차지하는 시간의 간격들에 의해 나뉘어져, 독립적으로 발설될 수 있는 것과 똑같다. 그들은 동시에 명명될 수 없고, 적혀질 때 그들은 독립된 공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들이 그들 자신의 ‘본질’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 셋은 단일체이다. 아버지의 목소리, 아들의 육신, 성령의 사랑, 비록 그러한 표현들이 각각의 위격들에 돌려질지라도, 그들 각자는 삼위일체의 결합된 활동에서 기인하다.

   동일한 삼위일체 안에서 각각의 위격들에 적당한 술부들은 그들의 상호 관계들, 혹은 피조된 존재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들을 언급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 다 ‘성령’이고 둘 다 ‘거룩하다’. 그러나 삼위일체에서 고유한 이름으로서의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이므로, 아들과 아버지와 상대적이다. 성령은 말하자면 아버지와 아들의 표현할 수 없는 교통이다. 이리하여 성령의 둘의 선물이라 불린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오직 선하고, 위대하며, 영원하고, 전능한, 즉 자기 자신의 단일성, 신성, 위대성, 선, 영원성, 전능성을 지닌 한 분 하나님이다.

2. 하나의 근원

   삼위일체의 상호 관계들 속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기 때문에 그의 근원이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발출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성령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낳거나 만드는 것에 관련하여 근원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주는 것에 관해서도 그렇기 때문이다. 성령은 출생한 자로 오지 않고, 주어진 자로 왔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는 독생자의 관계가 아니므로 아들이라 불리지 않는다. 만일 어떤 선물이 그것의 근원이 수여자를 갖고 있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의 근원이라는 것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한 분 하나님이고, 창조에 관해서 한 분 창조주이며 주님인 것처럼, 성령에 관련하여 그들은 두 근원들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다. 한편 창조에 관련하여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그들이 한 분 창조주이며 한 분 주님인 것처럼 하나의 근원이다.  

3. 하나의 본질(ousia)과 세 개의 위격(hypostasis)
  : 미아 우시아 트레아스 휘포스타시스’(μια υσια τρεις υποστασεως)

   본질이란 희랍어로 ousia라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표준적으로 ‘본질’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또한 hypostasis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ousia과 구별시켜준다. 그래서 희랍어로 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저자들이 ‘하나의 본질, 세 개의 위격들’이라는 구절을 채택했다. 이것에 대한 라틴어는 ‘하나의 essence, 세 개의 substances'일 것이다. 그러나 ’essence'는 'substance'와 똑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권위있는 라틴 저자들은 ‘하나의 essence 혹은 substance, 세 개의 persons'라고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한 실체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세 위격이라는 고백으로 ‘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아스 페르소나’(una substantia tres personae)이다.이는 동방교회의 ‘미아 우시아 트레아스 휘포스타시스’(μια υσια τρεις υποστασεως)의 적절한 그의 대응이었다. 숩스탄티아는 동사에서 명사로 만들어진 단어로 ‘어떤 것의 밑에 있는 것’, ‘어떤 것을 존재케 하는 ’그것‘ 혹은 ’어떤 실체가 그것으로 존재케 하는 밑에 깔려 있는 원칙‘이다. 그러나 페르소나는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 용어상으로 볼 때 오해를 불러일으킬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서방교회는 세 인격을 의미하는 용어를 동방교회와 친근감이 없는 라틴어 페르소나를 썼기 때문이다. 당시 서방교회는 우시아나 휘포스타시스를 동방처럼 세밀하게 분리하는 헬라적 통찰력이 부족했고, 오히려 동방교회가 동일한 두 단어를 분리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주제에 대한 접근이 헬라인의 접근과는 매우 달랐지만, 그는 매우 독립적으로 신의 공동내재에 관한 헬라인들의 중심 사상에 도달했고, 참으로 그들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 깊게 그 주제를 풀었다. 이후 그는 이런 서방교회의 입장이 동방교회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고심 끝에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동방의 세 휘포스타시스 자리에 적용하였다. 페르소나는 고유한 로마 표현으로 구체적으로 그 존재의 실체를 가진 존재의미이다. 즉 독자적 실체를 가진 존재 의미로 한 개인의 구체적 현현을 의미했다. 페르소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터툴리안이 삼위일체에 적용하면서부터 서방에 정착되었고, 어거스틴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그는 페르소나로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은사라고 해서 성부나 성자가 아니시므로 확실히 그들은 세분임을 설명했다.  
   - 고정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관계개념을 중심으로」, p 20
그의 고백에 의하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분리할 수 없는 동등성 속에서 같은 하나의 본질을 이루는 단일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비록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므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하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출생되므로 아버지는 아들과 동일하지 않고, 성령은 아버지도 아니고 아들도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난 성령이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하며 삼위일체의 단일체에 속할지라도, 세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인 한 분이기 때문에 삼중의 존재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언제나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상호관계에 관하여, 다른 것과 구별하여 단일한 위격을 언급하는, 삼위일체 안에서 적용된 단어들이 있다. 아버지는 삼위일체가 아니며, 아들도 아니고 그 선물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각각의 위격들에 대해 사용된 용어들은 하나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사용되고, 복수로 되어 있는 세 위격들에 대해 사용되지 않는다. 세 개의 신성, 세 개의 선, 세 개의 전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분 하나님, 선하고 전능한 삼위일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상호 관계 속에 있지 않고, 그들 자신의 존재 속에 있는 위격을 언급하는 모든 용어들에 적용된다. 따라서 우리는 세 위격들에 대하여 말하고, 본질의 어떤 차이도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한 하나님이 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어떻게 각각 성부 성자 성령으로 따로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고, 그의 해결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이에 대한 해결책은 ‘헨 폴라 논리’로 해결된다. 헨 폴라 논리의 주창자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에 의해 대두되었다. 그의 저서 속에 보면 하나와 둘을 합하면 셋이 된다고 하는 일(一)과 다(多) 사상이 있다. 헨 폴라 논리를 사용한 예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을 위해 다음과 같은 주제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부활까지 사흘에서도 하나와 비율이 나타나 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한 중보로 말미암아 많은 자가 하나로 집결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어떻게 그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 Augustinus, 「삼위일체론」, p144-46
그의 저서「Enneades」5장 1,8에서 헨 폴라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헨(ευ)은 하니이며, 헨 폴라(ευ πολλα)는 하나이며 동시에 다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헨 카이 폴라(ευ και πολλα)는 일(一)과 다(多)를 의미한다. 이중에서 헨 폴라 논리는 두 영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플로티누스는 일자와 그로부터 유출된 부산물의 존재 표현 방식을 하나이며, 다수인 헨 폴라로 설명한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논리에 의해 ‘한 실체 세 위격’의 표현으로 하나님은 한 분임과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했다.

4. 어거스틴의 관계개념

   한 실체 세 위격(una substantia tres presonae)은 세 인격 사이에 동등하며 완전히 하나며, 하나님 안에 분리나 구분이 없이 상호간에 충만중의 충만이다. 그러나 반대로 각각의 페르소나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고유한 실체를 가질 수 있는가? 어거스틴도 이것을 삼위일체에 관한 어려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부는 하나님이시오, 성자는 하나님이시오, 성령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실체에 대한 의심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세 하나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관계개념 안에서 다른 분들과의 상호 관련하에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연성에 관한 말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말은 그 모두가 그의 실체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성자에 대한 성부의 관계나 성부에 대한 성자의 관계는 우연성에 문제되지 않는다. 성부, 성자의 개념은 오직 아들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성부라고 부르며, 아들도 오직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성부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이 명칭들은 실체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부이신 것과 성자이신 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실체에는 차이가 없다. 성부와 성자라는 이름은 실체에 관한 것이 아니고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변하지 않으므로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속(屬)과 종(種)의 관계개념을 통해 위에 문제에 대한 이해를 주장한다. 가령 세 사람이 있다는 말은 동물 셋이 있다는 표현과 동일하다. 여기서 사람은 종에 속하고 동물은 속에 포함된다. 속은 모든 종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속이란 종들의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페르소나에 대한 성부 성자 성령은 한 숩스탄티아에 대한 세 종으로서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삼위는 세 관계 속에서 세 분의 개별적 인격으로서 성부 성자 성령이 존재되어진다.

5. 어거스틴의 관계개념 속에서 발전된 실체개념

   성부를 성자와의 관계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자를 성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지 않은 분과 난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 자신에 관한 것이고, 서로의 관계에서 부르는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관계개념의 기준을 낳으시고(begetting), 나고(begotten), 출원(being bestowed)으로 구분했다. 성부는 성자와의 관계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자는 성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나지 않음’이라는 것은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남도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나지 않음과 남이 서로 다르다면, 하나님에 대한 각각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다.

    어거스틴은 페르소나에 대한 관계개념의 이해 속에서 ‘낳은 이’와 ‘난 이’의 구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구별이라는 개별성이 관계개념을 전제하지 않는 일반적인 아리스토텔스식의 의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관계라는 대자적인 이해속에서 성부와 성자는 두 페르소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전제가 없다면 성부와 성자는 별개의 두 신이 된다.

6.  인간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흔적 : 심리학적인 유비들

   삼위일체론에 대한 어거스틴의 독창적인 공헌은 인간 영혼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유비를 사용한 것을 다루는데 있다. 이 유비(Anaiogies)의 기능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절대적인 유일성과 삼위의 진정한 구별에 대한 신비를 우리가 보다 낫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심화시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어디에나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관념 속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형언할 수 없고, 비물질적이고, 변함이 없는 최고의 존재를 이해력으로 식별하기 위해서는 삶의 마음을 신앙 규범의 지도하에서 단련해야 하며, 그 단련을 위해서는 사람의 본성에 있는 그 마음보다 나은 것이 없다.

1) 외적 사람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의 흔적
   어거스틴은 논하기를 삼위일체의 지식이 참으로 도달하는 길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세 가지 것을 암시하는데 실은 사랑 그 자체 안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 내가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세 가지의 것, 즉, 나 자신, 내가 사랑하는 대상, 그리고 사랑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면 두 가지의 것, 즉 사랑과 사랑 받는 자가 있다. 따라서 당연히 사랑이 있는 곳에 세 가지의 것들이 있다는 결과가 되지는 않는다. 마음은 자기 자체를 알지 못하면 사랑 자체를 할 수 없다. 마음이 자신을 사랑할 때는 마음과 사랑이 있다. 그것이 자신을 안다면, 셋은 하나의 단일체이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하다면 그들은 동등하다. 삼위일체, 즉 마음과 사랑, 지식이 지속한다. 그들은 혼동되지 않으나, 그들 자신들 안에서 각각, 대체로 상호간에 존재한다. 따라서 마음 속에는 일종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데, 마음의 원천인 그것의 지식과 그것에 대한 그것의 말과 사랑은 셋을 이루고, 이 셋은 단일체이며, 하나의 본질이다.

   마음의 지식이 그것 자신의 존재에 비례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원천은 적어도 부모이다. 또한 마음의 사랑이 그것의 지식과 그것의 존재에 비례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원천은 적어도 사랑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을 이해하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관찰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하나님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이미지를 관찰했다. 자기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관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리는 각 개인은 한 사람이고, 삼위일체의 형상은 그의 마음 속에 있다. 그런데 그 전체적인 삼위일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며, 전체적인 신성이 삼위일체이고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삼위일체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하는 성부, 사랑을 받는 성자,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랑의 성령의 흔적이 사람의 구조 안에도 남아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흔적을 외부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원리는 첫째 것이 둘째 것을 낳고 셋째 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의 형상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피조적 형상 속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헛되이 찾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해야 한다.

2) 내적 사람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론의 형상(Lmago)
   그가 특히 인간의 내적 활동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람의 중심 자리가 내적 사람의 최저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영혼(soul, Anima)이며, 만약 사람이 신과 상봉한다면 이 영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내적 사람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분석 검토한다.

① 존재(esse), 지득(nosse), 의욕(velle)
   나는 알고 또 의지하는 자로서 존재하고, 자기가 존재하고 또 의지하는 것을 알고, 또 존재하고 아는 것을 의지한다. 즉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존재가 반드시 무엇을 알며 또한 알려고 의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속아서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 당시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아카데미학파를 논박하면서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나의 존재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는 사실이므로 존재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상에서 말한  존재, 지득, 의욕은 그것이 그대로 곧 삼위일체론적 존재 양식에 직결되는 형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흔적임에 틀림없다.

② 마음(mens), 지식(notitia), 사랑(amor)
   사람의 마음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즉 마음과 그 마음 자체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사랑하며 또 그 자체의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 이 세 가지는 하나이며 다 같으며 나눠질 수 없고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이 세 가지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라 다같이 중요성을 갖는다. 그가 삼위일체의 흔적을 먼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찾는 이유는 사람이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실에 두었고, 또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식하며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에 두었다. 곧 마음, 시기, 사랑은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③ 기억(memaria), 이해(intelligentia), 의지(voluntas)
   신앙으로 시작하며 이성의 힘으로 진전하여 ‘하나님을 봄’에 이른다는 어거스틴의 확신은 그의 일생동안 변함이 없다. 삼위일체 신에 대한 지식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 영혼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연구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열심히 공부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과 이로써 바라던 지식을 소유하게 되고 안 후에는 이것을 이용코자 한다. 여기서 능력, 지식, 이용은 셋이나 한 마음의 작용으로 일체를 이루므로 삼위일체의 흔적이 엿보인다. 끝으로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유비와 흔적과 형상을 자연과 인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후에 고백하기를 이와 같은 유사성이 피조물의 세계에서 발견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Ⅲ. 결론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종합해보면, 다른 모든 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그 지고한 삼위일체에서 위격들은 분리될 수 없을 정도여서 한편 사람들의 삼위일체가 한사람이라 불릴 수 없지만, 그 삼위일체의 경우에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이라 불리고 한 분 하나님이 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일체가 있고 그것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세 요소들을 가졌으나 한 사람이라는 방법으로 있는 삼위일체가 아니다. 삼위일체에는 세 위격들, 즉 아들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이 있다. 그 삼위일체의 형상에서 세 요소들은 그 사람의 요소들이고, 그것들은 그 사람이 아니다. 한편 지고한 삼위일체 자체 속에서 이것은 그것의 형상인데, 셋은 한 분 하나님의 것이 아니지만, 한 분 하나님이 있고, 그들은 세 위격들이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불가사의하게 형언할 수 없거나 형언할 수 없이 불가사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지고한 삼위일체 자체는 세 위격들인데 반해 삼위일체의 형상이 한 사람일지라도, 세 위격들로 된 신적인 삼위일체는 하나로 된 인간적인 삼위일체가 그러한 것보다 더욱 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그의 작품이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에 관한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들 중의 하나라는 고찰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그것은 성 토마스에게서 발견되어지는 사고의 정확성이 부족하고, ‘위격’(Person)에, 서방에 있어서 고전적인 공식들을 위한 기초들을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심리학적인 유비와 삼위일체의 상호 내재(co-inherence)라는 통찰,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묶는 띠로 성령을 파악한 점에서, 그 논문은 탁월하다. 시릴 C.리처드슨, 「삼위일체의 수수께끼」, p 308







◈ 참고문헌

․로이 배튼하우스 편, 「아우구스티누스 연구핸드북」, 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4)
․시릴 C.리처드슨, 「삼위일체의 수수께끼」, 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4)
․고정열,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침례신대원
․피터 브라운, 「어거스틴 그의 생애와 사상」, 한국장로교출판사(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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