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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성경해석의 원리와 종말론
세대주의 성경해석의 연구
세대주의 성경해석 원리와 종말론: 그 기여와 한계
김정우(총신대 구약학교수)
들어가는 말
시한부 종말론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신학적-목회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조직신학은 여전히 "선조 림보"니 "유아 림보"니 하는 난해한 용어를 통하여 죽은 자의 사후 생활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의 돌풍 속에 살고 있는 목회자에게나 신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 같지 않다. 사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의 논쟁으로 가득찬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공중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는 열광적인 신도들의 종말신앙과 너무나 깊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조직신학으로 훈련받은 목회자들은 시한부 종말론의 열병에 걸린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도와줄 수도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우리 주위에 유행하고 있는 통속적 종말론의 해석학적 뿌리가 고전적인 세대주의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의 종말론을 이해하지 않고는 교리적인 혼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목회와 신학이 나에게 준 원래의 제목 "세대주의적 성경해석 원리와 종말론의 오류비판"을 "세대주의 성경해석 원리와 그 종말론: 그 기여와 한계"로 수정하였다. 왜냐하면 원래의 제목은 세대주의 종말관이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첫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성경해석 원리가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며 미국의 세대주의와 한국에 유행하는 세대주의가 동일한 것도 아니다. 또한 세대주의의 종말관이 비판만 받아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문제점을 드러낼 때 그 좋은 점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대주의의 교리 가운데 무엇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열거하는 것은 마치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공격하는 것 처럼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우리가 세대주의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논리를 이해하고 문제를 그 뿌리에서 찾아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쉽지만 그 잘못으로 부터 교훈을 받고 또한 왜곡된 체계를 벗어나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새로운 종말론적 체계를 제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세대주의 종말관을 해석학적인 관점애서 본격적으로 추적해 가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최근에 한국교회에 유행하고 있는 통속적 종말관에는 두개의 조류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크게 "신비주의적 종말관"과 "세대주의적 종말관"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가지가 혼합된 경우도 많이 있다. 혼합된 형태에 있어서도 개인에 따라 "신비주의적 종말관"에 치우친 자도 있고 "세대주의적 종말관"에 치우친 자도 있다. 펄시 콜레가 쓴 "내가 본 천국"과 "100가지 천국 비밀", 이장림이 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와 "하늘문이 열리다 " 는 세대주의 종말론의 구조를 따르지만 전반적으로 인류 최후의 종말에 대해 받은 새로운 계시를 소개하고 있으므로 신비주의적 종말론으로 볼 수 있다(권성수 1990:63-70에 나타난 비판을 보라). 할 린제이의 "대 유성지구의 종말"(Hal Lindsey, The Late Great Planet Earth 1970)이란 책이 한글로 번역된 이후에 세대주의적 종말관을 담은 책들과 번역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서달석이 쓴 "내가 속히 오리라", 그리고 그가 번역한 "주님 재림의 날과 시간" (콜린 데일 지음), "세계사건과 666시스템" (매리 렐프지음), "휴거와 환난, 때와 시간" (찰스 라일리 지음), 김 용순이 번역한 "휴거" (할 린제인 지음)등은 시한부 종말론의 시각에서세대주의적 종말관의 체계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그 해석적 원리를 연구해 갈 때 미국의 고전적 세대주의와 한국교회에 유행하고 있는 불건전한 종말론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전자는 일관성 있는 해석적 원리를 따라 종말론을 재구성하였지만 후자는 세대주의의 틀을 가져 오면서도 하늘로 부터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계시에 호소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진정한 세대주의자들이 한국에 유행하고 있는 세대주의적 글과 그 행태와 생활을 본다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단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에서 고전적 세대주의를 살피는 이유는 그것이 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통속적인 종말론의 모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1)고전적 세대주의 종말관의 체계를 먼저 그려보고 (2) 그 체계의 배후에 있는 문자적 성경해석 원리를 이해하고 비판하며 (3) 나아가 구약예언에 대한 세대주의적 해석의 실제를 다니엘서와 에스겔서, 스가랴서 등에서 살펴본 후에 그 기여와 문제점을 살피려고 한다. 특히 나는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예언서의 언어를 묵시문학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이해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세대주의자들이 묵시문학을 해석하는 열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종말을 묘사하는 비유적인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잘못에 빠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1. 고전적 세대주의 종말관의 개요
" 고전적 세대주의"라고 말할 때 우리는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82)로 부터 시작하여 에드와드 어빙 (Edward Irving 1792-1843)과 스코필드(Cyrus I. Scofield 1843-1921) 에 의해 체계화되고 왈부드(John F. Walwoord 1959) , 펜티코스트 (J. Dwight Pentecost 1958)와 근래에 라일리(Charles C. Ryrie 1953, 1981) 에 의해 세련되게 다듬어진 세대주의를 뜻한다. 최근에 와서 세대주의도 전환과 수정을 하고 있으므로(Poythress 1987:33-38을 보라) 우리는 한국교회의 통속적 종말관의 뿌리가 되는 고전적 세대주의를 중심으로 다루려고 한다.
고전적 세대주의는 신관으로 부터 종말론에 이르는 모든 교리의 틀을 가진 하나의 신학적 체계이지만 그 핵은 종말관에 있다. 세대주의는 (1) 구원의 역사를 일곱세대로 나누며, (2) 율법과 은혜를 날카롭게 대립시키고, (3) 이스라엘과 교회를 다른 운명을 가진 존재로 분리시키고, (4) 교회시대를 구원사에서 괄호 안의 시대로 만들고, (5) 대환란 이전에 교회가 휴거한다는 독창적인 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특징들이 종말론을 구심점으로 잡고 있음을 주목하라. 세계의 역사를 일곱세대로 나누는 목적도 궁극적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이 유대인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마지막 세대요 일곱번째 세대인 "천년 왕국 시대"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교회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후손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후손인 교회라는 두개의 이질적인 공동체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프로그램이 종말론적으로 유대인에게 성취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원론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을 날카롭게 분리하는 것도 제사법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율법이 종말론적인 실체가 될 유대인들에게 다시 부과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휴거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시간이 드디어 닥아 왔다는 신호탄으로 제시되고 있다.
고전적 세대주의는 전통적인 종말론(예,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과 달리 세계의 종말에 대한 극적인 씨나리오를 쓰고 있다. 이 씨나리오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 종말의 서곡으로 이스라엘이 회복(1948년 5월 14일)되며 지진, 기근, 교회의 타락, 적그리스도의 탄생, 666의 출현, 성도의 고난이 종말의 징조로 나타난다. (2) 휴거를 기점으로 하여 문자 그대로의 칠년 대환란이 시작되며 전후 삼년으로 나누어 진다. (3) 대환란이 끝난 후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이 이루어지며 그 때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승리를 거두고 지상에서 유대인을 위해 천년 왕국을 세운 후 마지막으로 곡과 마곡의 전쟁이 일어나고 영원한 신천신지가 이루어진다(권성수역 1990:31의 도표를 보라) .
이와같은 세대주의의 종말론 씨나리오는 " 통속적인" 한국교회의 종말관에 그대로 이식되었으며 특히 휴거가 종말론의 하일라이트로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 시한부 종말관이라는 이단적 종말관이 첨가되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책임있는 세대주의 학자 중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펼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시한부 종말관은 고전적 세대주의의 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판 점쟁이들이 스스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직관적 계시에 근거할 뿐 세대주의의 가르침은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계시에 근거하여 재림의 날과 때를 예언하는 해석은 성경적이 아니며 세대주의의 가르침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2 . 세대주의 성경해석의 원리와 문제점
2.1. 세대주의의 문자적 성경해석 원리
세대주의의 전천년적 종말론은 소위 그들이 주장하는 문자적 성경 해석(literal interpretation)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세대주의를 비판하는 엘리스(Allis 1945:17)는 만약 세대주의가 문자적 성경 해석을 따르지 않았다면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을 비판하는 라일리(Ryrie 1981:90)는 만약 엘리스가 성경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해석 했다면 무천년설(amillennialism) 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 사실 천년 왕국이란 신학적 용어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고 말하는 요한계시록 20:6 (3, 7절 참조)에서 나온 것이다. 이 구절에 있는 천년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과 비유로 보는 것에 따라서 종말론을 형성하는 신학적 틀이 크게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이 부분에 대한 장두만의 문자적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다 (1990:55-56):
그러므로 모든 문헌은 일단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문자적 해석을 하면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에만 다른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천년은 천년을 의미하지 다른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 모든 문헌을 해석하는 일반원칙-일단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문자적 의미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문자적 의미 이외의 의미를 받아들인다-에 따라 해석하면 지상의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계시록 20:4-6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전천년설이 맞다는 결론이 된다.
문제가 이렇게도 간단한가? "모든 문헌을 일단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나 천년 왕국의 문맥을 이루고 있는 요한계시록 20:1-3의 묵시적 이미지를 어떻게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가? 즉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서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 용을 잡는다"(1절). 여기에 등장하는 무저갱 열쇠, 큰 쇠사슬을 문자 그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여기의 용은 문자 그대로의 용이 아니고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때 사단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근다" (2,3절)는 표현은 사단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본문의 "천년동안 왕노릇 하리라"는 말씀도 비유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20:6) 는 표현은 시내산 언약을 상기시켜 준다. 즉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19:6) . 사도 베드로는 신약 성도들이 바로 이라엘 백성을 이어받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2:9). 이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볼때 "천년동안 왕노릇하리라" (원문에는 "다스리리라"[basileusin]) 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왕[basileus]으로서 다스리는 것 으로 볼 이유가 없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왕이며(계5:5-14) 제사장으로서 다스리는 영적인 통치(계5:10) 다스리는 개념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사만사천이라"(계7:4)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문자적 의미는 무엇인가? 오직 십사만 사천명 만이 인을 맞은 구원받은 백성인가? 또한 여기의 이스라엘 사람은 오직 문자 그대로 유대인이요 교회는 아닌가? 만약에 20:6의 천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면 여기의 십사만 사천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문자적 성경해석이 그렇게 쉬운 해석 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세대주의가 문자적 해석을 한다고 해서 전통적인 교회가 문자적 해석을 배격하고 풍유적 해석을 지지해온 것으로 생각해서는 않된다. 장두만(1990:55) 에 따르면 "무천년설주의자들이 예언서에서 우화적 해석을 한다"고 하나 이 비난은 정당하지 않다. 먼저 무천년설주의자들은 예언서에서 인위적인 우화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하지 않으며 비유적 표현을 그 문학 양식에 따라 해석하려고 한다. 또한 성경 해석사를 보면 이 두 방법론이 항상 대치되어 사용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대주의 뿐 아니라 전통교회도 문자적(혹은 문법적) 해석을 모든 성경해석의 첫 출발점으로 삼아온 것이 사실이다. 풍유의 천재로 알려진 오리겐도 문자적 해석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Silva 1987:36-45; Grant 1984:56-62) . 오리겐에게 있어서는 문자를 넘어선 영적 의미 즉 신약적 의미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마치 구약의 문자적 의미가 배제된 것 처럼 보일 뿐이다. 그가 당대 최고의 학자였고 헥사플라(Hexapla)를 만든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두 입장의 차이는 문자적 해석이냐 우화적 해석이냐에 있지 않고 어떤 문자적 해석을 하느냐에 있다.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을 가장 체계적으로 설득력 있게 변증한 챨스 라이리(Charles Ryrie)는 이 방법론에 대해 아주 부드러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권성수역 1990:118에서 인용됨).
세대주의자들은 자기들의 해석원리를 문자적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각 단어가 통상적인 용례(기록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지니는 의미를 그 단어에 부여하는 해석을 의미한다 .
"각 단어가 지니는 통례적인 의미"에 따라 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이리(Ryrie 1981:87) 는 한 수를 더 떠서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은 바로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지해 온 "문법적 역사적 해석"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권성수역 1990: 119).
이것이 때때로 문법적-역사적 해석(grammatical and historical interpretation)이라 불리는데 그것은 각 단어의 의미가 문법적이며 역사적인 고찰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라이리는 나아가서 세대주의가 말하는 문자적 해석이 "자연스러운 해석 " (normal interpretation) 혹은 "평이한 해석"(plain interpretation)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세대주의의 해석자들이 표면적으로 정의하는 "문자적 해석"에 있어서는 별로 큰 문제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 라이리가 한 본문의 의미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계속해서 "단어의 의미"에 집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물론 한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가 해석의 출발점을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이나 문장이 가장 기본적인 의미전달의 단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 단어의 자연스러운 의미도 문장으로 다듬어질 때 수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되고 한 문장(sentence)의 뜻은 더 넓은 문맥(context)에서 결정된다.
문자적 해석에 대해 일면 자연스러운 정의를 한 후에 라이리는 어려운 부분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다. 그는 문자적 해석이 "평이한 해석"이라고 해서 "비유법(figure of speech)을 베제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Ryrie 1981:87).
상징(symbols), 비유(figures of speech), 모형(types)은 모두 평이하게 해석되며 따라서 문자적 해석과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 결국 한 비유에 어떤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비유)과 관련된 용어들에 문자적의미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가 가끔 의미를 더 명료하게 해주나 비유가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문자적이고, 통상적이며 평범한 의미이다.
달리 말하자면 라이리는 상징이나 비유나 모형이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 문학적 카테고리들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의 의미를 올바로 찾아낼 때 그것들의 의미를 규명해 낼 수 있으므로 문자적 해석은 어디에나 일관성 있게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비유 하나만을 잠간 생각하더라도 하나의 비유를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의 평상적인 의미만을 이해한다고 그 비유가 풀린다고 볼 수 없다. 예수님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하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한다(마13:13) 고 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천국이 한 순간에 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천국이 서서히 성장해 간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즉 그들은 비유의 평이한 뜻은 알지만 비유가 가리키는 실제를 알 수가 없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다 명백하게 보여도 왜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을 선하다고 말했는지 모른다면 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는 아직도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유라고 하는 독특한 장르를 이해해야 올바른 해석에 접근할 수 있고 비록 그 장르를 이해해도 비유해석은 여전히 어렵다. 왜냐하면 비유는 "대개 달라진 상황 때문에 평범한 언어(직설법)로는 자신의 의사를 잘 전달 할 수 없을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정훈택 1991:11) .
세대주의가 문자적 해석을 주장한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의 역사나 설화 부분에서 세대주의자들은 심한 영해를 시도하며 그 교훈적 가치를 찾고 있다. 스코필드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역사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풍유적 또는 영적 의미가 있다(갈4:23-31)고 말한다(Poythress 1987:24) . 스코필드에 따르면 창세기 1:16에서 "큰 광명"은 재림 때의 그리스도를 "작은 광명"은 "보이지 않는 태양의 빛을 반영하는 교회"를 예표하며, 모세가 십보라와 결혼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방인과 맺어진 것의 예표이다. 가장 흥미로운 해석은 에스더서에서 나타난다(Allis 1947:21-22에서 인용됨).
아하수에로는 최고의 이방 권위를 대표한다. 와스디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서 신앙고백만 하는 교회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별"이란 뜻을 가진 에스더는 유대인 신부이다. 악한 하만은 이스라엘을 멸하려는 자로서 자기 꾀에 빠지며 회복된 이스라엘의 원수로서 음모를 꾸미는 자이다. 모르드게는 천년왕국 때에 높아진 주의 백성을 다스릴 주님을 보여주는 자이다 .
이런 해석들은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C. E. Mason을 보라). 그러나 오리겐은 구약성경을 기독론적으로 영해하나 스코필드는 종말론적으로 영해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세대주의자가 문자적 해석이 명료한 역사서와 설화에서는 영해를 시도하고 문자적 해석이 어려운 예언서와 묵시록에서는 절대적인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는 것은 아주 역설적이다. 즉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를 고집하며 성경예언의 종말론적인 언어가 모두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 한(M. R. DeHaan)은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한화룡 1990:30에서 인용됨)
과거에 성취되었던 바 예언된 모든 사건은 성경이 말했던 그대로 정확하게 어김없이 성취되었다. 성취된 모든 예언은 절대적으로 확실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모든 예언도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으로 자신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성취된 예언은 문자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성취되지 않은 예언도 동일하게 문자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디 한의 논리가 아주 단순해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성경에 제시되고 있는 많은 예언의 성취를 드러내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 꼭 문자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디 한이 볼 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정통교회에서는 이미 신약시대의 도래로 "이미 성취된 예언"으로 본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이 아직 이스라엘을 위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고 어떤 부분이 교회에서 이미 이루어진 예언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게된다.
스코필드는 세대주의의 해석학적 기초를 아래와 같이 놓고 있다(Scofield SBCS 45-46, Poythress 1990:24에서 인용됨; 나의 의역이다)
"[예언서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문자적 해석의 근거를 찾는다. 흔히 예언들 속에 비유가 가끔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나 비유는 반드시 문자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언이 "영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이루어진 예는 단 한번도 없다. 예루살렘은 항상 예루살렘이며 이스라엘은 항상 이스라엘이고 시온은 항상 시온이다. 예언은 결코 영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며 항상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스코필드는 세대주의의 가장 큰 관심이 구약의 예언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은 주로 이스라엘과 다윗의 집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그 모든 예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들은 앞으로 도래할 천년 왕국에서 문자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고 있다. 문자적 해석의 틀 속에서 볼때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결코 예표적으로 교회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없다. 즉 예언서의 이스라엘을 교회의 예표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말함으로써 교회와 이스라엘을 이을 수 있는 해석학적인 고리를 제거해 버렸다.
" 예루살렘은 항상 예루살렘이며 이스라엘은 항상 이스라엘이고 시온은 항상 시온이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은 결코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며 오직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는 사상은 이미 다비(Darby)로 부터 시작된다. 그는 천상적 이스라엘과 지상적 이스라엘을 구별한 후 구약의 예언은 오직 지상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Poythress 1987:17-18). 그러므로 구약에 예언된 지상의 모든 축복은 천년 왕국 시대에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다.
최근에 와서 폴 탠(Paul Tan 1974:132)은 보다 명료하게 문자적 해석원리를 데이빗슨(A. B. Davidson)으로 부터 인용하며 제시하고 있다 (권성수역 1990: 127 인용).
이것이 예언해석의 제일(!) 원리라고 나는 본다. 즉 예언을 문자적으로 읽고 문자적 의미가 바로 그의 의미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는 상징들이 아니라 실체적인 것들, 우리의 교회니 세계니 하는 것 처럼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들 중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세대주의자들은 한결같이 문자적 해석을 "제일 원리" 혹은 " 절대적인 원리"로서 주장하고 있다.
2.2.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원리 비판
먼저 세대주의가 구약의 역사서나 설화에서는 기발한 풍유적 해석을 하고 예언에서는 문자적 해석을 금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스코필드는 예언을 예표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완강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앞에서 보았다. 그러나 왜 역사서나 설화에 등장하는 이브, 리브가, 아스낫, 십보라, 룻, 술람미 여인, 와스디는 모두 "예표"로 보면서도 왜 예언서의 이스라엘은 꼭 이스라엘로만 보아야 하는가? (Allis 1947:23-24 참조) 요한 계시록에서 바벨론은 음녀로 묘사되며 종말론적인 적그리스도의 나라로 해석된다. 즉 구약의 바벨론이 계시록에서는 예표적인 존재로 해석되고 있는데 왜 이스라엘은 꼭 이스라엘이어야만 하는가?
세대주의가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예언의 상징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언이 상징으로 주어질 때는 항상 오해의 소지가 있다. 물론 세대주의는 예언 속에 상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상징까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고 (단7:2-3) 또 다른 짐승이 올라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며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에는 참람된 이름이 있다"(계 13:1)는 묵시록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사람의 이마에 인을 친다(계 7:4) 는 상징이 어느 정도 명백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가? 다니엘서12:11에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이란 상징이 어떤 점에서 원래의 청중들과 20세기의 독자들에게 명백한가? 스가랴 14:4에서 "그날에...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나머지 절반은 남으로 옮기리라"는 말은 정말로 문자 그대로 산이 나누어진다는 말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묵시적 상징들은 모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해석은 일차적으로 이 상징들을 표현하고 있는 본문의 문학적 장르의 관습을 따라 해석헤야 할 것이다.
나아가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은 예언의 기본적인 성격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마치 예언은 순전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세대주의자들에 따르면 예언이란 "미리 기록된 역사"(Prophecy is prewritten history)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이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예언해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로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예언했지만 그 70년이 언제 부터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다니엘은 언제 마치는지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단9:1). 그러나 고레스의 포로귀환 칙령(538년)이 있었기 때문에 포로기간이 여호야긴 시대에 처음 포로로 잡혀간 때(608년)로 부터 계산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예언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일깨우기 위해 준 것이다 (신18:15-22). "구약 예언 중 2% 미만이 메시야적이며 5% 미만이 특별하게 새 언약 시대를 묘사하고 앞으로 올 사건과 관련된 것은 1%미만이다"라고 간파한 스튜어트(Douglas Stuart 1981:150, 한화룡역 32쪽)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정당하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예언 중 많은 부분들이 중복되어 성취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들어 이사야 7:14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예언도 그 자체의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아하스 시대에 이미 하나님께서 징조로 보여준 아이가 있었고(7:15)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참된 의미에서 성취되고 있다(마1:23). 또한 이사야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에게 높은 산에 올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을" (사40:1-11) 외치라고 말할 때 그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부터 돌아오는 것을 바라 보았으나 이 예언은 정경적인 차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루어졌다(막1:1-3) .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이 예언 속에 있는 예표적 의미를 부인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정경의 일부로서 예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고 구약자체의 평이한 의미만을 고집하게 될 때 유대적 해석(Jewish interpretation)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위기도 고려해야 한다. 즉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또한 예표적 의미를 부인할 때 구약의 계시는 그 입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지상의 예루살렘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모형이다. 신약성경은 교회 예루살렘으로 이해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하고 있다(계 21:1-2) . 포이트레스는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이 결국 구약 계시의 입체성을 상실하므로 "평이한 해석""(plain interpretation) 이 아니라 "평면적인 해석" (flat interpretation)이라고 말한다(권성수 역 1990:122) . 구약성경을 신약적인 관점에서 올바로 읽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의 글 "시편 89편의 정경적 해석"과 "박 윤선 시편 주석에 나타나는 기독론적 해석" 을 참조하라(김 정우 1990:103-133; 193-213)
3. 구약예언에 대한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의 실제
3.1. 다니엘서의 예언에 대한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
구약예언에 대한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다니엘서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책에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할 터전을 마련하고 문자적 해석을 철저하게 적용하였다. 그 결과로 "교회시대"와 미래의 유대인이 이룰 "천년 왕국 시대"가 분리되었고, 교회와 유대인은 서로 다른 운명을 가진 이질적인 공동체가 되었고, 교회시대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서 괄호 안의 시대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이 가장 두드러진 세개의 본문인 느부갓네살이 본 신상의 꿈(2:1-45), 다니엘이 본 네 짐승과 인자의 꿈(7:1-28), 그리고 칠십이레의 계시(9:20-27) 를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로 느부갓네살이 꿈에 본 신상에 대한 말씀인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2:44)를 살펴보자.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졌는가 혹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전통적인 입장에 따르면 이 예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루어졌으나 세대주의에 따르면 이 예언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코필드는 여기의 열왕(열국의 왕들)을 마지막 시대에 재건될 로마 제국(Revived Roman Empire)의 왕들로 본다 (Scofield, RB 902). 아이언사이드 (Ironside)는 느부갓네살이 본 우상의 발가락은 10개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앞으로 10개의 나라가 구주 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느부갓네살이 본 우상에 10개의 발가락이 있다는 암시는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세대주의자는 그 우상이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므로 10개의 왕국을 상징하는 10개의 발가락이 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열왕의 때에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초림과 부활을 통해 이미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로 볼 수 없게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세울 나라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나라가 아니고 지상적이며 세상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예언을 영해해서는 안된다고 세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전통적인 입장은 이 구절을 구속사적인 맥락 속에서 도래할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보았으나 세대주의는 문자적 해석을 통해서 말세에 유대인의 왕국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예언으로 보게되었다. 결과적으로 다니엘서 2장에는 교회시대가 생략되었다.
그러나 2:44의 "하나님 나라"가 정말 영적인 나라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의 지상 나라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주석적 근거가 충분히 있는가? 먼저 이 나라에 대한 설명을 보라.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하며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것이다." 이 영원한 나라에 대한 표현을 문자 그대로 볼 때 어떻게 지상에 있을 유대인의 천년 왕국(시간적으로 제한된 나라) 과 동일시 할 수 있을까? 둘째로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는 돌은 "사람의 손으로 뜨인 돌이 아니고 산에서 뜨인 것"(2:45) 이므로 신적기원을 갖고 있으며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다"(2:35)고 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계에 퍼져갈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둘째로 다니엘서 2장의 환상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7:23-27에는 네개의 제국이 네마리의 짐승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의 네마리의 짐승은 2장에 있는 우상의 네 부분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한" (7:7) 네번째 짐승은 우상의 네번쩨 부분(2:40-41) 인 로마와 일치한다. 두 장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2장은 몸의 4번째 부분이 10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음을 전혀 암시하지 않지만 7장은 네번째 짐승이 10개의 뿔을 가지고 있음을 명시하는데 있다. 세대주의에 따르면 이 10뿔은 마지막 시대에 로마의 화신으로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구성할 10개의 왕국이다(Gaebelein). 즉 하나의 뿔이 하나의 왕국을 상징하므로 10개의 뿔은 문자 그대로 열개의 왕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블라인은 계시록 13:1-7과 17:8에 근거하여 로마 제국이 476년에 끝나고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갈 때 새로 일어날 것이며" 다니엘서 9장의 70번째 주간인 마지막 7년간 존재하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므로 멸망할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열뿔의 해석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에 따르면 열뿔은 문자 그대로 열나라가 되며 그동안 구주 공동체가 결국 10나라로 구성될 것이라는 헛된 예언들을 해왔다. 그러나 "뿔"이 왕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10이란 숫자도 상징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엘리스 (Allis 1947:126)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다니엘의 시대나 오늘날에도 10개의 뿔을 가진 짐승을 우리는 들어보지 못했으므로 10이란 숫자도 인위적인 것" 즉 상징적인 숫자로 볼 수는 없을까? 에드워드 영(E. J. Young 1978:159) 역시 여기의 10을 완전수(indicative of completeness)로 보고 있다. 동물의 뿔은 성경에서나 성경 밖의 문헌에서 군사적인 맥락에 자주 등장하여 탁월한 힘을 상징해 준다(삼상 2:1; 슥1:18-20). 열뿔은 두개의 뿔이 다섯 쌍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 짐승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다니엘서에서는 뿔이 제국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7:24; 8:5이하; 에녹 1서 90:9; A. Lacocque 1979:141참조).
네번째 짐승은 열뿔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중 작은 뿔이 나와서 세뿔을 부러뜨리는 모습이 나타난다(7:8, 23-24) . 세대주의에 따르면 이 환상은 종말론적인 것으로서 "작은 뿔"은 회복된 로마 왕국의 왕이며 교회가 사라진 후에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문의 어디에서도 네번째 짐승은 역사적인 로마이며 그곳에서 나온 작은 뿔을 말세에 새로 등장할 로마 왕이라는 수천년의 시간의 공백을 제시해 주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23-24절) . 또한 7:13이하에는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 부터 계신이에게 인도되는 모습" 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본문은 신약의 인자론에 핵을 이루는 부분이므로 그 일차적인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보는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7:18에 따르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고 말하며 이 뿔이 이들과 싸워서 먼저 승리를 거두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다시 성도가 이긴다고 말한다(21,22절) . 본문의 그 어디에도 성도들이 신자가 아니고 천년 왕국의 유대인을 가리킨다는 힌트는 없다.
끝으로 세대주의 종말론의 문자적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을 차지하는 부분은 70이레의 비밀을 말하고 있는 다니엘 9:24-27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예언 중 26절의 육십 두 이레 (62주) 과 27절의 마지막 이레 (7주) 사이에 큰 시대적인 간격이 있으며 이것은 "예언적 프로그램에 있어서 교회 시대 전체가 괄호(parenthesis) 속에 들어간 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Allis 1945:111).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부터 교회가 사라지는 날까지가 이 한 절 사이에 예언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에 따르면 다 臼 9장의 예언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에 따르면 9:24의 예언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 보고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성"은 오직 예루살렘 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한 아직까지 그 죄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7절 역시 여전히 미래에 나타날 일이다. 여기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69주와 70주 사이에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데 있다. 세대주의의 종말관 체계를 여기에 억지로 집어넣지 않는다면 어떤 건전한 주석의 원리를 따라 69째 주와 70째 주 사이에 수천년이란 시대적인 간격을 둘 수가 있을까?
문자적 해석과 직결된 문제로서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를 정말 문자 그대로만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서 성경의 본문은 하루가 1년이라는 것을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클라인 (Kline 1977:459-62)에 따르면 70이레는 안식년이 10번 이루어지는 숫자로서 10개의 희년을 가리킨다. 이런 팻턴은 외경 The Apocalypse of Weeks (1 Enoch 93:1-10, 91:12-17) 그리고 쿰란의 문헌 11QMelchizedek에도 나타나고 있다. 10번째의 희년은 최후의 희년으로서 메시야의 시대를 가리키며 영원한 구속이 완성되는 해로 볼 수 있다.
27절에 나타나는 마지막 이레의 절반이 흥미로운 표현이다. 이것은 7:25에서 "한 때, 두때, 반때"로 이미 나왔다. 여기에서 "두 때"(`iddanin)라는 표현은 아주 모호하다. 이것은 복수형 혹은 쌍수형으로 읽혀 질 수 있다. 복수라면 상당히 무한정한 시간이 된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1260일 혹은 42달로 나타날때 비로소 "두 때"라는 계산이 나온다. 세대주의는 1260일이 문자 그대로 해석되며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7년과 전삼년반과 후삼년반이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2달은 3년 반으로서 7년을 둘로 나눈 것 즉 완전수를 둘로 나눈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3.5라는 숫자는 다니엘서(7:25, 9:27, 12:7) 와 계시록(11: 2, 3, 9, 12, 12: 6, 14, 13:5)에서 여러번 나타나타나고 있다. 이 숫자는 일곱번에 걸쳐 환난의 기간을 다루며 한번은 두 증인의 예언 기간으로(계11:3) 나머지 두번은 교회가 광야에서 양육받는 기간(12:6,14)로 나타난다. 즉 이 표현은 다양한 문맥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다니엘서의 의미와 계시록의 의미 사이에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3.2. 몇몇 선지서의 예언에 대한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
이제 다니엘서를 떠나서 다른 구약의 본문을 몇개만 살펴보자. 먼저 이사야서에 대한 세대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이사야40-54장은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바로 이어서 이루어질 다윗 왕국의 영광"(Scofield RB 747)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 부분에 나타난 예언은 교회를 다루지 않고 초림에서 천년왕국으로 바로 넘어가고 있다.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사야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는 말씀은 "교회 시대에 대한 예언(a prophecy of the church age)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복음의 원리"(priciple of the gospel)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을 품어주는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성취는 천년왕국 시대의 유대인에게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Darvy, Synopsis 2:315, Allis1947:130에서 인용됨) . 즉 이 예언은 미래의 메시야 왕국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일차적으로 현재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의 해석과 전통적인 해석이 가장 크게 충돌하는 부분은 역시 에스겔 40-48장일 것이다. 이 장들은 새 언약(33장) , 이스라엘의 회복(36:1-37:28), 곡과 마곡과의 전쟁(38:1-39:29) 을 다루는 맥락에서 나오며 크게 두부분 즉 이상적인 미래의 성전 건축(40:1-46:24) 과 예루살렘 성의 회복(47:1-48:35) 을 구성하고 있다.
이 부분의 해석에서 폭풍의 핵을 이루는 문제는 "피의 제사"에 대한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에스겔 44-46장에 나타난 예언이 오직 미래에 회복될 이스라엘에 적용되므로 그 때에 레위법을 따른 피의 제사가 회복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아처(Gleason Archer 1985:430)에 따르면 이 본문의 앞부분에서 두로와 시돈의 심판(26-28장)이 문자적으로 의도 되었으므로 40-48장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부분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영적인 예루살렘인 신약교회에서 이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한다 (Archer 1985:430).
성경의 예언서 중 여덟 장 내지 아홉 장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과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해 명백한 계획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전의 정확한 치수와 구획, 그리고 여러 지파들이 약속의 땅을 어떻게 분배하게 될 것인지 자세히 말하고 있으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
두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여기에서 제기된다. 첫째 문제는 에스겔 성전에 나타나는 희생 제사에 관한 것이다. 43:18은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가 이러하니라"고 말하며 이어서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고 (19절), 번제(24절), 속죄제(25절), 감사제(27)를 칠일 동안 드리라고 한다. 즉 레위기의 속죄 규례가 부활할 것을 다루고 있다. 또한 사독의 후손이 제사장으로 등장하여 이 모든 제사의식을 집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구약의 예언 언어는 신약시대를 가리키지 않고 신약시대의 끝에 있을 소위 천년 왕국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신약성경에 따르면 여기에 언급된 모든 희생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전히 이루어졌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히10: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에스겔40-48장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문자적 예언해석을 주장하는 세대주의에 따르면 후일의 천년 왕국에 에스겔 서에 예언된 피의 제사가 다시 있으리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의 제사의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약화시키거나 폐기 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천년왕국의 피의 제사가 화해나 속죄적 성격을 지니지 않고 기념적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아처, 1985:431, Allis 1947:249). 스코필드도 이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면서, "의심할 여지 없이 마치 옛 언약이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같이 여기의 제사들은 십자가를 되돌아 보며 기념하는 것이 될 것이다"고 해석한다 (Scofield RB 890). 그러나 에스겔서의 어디에도 이 제사들이 기념용으로 의도되었다는 암시조차 없다. 에스겔서의 제사 제도는 본질적으로 레위기의 제사제도와 동일한 것으로서 대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레위기의 제사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점에서 세대주의는 구속사적인 흐름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문자적 해석을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다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역행시키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다.
두번째 해석적인 난관은 에스겔 47장이다. 여기에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내리는 모습이 예언되고 있다.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 나오는데 이것이 큰 강이 되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으로 나타난다(5절). 그리고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고 강이 이르는 곳 마다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며 바닷물(사해)이 소성함을 얻는다고 한다(9절). 이 예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사해까지 적시며 사해를 생명의 바다로 바꾸고 고기가 살 수 있도록 할까? 이 예언의 배후에는 명백하게 에덴동산 이미지가 깔려 있음을 주목하라. 에덴동산에 흐르는 물과 모든 나무와 산의 모티프가 에스겔서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28)고 말씀하심으로 에덴동산을 성령강림으로 재해석하셨다. 요한계시록 22:1-4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나오며 강 좌우편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실과를 맺는다고 한다. 즉 에스겔의 상징적인 강이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에스겔은 에덴동산의 회복을 여기에서 바라 보고 있지 문자 그대로 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올 것을 내다 보고 있지 않다. 구약의 성전은 그 자체가 예표적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처소를 본딴 복사판이다(출25:40, 왕상8:29-30). 성전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로서(히8:5) 하나의 모형으로 주어졌다. 이 모형은 그림자로서 솔로몬의 돌 성전은 보다 완전한 것이 나올 때 폐기될 수 있었다(히10:9). 이 그림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실체가 나타나고(요1:14) 종말론적인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계22). 이 성경신학적인 맥락 속에서 에스겔서의 강물과 나무 이미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끝으로 스가랴서에 나타난 예언을 세대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살펴보자. 메릴 엉거(Unger 1978)는 스가랴서 전체가 메시야의 강림과 천년왕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라는 관점 속에서 주석을 하고 있다. 예로서 2:1-13의 측량줄 잡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환상은 "그 도시가 미래에 천년왕국의 수도가 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1978:43). 즉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고 교회가 될 수 없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깨끗함을 받는 환상(3:1-10)은 메시야가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회개할 것을 그리고 있다(55쪽). 11장은 미래에 거짓 목자 즉 적그리스도가 올 것을 말하며, 12장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을 예언한다고 말한다(206쪽). 미래의 예루살렘이 다시 이방인들에게 포위될 것이며 (12:1-9), 메시야 왕이 두번째로 오셔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 때 온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이다(12:1-13:9).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승리를 거둘 것이나 메시야가 감람산에 오심으로 큰 지진이 일어나고 그 산이 변형되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는다(14장) . 따라서 14장은 전적으로 예언적이다(wholly prophetic). 이것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과거 역사에는 적용할 수가 없다(238쪽). " 제 14장은 현 시대의 관점에서도 전적으로 예언적이다. 그 의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해석법은 문자적인 해석이다 " (239쪽). 그리고 엉거는 파인버거(Feinberg)를 인용하고 있다: "이 장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때 스가랴가 지금까지 계시한 것과 성경전체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완성에 대한 예언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 .
4. 묵시문학적 관점에서 본 세대주의 종말관 재고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세대주의는 성경해석에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틀을 달리 제시하였고 이스라엘과 교회를 다른 운명을 지닌 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므로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을 극대화 시켰으며 예언서 전체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새로운 해석이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세대주의는 자신이 정의한 문자적 해석이 가장 일관성있고, 정당하며, 옳은 해석이라고 말하며 마치 언약신학자들이 평이하고 문자적인 해석을 배격하고 비유적 해석을 하는 것으로 비판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문자적 해석과 비유적 해석의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오히려 문제의 핵은 어떤 "문자적 해석"이냐하는데 있다. 둘다 문자적-문법적 의미를 추구하지만 세대주의는 한 단어에서, 언약신학자들은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예언이라는 독특한 장르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바로 이 점을 좀더 생각해 보며 마무리를 해 보자.
오순절 설교(행2:14-21)에서 베드로는 요엘2:28-32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요엘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는가? 요엘은 말세에 주께서 자신의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시는 날에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행2:19-20)고 말했다. 여기에서 " 피, 불, 연기, 어두워진 해, 피로 변한 달" 을 어떤 점에서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묵시록적인 이미지로서 하나님이 강림하심으로 세상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베드로는 위의 말씀을 인용한 후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였다"고 해석하였다(행 2:22) .
그렇다면 스가랴서에서 감람산이 나누어지고 에스겔서에서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 사해를 생명의 바다로 만드는 이미지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을 알리는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엘이 말세가 되어 하나님의 영이 새롭게 일하시는 시대를 예언하면서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알았을까? 선지자는 신약시대의 도래에 대해 상징과 비유를 사용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 상징과 비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선지자의 의미를 바로 캐어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구름을 수레로 타신다 "고 말할 때 문자 그대로 그분을 손오공 처럼 구름을 타는 자로 볼 수 없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할때 그것은 문자적인 구름이 아니다. 할 린제이 조차도 여기의 구름은 "예수와 함께 흰 옷을 비고 재림하는 무수한 신자들"로 해석하였다(Hal Linsay 1970:173). 물론 구름에 대한 할 린제이의 해석은 잘못되었다. 여기의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나타나는 천사들이다. 이런 문맥에서 구름을 하나님의 강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데살로니가 전서 4: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구름 속으로 휴거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이 본문은 묵시문학으로 종말론적인 전쟁의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강림을 그리고 있다. 여기의 공중과 구름을 평이한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다. 세대주의는 묵시문학의 이미지와 시적인 이미지, 신화적인 이미지를 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하였다.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결정하는 것이 종말과 연관된 본문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준다. 다니엘과 사도 요한은 고난 가운데서 꿈과 환상과 상징을 통해 하나님이 이기고 있고, 역사의 마지막에 개입하시며 그의 성도들을 신원하시고 그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말하고 있다. 묵시문학은 구체적인 종말의 때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종말론적인 최후의 승리를 제시하며 고난받는 믿음의 공동체를 위로한다. 신자들이 고난받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상징(symbolism)을 통해서 의미를 전달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도 "종말이 언제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만이 아신다"고 대답하시며 오직 (1)종말이 임박했으며 (2)고난이 있을 것이나 (3)하나님이 역사를 이끄시므로 (4)늘 깨어있으라고 권면하신다. "작은 묵시록"으로 알려진 마가복음 13장의 메시지의 초점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모든 묵시록은 종말의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의 필연성을 가리키면서 준비할 것을 명하고 있다. 또한 새 시대가 기어이 오리라는 확신으로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로 하고 있다. 사람들과 제자들은 종말의 날과 때에 대해 관심을 갖지만 주님은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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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thebooklih.tistory.com/25 [thebookl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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