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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논문(손재호 목사)
어거스틴의 교회론
(도나투스의 교회론과 비교연구)
◆ 목차
I. 서론
Ⅱ. 도나투스파의 교회론
1. 도나투스파의 발생배경
1) 종교적 배경
2) 도나투스의 기원과 발생과정
2. 도나투스파의 신학
1) 교회관
2) 성례전
Ⅲ. 어거스틴의 교회론
1.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배경
1) 정치적, 사회적 배경
2) 신학적 배경
2. 도나투스파와 어거스틴의 마찰
3. 키프리안의 교회론(어거스틴의 교회론과의 차이)
4.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한 이해
1) 교회본질에 대한 이해
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② 어머니로서의 교회
③ 성령의 친교로서의 교회
④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2) 교회의 네 가지 본질
① 교회의 일치성
② 교회의 거룩성
③ 교회의 보편성
④ 교회의 사도성
3) 교회와 성례와의 관계
① 세례의 기원
② 세례의 타당성
③ 세례의 효과성
④ 성만찬
Ⅳ. 결론
I. 서론
어거스틴이 말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써의 교회 개념이다. 이 신비적인 몸의 이론은 중세 교회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는 중요한 이론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목회적 실천적 바탕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 더 그 근원으로 올라가 보면,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관한 그의 교리에 있어서 주로 키프리안으로부터 유래하는 서방의 신학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어거스틴의 교회론이 키프리안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여러 가지 사상을 종합하여 어거스틴 자신의 교회론을 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거스틴 시대나 오늘날이나 교회론은 신학적인 관심사 중에 가장 중요한 분야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도나투스파의 분파 운동이 오늘날 우리 교회 내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이 참된 교회라고 자처하며, 분열을 일삼는 신앙의 흐름도 존재하고 있다. 또한 신앙의 흐름 가운데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경향도 있다. 특히 오늘날은 개교회주의가 심각하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권위와 거룩함을 성도들 앞에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도나투스파에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하려고 했던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연구하는 것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도나투스파의 분파주의 운동에 대항하여 교회일치운동을 주장했던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현대의 교회가 직면한 갖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논문을 통해 도나투스파와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비교, 고찰해 봄으로써 참다운 교회론을 정립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II. 도나투스의 교회론
1. 도나투스파의 발생배경
1). 종교적 배경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중에서 확립되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나투스파의 운동을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여러 분야 중에서 특히 종교적 배경은 중요하다고 본다. 도나투스파의 발생지는 카르타고이다. 카르타고의 저명한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하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활동을 부정하리만큼 이 세상 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을 엄격히 구별했다. 이러한 반세상적인 경향은 기독교가 로마 정부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 강하게 나타났다. 카르타고가 중심이 되는 아프리카의 반 로마적 경향과 박해하는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반제국적 경향이 결합되어 아프리카의 교회는 더욱 반세상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함으로써 서로마를 지배하게 되고, 기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쓰게 됨으로써 아프리카의 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속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를 이상화한 것과는 달리 카르타고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은 이 새 통치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기독교에 우호적인 황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황제와 교회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이 시기 아프리카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시기에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폭군 네로의 대화제 사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화인(火因)의 책임자라는 누명을 쓰고 심한 박해를 받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반국가 및 반사회적이라 하여 인류의 적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 이후로 기독교에 대한 심한 박해는 트라잔(98-117), 마루쿠스아우렐리우스(161-180), 디오클레티안(284-305), 갈레리우스(305-311)로 이어져 왔다. 디오클레티안은 303년 2월 23일 “교회를 파괴하여 땅과 같이 평평하게 하고 성서는 불에 태워버리라.”는 칙서를 공포했는데, 이 박해의 여파는 아프리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도너티즘의 발생으로까지 연결되었다.
2) 도나투스의 기원과 발생과정
2세기 중반, 그러니까 도나티즘이 발생하기 130여년 전 이레니우스는 참된 교회는 이단들과 악한 생각을 하는 자들, 자랑과 자기 만족에 빠진 분리주의자들, 그리고 위선자들로부터 조심스럽게 피해야 함을 말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 사도신경을 지키고 말과 행실에서 범죄하지 않는 거룩한 자들과 연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후에 이것이 노바티안과 도나투스 같은 분리주의자들에게 더욱 강화되어 엄격한 도덕적인 규례를 통해서 진정한 교회를 구분지으려 했던 것이다.
도나투스의 기원은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303-305년 사이에 일으킨 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실의 칙령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모든 성경을 제국의 관리들에게 자진해서 반납하라는 명령이 전해지자 상황은 어렵게 되었다.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인해 교회는 여러 부류로 나뉘게 된다. 한편에서는 황제의 칙령이 반포되자 대부분은 박해기간을 피해서 도피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위의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제3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과격파 특히 도나티스트들로부터 떳떳이 순교하지 못했다고 비판받기에 이른다. 박해가 끝난 후에 박해 기간 중에 성경을 건네준 감독들을 보통 “건네준 자”(traditores), 또는 “배교자”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 성경을 건네준 자들에 의해서 안수 받은 감독들의 권위에 대한 질문이 일어났다. 이들에 대해 엄격한 파 나중에 이들을 도나투스의 이름을 따서 도나투스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에 속했던 사람들은 이들 감독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마땅하며, 성경을 건네준 자들에 의해서 안수 받은 감독들도 효용성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해서 대부분의 북아프리카 교회지도자들은 감독의 교권적 행동은 개인의 순수성에 의존하지 않고, 그 개인의 감독으로서 갖는 직임과 안수례 그 자체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 이후 엄격주의 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계속되었다. 분파주의자 교회가 설립된 실제적인 사건은 A.D. 312년 카르타고 교구의 감독자리가 비게 된데서 시작되었다. 즉 카르타고 감독 멘슈리우스와 그의 부감독 캐킬리아누스(Caecillianus)는 카르타고 내에서 교인들이 지나치게 순교자를 추종하는 행위가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므로 이를 제한하려는 노력을 했는데 그것이 많은 대중의 감정을 거스리게 되었다. 그에 더해서 캐킬리아누스가 배교적인 펠릭스(Felix of Aptunga)에 의해 서품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를 대중에게서부터 배척 당하게 했다. 그 반대파들의 주동자는 카르타고에 있는 열광주의자인 루실라 부인의 후원을 받는 보트루스(Botrus)와 케레티우스(Calestius)신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킬리아누스를 인정치 않고 마요리누스(Majorinus)를 반대 감독으로 선출함에 따라 아프리카의 교회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곧이어 도나투스가 마요리우스의 뒤를 이어 이 분파를 지도하였는데 그의 이름에서 이 분파의 이름이 명명되었던 것이다.
도나투스파들은 캐킬리아누스의 교회를 부정하였지만, 해외의 카톨릭 교회는 캐킬리아누스와 친교를 교환하였으며, 또한 황제는 캐킬리아누스의 교회를 정통 카톨릭으로 인정하였다. 여기에 대해 도나투스파는 황제에게 요청하였고 황제가 오히려 도나투스파를 정죄하자 그들은 황제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이의를 제기하나 결국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국가는 강경책, 유화책을 실시하여 도나투스파를 박해했다.
그러나 362년 줄리안 황제는「인내의 칙령」에 의해 도나티스트들을 용납하였으며, 심지어 지원까지 함으로 사태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줄리안 사후 로마누스에 의해 도나티스트는 다시 박해를 받는데, 더 나아가 그들은 372년 피르무스(Firmus)의 민족주의적 반역과 398년 길도의 반역에 가담하는 등 반로마정책으로 제국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는 반면에, 그라티안과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공공연한 지지로 카톨릭은 더욱 유리한 입장에 서 있게 되었다.
2. 도나투스파의 신학
도나투스파들은 그들의 대부분의 관심을 도덕이라는 관점에 집중시켰다. 이들은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처벌이나 순교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지 박해하는 국가와 타협했다거나 그들이 국가에 성문서를 넘겨준 변절의 죄가 있었다면, 감독이나 신부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유효한 성례전을 집행할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또한 도나투스파들은 자기들만이 참된 카톨릭 교회이며, 어거스틴이 속한 교회는 그 교회로부터 분리된 자들임을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교회를 역시 아프리카의 카톨릭 교회와 친교함으로써 그들의 죄로 인해서 더럽혀졌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권리를 상실했다고 주장하였다.
도나투스파 신학의 주요 점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도나티스트 교회 분립의 구실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배교자가 안수한 안수가 유효한가 문제이며, 둘째,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그러한 무자격 감독을 반대하고 새 감독을 세워 교회의 순수성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셋째,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의 주된 관심은 청교도적인 교회의 순수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교직자의 자격 문제였으며, 성례전의 유효성의 문제였다. 결국은 한마디로 ‘배교자’의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교회관과 성례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본다.
1) 교회관
도나티스트들에 의하면 교회는 성도들의 회중인데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로 구성되었다. 디오클레티안 박해시 세계 곳곳에 ‘배반자’들이 생겼는데, 아프리카 교회만이 이들 배반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순결을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배반자들의 죄책에 의해 감염된 세계에 흩어진 교회들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나티스트 교회만이 성별된 참된 교회라고 말한다.
도나티스트들의 근본적인 사상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개념으로써 이것에 의해서 ‘순수하지 못한’ 세상과의 그 어떤 타협도 거부하는 것을 그들의 주체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교회론은 거룩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이 도나티스트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의 전 회원들에게 경험적인 성결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지상 교회는 무흠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 것 같다. 그러나 그 거룩성도 본질적인 면에서라기보다는 박해기간 동안 성경을 건네준 자들과, 교회 밖의 성례전은 무효라는 키프리안의 전통에서 벗어나는가, 아닌가에 따라 거룩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의 성결은 교회 구성원들의 성결에 근거한다고 생각했다. 자기들만이 성도요, 크리스찬이라고 자부했고, 카톨릭 교회 신도들을 향해서는 크리스찬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도나티스트들은 이 지상에 있는 가시적 교회, 경험적인 교회의 거룩(성결)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불가시적 교회에 대한 교회론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의 거룩함에 대한 기준은 단지 배반자로 취급받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배반자는 다시 화해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도나티스트들의 교회관은 그들만의 거룩성을 고집하는 고착된 교회관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례전
도나티스트들은 키프리안의 전통에 서서 비타협적인 교회관과 아울러 엄격한 성례관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격없는 교역자가 베푸는 예전은 아무런 타당성과 유효성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카프리안은 교회 밖에서 거행된 성례는 무가치할 뿐 아니라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까지 했다. 또한 이단이나 분파를 따르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게 되며, 이단이나 분파를 따르는 성직자들은 성례를 거행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가르쳤다. 성례의 타당성은 성직자의 자격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이와같은 키프리안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파의 교회인 도나티스트 교회 밖에서 거행된 성례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도나티스파로 돌아오는 카톨릭 신도들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재세례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도나티스트들은 키프리안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한 감독 및 그러한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면서도, 교회를 순전한 성도들의 교제로 인식하는 노비티안의 사상에 동조했기 때문에 교회분리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나투스파는 교회론에 있어서 ‘거룩성’이 교회의 근본적 특성이며, 참된 교회의 표상으로 생각하여 타락한 자는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시에 성서를 넘겨줌으로 하나님을 배반했던 자들은 다시 세례를 받음으로 거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III. 어거스틴의 교회론
1.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배경
어거스틴은 시대적으로 전환기에 살았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새시대의 창시자로서 최초의 중세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고대 문명의 후계자로써 고대의 마지막 대표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어거스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몇 가지로 구분해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적 배경은 다음장 도나티스트들과 어거스틴의 마찰 부분에서 다루고자 한다.
1) 정치적, 사회적 배경
북아프리카는 A.D 146년 카르타고의 멸망과 더불어 설치된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 기인된다. 로마가 이곳을 정복한 뒤 약 1세기 동안에는 속주로써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점차적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북아프리카는 로마제국의 중요한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반공화체적 정체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전제군주제로 성격이 변하고, 테오도시우스 후 중앙의 강력한 통제력이 급속도로 화해되어가고 있었다. J.J. Saunders, 지동식 편역 「로마사 연구의 제문제」(서울:고대출판사, 1977), pp262-263
북아프리카의 속주는 일반적으로 5가지로 구분되었다. 첫째로, 로마 식민지(Roman Col0niae), 둘째로, 라틴시(Latin Municipia), 셋째로, 카르타고의 도시들(Punic Citiates), 넷째로, 토착마을(Native Villages),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목부족들(Unsettled Tribes)로 구성되었다. W.H.C. Frend, 지동식편역, 「로마제국과 기독교」,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0), pp475-486
토착민 집단들은 처음에는 로마 식민 도시의 하위에 편재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적인 부를 축적시켜 로마 식민 도시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성장하였으며, 토착민들 중에서 로마 시민권을 얻는 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의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도로사정은 서방의 어떤 속주들보다도 발달하였다. 원래 도로는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지만 그보다는 이 도로를 통하여 도시들이 연결되어 문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신으로 비록 로마 시민이었으나, 라틴 문화의 기형아로서 그는, 결국 로마본국의 로마인이 갖는 동료의식을 갖는 참여자가 될 수 없었고, 어디까지나 로마인과 로마 문명에 의해 정복된 아프리카 지방의 소속인이었다. 그의 감정은 로마인의 동료의식을 갖고자 했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깊은 내면의 본질 세계에는 무엇인가 로마를 위한 애국심을 갖기에는 미흡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울 수 없는 이질감과 고독감이 그를 항상 따라 다녔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질감은 그의 전반부 인생을 통해 항상 털어 버릴 수 없는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 그가 태어난 이러한 지역적 객관성이 그로 하여금 지역문화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더 보편적이며 고차원적인 기독교의 수용을 용이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볼 때에 당시는 정리된 시대가 아니었다. 당시는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후 한 두 세대가 자라난 시기로서 신학논쟁이 만발하고 발전적 채비를 갖추고 있었던 시기이기는 하다. 기독교에 대한 외적인 위협이 사라진 것은 바람직했지만, 새로운 내적 질서의 확립을 위한 진통은 더욱 강렬한 상황이었다. 그 한 예로써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도 아직 정립되지 않은 형성기에 있었고, 기독교 자체 내에서 발생한 이단의 출현은 많은 도전과 문제를 던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이단들과 많은 논쟁을 하며, 반박적 저술활동이 활발했던 것도 이러한 환경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2) 신학적 배경
아프리카의 종교를 하나로 이야기할 순 없지만, 3세기 초에 새틴(Saturn)신을 숭배한 것은 확실하다. 이 신은 베르베르족의 바알 함몬(Baal Hammon)의 계승자로 되어있다. 이 신은 만신전의 여러 신들처럼 신전에서 숭배된 것이 아니나 노천지역에서 혹은 구원지대에서 숭배되었다. 속주민들은 자신들의 신들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은 베르베르나 셈계의 신들인 바알이나, 타니트를 갖고 있었으나 그들은 Saturn, Juno, Caelestis 등으로 불리워졌다. 그러나 3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기존의 신을 버리고 누마디아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전향하였다.
전반적으로 로마제국의 후기에는 과중한 세금의 부담으로 인하여 중간계층을 이루던 십부장의 몰락을 가져왔고, 산업은 쇠퇴하였으며, 경작지는 황폐하여 경제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어거스틴 당시의 그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가치관의 혼란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로마 침략의 영향들 중 바로 이 정신적 위기의 측면은 실로 그 세대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 아닐 수 없다. 사실 3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일어난 정신적인 변화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채택되고, 이교 신앙에 대한 신뢰를 철회함으로써 “인간들의 정신과 사고 속에서 새로운 신앙, 새로운 생활양식, 새로운 윤리”로 대치되는 새로운 질서가 아노미적 현상 속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돈과 변화의 시대적인 특성은 어거스틴 자신의 개인적 생애에도 뚜렷이 반영되고 있다. 그의 인생 전반부가 그리스, 로마적 교육배경과 수사학자로서의 현세 지향적인 출세주의적 로마인의 생활에서 33세에 회심을 경험한 후에는 독실한 신앙인이며, 히포의 주교로서 기독교 교리의 창안 또는 정리자 일 뿐 아니라 이교도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위치를 확고하게 세우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는 은총론, 예정론, 교회론 등 신학 전반에 걸친 교리를 형성하고 확립시켰다.
2. 도나티스트들과 어거스틴의 마찰
어거스틴은 히포의 감독이 된 후에 큰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분열”의 문제였다. 이 분열은 도나티스트들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었고, 아프리카 교회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마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A.D.393년 히포의 회의에서부터였다.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들과의 논쟁을 벌였던 초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고, 둘째는 성례전과 그 효용성에 관한 문제이며, 셋째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먼저 교회의 본질이 남은 자의 공동체이며, 자신들만의 거룩성을 잃지 않은 진정한 교회라는 도나투스트들의 주장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반박한다. 먼저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면에서, 교회의 성직의 질서가 ‘성경을 받친자들’로부터 계승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도나투스트들이 ‘성경’을 비난했지만, 실상은 그들도 같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나투스트들이 자신들의 교회의 거룩함을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들은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많은 도나티스트들이 거룩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의 거룩함의 근거를 사람들에게 둔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는 자신들을 선민과 동일시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교회의 거룩성은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근거하는 것이지, 인간의 거룩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죄와 상관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거룩해 진다는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자신들만의 거룩함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키는 도나티스트들을 비판한다. 교회는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지만, 하나의 교회라는 것이다. 이 하나의 교회를 가능케하는 것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오직 성령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랑의 도움 속에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죄인이 순결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회의 일치를 깨는 사람은 사랑의 원천인 성령의 활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나티스트들의 죄는 ‘성경을 받친 사람들’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의 영인 성령을 결핍하였고, 형제들을 향해서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도나티스트 논쟁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은 성례전에 관한 문제, 특히 세례에 관한 문제이다. 도나티스트들은 세례의 문제에 있어서 키프리안의 견해를 그들의 입장이라고 삼는다. 키프리안은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성례전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바탕에는 교회를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로 보는 견해가 전제된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른다면 분열은 죄이며, 또한 레위적인 성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배교한 사제들에 의해서 더렵혀진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사실상 피를 더럽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도나티스트 교회에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에 반대하여 세례의 정당성(validity)과 효과성(effectiveness)를 구분하여 논하였다. 성례전 논쟁에 임하는 어거스틴의 입장은 도나티스트들을 논리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갈라져 나간 그들을 다시 포용하고자 하였다. 어거스틴의 입장은 죄없으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성례전적인 은총을 베푸는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성례전의 능력 속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집행하는 사제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례전의 타당성은 집행하는 사제의 성품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감독으로 있는 히포 지역은 도나티스파의 세력이 강하였음으로 카톨릭 교회를 수호하고자 하는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마찰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도나투스파에 대해 어거스틴은 처음에는 대화의 방법으로 그들을 카톨릭 교회 내로 이끌어 오고자 하였지만, 자신의 방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난폭하여지는 킬쿰켈리온 혼인을 하지 않은 젊은이들로 구성된 열광주의자들을 말한다.
의 행동을 보면서 나중에는 강압적인 방법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어거스틴은 이 도나투스파에 대하여 처음에는 분리되어 나간 한 형태로 생각하여 그들을 대하였지만 나중에는 교회의 분파운동은 일반 죄악보다 더욱 무거운 죄로 보아 그들을 정죄하였다.
3. 키프리안의 교회론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카프리안의 교회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의 교회론의 영향을 받기는 받았지만 그의 교회론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키프리안의 교회론의 중심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먼저, 키프리안의 교회론을 다룬다면 어거스틴의 교회론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키프리안은 감독교회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249년에 감독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는 감독이 되자마자 데시우스의 박해를 받는다. 이때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의 명령대로 실제로 로마 신들에게 제사하든가 혹은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하였다는 증서를 매수함으로 박해를 피하였다. 문제는 이와같은 타락자의 처리 문제에서 야기되었다. 그런데 키프리안이 이 문제를 처리하기에 앞서 키프리안은 타락자를 취급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박해가 이완되는 것을 기다려서 아프리카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결정하려고 하였다.
노바투스라는 사람이 5인의 장로들과 합세하여 키프리안에 적대하여 독단적으로 타락자들의 교회복귀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키프리안 보다 더 관대한 정책을 타락자들에게 폈던 것이다. 이처럼 키프리안의 교회론의 자리는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상황에서 로마의 잡신들과 황제 숭배로부터 다시 교회로 돌아온 “타락한 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특히 이들 중 타락한 감독과 이런 감독으로부터 받은 세례와 성만찬과 서품 안수례의 효력 문제 등이 중요한 논쟁의 초점이었다. 키프리안이 감독의 권위를 주장하게 되고 교회의 질서와 일체성을 주장하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키프리안의 교회론에 있어서 주요 관심사는 가시적 교회의 일체성에 있었다. 교회에 대한 키프리안의 논지는 한마디로 “교회는 무릇 하나이다”라는 교회의 일체성에 있었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분리된 자들에게는 영적인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키프리안은 교회를 필요불가결한 구원의 방주라고 보는데 노바티안 분파의 경우는 교회가 없으므로 구원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적 계승이 없으므로 교회가 아니며 따라서 교회 밖에 있으므로 구원이 없다는 논리이다. 특히 키프리안은 감독직을 통한 교회의 통일성을 가장 크게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이단자들과 배교자들이 실시한 세례는 무효이며, 정통교회에 들어와서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감독들은 사도들의 계승자이며, 교회는 감독들로 말미암아 세워졌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감독직의 정통성을 지닌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키프리안의 세례론도 그의 철두철미한 교회론을 중심으로 하여 세례의 효능의 문제도 취급한다. 분열자들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키프리안의 이론은 간단하다. 교회만이 생명의 물을 소유하고 있으며, 세례를 베풀고 정결케 할 권세를 갖는 것이므로 교회밖에는 그런 권세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키프리안의 교회론을 종합해 볼 때 몇 가지 결함이 발견된다. 그것은 교회의 외적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영적이며, 불가견적 교회의 성격을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감독들이 다스리는 교회를 말하고, 이 제도적 교회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이 없다고 단정해 버린 것은 잘못이다. 셋째로는 감독적 계승이란 말로 표현된 그의 교회 연합관은 논리적인 결과로서 카톨릭 교회 내에 분리주의를 시인하는 데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어거스틴도 키프리안을 존경하나 재세례의 문제는 키프리안도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고, 차라리 키프리안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4. 어거스틴의 교회론
1) 키프리안의 교회론과 목회론 관점에서의 출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엄밀히 말하면 그가 독자적으로 창안해 낸 것이 아니다. 키프리안의 교회론의 사상적인 토대 위에서 여러 가지 사상을 종합하여 어거스틴 자신의 교회론을 정립하였다. 또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목회적인 면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교회론은 단순히 그의 머리 속에서 꾸며진 것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부딪치는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과 실천적인 체험을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목회하는 동안에 도나티스트 이단에 속한 교회들과 교직자들, 그리고 과격한 열광주의자들을 맞이해서 교회론을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이원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그는 교회에 대해서 가견적 교회(보이는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두 관계를 분리시킨 것은 아니다. 그는 도나투스파의 흠없는 신자들만으로 구성된「참 교회」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지상교회는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또는 예정된 자로 구성된 영적 교회와 예정되지 않은 자가 섞여 있는 제도적 교회를 구별하여 교회의 이중구조를 말한다. 또한 어거스틴은 현세의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과 상이한 것(불가견적, 영적 공동체)으로 보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동일한 것(역사적, 제도적 공동체)으로 본다. 이처럼 그는 이원론적인 기독교 전통에 서 있었다. 아울러 그는 제도적 지상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 (선인과 악인)이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기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이라는 것과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사상이다. 여기에서 몸과 머리는 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근본 사상은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회란 전세계에 분포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인 동시에 주의 성례전이 베풀어질 수 있는 교회였다. 그러므로 신앙심이 없는 자들과 위선자들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 밖으로 추방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받은 참된 교회는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자들로 구성되며, 그들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묶여진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이 내적이 교회는 외형적인 교회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교회를 두 가지 이중적 의미로 보았다는 것이다.
2) 교회 본질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
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어거스틴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정의한다. 어거스틴이 교회를 ‘그리스의 몸’으로 표현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서부터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신비한 몸’의 표상을 통하여 암시되는 교회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어거스틴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바울의 사상적인 토대 위에서 그의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특히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가운데서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비유한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신부라는 것이다. 즉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는 것과 사도직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임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몸인 교회의 상호 연결성에 대한 개념을, 특히 성령과 사랑의 측면에서 발전시켰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불가시적 교회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사랑’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진리는 첫째로, 머리는 한 몸의 다른 지체와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 둘째로 머리는 다른 지체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 셋째로, 다른 지체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각 지체들과 연합되고 그리고 또 영향을 주는 것은 그의 은혜를 매개로 하는 것인데 그의 지체들이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교회는 그의 몸이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교회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근거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며,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되고 성숙되어져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교회 개념은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에 있어서 더 발전한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의 거룩성은 그 성도들의 거룩에 의존하는 것이며, 의식의 효과도 무죄한 성직자가 베푸는 곳에서만 성립된다는 지론으로써 교회의 분열을 일삼았다. 도나티스트들은 「참교회」를 정의하기를, 이단자는 물론 박해시 신앙의 정조를 지키지 못한 배교자들을 제거해 버린 흠 없는 신자들만으로 구성된 교회를 참 교회, 곧 거룩한 교회라고 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라고 정의하고, 교회의 거룩성(순정성)이 신자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교회가 그리스도 몸인데 달려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은 어거스틴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교회는 연합과 성장, 다양성과 통일성, 은사와 직분, 유기적인 측면과 제도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어머니로서의 교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곧 성도의 공동체라는 사상은 교회가 신자의 어머니라고 하는 견해와 필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어거스틴은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를 신부로 보는가 하면, 교회가 신자에 대하여는 어머니의 입장이라고 본다. 이것은 교회를 자신들의 어머니로 인식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로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어머니로서의 교회 사랑은 터툴리안의 저술들에서부터 나타났다. 그리고 키프리안이 명시적으로 이야기했으며, 이어서 어거스틴이 사용하였다. 키프리안은 “당신은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하였으며, 어거스틴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너는 안전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몇 세기 후에 칼빈은 이것을 수용하였다. 인내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영상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영향이라고 한다. 순수성, 부드러움, 간절함, 아름다움, 풍부함 등이 그가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아 영적인 어머니 즉 교회에 부여한 영상(Image)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출산 양육하며 그들을 위한 안락한 보금자리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의 새 지체들을 생산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비유한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진실한 어머니”라고 한다. 어거스틴의 어머니로서의 교회개념은 낳고, 양육하고, 돌보고 나아가 말 안 듣는 아들뿐 아니라 모범적인 아들에 대해서도 번민하는 교회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의 적합성은 교회와 목자들과 신자들을 통하여 실제로 이러한 자기 희생적 돌봄을 실행할 때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 자신이 그것에 대한 탁월한 본보기였다.
③. 성령의 친교로서의 교회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교회 상을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성령의 친교로서의 교회 상을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교회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이 내재하여서, 교회 성원과 예배와 성례전에는 물론 그 밖의 모든 활동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거스틴은 몸에 영혼이 있어 몸의 존재원리가 되듯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의 영혼을 성령이시라고 말했다. “성령은 모든 지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고 그리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각 지체들을 통일시키는 이 성령의 원리는 사랑이다” 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사랑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불가시적 교회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어거스틴은 믿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성령의 띠로 묶여진 하나의 교회라는 이미지에 압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어떤 분열도 용납할 수 없었다.
④.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어거스틴은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설명한다. 가시적 교회는 외적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며, 불가시적 교회는 참신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개념은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으로 논의되었는데, 가시적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집합되어지며, 성례전에 의하여 양육되어가며, 감독들에 의해 지배되어 가는 교회로 하나님의 유일한 참 가정이며, 그리스도교는 이 가정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가시적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든 자들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구원받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저서「하나님의 도성」에서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말한다. 이 두 교회간의 구분은 예정의 관념에 의해 첨예화된다. 어거스틴의 두 도성의 개념은 티코니우스의 두 나라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두 부분 즉 동시에 선인과 악인, 거룩하고 사악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 안의 죄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무효화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성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해석되는 것이고, 두 나라는 ‘한 몸’안에서 종말 때까지 함께 지속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 이원론이 어거스틴의 두 도성의 개념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회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첫째, 교회라는 말을 하나님의 도성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때 교회는 인류창조 이후부터 이 세상의 종말까지 그리고 종말 이후의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불가견적 영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둘째로, 교회라는 말은 역사적, 제도적 공동체의 의미로 사용한다. 특히 도나티스파가 완전주의적 교회관을 주장하는데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현실주의적 교회관을 내세웠다.
3). 교회의 네 가지 본질
①. 교회의 일치성
도나투스파에 의하면 교회는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로 구성되며, 오직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박해시에 배교한 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배교자들에 의하여 감염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교회의 표식은 통일성과 보편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 “교회는 오직 하나만이 있으며, 그리스도도 하나요, 신부도 하나이다.”라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첫째로 신앙의 통일성을 가지며, 사랑의 일치성을 가지는데 어떤 사람은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단자는 면할 수 있을지언정 사랑의 통일성에 위배되면 역시 분열주의자나 이단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이 통일성의 원리는 유기적인 것이지 제도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비록 순교자라 할지라도 이 신앙의 소망과 사랑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교회는 사랑으로 묶여져야 하고 그 사랑은 수많은 죄를 덮어 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교회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은 그 사실로 인하여 사랑이 결핍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결핍된다고 보았다.
②. 교회의 거룩성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그리고 도나티스트 등이 가시적 거룩성을 정통으로 보는데 반하여, 어거스틴은 쭉정이가 공존하는 가시적 공동체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들과 달리 예정(선택)교리를 교회론에 적용했다.
도나티스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은 소수의 경건한 자들의 공동체만이 참된 교회라고 보았다. 그들은 교회의 거룩은 구성원들의 신앙과 성결의 상태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말한다. 즉 거룩함의 근거를 사람에게 두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말하기를 “교회는 구성원들이나 성례 및 개인의 성화의 산물이 아니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거룩하고, 성례는 그리스도의 행동이기에 거룩하다”라고 말한다. 도나티스트들이 주장하던 조건적 거룩성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발전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불가견적인 교회와 로마의 감독이 모든 사도들의 머리인 베드로부터 발원한다는 소위 사도적 계승권에 우선적 관심을 두는 듯 보이는데, 이는 옵타투스와 키프리안의 견해가 고루 섞여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부분은 그에게 미친 키프리안의 큰 반영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교회를 혼합된 공동체라 한다. 이는 마치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듯이, 의인과 죄인의 두 가지 계층이 전세계를 통하여 혼합되어 있다가 타작마당에서 즉, 주님의 최후의 완성에 날에 가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어거스틴은 카톨릭교회에는 ‘의인’과 ‘죄인’이 공존하지만 죄인에 의해 더럽혀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거룩성은 성도 개인의 여부와 형편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사람들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조직된 신비적인 몸이며, 겸손 속에서 성장되어지고,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변화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으로부터 유래된 주관적 교회의 거룩성보다는 교회의 객관적 거룩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③. 교회의 보편성
어거스틴은 모든 성례전들을 지킨 교회만이 “카톨릭”이라고 하는 로가티스트들(Rogatist)의 견해에 반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 등 성경의 그리스도 계시와 교회에 대한 계시 등 전 진리(the whole truth)를 소유해야 진정한 카톨릭 교회라고 한다. 이는 교회의 사도적 가르침의 승계라는 뜻에서 교회의 사도성이요, 교회의 항구적 정체성을 말한다. 이단들은 전 진리가 아니라 부스러기 진리를 소유하고 그것을 절대화한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는 세계 도처에 있는 기독 공동체이다. 아프리카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파가 사도들의 저술, 사도들의 설교 및 사도들의 행동이 진행되고 있는 모든 장소들에 실존하고 있지 않다고 하여 도나티스트파의 이단성을 암시하였다.
그는 도나투스파들을 교정하는 입장에서 보니페이스에게 쓴 그의 서신에서 도나티스트는 카톨릭교회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전세계로 퍼져 나아가야 할 것은 부인한다고 지적하였다. 즉 주님의 교회는 아프리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야 할 것인데, 도나티스트는 일부 아프리카인을 고소하기 위해 전세계적인 카톨릭 교회를 내버리고 스스로를 아프리카에만 한정하였기 때문에 결코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한 분파가 전세계에 걸쳐 있는 카톨릭교회를 대적하여 자신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보기에 우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예를 들어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이 천하 각국의 방언을 말하게 된(행2:5-13) 표적과 장관의 의미를 설명하여 땅위의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며, 그래서 그처럼 복음이 천하 각국의 방언 가운데 발견된 것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하며, 한편 도나티스트들은 라틴어와 카르타고어 두 가지 방언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이러한 두 방언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전파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나티스트들은 카톨릭 교회에 들어올 것을 권고한다.
④. 교회의 사도성
일반적으로 사도성의 특징의 사도의 주교적 계승으로 해석된다. 특히 로마는 성베드로 자신에까지 소급되는 단절되지 않은 주교들의 계승을 추적할 수 있는데, 로마가 사도의 주교권을 계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로마의 주교들이 길게 계승되는 과정에서 도나티스트주의자들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나티스트들이 그들의 교리들을 위한 사도의 제가를 추구하는 일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복음의 사도들이 기초를 놓은 주교직들 속에서 사도들의 계승자들에 의해 전달되었듯이, 참된 사도직은 복음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그의 「교회일치론」에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본문이 전해 온다고 보는데, 그것은 우위본문과 공인본문이다. 그의 우위본문(primacy Text)을 따르면 베드로의 우위성 즉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강조하게 되며, 공인본문을 따르면 사도들의 공동 사목권을 강조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노바티안이 비록 감독들에 의해 안수를 받았어도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파를 만들어 그들의 감독을 떠나서 유사감독이 되었으니 사도적 계승이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의 공동사목권을 지지한다. 그래서 모든 감독은 자신의 결정을 형성할 권리가 있으며, 그의 결정이 다른 감독들과 다르다고 해도 교회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세례론에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의 공동 사목권이 인정되지만 특별히 로마교회에 의해 대표되어지며 그 사도적 계승을 떠나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4) 교회와 성례와의 관계
성례전의 개념은 2세기부터 점차적으로 변화되어 성례는 불가사의하게 역사 한다는 사상이 점점 세력을 얻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어느 정도 이 사상에 동의하였지만, 그는 믿음과 회개를 특별히 성인의 세례에 있어서 필수 요건으로 보았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례전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정식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①. 세례의 기원(Origin)
어거스틴은 세례의 원천과 기원은 사람이나 심지어 교회도 아니며 하나님 자신이시다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가 세례의 원천이요, 기원이며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세례의 물이 어거스틴의 것이냐 또는 도나티스트의 것이냐 심지어 바울의 것이냐 베드로의 것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세례는 의인에 의해서 베풀어지건 불의한 자에 의해서 베풀어지건 간에 그리스도의 세례일 뿐이다. 사려 깊고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불의함을 피하려다가 하나님의 성례전을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②. 세례의 타당성(Validity)
세례의 타당성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카톨릭 밖에서 즉 도나티스트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복음의 말씀대로, 안수 받은 교역자에 의해 베풀어지는 한 그리스도의 세례로서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속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서 다 거룩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오는 자들을 재세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복음이 모든 사람, 즉 정통 카톨릭 교인이나 이단자나 배교자에게 다 공통된 복음이 되듯이 세례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과 세례는 병행하는 것으로서 복음의 말씀 없이는 세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세례의 타당성은 그것이 복음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병행되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말씀대로 베푼 세례는 베푸는 사람의 신앙이나 행위 여하에 좌우됨 없이 타당하여 합법적인 의식이 된다는 것이다. 즉 배교자나 이단자가 베푸는 세례도 그대로 진행되면 세례로서는 성립된다는 것이다.
③. 세례의 효과성(Efficacy)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는 다 타당성을 가지지만, 그 세례의 효과는 사랑으로 연합할 때만 나타나게 된다. 세례의 효과 즉 죄사함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카톨릭 교회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도나티스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분리의 원인인 ‘형제에 대한 증오’에 있으므로 ‘형제애’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의 세례도 인정을 해 주지만,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 이 모든 것이 참으로 가치를 지닌다는 형제 사랑과 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세례의 타당성 또는 합법성과 유효성(효과성)을 구별하였다. 또한 “교회의 일치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이로 미루어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보편교회(카톨릭) 안에서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말”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세례는 죄책으로서 원죄를 모두 제거하나 본성의 부패성은 제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세례의 은총에 의하여 제거되는 것은 세례 이전의 지은 행위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왕의 도장을 받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교회 안에서 표가 될 뿐만 아니라 생명력이 된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면 그것은 다만 표가 되고 효력은 없어진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례전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정식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된다고 보았다.
④. 성만찬
성만찬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독특한 이원론을 나타낸다. 성만찬을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표시”라고 하면서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예수의 몸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만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시켜 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사랑의 연합을 이루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만찬을 희생의 제물이라고 본 당시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성만찬은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칠 의무가 있음을 기억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성만찬의 은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며,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사랑의 영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만찬에 관한 어거스틴의 상징주의적 개념이었다. 그는 성례전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하여 세례 받지 아니한 자나 성례전에 참여하지 못한 자는 천국과 영생을 소유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성례전의 주관성을 주장하여 성례전의 효력이 집례하는 자에게나 성례를 받는 자의 신앙에 따라 달라진다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성례전은 그리스도에 의해 집행되기 때문에 집례자나 수령자의 가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성례전의 객관성을 강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IV. 결론
이상에서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해서 또한 그의 목회활동을 통해서 교회와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가운데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특정 교회가 참 교회라고 하는 개념은 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참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성되어져 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서의 교회 관념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이 자신의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가 하나의 전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 사랑하여야 하며, 개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주장한다. 여기에 그의 교회론에 대한 진정한 의도가 있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점 먼저, 어거스틴은 성삼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는 어디서나 동일하다고 하였지만 카톨릭 교회의 개념으로 인하여 교회 밖에서 도나투스파에 의해 행해진 세례의 효과성에 대해서는 부인하였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을 교회 안으로만 제한하는 모순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카톨릭적인 교회만을 강조- 그 속에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하는 편협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어거스틴은 초기에는 대화와 토론의 방법으로 도나투스파를 카톨릭 교회로 이끌려고 하였지만 그 방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나중에는 교회를 일치시키려는 의도에서 물리적 수단을 허용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교회의 폭력과 탄압을 정당화시키게 되어 후에 중세 십자군 원정과 종교재판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고 만다.
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학사상 발전, 특히 교회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이미 어거스틴에 대한 많은 연구자료중 일부분의 답습에 불과하겠지만 본인은 도나투스파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연구하면서 그동안 고민해 왔던 교회론에 대한 여러 해답들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선교단체에 있으면서 교회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교회가 참 교회인가를 생각해 왔었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자신과 조금만 의견이 다르거나 형태가 달라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독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 빨리 배척해 버리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 또한 오늘날도 도나투스주의자들 같이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인 의로움에 기초해 자신들을 스스로 분리시키고 자신들 외에는 참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볼 때 어거스틴의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나 다른 이단에서 준 세례에 대해서도 그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교회에서 받은 세례라도 그것이 성삼위일체 이름으로, 복음의 말씀대로, 안수받은 교역자에 의해 베풀어지는 한 그리스도의 세례로서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을 볼 수 있다. 또한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 이 모든 것이 참으로 가치를 지닌다는 형제 사랑과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교회일치를 위한 좋은 길 안내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삼위의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시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도나투스주의자와 같은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의에 기초한 형제에 대한 편견과 독선을 버리고 형제를 사랑으로 영접하고 하나되기를 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교회가 죄인과 가라지 같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정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 참고문헌 》
단행본 : 해외저자
라이온사 편, 「교회사 핸드북」,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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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란드 베인현, 「세계 교회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윌리스턴 워커, 「기독교회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에드워드 하디, 「하나님의 도성」,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단행본 : 국내저자
김의환, 「교회사」, 세종문화사
차종순, 「교회사」, 한국장로교출판사,1993
서요한, 「초대교회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참고논문 : 국내문헌
김영도,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성서해석」, 1997
어거스틴의 교회론
(도나투스의 교회론과 비교연구)
◆ 목차
I. 서론
Ⅱ. 도나투스파의 교회론
1. 도나투스파의 발생배경
1) 종교적 배경
2) 도나투스의 기원과 발생과정
2. 도나투스파의 신학
1) 교회관
2) 성례전
Ⅲ. 어거스틴의 교회론
1.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배경
1) 정치적, 사회적 배경
2) 신학적 배경
2. 도나투스파와 어거스틴의 마찰
3. 키프리안의 교회론(어거스틴의 교회론과의 차이)
4.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한 이해
1) 교회본질에 대한 이해
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② 어머니로서의 교회
③ 성령의 친교로서의 교회
④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2) 교회의 네 가지 본질
① 교회의 일치성
② 교회의 거룩성
③ 교회의 보편성
④ 교회의 사도성
3) 교회와 성례와의 관계
① 세례의 기원
② 세례의 타당성
③ 세례의 효과성
④ 성만찬
Ⅳ. 결론
I. 서론
어거스틴이 말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써의 교회 개념이다. 이 신비적인 몸의 이론은 중세 교회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는 중요한 이론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목회적 실천적 바탕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 더 그 근원으로 올라가 보면,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관한 그의 교리에 있어서 주로 키프리안으로부터 유래하는 서방의 신학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어거스틴의 교회론이 키프리안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여러 가지 사상을 종합하여 어거스틴 자신의 교회론을 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거스틴 시대나 오늘날이나 교회론은 신학적인 관심사 중에 가장 중요한 분야 중에 하나다. 왜냐하면 도나투스파의 분파 운동이 오늘날 우리 교회 내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이 참된 교회라고 자처하며, 분열을 일삼는 신앙의 흐름도 존재하고 있다. 또한 신앙의 흐름 가운데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경향도 있다. 특히 오늘날은 개교회주의가 심각하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권위와 거룩함을 성도들 앞에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도나투스파에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하려고 했던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연구하는 것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도나투스파의 분파주의 운동에 대항하여 교회일치운동을 주장했던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현대의 교회가 직면한 갖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논문을 통해 도나투스파와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비교, 고찰해 봄으로써 참다운 교회론을 정립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II. 도나투스의 교회론
1. 도나투스파의 발생배경
1). 종교적 배경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중에서 확립되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나투스파의 운동을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여러 분야 중에서 특히 종교적 배경은 중요하다고 본다. 도나투스파의 발생지는 카르타고이다. 카르타고의 저명한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하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활동을 부정하리만큼 이 세상 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을 엄격히 구별했다. 이러한 반세상적인 경향은 기독교가 로마 정부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 강하게 나타났다. 카르타고가 중심이 되는 아프리카의 반 로마적 경향과 박해하는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반제국적 경향이 결합되어 아프리카의 교회는 더욱 반세상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함으로써 서로마를 지배하게 되고, 기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쓰게 됨으로써 아프리카의 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속한 교회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를 이상화한 것과는 달리 카르타고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은 이 새 통치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기독교에 우호적인 황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황제와 교회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이 시기 아프리카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시기에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폭군 네로의 대화제 사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화인(火因)의 책임자라는 누명을 쓰고 심한 박해를 받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반국가 및 반사회적이라 하여 인류의 적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 이후로 기독교에 대한 심한 박해는 트라잔(98-117), 마루쿠스아우렐리우스(161-180), 디오클레티안(284-305), 갈레리우스(305-311)로 이어져 왔다. 디오클레티안은 303년 2월 23일 “교회를 파괴하여 땅과 같이 평평하게 하고 성서는 불에 태워버리라.”는 칙서를 공포했는데, 이 박해의 여파는 아프리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도너티즘의 발생으로까지 연결되었다.
2) 도나투스의 기원과 발생과정
2세기 중반, 그러니까 도나티즘이 발생하기 130여년 전 이레니우스는 참된 교회는 이단들과 악한 생각을 하는 자들, 자랑과 자기 만족에 빠진 분리주의자들, 그리고 위선자들로부터 조심스럽게 피해야 함을 말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 사도신경을 지키고 말과 행실에서 범죄하지 않는 거룩한 자들과 연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후에 이것이 노바티안과 도나투스 같은 분리주의자들에게 더욱 강화되어 엄격한 도덕적인 규례를 통해서 진정한 교회를 구분지으려 했던 것이다.
도나투스의 기원은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303-305년 사이에 일으킨 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실의 칙령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모든 성경을 제국의 관리들에게 자진해서 반납하라는 명령이 전해지자 상황은 어렵게 되었다.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인해 교회는 여러 부류로 나뉘게 된다. 한편에서는 황제의 칙령이 반포되자 대부분은 박해기간을 피해서 도피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위의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제3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과격파 특히 도나티스트들로부터 떳떳이 순교하지 못했다고 비판받기에 이른다. 박해가 끝난 후에 박해 기간 중에 성경을 건네준 감독들을 보통 “건네준 자”(traditores), 또는 “배교자”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 성경을 건네준 자들에 의해서 안수 받은 감독들의 권위에 대한 질문이 일어났다. 이들에 대해 엄격한 파 나중에 이들을 도나투스의 이름을 따서 도나투스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에 속했던 사람들은 이들 감독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마땅하며, 성경을 건네준 자들에 의해서 안수 받은 감독들도 효용성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해서 대부분의 북아프리카 교회지도자들은 감독의 교권적 행동은 개인의 순수성에 의존하지 않고, 그 개인의 감독으로서 갖는 직임과 안수례 그 자체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 이후 엄격주의 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계속되었다. 분파주의자 교회가 설립된 실제적인 사건은 A.D. 312년 카르타고 교구의 감독자리가 비게 된데서 시작되었다. 즉 카르타고 감독 멘슈리우스와 그의 부감독 캐킬리아누스(Caecillianus)는 카르타고 내에서 교인들이 지나치게 순교자를 추종하는 행위가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므로 이를 제한하려는 노력을 했는데 그것이 많은 대중의 감정을 거스리게 되었다. 그에 더해서 캐킬리아누스가 배교적인 펠릭스(Felix of Aptunga)에 의해 서품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를 대중에게서부터 배척 당하게 했다. 그 반대파들의 주동자는 카르타고에 있는 열광주의자인 루실라 부인의 후원을 받는 보트루스(Botrus)와 케레티우스(Calestius)신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킬리아누스를 인정치 않고 마요리누스(Majorinus)를 반대 감독으로 선출함에 따라 아프리카의 교회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곧이어 도나투스가 마요리우스의 뒤를 이어 이 분파를 지도하였는데 그의 이름에서 이 분파의 이름이 명명되었던 것이다.
도나투스파들은 캐킬리아누스의 교회를 부정하였지만, 해외의 카톨릭 교회는 캐킬리아누스와 친교를 교환하였으며, 또한 황제는 캐킬리아누스의 교회를 정통 카톨릭으로 인정하였다. 여기에 대해 도나투스파는 황제에게 요청하였고 황제가 오히려 도나투스파를 정죄하자 그들은 황제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이의를 제기하나 결국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국가는 강경책, 유화책을 실시하여 도나투스파를 박해했다.
그러나 362년 줄리안 황제는「인내의 칙령」에 의해 도나티스트들을 용납하였으며, 심지어 지원까지 함으로 사태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줄리안 사후 로마누스에 의해 도나티스트는 다시 박해를 받는데, 더 나아가 그들은 372년 피르무스(Firmus)의 민족주의적 반역과 398년 길도의 반역에 가담하는 등 반로마정책으로 제국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는 반면에, 그라티안과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공공연한 지지로 카톨릭은 더욱 유리한 입장에 서 있게 되었다.
2. 도나투스파의 신학
도나투스파들은 그들의 대부분의 관심을 도덕이라는 관점에 집중시켰다. 이들은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처벌이나 순교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지 박해하는 국가와 타협했다거나 그들이 국가에 성문서를 넘겨준 변절의 죄가 있었다면, 감독이나 신부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유효한 성례전을 집행할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또한 도나투스파들은 자기들만이 참된 카톨릭 교회이며, 어거스틴이 속한 교회는 그 교회로부터 분리된 자들임을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교회를 역시 아프리카의 카톨릭 교회와 친교함으로써 그들의 죄로 인해서 더럽혀졌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권리를 상실했다고 주장하였다.
도나투스파 신학의 주요 점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도나티스트 교회 분립의 구실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배교자가 안수한 안수가 유효한가 문제이며, 둘째,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그러한 무자격 감독을 반대하고 새 감독을 세워 교회의 순수성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셋째,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의 주된 관심은 청교도적인 교회의 순수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교직자의 자격 문제였으며, 성례전의 유효성의 문제였다. 결국은 한마디로 ‘배교자’의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교회관과 성례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본다.
1) 교회관
도나티스트들에 의하면 교회는 성도들의 회중인데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로 구성되었다. 디오클레티안 박해시 세계 곳곳에 ‘배반자’들이 생겼는데, 아프리카 교회만이 이들 배반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순결을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배반자들의 죄책에 의해 감염된 세계에 흩어진 교회들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나티스트 교회만이 성별된 참된 교회라고 말한다.
도나티스트들의 근본적인 사상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개념으로써 이것에 의해서 ‘순수하지 못한’ 세상과의 그 어떤 타협도 거부하는 것을 그들의 주체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교회론은 거룩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이 도나티스트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의 전 회원들에게 경험적인 성결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지상 교회는 무흠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 것 같다. 그러나 그 거룩성도 본질적인 면에서라기보다는 박해기간 동안 성경을 건네준 자들과, 교회 밖의 성례전은 무효라는 키프리안의 전통에서 벗어나는가, 아닌가에 따라 거룩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의 성결은 교회 구성원들의 성결에 근거한다고 생각했다. 자기들만이 성도요, 크리스찬이라고 자부했고, 카톨릭 교회 신도들을 향해서는 크리스찬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도나티스트들은 이 지상에 있는 가시적 교회, 경험적인 교회의 거룩(성결)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불가시적 교회에 대한 교회론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의 거룩함에 대한 기준은 단지 배반자로 취급받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배반자는 다시 화해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도나티스트들의 교회관은 그들만의 거룩성을 고집하는 고착된 교회관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례전
도나티스트들은 키프리안의 전통에 서서 비타협적인 교회관과 아울러 엄격한 성례관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격없는 교역자가 베푸는 예전은 아무런 타당성과 유효성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카프리안은 교회 밖에서 거행된 성례는 무가치할 뿐 아니라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까지 했다. 또한 이단이나 분파를 따르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게 되며, 이단이나 분파를 따르는 성직자들은 성례를 거행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가르쳤다. 성례의 타당성은 성직자의 자격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이와같은 키프리안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파의 교회인 도나티스트 교회 밖에서 거행된 성례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도나티스파로 돌아오는 카톨릭 신도들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재세례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도나티스트들은 키프리안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한 감독 및 그러한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면서도, 교회를 순전한 성도들의 교제로 인식하는 노비티안의 사상에 동조했기 때문에 교회분리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나투스파는 교회론에 있어서 ‘거룩성’이 교회의 근본적 특성이며, 참된 교회의 표상으로 생각하여 타락한 자는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시에 성서를 넘겨줌으로 하나님을 배반했던 자들은 다시 세례를 받음으로 거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III. 어거스틴의 교회론
1.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배경
어거스틴은 시대적으로 전환기에 살았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새시대의 창시자로서 최초의 중세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고대 문명의 후계자로써 고대의 마지막 대표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어거스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몇 가지로 구분해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적 배경은 다음장 도나티스트들과 어거스틴의 마찰 부분에서 다루고자 한다.
1) 정치적, 사회적 배경
북아프리카는 A.D 146년 카르타고의 멸망과 더불어 설치된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에 기인된다. 로마가 이곳을 정복한 뒤 약 1세기 동안에는 속주로써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점차적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북아프리카는 로마제국의 중요한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반공화체적 정체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전제군주제로 성격이 변하고, 테오도시우스 후 중앙의 강력한 통제력이 급속도로 화해되어가고 있었다. J.J. Saunders, 지동식 편역 「로마사 연구의 제문제」(서울:고대출판사, 1977), pp262-263
북아프리카의 속주는 일반적으로 5가지로 구분되었다. 첫째로, 로마 식민지(Roman Col0niae), 둘째로, 라틴시(Latin Municipia), 셋째로, 카르타고의 도시들(Punic Citiates), 넷째로, 토착마을(Native Villages),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목부족들(Unsettled Tribes)로 구성되었다. W.H.C. Frend, 지동식편역, 「로마제국과 기독교」,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0), pp475-486
토착민 집단들은 처음에는 로마 식민 도시의 하위에 편재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적인 부를 축적시켜 로마 식민 도시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성장하였으며, 토착민들 중에서 로마 시민권을 얻는 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의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도로사정은 서방의 어떤 속주들보다도 발달하였다. 원래 도로는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지만 그보다는 이 도로를 통하여 도시들이 연결되어 문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신으로 비록 로마 시민이었으나, 라틴 문화의 기형아로서 그는, 결국 로마본국의 로마인이 갖는 동료의식을 갖는 참여자가 될 수 없었고, 어디까지나 로마인과 로마 문명에 의해 정복된 아프리카 지방의 소속인이었다. 그의 감정은 로마인의 동료의식을 갖고자 했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깊은 내면의 본질 세계에는 무엇인가 로마를 위한 애국심을 갖기에는 미흡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울 수 없는 이질감과 고독감이 그를 항상 따라 다녔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질감은 그의 전반부 인생을 통해 항상 털어 버릴 수 없는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 그가 태어난 이러한 지역적 객관성이 그로 하여금 지역문화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더 보편적이며 고차원적인 기독교의 수용을 용이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볼 때에 당시는 정리된 시대가 아니었다. 당시는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후 한 두 세대가 자라난 시기로서 신학논쟁이 만발하고 발전적 채비를 갖추고 있었던 시기이기는 하다. 기독교에 대한 외적인 위협이 사라진 것은 바람직했지만, 새로운 내적 질서의 확립을 위한 진통은 더욱 강렬한 상황이었다. 그 한 예로써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도 아직 정립되지 않은 형성기에 있었고, 기독교 자체 내에서 발생한 이단의 출현은 많은 도전과 문제를 던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이단들과 많은 논쟁을 하며, 반박적 저술활동이 활발했던 것도 이러한 환경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2) 신학적 배경
아프리카의 종교를 하나로 이야기할 순 없지만, 3세기 초에 새틴(Saturn)신을 숭배한 것은 확실하다. 이 신은 베르베르족의 바알 함몬(Baal Hammon)의 계승자로 되어있다. 이 신은 만신전의 여러 신들처럼 신전에서 숭배된 것이 아니나 노천지역에서 혹은 구원지대에서 숭배되었다. 속주민들은 자신들의 신들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은 베르베르나 셈계의 신들인 바알이나, 타니트를 갖고 있었으나 그들은 Saturn, Juno, Caelestis 등으로 불리워졌다. 그러나 3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기존의 신을 버리고 누마디아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전향하였다.
전반적으로 로마제국의 후기에는 과중한 세금의 부담으로 인하여 중간계층을 이루던 십부장의 몰락을 가져왔고, 산업은 쇠퇴하였으며, 경작지는 황폐하여 경제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어거스틴 당시의 그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가치관의 혼란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로마 침략의 영향들 중 바로 이 정신적 위기의 측면은 실로 그 세대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 아닐 수 없다. 사실 3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일어난 정신적인 변화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채택되고, 이교 신앙에 대한 신뢰를 철회함으로써 “인간들의 정신과 사고 속에서 새로운 신앙, 새로운 생활양식, 새로운 윤리”로 대치되는 새로운 질서가 아노미적 현상 속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혼돈과 변화의 시대적인 특성은 어거스틴 자신의 개인적 생애에도 뚜렷이 반영되고 있다. 그의 인생 전반부가 그리스, 로마적 교육배경과 수사학자로서의 현세 지향적인 출세주의적 로마인의 생활에서 33세에 회심을 경험한 후에는 독실한 신앙인이며, 히포의 주교로서 기독교 교리의 창안 또는 정리자 일 뿐 아니라 이교도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위치를 확고하게 세우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는 은총론, 예정론, 교회론 등 신학 전반에 걸친 교리를 형성하고 확립시켰다.
2. 도나티스트들과 어거스틴의 마찰
어거스틴은 히포의 감독이 된 후에 큰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분열”의 문제였다. 이 분열은 도나티스트들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었고, 아프리카 교회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마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A.D.393년 히포의 회의에서부터였다.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들과의 논쟁을 벌였던 초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고, 둘째는 성례전과 그 효용성에 관한 문제이며, 셋째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먼저 교회의 본질이 남은 자의 공동체이며, 자신들만의 거룩성을 잃지 않은 진정한 교회라는 도나투스트들의 주장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반박한다. 먼저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면에서, 교회의 성직의 질서가 ‘성경을 받친자들’로부터 계승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도나투스트들이 ‘성경’을 비난했지만, 실상은 그들도 같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나투스트들이 자신들의 교회의 거룩함을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들은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많은 도나티스트들이 거룩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의 거룩함의 근거를 사람들에게 둔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는 자신들을 선민과 동일시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교회의 거룩성은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근거하는 것이지, 인간의 거룩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죄와 상관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거룩해 진다는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자신들만의 거룩함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키는 도나티스트들을 비판한다. 교회는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지만, 하나의 교회라는 것이다. 이 하나의 교회를 가능케하는 것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오직 성령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랑의 도움 속에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죄인이 순결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회의 일치를 깨는 사람은 사랑의 원천인 성령의 활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나티스트들의 죄는 ‘성경을 받친 사람들’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의 영인 성령을 결핍하였고, 형제들을 향해서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도나티스트 논쟁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은 성례전에 관한 문제, 특히 세례에 관한 문제이다. 도나티스트들은 세례의 문제에 있어서 키프리안의 견해를 그들의 입장이라고 삼는다. 키프리안은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성례전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바탕에는 교회를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로 보는 견해가 전제된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른다면 분열은 죄이며, 또한 레위적인 성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배교한 사제들에 의해서 더렵혀진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사실상 피를 더럽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도나티스트 교회에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에 반대하여 세례의 정당성(validity)과 효과성(effectiveness)를 구분하여 논하였다. 성례전 논쟁에 임하는 어거스틴의 입장은 도나티스트들을 논리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갈라져 나간 그들을 다시 포용하고자 하였다. 어거스틴의 입장은 죄없으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성례전적인 은총을 베푸는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성례전의 능력 속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집행하는 사제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례전의 타당성은 집행하는 사제의 성품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감독으로 있는 히포 지역은 도나티스파의 세력이 강하였음으로 카톨릭 교회를 수호하고자 하는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와의 마찰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도나투스파에 대해 어거스틴은 처음에는 대화의 방법으로 그들을 카톨릭 교회 내로 이끌어 오고자 하였지만, 자신의 방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난폭하여지는 킬쿰켈리온 혼인을 하지 않은 젊은이들로 구성된 열광주의자들을 말한다.
의 행동을 보면서 나중에는 강압적인 방법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어거스틴은 이 도나투스파에 대하여 처음에는 분리되어 나간 한 형태로 생각하여 그들을 대하였지만 나중에는 교회의 분파운동은 일반 죄악보다 더욱 무거운 죄로 보아 그들을 정죄하였다.
3. 키프리안의 교회론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카프리안의 교회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의 교회론의 영향을 받기는 받았지만 그의 교회론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키프리안의 교회론의 중심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먼저, 키프리안의 교회론을 다룬다면 어거스틴의 교회론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키프리안은 감독교회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249년에 감독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는 감독이 되자마자 데시우스의 박해를 받는다. 이때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의 명령대로 실제로 로마 신들에게 제사하든가 혹은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하였다는 증서를 매수함으로 박해를 피하였다. 문제는 이와같은 타락자의 처리 문제에서 야기되었다. 그런데 키프리안이 이 문제를 처리하기에 앞서 키프리안은 타락자를 취급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박해가 이완되는 것을 기다려서 아프리카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결정하려고 하였다.
노바투스라는 사람이 5인의 장로들과 합세하여 키프리안에 적대하여 독단적으로 타락자들의 교회복귀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키프리안 보다 더 관대한 정책을 타락자들에게 폈던 것이다. 이처럼 키프리안의 교회론의 자리는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상황에서 로마의 잡신들과 황제 숭배로부터 다시 교회로 돌아온 “타락한 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특히 이들 중 타락한 감독과 이런 감독으로부터 받은 세례와 성만찬과 서품 안수례의 효력 문제 등이 중요한 논쟁의 초점이었다. 키프리안이 감독의 권위를 주장하게 되고 교회의 질서와 일체성을 주장하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키프리안의 교회론에 있어서 주요 관심사는 가시적 교회의 일체성에 있었다. 교회에 대한 키프리안의 논지는 한마디로 “교회는 무릇 하나이다”라는 교회의 일체성에 있었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분리된 자들에게는 영적인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키프리안은 교회를 필요불가결한 구원의 방주라고 보는데 노바티안 분파의 경우는 교회가 없으므로 구원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적 계승이 없으므로 교회가 아니며 따라서 교회 밖에 있으므로 구원이 없다는 논리이다. 특히 키프리안은 감독직을 통한 교회의 통일성을 가장 크게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이단자들과 배교자들이 실시한 세례는 무효이며, 정통교회에 들어와서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감독들은 사도들의 계승자이며, 교회는 감독들로 말미암아 세워졌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감독직의 정통성을 지닌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키프리안의 세례론도 그의 철두철미한 교회론을 중심으로 하여 세례의 효능의 문제도 취급한다. 분열자들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키프리안의 이론은 간단하다. 교회만이 생명의 물을 소유하고 있으며, 세례를 베풀고 정결케 할 권세를 갖는 것이므로 교회밖에는 그런 권세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키프리안의 교회론을 종합해 볼 때 몇 가지 결함이 발견된다. 그것은 교회의 외적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영적이며, 불가견적 교회의 성격을 공정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감독들이 다스리는 교회를 말하고, 이 제도적 교회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이 없다고 단정해 버린 것은 잘못이다. 셋째로는 감독적 계승이란 말로 표현된 그의 교회 연합관은 논리적인 결과로서 카톨릭 교회 내에 분리주의를 시인하는 데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어거스틴도 키프리안을 존경하나 재세례의 문제는 키프리안도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고, 차라리 키프리안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4. 어거스틴의 교회론
1) 키프리안의 교회론과 목회론 관점에서의 출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엄밀히 말하면 그가 독자적으로 창안해 낸 것이 아니다. 키프리안의 교회론의 사상적인 토대 위에서 여러 가지 사상을 종합하여 어거스틴 자신의 교회론을 정립하였다. 또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목회적인 면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교회론은 단순히 그의 머리 속에서 꾸며진 것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부딪치는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과 실천적인 체험을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목회하는 동안에 도나티스트 이단에 속한 교회들과 교직자들, 그리고 과격한 열광주의자들을 맞이해서 교회론을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이원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그는 교회에 대해서 가견적 교회(보이는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보이지 않는 교회)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두 관계를 분리시킨 것은 아니다. 그는 도나투스파의 흠없는 신자들만으로 구성된「참 교회」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지상교회는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또는 예정된 자로 구성된 영적 교회와 예정되지 않은 자가 섞여 있는 제도적 교회를 구별하여 교회의 이중구조를 말한다. 또한 어거스틴은 현세의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과 상이한 것(불가견적, 영적 공동체)으로 보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동일한 것(역사적, 제도적 공동체)으로 본다. 이처럼 그는 이원론적인 기독교 전통에 서 있었다. 아울러 그는 제도적 지상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 (선인과 악인)이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기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이라는 것과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사상이다. 여기에서 몸과 머리는 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교회론의 근본 사상은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회란 전세계에 분포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인 동시에 주의 성례전이 베풀어질 수 있는 교회였다. 그러므로 신앙심이 없는 자들과 위선자들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 밖으로 추방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받은 참된 교회는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자들로 구성되며, 그들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묶여진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이 내적이 교회는 외형적인 교회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교회를 두 가지 이중적 의미로 보았다는 것이다.
2) 교회 본질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
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어거스틴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정의한다. 어거스틴이 교회를 ‘그리스의 몸’으로 표현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서부터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신비한 몸’의 표상을 통하여 암시되는 교회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어거스틴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바울의 사상적인 토대 위에서 그의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특히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가운데서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비유한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신부라는 것이다. 즉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는 것과 사도직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임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은 몸인 교회의 상호 연결성에 대한 개념을, 특히 성령과 사랑의 측면에서 발전시켰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불가시적 교회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사랑’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진리는 첫째로, 머리는 한 몸의 다른 지체와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 둘째로 머리는 다른 지체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 셋째로, 다른 지체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각 지체들과 연합되고 그리고 또 영향을 주는 것은 그의 은혜를 매개로 하는 것인데 그의 지체들이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교회는 그의 몸이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교회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근거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며,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되고 성숙되어져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교회 개념은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에 있어서 더 발전한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의 거룩성은 그 성도들의 거룩에 의존하는 것이며, 의식의 효과도 무죄한 성직자가 베푸는 곳에서만 성립된다는 지론으로써 교회의 분열을 일삼았다. 도나티스트들은 「참교회」를 정의하기를, 이단자는 물론 박해시 신앙의 정조를 지키지 못한 배교자들을 제거해 버린 흠 없는 신자들만으로 구성된 교회를 참 교회, 곧 거룩한 교회라고 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라고 정의하고, 교회의 거룩성(순정성)이 신자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교회가 그리스도 몸인데 달려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은 어거스틴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교회는 연합과 성장, 다양성과 통일성, 은사와 직분, 유기적인 측면과 제도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어머니로서의 교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곧 성도의 공동체라는 사상은 교회가 신자의 어머니라고 하는 견해와 필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어거스틴은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를 신부로 보는가 하면, 교회가 신자에 대하여는 어머니의 입장이라고 본다. 이것은 교회를 자신들의 어머니로 인식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로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어머니로서의 교회 사랑은 터툴리안의 저술들에서부터 나타났다. 그리고 키프리안이 명시적으로 이야기했으며, 이어서 어거스틴이 사용하였다. 키프리안은 “당신은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하였으며, 어거스틴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너는 안전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몇 세기 후에 칼빈은 이것을 수용하였다. 인내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영상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영향이라고 한다. 순수성, 부드러움, 간절함, 아름다움, 풍부함 등이 그가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아 영적인 어머니 즉 교회에 부여한 영상(Image)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출산 양육하며 그들을 위한 안락한 보금자리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의 새 지체들을 생산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비유한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진실한 어머니”라고 한다. 어거스틴의 어머니로서의 교회개념은 낳고, 양육하고, 돌보고 나아가 말 안 듣는 아들뿐 아니라 모범적인 아들에 대해서도 번민하는 교회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의 적합성은 교회와 목자들과 신자들을 통하여 실제로 이러한 자기 희생적 돌봄을 실행할 때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 자신이 그것에 대한 탁월한 본보기였다.
③. 성령의 친교로서의 교회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교회 상을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성령의 친교로서의 교회 상을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교회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이 내재하여서, 교회 성원과 예배와 성례전에는 물론 그 밖의 모든 활동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거스틴은 몸에 영혼이 있어 몸의 존재원리가 되듯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의 영혼을 성령이시라고 말했다. “성령은 모든 지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고 그리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각 지체들을 통일시키는 이 성령의 원리는 사랑이다” 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사랑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불가시적 교회의 내적 구조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어거스틴은 믿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성령의 띠로 묶여진 하나의 교회라는 이미지에 압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어떤 분열도 용납할 수 없었다.
④.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어거스틴은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설명한다. 가시적 교회는 외적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며, 불가시적 교회는 참신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개념은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으로 논의되었는데, 가시적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집합되어지며, 성례전에 의하여 양육되어가며, 감독들에 의해 지배되어 가는 교회로 하나님의 유일한 참 가정이며, 그리스도교는 이 가정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가시적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든 자들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구원받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저서「하나님의 도성」에서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말한다. 이 두 교회간의 구분은 예정의 관념에 의해 첨예화된다. 어거스틴의 두 도성의 개념은 티코니우스의 두 나라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두 부분 즉 동시에 선인과 악인, 거룩하고 사악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 안의 죄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무효화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성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해석되는 것이고, 두 나라는 ‘한 몸’안에서 종말 때까지 함께 지속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 이원론이 어거스틴의 두 도성의 개념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회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첫째, 교회라는 말을 하나님의 도성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때 교회는 인류창조 이후부터 이 세상의 종말까지 그리고 종말 이후의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불가견적 영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둘째로, 교회라는 말은 역사적, 제도적 공동체의 의미로 사용한다. 특히 도나티스파가 완전주의적 교회관을 주장하는데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현실주의적 교회관을 내세웠다.
3). 교회의 네 가지 본질
①. 교회의 일치성
도나투스파에 의하면 교회는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로 구성되며, 오직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박해시에 배교한 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배교자들에 의하여 감염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교회의 표식은 통일성과 보편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 “교회는 오직 하나만이 있으며, 그리스도도 하나요, 신부도 하나이다.”라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첫째로 신앙의 통일성을 가지며, 사랑의 일치성을 가지는데 어떤 사람은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단자는 면할 수 있을지언정 사랑의 통일성에 위배되면 역시 분열주의자나 이단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이 통일성의 원리는 유기적인 것이지 제도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비록 순교자라 할지라도 이 신앙의 소망과 사랑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교회는 사랑으로 묶여져야 하고 그 사랑은 수많은 죄를 덮어 준다고 믿었다. 그런데 교회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은 그 사실로 인하여 사랑이 결핍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결핍된다고 보았다.
②. 교회의 거룩성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그리고 도나티스트 등이 가시적 거룩성을 정통으로 보는데 반하여, 어거스틴은 쭉정이가 공존하는 가시적 공동체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들과 달리 예정(선택)교리를 교회론에 적용했다.
도나티스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은 소수의 경건한 자들의 공동체만이 참된 교회라고 보았다. 그들은 교회의 거룩은 구성원들의 신앙과 성결의 상태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말한다. 즉 거룩함의 근거를 사람에게 두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말하기를 “교회는 구성원들이나 성례 및 개인의 성화의 산물이 아니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거룩하고, 성례는 그리스도의 행동이기에 거룩하다”라고 말한다. 도나티스트들이 주장하던 조건적 거룩성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발전된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불가견적인 교회와 로마의 감독이 모든 사도들의 머리인 베드로부터 발원한다는 소위 사도적 계승권에 우선적 관심을 두는 듯 보이는데, 이는 옵타투스와 키프리안의 견해가 고루 섞여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부분은 그에게 미친 키프리안의 큰 반영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교회를 혼합된 공동체라 한다. 이는 마치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듯이, 의인과 죄인의 두 가지 계층이 전세계를 통하여 혼합되어 있다가 타작마당에서 즉, 주님의 최후의 완성에 날에 가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어거스틴은 카톨릭교회에는 ‘의인’과 ‘죄인’이 공존하지만 죄인에 의해 더럽혀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거룩성은 성도 개인의 여부와 형편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사람들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조직된 신비적인 몸이며, 겸손 속에서 성장되어지고,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변화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으로부터 유래된 주관적 교회의 거룩성보다는 교회의 객관적 거룩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③. 교회의 보편성
어거스틴은 모든 성례전들을 지킨 교회만이 “카톨릭”이라고 하는 로가티스트들(Rogatist)의 견해에 반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 등 성경의 그리스도 계시와 교회에 대한 계시 등 전 진리(the whole truth)를 소유해야 진정한 카톨릭 교회라고 한다. 이는 교회의 사도적 가르침의 승계라는 뜻에서 교회의 사도성이요, 교회의 항구적 정체성을 말한다. 이단들은 전 진리가 아니라 부스러기 진리를 소유하고 그것을 절대화한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는 세계 도처에 있는 기독 공동체이다. 아프리카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파가 사도들의 저술, 사도들의 설교 및 사도들의 행동이 진행되고 있는 모든 장소들에 실존하고 있지 않다고 하여 도나티스트파의 이단성을 암시하였다.
그는 도나투스파들을 교정하는 입장에서 보니페이스에게 쓴 그의 서신에서 도나티스트는 카톨릭교회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전세계로 퍼져 나아가야 할 것은 부인한다고 지적하였다. 즉 주님의 교회는 아프리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야 할 것인데, 도나티스트는 일부 아프리카인을 고소하기 위해 전세계적인 카톨릭 교회를 내버리고 스스로를 아프리카에만 한정하였기 때문에 결코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한 분파가 전세계에 걸쳐 있는 카톨릭교회를 대적하여 자신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보기에 우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예를 들어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이 천하 각국의 방언을 말하게 된(행2:5-13) 표적과 장관의 의미를 설명하여 땅위의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며, 그래서 그처럼 복음이 천하 각국의 방언 가운데 발견된 것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하며, 한편 도나티스트들은 라틴어와 카르타고어 두 가지 방언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이러한 두 방언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전파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나티스트들은 카톨릭 교회에 들어올 것을 권고한다.
④. 교회의 사도성
일반적으로 사도성의 특징의 사도의 주교적 계승으로 해석된다. 특히 로마는 성베드로 자신에까지 소급되는 단절되지 않은 주교들의 계승을 추적할 수 있는데, 로마가 사도의 주교권을 계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로마의 주교들이 길게 계승되는 과정에서 도나티스트주의자들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나티스트들이 그들의 교리들을 위한 사도의 제가를 추구하는 일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복음의 사도들이 기초를 놓은 주교직들 속에서 사도들의 계승자들에 의해 전달되었듯이, 참된 사도직은 복음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키프리안은 그의 「교회일치론」에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본문이 전해 온다고 보는데, 그것은 우위본문과 공인본문이다. 그의 우위본문(primacy Text)을 따르면 베드로의 우위성 즉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강조하게 되며, 공인본문을 따르면 사도들의 공동 사목권을 강조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노바티안이 비록 감독들에 의해 안수를 받았어도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파를 만들어 그들의 감독을 떠나서 유사감독이 되었으니 사도적 계승이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의 공동사목권을 지지한다. 그래서 모든 감독은 자신의 결정을 형성할 권리가 있으며, 그의 결정이 다른 감독들과 다르다고 해도 교회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세례론에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의 공동 사목권이 인정되지만 특별히 로마교회에 의해 대표되어지며 그 사도적 계승을 떠나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4) 교회와 성례와의 관계
성례전의 개념은 2세기부터 점차적으로 변화되어 성례는 불가사의하게 역사 한다는 사상이 점점 세력을 얻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어느 정도 이 사상에 동의하였지만, 그는 믿음과 회개를 특별히 성인의 세례에 있어서 필수 요건으로 보았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례전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정식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①. 세례의 기원(Origin)
어거스틴은 세례의 원천과 기원은 사람이나 심지어 교회도 아니며 하나님 자신이시다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가 세례의 원천이요, 기원이며 머리가 되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세례의 물이 어거스틴의 것이냐 또는 도나티스트의 것이냐 심지어 바울의 것이냐 베드로의 것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세례는 의인에 의해서 베풀어지건 불의한 자에 의해서 베풀어지건 간에 그리스도의 세례일 뿐이다. 사려 깊고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불의함을 피하려다가 하나님의 성례전을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②. 세례의 타당성(Validity)
세례의 타당성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카톨릭 밖에서 즉 도나티스트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복음의 말씀대로, 안수 받은 교역자에 의해 베풀어지는 한 그리스도의 세례로서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속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서 다 거룩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오는 자들을 재세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복음이 모든 사람, 즉 정통 카톨릭 교인이나 이단자나 배교자에게 다 공통된 복음이 되듯이 세례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과 세례는 병행하는 것으로서 복음의 말씀 없이는 세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세례의 타당성은 그것이 복음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병행되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말씀대로 베푼 세례는 베푸는 사람의 신앙이나 행위 여하에 좌우됨 없이 타당하여 합법적인 의식이 된다는 것이다. 즉 배교자나 이단자가 베푸는 세례도 그대로 진행되면 세례로서는 성립된다는 것이다.
③. 세례의 효과성(Efficacy)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는 다 타당성을 가지지만, 그 세례의 효과는 사랑으로 연합할 때만 나타나게 된다. 세례의 효과 즉 죄사함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카톨릭 교회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도나티스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분리의 원인인 ‘형제에 대한 증오’에 있으므로 ‘형제애’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의 세례도 인정을 해 주지만,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 이 모든 것이 참으로 가치를 지닌다는 형제 사랑과 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세례의 타당성 또는 합법성과 유효성(효과성)을 구별하였다. 또한 “교회의 일치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이로 미루어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보편교회(카톨릭) 안에서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말”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세례는 죄책으로서 원죄를 모두 제거하나 본성의 부패성은 제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세례의 은총에 의하여 제거되는 것은 세례 이전의 지은 행위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왕의 도장을 받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교회 안에서 표가 될 뿐만 아니라 생명력이 된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면 그것은 다만 표가 되고 효력은 없어진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례전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 정식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며,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된다고 보았다.
④. 성만찬
성만찬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독특한 이원론을 나타낸다. 성만찬을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표시”라고 하면서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예수의 몸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만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시켜 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사랑의 연합을 이루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만찬을 희생의 제물이라고 본 당시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성만찬은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칠 의무가 있음을 기억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성만찬의 은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며,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사랑의 영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만찬에 관한 어거스틴의 상징주의적 개념이었다. 그는 성례전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하여 세례 받지 아니한 자나 성례전에 참여하지 못한 자는 천국과 영생을 소유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성례전의 주관성을 주장하여 성례전의 효력이 집례하는 자에게나 성례를 받는 자의 신앙에 따라 달라진다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성례전은 그리스도에 의해 집행되기 때문에 집례자나 수령자의 가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성례전의 객관성을 강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IV. 결론
이상에서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해서 또한 그의 목회활동을 통해서 교회와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가운데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특정 교회가 참 교회라고 하는 개념은 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참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성되어져 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서의 교회 관념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이 자신의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가 하나의 전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 사랑하여야 하며, 개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주장한다. 여기에 그의 교회론에 대한 진정한 의도가 있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점 먼저, 어거스틴은 성삼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는 어디서나 동일하다고 하였지만 카톨릭 교회의 개념으로 인하여 교회 밖에서 도나투스파에 의해 행해진 세례의 효과성에 대해서는 부인하였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을 교회 안으로만 제한하는 모순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카톨릭적인 교회만을 강조- 그 속에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하는 편협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어거스틴은 초기에는 대화와 토론의 방법으로 도나투스파를 카톨릭 교회로 이끌려고 하였지만 그 방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나중에는 교회를 일치시키려는 의도에서 물리적 수단을 허용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교회의 폭력과 탄압을 정당화시키게 되어 후에 중세 십자군 원정과 종교재판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고 만다.
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학사상 발전, 특히 교회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이미 어거스틴에 대한 많은 연구자료중 일부분의 답습에 불과하겠지만 본인은 도나투스파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교회론을 연구하면서 그동안 고민해 왔던 교회론에 대한 여러 해답들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선교단체에 있으면서 교회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교회가 참 교회인가를 생각해 왔었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자신과 조금만 의견이 다르거나 형태가 달라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독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 빨리 배척해 버리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 또한 오늘날도 도나투스주의자들 같이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인 의로움에 기초해 자신들을 스스로 분리시키고 자신들 외에는 참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볼 때 어거스틴의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나 다른 이단에서 준 세례에 대해서도 그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교회에서 받은 세례라도 그것이 성삼위일체 이름으로, 복음의 말씀대로, 안수받은 교역자에 의해 베풀어지는 한 그리스도의 세례로서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을 볼 수 있다. 또한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 이 모든 것이 참으로 가치를 지닌다는 형제 사랑과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교회일치를 위한 좋은 길 안내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삼위의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시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도나투스주의자와 같은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의에 기초한 형제에 대한 편견과 독선을 버리고 형제를 사랑으로 영접하고 하나되기를 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교회가 죄인과 가라지 같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정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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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 해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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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논문 : 국내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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