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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복선언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
지금도 살아서 복 주시는 대제사장
강복선언(Benediction)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
(본문 : 레 9:22-23; 눅 24:50-51 / 참조본문: 마 28:18-20; 고후 13:13)
손재익 목사, 서울 강서교회
<서론>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니신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이런 장난을 쳐 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 예배 시간 내내 지루해서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그런데 드디어 지루한 설교가 마치고 축도 시간입니다. “이야 이제 드디어 끝났구나.” 그래서 실눈을 살짝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을 쳐다보니 목사님께서 두 손을 들고 축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번 따라해 봅니다. 자기도 목사님처럼 두 손을 올립니다. 그리고 키득 키득 웃습니다. - 아마 이런 경험이 다들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이렇게 장난치지만 좀 나이가 들면서 신앙에 대해 진지한 호기심을 가지는 시점에 이르면 그런 장난을 넘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1) 왜 축도는 두 손을 들고 하지? 손에서 레이저가 나오나? 손에서 복이 쏟아지나? 아무도 안 보고 다 눈감고 있는데 그냥 손 내리고 하면 안 될까? (2) 왜 축도는 예배의 제일 마지막에 하지? (3) 축도는 뭣 하려 하지? 어떤 성경적 증거가 있을까? (4) 축도는 꼭 목사님이 해야 하나?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등등 수많은 질문들이 생깁니다.
혹자는 아직까지도 아예 이런 관심이 없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의례(依例)히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1시간 남짓 드리는 예배의 순서 순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찬송을 부르는지, 왜 기도를 하는지, 왜 설교는 긴 시간 동안 계속되어야 하는지, 왜 축도는 예배의 마지막에 있는지.
그래서일까요? 어떤 사람은 예배에 항상 늦습니다. 장로님이 대표기도 할 때 즈음 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은 아예 설교만 끝나면 집에 갑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 후 찬송 부르고 나가버립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 내내 없다가 축도 때만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이라도 받아야 돼!”
혹 우리 중에는 이런 분들은 없는지요? 예배는 그 시작을 알리는 예배에의 부름에서부터, 그 끝을 알리는 축도까지가 하나의 예배입니다. 중간까지만 드리거나 중간부터 드릴 수가 없습니다. 드렸거나 안 드렸거나 둘 중 하나이지, ‘나는 예배를 절반 드렸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예배의 마지막을 알리는 축도, 이것은 단순한 순서가 아닙니다.
25년 전, 두 손을 들고 키득키득 장난을 치던 한 소년이 목사가 되겠다고 한 지 25년이 흘러 이제 설교자로, 그리고 축도자로 섰습니다. 저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축도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안수를 받고 며칠동안 손을 들고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모양이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난생 처음 설교와 축도를 겸하여 하게 되는 이 날에 앞서 말씀드렸던 여러 가지 질문들의 답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증거하려고 합니다. 1) 왜 예배 시간에 축도라는 순서가 있는지, 2) 축도는 왜 예배의 맨 마지막 시간에 하는지, 3) 축도는 왜 목사가 하는지, 4) 목사는 왜 축도의 시간에 두 손을 크게 들고 서 있는지.
<본론>
Ⅰ. 구약의 제사와 축복
1. 제사장의 축복
먼저, 우리는 오늘날 신약 예배의 근간이 되는 구약의 제사제도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레위기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는데요 복잡합니다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제사의 직무를 맡은 제사장인 아론이 성막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이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막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제사를 드립니다. 화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지냅니다. 동물의 피를 내어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일을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사죄해 주십니다. 이렇게 모든 제사가 다 마친 뒤에 아론은 성막을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오늘의 구약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9장 22-23절 “(22)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23)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린 아론과 모세가 제사가 다 끝이 났다는 표시로 손을 듭니다. 그런데 단순히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합니다.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들을 향해 손을 들고 축복을 하니, 이 축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 백성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아론과 모세는 어떤 내용으로 백성들을 축복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민수기 6장 24-26절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들고 성막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제사를 마치고 나와서 손을 들고 복을 선포하기를 “너희들의 모든 죄가 사함을 얻었다. 이제 하나님이 너희에게 복주신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복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때 비록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손을 들고 복을 선언하였지만, 실제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민6:27).
이처럼 하나님은 성막 혹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아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복을 베푸셨습니다. 이 백성들이 삶의 현장으로 나아갈 때 복을 주사 그들을 지켜주시며, 은혜 베푸시고, 평강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이 축복의 약속을 받고서 기쁨과 감사로 넘쳐 삶의 터전으로 나간 것입니다.
2. 제사장의 축복의 예
구약에서 이렇게 한 예를 우리는 한 군데 더 찾아봅시다. 역대상 16장 1-2절(삼하 6:17-18). “(1)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에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니라 (2)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비록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던 다윗 왕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장막 안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사를 모두 마친 뒤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바로 레위기 9장 22-23절 말씀에 근거하여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도 민수기 6장의 말씀을 통해 백성들을 축복했을 것입니다. 손을 들고 하나님의 복을 선언합니다.
3. 구약에서 본 축도의 의의
이렇게 성막에서 제사를 마치고 대제사장이 복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의 규례였습니다. 그 이후에 아론의 반차에 속한 모든 대제사장들은 제사를 마치고 나와서 반드시 이 규례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복을 선언하였으니, 이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말씀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도록 주신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라는 복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축도를 대제사장들로부터 성막과 성전에서 받았습니다. 이 축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제나 감명 깊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의 생활을 벗어나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할 때 크고 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그들은 이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평안을 얻었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구나.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시는 구나”라고 하면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에 있어서 대제사장이 성막에서의 모든 제사를 마친 뒤에 나와서 손을 들어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모든 제사가 끝이 났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의 죄를 해결해 주셨도다’ 하는 대제사장의 선언입니다. (2) ‘죄사함을 얻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앞으로 계속해서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선포입니다.
Ⅱ. 신약의 대제사장이 드린 제사와 축복
1.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
이제 오늘의 신약 본문인 누가복음을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친히 달리셨습니다. 이 사건을 구약의 제사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친히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어린 양을 들고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소에 들어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분명히 예수님은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어린 양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성막에 있던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 그것들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구약의 제사를 성취하신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구약 제사의 모든 원형을 성취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은 성소 안에서 어린 양을 죽인 대제사장이 행한 사건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친히 들고 들어가신 사건입니다. 십자가, 그곳이 바로 성소, 성막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신약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제사를 친히 드리셨습니다.
2. 축복하신 제사장 예수님
앞서 생각해 본 구약의 제사와 비교할 때에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제사가 완료되었다고 하는 상징인 손을 들어 축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참 제사려고 한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마치신 뒤에 손을 들어 축복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 버리셔서 손을 드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축복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3일 뒤에 다시 살아나십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근처 베다니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이 손을 드십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세와 아론보다도 더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님이 손을 드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축복하십니다. 그렇게 축복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본문을 봅시다. 눅24:50-51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50)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51)”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모두 마치고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무덤에 하루 동안 계신 뒤에 나와서 축복하심으로, 무덤을 성막, 즉 거룩한 장소로 삼아 주셨고, 죽음을 승리의 처소로 바꾸어 주신 후에 축복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무덤에서의 하루-부활의 승리, 이 모든 것을 이루신 뒤에 승천을 앞두고 백성들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어떤 내용으로 제자들에게 축복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마태복음 28장 20절,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입니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복을 주신 뒤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민수기 6장에서의 약속처럼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하나님이시니, 이제 성부의 임재를 대신하여 성자의 임재를 약속하십니다.
3. 예수님 축복의 의의
아론과 그 아들들이 백성에게 손을 들어 축복할 때에는 언제나 그들 손에 제물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피 묻은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습니다. 피 없이는 축복이 없었습니다. 이 피는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장차 오실 대제사장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제물의 피는 히브리서 10장 1절의 말씀대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였습니다(10:14). 만민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만민을 거룩하게 할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으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대제사장으로서 친히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제사를 완성하신 예수님.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이 이제 제사를 마치시고 죽음을 거룩한 곳, 즉 성소 삼아 주신 뒤에 그의 제자들을 향해 손을 드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십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축복을 하였습니다. 축복하는 일이 제사장들에게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복을 선포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손을 들어 축복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 사건은 반쪽짜리 제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쪽짜리 제사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한 제사, 참된 제사를 우리를 대신하여 드리셨습니다.
친히 어린 양의 제물이 되셨고,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제사를 드리셨으며, 모든 제사를 마친 뒤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렇게 축복을 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사도들에게 모든 사명을 맡기시고 올라가십니다.
Ⅲ. 신약서신에 계속되는 축복
사명을 받은 사도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그 축복을 받았던 사도들은 자신들이 쓰는 서신서의 제일 마지막에 항상 삼위 하나님의 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16:23-24,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갈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엡6:23-24, “(23)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빌4: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골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5: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3: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딤전6:21,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딤후4: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딛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몬1: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히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벧전5: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유1:24-25, “(24)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계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항상 복의 선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모든 편지의 말미에서 동일한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고 있을까요? 원래 처음에 사도들의 서신은 초대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에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 성도들이 모여서 이 편지를 읽으면서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 바로 그 복의 선포를 읽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 성전에 계시면서도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주고 계심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흩어져 있는 교회에 편지하는 가운데에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복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승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약교회 성도들을 향하여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인사로 최고의 축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손들고 복 주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니 너희가 비록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기죽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라’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배 시간의 제일 마지막에 목사가 손을 들고 하나님의 복을 선포합니다. 다른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처음 복의 선포를 들었던 사도들이 남긴 그 말씀으로 목사가 축도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의 선포,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목사가 지어내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모든 제사를 마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손을 들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Ⅳ. 예배마다 계속되는 축복
1. 4가지 질문에 대한 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처음 생각해 보았던 4가지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1) 왜 예배 시간에 축도라는 것이 있습니까? 어떤 성경적 증거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예배가 곧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죄를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왔지만 하나님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셨음을 축도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2) 왜 축도는 예배의 제일 마지막에 합니까? 성경을 뒤져보면 문자적으로 예배 시간에 축도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또한 축도를 예배의 마지막에 하라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꼭 마지막에 합니까?
우리가 성소에 들어갔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제사를 마쳤다는 표시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완전히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더 이상 씻어야 할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제사를 마치시고 부활하셨고,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완전한 죄 씻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으로 인해 그 삼위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였던 우리들이 말씀으로 위로받고 돌아갈 때에 우리는 그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축복을 약속받으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마지막을 축도로 장식하는 이유입니다.
(3) 왜 축도는 목사가 합니까?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복, 그 복을 사도적 직분을 맡은 자가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목사가 축도를 하지만 진짜 복을 주시는 선포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오, 그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목사에게도 복을 직접 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목사는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축도를 할 뿐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이 선언될 때, 여호와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그가 친히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 27절에는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4) 마지막으로, 왜 축도 시간에 목사는 손을 들고 합니까? 그것은 대제사장 아론과 모세가 했던 것에 따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축복하셨던 것에 따른 것입니다. 손에서 광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완성으로서 손을 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 신약의 제사장이 했던 그 축복이 이제 사도들의 기록된 말씀에 따라 목사를 통해 우리에게 선포되는 것입니다.
2. 지금도 살아서 복주시는 대제사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복주십니다. 목사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시니 곧 매주일 예배를 마치고 떠나는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때 마다 지금도 살아서 복주시는 대제사장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축도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목사는 손을 들 때마다 부활의 주님을 선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만약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축복하실 수 없었고, 목사는 더더욱 손을 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손을 들고 복을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설교의 내용은 부활을 다루지 않았어도 그 밑바탕에는 부활의 주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설교의 설교자였음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에게 설교하고 계십니다. 바로 목사의 입을 통해서.
3. 기도가 아닌 복의 선포
여기서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종종 축도를 기도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사실 축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축도라는 말은 축복기도라는 말의 줄임말인데, 축복(祝福)이라는 말은 ‘빌, 기원할’ 축(祝)자를 써서 “복을 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 우리를 축복해 주세요”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 복을 빌어 주옵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 바른 표현은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입니다. 축복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도’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이것보다는 더 바람직한 표현으로 ‘강복(降福)선언’(Benedic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축도는 복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강복선언의 시간에 목사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손을 들어 축복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위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 줍니다.
Ⅴ. 우리의 삶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복
1. 끊임없이 복주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의 복을 받고 돌아가는 우리들은 이제 삼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한 주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주간을 살다가 다시 매주간의 첫날에 모여서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노라고 온 교회가 노래하고 예배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깨닫고 돌아갑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구나’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던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다시 듣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약속만을 붙들고 한 주간을 살아갑니다. 그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였던 우리들을 하나님이 다시 부르십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더 그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한 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주 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손을 드는 목사,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를 통하여서 우리는 다시한번 더 다짐합니다. 그 축복은 목사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입니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목사가 손을 들지만, 그 목사의 손을 들게 하시는 이는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지켜 보호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에 우리는 빈손으로 왔습니다. 아니 우리의 죄를 들고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도 함께 들고 나왔습니다. 마치 성막 안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와 어린양의 피를 들고 들어 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우리는 죄 씻음을 얻고, 또한 하나님의 복을 들고 돌아갑니다. 우리는 갖고 온 것이 아무것도 없고 빈손으로 왔으며, 고작 죄만 들고 나아왔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맨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복으로 넉넉히 채워 돌려보내십니다.
2. 우리에게 주어지는 책임
마지막으로 한 가지, 왜 목사는 한 손이 아니라 두 손을 들까요? 우리가 읽은 두 개의 본문에는 손을 들었다고만 되어 있지, 두 손을 들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왜 두 손을 들까요? 그냥 한 손만 하면 어색하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두 손이 하나는 복, 하나는 저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두 손을 들면서 하나는 복이요, 하나는 저주임을 강조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기를 축도는 그냥 받기만 하면 무조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술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강복선언은 언약의 하나님이 하시는 언약적인 복입니다. 그렇기에 복을 받는 우리들에게 막중한 책임이 부여됩니다. 복을 받은 자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도리어 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목사의 두 손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을 받는 언약의 회중들은 믿음으로 이 약속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이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언약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이 복은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동적으로 이 복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에 참여한 자가 예배에 깊은 애정을 갖고 참여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에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사가 한 손을 들지 않고 두 손을 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축도는 마냥 반가운 것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두려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의 선포를 듣고 돌아가는 자, 우리에게 필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복에 대하여서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에 대해서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여호와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복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오히려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불신이 없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복을 기대하는 자가 실제로 복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으며 성령 안에서 항상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축도는 단순히 복 받아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도 듣지 않은 분이 나는 축도라도 꼭 받아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축도
이런 점에서 분명 축도는 그 순서상 예배가 모두 끝났다는 의미로서 예배의 맨 마지막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드리는 삶의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축도가 끝남과 동시에 이제 우리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당 밖을 나서는 순간 또 다른 예배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배당 밖에서 드리는 예배에 진정으로 삼위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이제 예배당에서 하늘의 복을 받은 우리는 그 복을 온 세상에 나누어주는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목사의 복의 선언을 들고 한 주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진정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축도 시간은 단순히 예배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이 선언되는 동안에 집에 갈 준비를 한다든지, 성경 자크를 잠근다든지,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든지, 외투를 입는다든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무례를 범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살아나신 대제사장의 강복선언입니다. 이제 부활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계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는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이러한 신약의 축복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되는 축복입니다. 신약의 축복은 더 풍성합니다. 더 진전되었습니다. 더 강력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제 막 목사가 된, 따끈따끈한 목사로부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두 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사의 두 손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갓 목사가 된 사람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살아계셔서 무덤도 가두어두지 못한,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신, 아니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베푸시는 삼위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처음으로 두 손을 드는 목사가 아니라 영원토록 당신의 두 손을 친히 들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삼위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은 영원토록 유효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지금도 거룩한 성소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의 모든 일을 마치고 떠나는 우리를 향해 두 손을 크게 펴시고 복을 내려 주십니다. 비록 목사는 손을 내리지만, 지금도 살아서 복 주시는 예수님은 영원히 그 손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땅 위에 있는 그의 교회, 그의 백성을 여전히 계속해서 축복하고 계십니다.
이 복을 받고 돌아가는 여러분~! 한 주간의 모든 삶에 성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속을 따라 힘차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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