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논문
산상설교와 평지설교의 유사점과 차이점
I. 서론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마5-7장)와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눅6:17-49)는 구조나 내용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런 반면에 차이점도 많이 있다. 두 복음서 저자는 같은 자료를 근거로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를 구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자료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두 저자 자신들이 속해 있던 공동체들이 가지고 있던 환경이나 상황, 그리고 성격들로 인해 기인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자료지만 그들의 공동체에 맞게 확대, 축소, 삭제를 통한 변형을 꾀하다보니 두 설교의 구성에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을 것이다. 두 설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설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차이점도 적절히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두 설교에 나타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연구해 보는 가운데 저자들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기록했는지, 각각의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각 설교를 통해 저자들이 각각의 독자들에게 주고자했던 메시지의 의도와 목적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Ⅱ. 본론 : 산상설교와 평지 설교의 비교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는 같은 구조로 조직되어 있고 많은 내용들은 중복되어 있다. 정훈택, 「산상설교」, 로고스연구원(1992), p 59
두 말씀은 모두 “축복선언들”(the Beatitudes)로 시작해서 “두 종류의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끝난다. 그 사이에 황금률, 원수를 사랑하고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편 뺨도 대라는 명령,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을 금하는 것, 눈에 있는 들보와 티 그리고 나무와 그 열매에 관한 생생한 예화들이 두 군데 다 들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산상설교와 평지설교에서 많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평지설교는 산상설교보다 훨씬 짧다는 점이다. 마태의 산상설교는 5-7장까지 107구절로 구성되었는데, 누가의 평지설교는 6장 20-49절에서 단지 30구절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두 설교가 선포된 장소의 차이와 두 설교문의 차이(병행구절을 중심으로), 그리고 마태와 누가의 신학적 의도의 차이를 중심으로 비교 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1. 장소 차이(마5:1-2, 눅6:17)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설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마태복음5:1-2절에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반면 병행구절인 누가복음6:17-49절의 설교가 평지 설교로 불리워지는 이유는 설교가 선포되어진 장소가 마태와 달리 “평지”에서 주어졌기 때문이다.(17절) “산”과 “평지”라는 이러한 장소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장소의 차이를 “조화”시키든지 아니면 두 가지 다른 설교가 있었음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된다. 후자의 입장을 취하면 두 기사 사이에 있는 더 이상의 긴장관계도 제거된다. 이러한 입장은 예수께서 그의 3년 사역을 하시는 동안 본질적으로 똑같은 설교를 여러 장소에서 전파하셨을 것이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산과 평지를 조화시킬 수도 있다. 예수께서 갈릴리 산악지역에 계셨기 때문에, 예수께서 산꼭대기에서 무리들이 모여있는 고원으로 내려오셨는데(눅6:17) 이곳은 여전히 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Marshall, 「루가복음」 p 241-242
“산”은 구약 성경의 배경에서 계시의 장소로서 마태는 모세를 연상하고 있다. 모세가 시내 산 위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여기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산”이란 마태에게 있어서 탁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Ibid. p40.
반면, 누가복음의 설교장소인 “평지”에 대하여는 누가는 마태와 다른 의미를 두고 있다. 예수가 선택한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오는 모습을 시내 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에게 오는 모세가 연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가 상징적인 의미로 “평지”를 강조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쉽게 많이 모일 수 있는 곳, 그리고 병든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곳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Marshall, 「루가복음」, p316
결과적으로 마태는 산이라는 장소가 상징하고 있는 계시의 장소로서 예수가 선포하는 산상 설교에 같은 의미를 두고 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였듯이 마태는 모세보다 더 큰이가 산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또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누가는 평지라는 장소를 통하여 누가가 가지고 있는 삶의 자리를 반영함으로써, 가난하고, 힘없고, 병이 들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도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누가의 신학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장소로 볼 수가 있다.
2. 병행구절 비교
마태의 기록과 누가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네 개의 축복선언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3,4,6,11-12, 병행구절 눅6:20-23)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이들을 Q전승으로 돌리고 있다. 마태와 누가간에 유사점과 차이점은 이 전승 배후에 아람어 전승 Q가 있음을 보여주며 거기에서 두 저자는 나름대로의 신학적 의도와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는 누가전승이 마태보다 Q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태는 3인칭으로 진리를 일반적으로 서술했지만 누가의 축복선언은 복수2인칭으로 되어있어 예수께서 무리를 상대했던 상황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리고 누가의 축복선언이 마태보다 훨씬 짧다. 이는 짧은 것이 원형에 더 가깝다는 것을 반영한다. 누가의 3축복, 가난한 자, 우는 자, 굶주린 자들에게 주어지는 종말론적인 축복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그 당시의 역사적 예수의 상황을 더 잘 반영한다. - Ibid, p92
산상설교에 나오는 축복선언을 평지설교에 나오는 축복선언(눅6:20-26)과 비교해 볼 때,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굶주린 자,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는 자의 축복을 선언하고, 축복 선언 다음에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두 말씀은 모두 μακάριοι οί πτωχοί, ότι...έοτιν ή βαοιλεία, μακαριοι οί πεινϖντεꐠ μακαροιο έοτε όταν ...όμας όνειδιοωοιν πονηρόν χαιρετε ό μιοθός ύμων πολύς έν...Υαρ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 다 χορταζω동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유사어 ἒνεκεν(마), ἒνεκα(눅), τοίς ούρανοίς(마), τϖ ούρανφ(눅)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박수암, 「산상수훈」, p91
그러나 이 두 사이엔 차이점이 많다. 먼저 문자적으로 볼 때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예컨대 누가복음엔 οί πτωχοί로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엔 οί πτωχοί에 τώ πνεύματι로 되어 있다. 누가복음엔 οί πεινώντες로 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엔 οί πεινώντες καί διψώντες τήν δικαιοσύνην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엔 πεινώντες으로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엔 κλαίοντες로 되어 있다. 마태는 άϒαλλίαζω를 사용하는데 대해 누가는 σκιρτάξω를 사용한다.
누가는 마태복음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표현으로 마태복음의 첫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두 번째와 아홉 번째 “복”을 차례로 기술하고 있는데, 가장 큰 차이는 주어가 2인칭 복수(마태복음에서는 3인칭 복수)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가(6:20)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요.”(2인칭 복수)라고 되어 있는데 비해서, 마태(5:3)는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3인칭 복수)라고 되어 있다.
마태는 구약의 패턴을 따르고자 했고, 누가는 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패턴을 따르고자 했다. 곧 누가는 그 자리에 있는 청중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더구나 누가복음의 첫 번째와 두 번째(마태복음의 첫 번째와 네 번째) “복”에서는 마태복음의 “심령이”라는 표현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이라는 표현이 누락되어 있을 뿐더러, “천국”대신에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가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지극히 지상적이고, 마태는 영적이다. 누가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이 있었고, 마태는 영안에서의 가난한 자 곧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형편과 상황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주린자’로 되어 있는데 반해서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나온다. 누가복음에서는 ‘우는 자’로 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애통하는 자’로 되어 있다. 누가복음의 세 번째 “복”은 어휘보다는 내용 면에서 마태복음의 두 번째 “복”과 비슷하며, 네 번째 복은 마태복음의 아홉 번째 복과 어휘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법에 있어 이와 유사한 차이들이 실제 모든 절마다 발견된다. 이러한 것들은 저자 자신들에게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대부분의 경우에 어법의 차이는 번역 상의 문제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한 개의 동일한 아람어 전승의 본문이 두 가지 방법의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다. 예를 들어, 팔복의 결론 부분인 마5장12절과 평행구절 누가복음 6장 23절을 살펴보면, 마태는 “기뻐하고(현재 명령) 즐거워하라.”고 했는데 누가는 “기뻐하고(부정 과거 명령) 뛰놀라.”고 했으며, 마태가 “하늘들(복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했으며, 누가는 “하늘(단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했으며, 마태가 “사람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했는데, 누가는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차이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두 가지 헬라어로 번역된 아람어 전승에 기인한다. - Ibid, p38
이어서 누가는 네 가지 “복”에 상응하는 네 가지 “화”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다.(눅6:24-26) 4복과 4화가 잘 대칭 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누가복음에서와 달리 화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4복이 첨가되어 있다.
마태의 주기도문은 누가의 주기도문보다 길다. 마태의 것은 57단어, 6청원인데 비해, 누가의 것은 37단어 5청원으로 되어 있다. 마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되어 있는데 비해 누가는 다만 “아버지여”로 되어 있다. 마태는 네번째 청원에 있어 δον와 σήμερον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δί δον와 τό καθ ήμέρον을 사용하고 있다. 마태는 죄를 표기함에 있어 “호바”(אꔧןח,부채, 빚)를 직역한 명사 όφειλήμα를 사용하는 데 비해 누가는 죄를 의미하는 일반 용어인 άμαρτία를 사용한다. 마태에는 τοΐς όφειλέταις로 되어 있는데 비해, 누가에는 παντί όφείλοντι로 되어 있다. “용서하여 주옵시고”에 있어 마태는 άφήκαμεν이란 단순과거형을 사용하는데 비해, 누가는 άφίομεν이란 현재형을 사용한다. 그리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란 기도는 마태에만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태의 산상설교와 누가의 평지 설교의 설교문에서 많은 차이가 있게 된 것은 저자들이 사용하는 자료들을 자신들의 공동체의 상황에서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삶의 자리의 특성에 맞게 반영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공통적인 전승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할 만큼 충분한 차이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로버트 귈리히, 「산상설교1」, 솔로몬(1994)
이렇게 두 복음서가 서로 차이를 보이는 까닭을 설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두 복음서 저자는 치밀한 의도로 각자의 기사를 문학적으로 구성했으나 같은 자료를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랬다고 가정할 경우, 마태는 네 가지 “화”, 그리고 누가는 네 가지 “복”에 관한 결코 누락시킬 수 없는 자료를 누락시킨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두 복음서 저자는 내용이 중복되기는 하되 서로 독립된 구전전승을 사용했을 것이다. 두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이 같은 자료에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암기하고 있었음직한 내용과 양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 도날드 헤그너,「마태복음 (상)」, 솔로몬(1990)
3. 신학적 의도의 차이
누가의 평지설교가 보다 더 원문에 가까운 것이라면 마태의 산상설교는 보다 마태의 신학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관심은 누가 본문에 없는 축복을 첨가했다는 점과 제 1복에 “가난한 자”가 아닌 “마음에 있어서 가난한 자”라고 하고 있으며, 단순히 “주린 자”들이 아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라고 한 구절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의 주된 관심이 공동체의 교육 즉 윤리적 교육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의 메시야적 선포를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미덕에 대한 기술 즉 그리스도의 교리문답 또는 권면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박수암, 「산상수훈」, p 35
또 산상설교는 사회적인 분위기 대신 내면적이고 영적인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산상설교의 기록들은 언어의 표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보다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의 평지설교는 이미 믿기 시작한 그리고 예수를 따르기로 시작한 “제자들에게”에게 주는 설교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의 생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누가는 가난한 자 즉 소외된 자들과 더 나아가서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해 주어지고 있는 누가의 축복 선언이나 부요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저주 선언을 함으로 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존슨(L.T.Kohnson)은 누가의 관심이 부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예언자적 비판을,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려는데 있다고 결론 짓는다. 누가는 평지 설교에서 공동체 내에 있는 사람들이 만나고 있는 현실적으로 고난에 처하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처하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제자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강조하며, 그리고 진정으로 돌아보아야 할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현재의 만족을 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저주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Ⅲ. 결론
이상에서와 같이 마태의 산상설교와 누가의 평지설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 연구해 보았다. 마태의 산상설교와 누가의 평지설교의 저자들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자신들의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 적용하기 위하여 확대하고, 축소하며, 또는 삭제를 통하여 변형을 꾀하였고 해석을 하기도 한다. 골격인 구조는 비슷한 형태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양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산상설교는 보다 영적이며 내면적인 면을 치중한 반면, 평지설교는 외부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더우기 마태는 축복선언문을 더욱 확대시켰고, 누가는 축복선언에 저주선언을 첨가했다. 이런 차이점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진다. 동일한 원문을 가지고 마태가 축복선언을 확대시키고, 누가는 저주 선언을 포함한 의도가 무엇인가? 또한 마태와 누가는 각 본문을 통해서 그들의 공동체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두 공동체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 당대에 주어졌던 현실 속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주님의 말씀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두 저자의 독특한 특징과 개인적인 신학이 반영되었다. 마태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을 위한 색채가 짙었고, 누가는 이방인으로서 이방인들을 위한 보다 폭넓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 참고 문헌
․로버트 길리히, 「산상설교1」, 솔로몬(1990)
․박수암, 「산상수훈」, 대한기독교서회(1990)
․도날드 헤그너, 「마태복음(상)」, 솔로몬(1999)
․존 스토트, 「예수님의 산상설교」, 생명의 말씀사(1983)
․하워드 마샬, 「루가복음」,한국신학연구소(1989)
․고민재, 「산상설교와 평지설교의 비교연구」, 협성신학대학원
․김진규, 「산상설교와 평지설교의 신학적 비교」, 침례신학대학원
․유재인, 「마태의 산상설교와 누가의 평지설교와의 비교연구」, 감리교신 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