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개혁교회를 누리는 삶(4)
# 이 글은 이천우 목사(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의 글입니다. 개혁교회를 이해하고 누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개혁 교회를 누리는 삶 /1-4강
이천우 목사(개혁주의 신앙공동체)
4강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자세
- 바울의 밀레도 고별사를 통해서 봄 -
교회의 영광이 진정으로 드러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떼거리로 모여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데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는 데서이며, 그렇게 선포된 말씀 앞에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데서 비로소 교회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지 않고, 선포된 말씀 앞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없고서야, 제아무리 큰 예배당을 짓고,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한들, 그것이 무슨 교회가 되겠습니까? 목사는 이런 일에 누구보다도 심각한 사람이고, 누구보다도 깨어 있는 사람이며, 그래서 누구보다도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인 것이요, 따라서 무엇보다도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생명을 바치듯이 하는 사람입니다.
겸손과 인내로서 섬긴 복음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때에 미둘레네, 기오, 사모 등을 거쳐서 밀레도에 이릅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꼭 들르고 싶었지만, 당시 해상의 여러 가지 교통 형편상 에베소를 들러서 가게 될 경우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밀레도로 왔고(14-16절). 대신 이곳에서 바울은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장로들을 오도록 했습니다(17절). 여기서 장로들이란, 오늘날 목사들과 장로들을 포함한 교회의 인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장로들이 오자, 바울은 이들과 반갑게 맞이한 후,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다시는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앞에서 바울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일까를 깊게 생각한 끝에, 사역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고양시켜주는 방식을 택함으로서, 사도로서 주의 일군들을 향한 사랑과 마지막 섬김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의 고별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엄청난 혼란에 빠진 이 시대의 교회가 바르게 서기 위하여 과연 목회자들의 사역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겸손과 인내로써 주를 섬겼다'고 말합니다(18-20절). 여기서 '겸손'이란 바울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간 것을 가리키고, 이를 위하여 세상 앞에서 꿋꿋이 서 나간 것은 '인내'입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서 찾아지며, 순종하기 위하여 어떠한 환난이라 할지라도 연단으로 알고 감당하는 데서 구원의 생명으로부터 맺어지는 인내가 있게 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보냈던 3년의 목회 기간은 실로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이었습니다. 유난히 가중된 핍박과 함께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연약의 극치에 달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심정에 대해 말하기를,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고후 1:8-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을 맞서 대적하지 아니하였고, 묵묵히 견디는 인내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는 신앙의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이 이러한 자신의 겸손과 인내의 모범적인 삶을 친히 목격했던 증인들인 까닭에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겸손'과 '눈물', 그리고 '시험을 참는 것' 등은 요즈음과 같이 혼란한 시대에 보다 더 개혁주의적인 교회를 섬기려 하는 사역자들이라 할 때에, 지녀야 할 필수적인 성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19절).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사람에게서 찾지 아니하였으니(살전 2:6,7), 곧 일체의 수난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믿음으로서 끝까지 주를 섬긴 사실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유대인의 간계를 당할 때에도 전혀 무력으로 대항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랑을 베풀었는데, 이는 실로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5:44)라고 하신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믿음이었습니다. 적어도 개혁 교회의 목사라 한다면 이런 정도의 실력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통 육신이 연약하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역자는, 항상 자신이 당하는 멸시와 수모에 큰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기에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수심을 일으키고, 변명을 위한 계책을 동원하며, 명예심을 회복할 권모술수를 발휘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재판장이신 주님께 대한 신뢰가 부족한 증거요, 아직도 자신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한 증거이겠습니다. 대적들로부터 극심한 모욕을 당할지라도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참으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바울이 일체의 시험을 '인내'로서 참아내었다고 한 바와 같이, 순결한 교회를 이루기를 염원하는 개혁 교회의 목사라 한다면 동일한 인내를 온전히 발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약 1:4).
회개와 믿음을 증거한 사역
다음으로, 회개와 믿음을 증거했다고 했습니다(20-21절). 바울이 복음 때문에 당하는 많은 어려움을 인내로 참아낸 것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해주고 싶었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공적이나 사적이나를 무론하고 기회를 살려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였던 사람입니다(딤후 4:2). 이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신앙하도록 하는 두 요소를 동반합니다. 중생한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외적인 상태를 가리켜 회심이라고 한다면, 이 회심의 요소는 회개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실상 '회개하라'는 말이 포함된 것이며, 또한 '회개하라'고 선포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말이 역시 포함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런 차원에서 자신의 사역이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을 전제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할 막중한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러한 죄의 대가를 지고 무서운 형벌과 고통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비로소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속죄를 바라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천번 만번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구원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법입니다(눅 23:39-43).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군들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포하여야 하고, 이 전제 하에 죄인을 구원해 주시려고 베푸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목회자들은 이 사실을 가볍게 여기고 있으며, 심하면 아예 복음의 본질로부터 이 사실을 제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이나 치유신앙 같은 괴이한 이론으로서 청중들에게 다가가고, 거기에 속아서 나오는 우매한 백성들과 어울려서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 놀음을 펼쳐나갑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을 걸고 분명히 단언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치유신앙이나 기복신앙을 복음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가령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예를 제시하면서 현세의 하나님의 축복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목사는,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이 뭔지도 모르면서 감히 목사의 직분을 맡은 어리석은 자요,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한번 안 읽어보았으면서, 이름이 좋은 줄은 알아서 '개혁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도용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복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명을 위해서는 목숨도 초개처럼
다음으로 바울은 앞으로의 계획을 말합니다(22-27절). 여기서 특별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고 한 말씀을 대할 때 숙연한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명의 존재 가치라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기여한다는 데서 찾았습니다. 바울은 사나 죽으나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고(롬 14:7-8),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했습니다(고전 10:31). 바울의 이러한 인생관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신 것과 일치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려 함에 있어서 설혹 자신의 앞길에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힘차게 돌진할 뿐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여기서 바울의 생명관 혹은 인생관이 잘 드러났습니다. 즉 그는 생명의 의미를 가치에서 찾습니다. 어떤 가치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해 나간다는 데서 인간의 가치가 찾아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하는 것들, 그것들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삶은, 동물의 생명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을 유혹하는 물질문명이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하는 까닭에 말세가 가까울수록 인간들의 가치관은 이에 미혹되어 더더욱 동물적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순전히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쾌락주의가 인생들의 활동과 문화의 흐름을 주도해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사용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가치 활동을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열매로서 맺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도구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삶에로 성도들을 독려해야 할 목사의 경우는 얼마나 더 예민하고 능력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바울은 이런 차원에서 에베소 교회의 인도자들인 장로들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뜨거운 희생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으로 연속된 삶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을 생각할 때에 그가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고 평가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성경을 깨닫지 못한 것이요, 해서 바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복음을 세상에 심어 나갈 때에, 맹렬하게 핍박해 오는 고난의 깊은 늪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일편단심 믿음의 인내로써 모든 수고를 감내해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고, 옥에 갇히기도 누구보다 더 많이 하였고, 매도 수 없이 맞아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또한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그리고 여러 번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협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평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의 교회들을 위한 염려로 항상 눌려 있었습니다(고후 11:23-29). 그는 받은 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을 가능케 하신 것은 그의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그의 생애를 인도해 나가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속에 있는 무엇이 과연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안되도록 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작용하였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분명히 앞에서 열거한 모든 것들을 바울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서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가 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심정 깊은 곳에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아니하면 안되도록 하는 뜨거운 생명력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술이 아닌 가슴에 새긴 복음
그러면 바울의 마음에 심겨진 이 복음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복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조금도 다르지 아니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바울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셨으며, 당시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우리에게 나타나신 바 된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히 13:8). 그때 계시면서 바울과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역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동일한 분이십니다. 이렇게 바울이 받은 복음과 오늘날 우리가 받는 복음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바울의 사역의 지극히 작은 부분조차 흉내도 내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를 본받아 나가기는커녕, 지극히 작은 일조차도 힘에 겨워 겨우 감당하고, 그런 다음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해지기 일쑤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바울이 깨달은 만큼으로 혹은 그러한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보다 정확하게 회복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정말로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위해서 이 땅으로 내려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시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지금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바르고 충분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현재의 삶을 순식간에 끝장내 버릴 심판의 시간이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귀로만 듣는 복음이어서는 안됩니다. 욥의 고백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복음이어야 합니다(욥 42:5,6). 머리로만 이해되던 복음, 감정적으로만 들뜨던 복음,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성급하게 발을 앞세웠던 복음, 이 복음이 성경이 가르치는 만큼 충분하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가장 고상함으로 인해, 스포츠나 동창회 그리고 야유회와 연극과 여행 등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가족에 대한 사랑까지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 바울의 말이 내포하고 있는 깊은 무게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빌 3:8).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한 고백이 제대로 깨달아져서 마음 깊은 곳에 뿌리 박혀야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한 바울의 환희에 찬 선포가 가슴에 와 닿아야 합니다(고후 5:17). 하지만 바울의 이 모든 표현들은 단순히 그가 받은 바를 '증거'한 데서 나온 자연스러운 고백이었을 뿐입니다.
삼가는 자세를 취하라
지금까지 자신이 사역해 나온 자세를 간략하게 회상한 바울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장로들에게 교회를 섬기는 도리에 대해 간곡하게 부탁하기 시작합니다(28-35절).
첫째, 바울은 장로들에게 '삼가라'고 말하는데(28절), 이는 '겸손하고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항상 자신부터 먼저 잘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로들이 이렇게 자신을 삼가야 할 이유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자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딤전 3:5). 남을 인도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배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딤전 4:13-16). 특별히 교회의 인도자들은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는 아주 중요한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은 만큼, 자기를 위해서나 또는 양 떼를 위해서라도 항상 삼가야 합니다. 목회자들의 직분은 성령께서 주신 것이고, 성령께서 더불어 역사하시는 데서 감당하게 되는 아주 고귀하고 신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들은 한시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어 있어야 하고 범사에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장로들은 오늘날 교회의 장로들과 원리상으로는 같으나, 형식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의 장로들은 아직 목사직이 형성되기 직전의 교역자들로서 설교까지도 담당하고 있던 바 감독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로와 감독은 동일한 직분이요 직무입니다. 이는 지금 바울이 장로들을 향하여 말하지만(17절), 특별히 장로들이 교회를 돌보는 직무에 위임되었다는 의미에서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납니다(28절). 당시에는 장로들이라 불리운 감독들이, 오늘날 목사의 직무와 장로의 직무를 겸하여 수행하고 있었습니다(딤 1:5-7).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오늘날의 교회의 직분자에게 해당하는,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부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르치고 돌보는 자들은, '부득이함'으로 한다거나 또는 '더러운 이'를 위해서 해서는 안되며, 또한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해서도 안됩니다. 도리어 자원함과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여야 하며, 항상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벧전 5:1-3). 교역자들은 성도들 앞에서 명령하고 군림하는 권세를 소유자들인 것이 아니라, 단지 말씀의 수종자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원리와는 달리, 오늘날 목사직이 하나의 권세직으로 변질되거나 또한 장로직이 돈 많은 자만의 점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현상은 심히 통탄할 노릇입니다. 더욱이 교회를 기업처럼 생각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하는 세습이 판을 치고 있으니, 정말 통곡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을 섬기는 목사, 마치 유모가 아기를 돌보듯이 그런 정성과 사랑으로서 섬기는 그런 목사와 장로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스스로 근검과 절약에 모범을 보이면서, 하나님께 바친 헌금이니, 한푼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하도록 선도해 나가는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목사가 교회를 섬긴다면, 결코 생활상으로도 사치와 방탕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며, 교회 차원에서도 재산을 형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재산을 모으게 되니, 세상 사람이 재물을 자식에게 물려주듯이, 목사가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미혹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직분에 대한 투철한 각성
목사의 임무 혹은 권리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서 사신 교회'(28절)를 보양하는 일입니다. '샀다'는 것은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고 소유권을 삼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가로 지불된 것은 '피', 더욱이 '자기 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면서까지 교회를 세우셨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교회를 돌보시고 양육하시는데, 이때 당신께서 세우신 종들을 통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이러한 감독 혹은 장로와 목사의 제도를 부인하면서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이념인 '만인제사장'의 원리를 내세웁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을 알지 못하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만인제사장의 원리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직분자의 제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성도 사이에 계급의 차이를 두신 것은 분명 아니지만, 성령으로서 교회 안에 직분자를 세우신 것이 분명하며, 이들의 섬김을 통하여 당신께서 세우신 교회를 보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 중에서 합당한 사람이 은사에 근거하여 직분에 세워지는 것을 가리키며, 사실 성령의 은사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직분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간혹 목사나 장로의 직분이 마치 세상 벼슬과도 같은 것처럼 생각되어,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 이런 저런 방법을 써서 직분을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직분자로 있으면서 교회를 치게 되면, 성도들이란 그들의 출세와 영화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 필연적이겠기에,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이내 피폐해지게 됩니다. 이런 목사들이 이런 저런 노력과 열심으로서 교회를 키워나가게 되면, 외적으로 볼 때에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적으로는 교회의 생명이 고사되기 마련이어서 마침내 종교 기업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의 피를 제공하기까지 하시면서 값 주고 사신 영혼들이 모여서 길려져야 하는 '하나님의 초장'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도의 생명은, 한 생명 한 생명이 예수님짜리로서의 가치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사역자들의 사심이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양 떼들이 소홀히 여김을 받아 하나라도 잃어버린 바가 되게 되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패역한 죄가 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직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주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고 명심하여, 맡겨진 거룩한 직무에 성실하고 순결하게 충성해야 합니다. 결코 게으르고 나태해서는 안되며, 더군다나 하나님의 양 떼들을 거칠게 돌보고 무책임하게 대하는 태도는 아주 금해야 할 일입니다.
특별히 목회자는 주의 이름을 걸고 나서는 일이 많은 까닭에 자칫잘못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에도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직무의 성격상 말을 많이 하여야 하는 만큼, 실수가 없고, 허점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여야 합니다(약 3:1). 목사는 무엇보다도 주의 말씀에 정확하고 충만함으로서 신령해야 합니다. 신령한 판단력으로서, 눈에 잘 드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성도들의 생활의 내면을 살필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차원에서 성도들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에 최선을 다하여 봉사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그것을 감당할 만한 은사를 주사 목사의 직분에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성령이 저들 가운데서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라고 말한 의미입니다. 진정으로 교회 일군들의 직분은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마땅히 직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어떤 뛰어난 특출함이 있어서 그같은 직무를 감당하게 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범사에 겸손한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골 1:29).
쉴새 없이 일어나는 삯군 목사들 경고
다음으로 바울은 이제 자신이 떠난 뒤에 교회를 파괴하는 무리들이 나타날 것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29-31절).
'흉악한 이리'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거짓 목사' 혹은 '삯군 목사'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속이기 위해서 특별한 위장, 곧 '양의 옷'을 입고 침투할 것입니다(마 7:15-20). 거짓 목자의 특징은 여러 가지이지만, 하나님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따르게 하는 데서도 그것이 잘 나타납니다. 삯군 목자는 교묘한 속임수로서 주님의 양 떼를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다가, 자기보다도 더 능력이 있는 삯군이 나타나면 이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요 10:12). 그런데 지금 바울은 이러한 거짓 스승들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다기 보다는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너희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좀더 넓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다른 아닌 열 두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과도 같이, 거짓 목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 스스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본다면, 이것은 교회가 조금씩 변질되다가 마침내 사이비 종교 단체로 전락하는 것을 통해서 되어집니다. 교회가 말씀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들어 나가지 아니하고, 세상의 이론들을 하나씩 둘씩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는 사이비 종교 단체로 전락하며 심하면 아예 이단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됨에 있어서 다른 누구에 앞서 목사가 끼치는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목사 자신이 변질되어 사이비 종교 단체의 주인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단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어 놓지만, 삯군은 반대로 자신을 교묘하게 감춘다는 데서 더욱 교활하고 가증스럽다 하겠습니다. 즉 겉으로는 개혁 교회라고 정통성을 주장하지만 속을 살펴보면 영락없는 사이비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거짓 목자들의 영향으로부터 주님의 양 떼를 보호할 뿐더러, 더불어 자기 자신부터도 그렇게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바울이 몸소 본을 보인 모범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절). 바울은 자신이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눈물로' 라는 말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섬길 때, 성도들이 죄 가운데 넘어가고 안주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했던가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를 섬기는 동안 성도들 개개인을 일일이 상대하면서 간절한 심정으로 울다시피 하는 신실함으로서 돌보고 훈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보여준 이러한 모범에 입각하여,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역시 교회 안에 행여라도 어그러진 말을 한다거나 또는 그들에게 넘어가는 자들이 있는가를 잘 살피고 돌이키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실로 사역자라 한다면, 주님의 양 떼들을 돌봄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것에 대한 평가를 계산할 자인 것 같이 여기는 자세로서 하여야 하며(히 13:17), 무엇보다도 양 떼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삼상 13:23). 그리스도의 강림하시는 날에 성도들을 잘 양육한 교역자가 있고, 잘 양육받은 성도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자랑할 것이 있는 교회는 참으로 복됩니다(고후 1:14).
주님과 그의 말씀의 동일성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로서 사신 온 양 떼를 돌보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를 소원하며 살아온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이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본받아 줄 것을 소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에 수고하는 사역자들을 은혜로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는 소원을 피력합니다(32절). 그가 이러한 소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 속에서 늘 동행해 주셨던 하나님의 확실한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인은 자기 자식을 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택한 백성을 잊지 아니하십니다(시 49:15).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서 '주'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이고, 이것은 다시 '그 은혜의 말씀'과 동격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당신의 말씀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고 하는 원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서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말씀 안에 믿음으로 거하는 때에 일체의 예비된 신령한 하늘의 복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계시의 총체인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계신하신 바대로, 그 말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성령께서 배후에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 말씀이 허공에 흩어지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받는 자들의 심령에서 효력을 내게끔 하시는 것입니다(사 34:10). 사역자들은 이런 원리를 잘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야 하고 범사에 믿음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 순종에 의해서 그의 신앙은 든든히 자라가며 맡겨진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며(딤후 2:9), 죄인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가는가 하면(요 17:17), 또한 부딪쳐 넘어질 자를 골라내기도 합니다(벧전 2:8).
사람은 잠시 살다가 세상을 떠나가지만, 주님께서는 언제까지나 당신의 교회에 계시면서 당신의 양 떼를 돌보고 지켜주십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양 떼들이 마침내 영원한 기업에 들어가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때에, 양 떼들은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말씀으로서 당신의 양 떼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사역자들을 통하여 선포되고, 성령께서 이것을 쓰셔서 성도들의 생활 속에서 삶의 원리가 되게 하시며,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기업을 소유하는 데 이르기까지 든든하게 자라가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주'와 '은혜의 말씀'을 동일한 차원에 놓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일군이라는 데 대한 철저한 자각
오늘날 여기 바울처럼 '은혜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목사의 어떤 자세를 통하여 구현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목사 자신부터가 정말로 성경 말씀이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믿는 실질의 믿음 위에 서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목사는 한 주간 동안 내내 말씀 준비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한 주간 내내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돌아오는 주일의 공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사는 자다운 자세를 신실하게 유지해 나가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목사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형편에 가장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하는 일에 한 주간 주어진 시간 동안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도 교회의 헌금으로서 목사의 생계를 뒷받침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와 같은 은사와 책무를 맡은 자답게 거기에 합당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일에 분주한다거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와 상관없는 일에 시간을 쓰면 안됩니다. 만일 개인적으로 시간을 써야 할 것 같으면 반드시 합법적으로 교회의 허락을 얻어야 합니다. 목사가 마치 개인 회사 사장처럼 행세하여 자기 멋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하면 안 되는 것이고, 스스로 교회에 매여서 범사에 교회의 허락을 받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고, 신학교에 가서 가르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 목사는 자신이 실제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소속한 교회와 관련하여 그렇게 목사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실제가 없이, 무슨 목사의 직무가 있고, 무슨 목사의 은사가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목사는 다른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한다거나 혹은 기타 이런 저런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교회의 동의 하에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가 교회에서 만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면, 이것처럼 삯군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헌금 중 일부로서 목사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공급하시는 원리가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목사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를 위해서 전심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그 일에 지장이 없는 조건 하에서 다른 교회와의 봉사에도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반드시 교회와의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해야 합니다. 오늘날 자신이 속한 교회를 섬기는 일은 대충 대충하면서, 말씀을 전한다는 명분 아래 국내외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실상 놀고먹기를 좋아하는 삯군 목회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기 교회에서 사례비는 사례비대로 받고, 여비도 교회돈으로 쓰고, 다른 교회에서 또 사례비를 받고 교통비 및 기타 선물들을 받는데 맛 들린 삯군 노릇을 하는 것은 불쌍한 영혼입니다(벧전 5:1-4).
한편의 설교 준비에 목숨을 바치듯이
목사는 한 주간 동안 내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말씀을 준비하고 성도들의 영혼 상태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생명을 걸다시피 말씀 준비와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킨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가에 대해서 부단히 살피고 격려하고 권면하며 방향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의 전체적인 부분이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킨 모습이 없는데도,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나 청소 등의 일을 잘 해주면 그것으로 족한 줄로 생각하는 정도이고서야 어찌 주님의 백성을 양육하는 목사라고 하겠습니까?
사실 성도가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고, 찬송을 열심히 부르고 하는 등등의 외적인 종교 행위에 열심을 내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그의 영성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의 인생의 방향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돌이켜 나가고 있는 실증이 있느냐의 여부입니다. 목사는 이 일에 마치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서 계산할 자인 것 같은 심정으로서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히 13:17). 적어도 이런 정도의 각오와 각성과 결단력이 있는 데서 자기에게 진정으로 목사의 직분을 받은 은사가 있음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를 양육한다 할 때에도 심방 같은 것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주의 말씀에 의탁하는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사람이 행하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영적 생명의 진전에는 호리만큼도 기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성령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바라야 하는데,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통상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고로 목사는 말씀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알렉산더 맥크라렌이라는 목사는 주일 설교 한편을 준비하기 위하여 평균 60시간을 바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야말로 주일 1시간의 말씀 선포를 위하여 하루 10시간씩 6일 동안 꼬박 설교 준비를 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었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원동력과 그 지속적 능력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선포되는 - 설교되는 -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이었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된 것 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과 선포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다름 아닌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의해 종교 개혁은 일어났고, 말씀의 선포에 의해 종교 개혁은 성취되어갔습니다. 개혁자들은 이 말씀에 사로잡혀 그들의 소명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실로 말씀의 선포가 없는 바른 교회, 열정과 확신 가운데 말씀이 설교되어지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혁 교회 목사들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었고,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일이 가능했던 핵심은, 개혁 교회 목사들이 인식한 설교에 대한 확실한 이해였습니다. 목사는 누구보다고 말씀을 믿고 확신해야 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한편의 설교 준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이 진정한 목사입니다. 목사는 교회의 부흥에 미혹되지 않고, 성도의 인격적인 성장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성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자라가게 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마치 여인이 자식을 얻는 기쁨을 바라보는 까닭에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 않듯이, 그렇게 성도를 인격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목사입니다(갈 4:19). 그렇지 않고 수많은 성도들을 거느린 데서 즐거움을 찾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그는 목사가 아닙니다. 참으로 성도를 자기 밥숟갈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목사가 진정한 목사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진정으로 드러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떼거리로 모여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데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는 데서이며, 그렇게 선포된 말씀 앞에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데서 비로소 교회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한결 같이 '말씀의 순수한 선포'는, 교회의 가장 으뜸되는 표식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지 않고, 선포된 말씀 앞에 복종하는 사람들이 없고서야, 제아무리 큰 예배당을 짓고,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한들, 그것이 무슨 교회가 되겠습니까? 목사는 이런 일에 누구보다도 심각한 사람이고, 누구보다도 깨어 있는 사람이며, 그래서 누구보다도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인 것이요, 따라서 무엇보다도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생명을 바치듯이 하는 사람입니다.
생활 문제와 관련하여 사역자가 갖추어야 하는 철학
바울은 계속해서 사역자가 생활 문제와 관련하여 갖추어야 할 기본 원리를 가르칩니다(35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일체의 탐심과 사욕을 버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역자는 자연히 그의 온 생애를 양 떼를 돌보는 일에 바치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가장 긴급한 문제는 일상 생활에 대한 염려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문제를 교회가 담당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여기서 양 떼라는 말은 편의상 쓰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가 자신의 양 떼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여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급하였습니다. 그는 차라리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할지언정 스스로가 제자들에게 생활비를 요구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는 도리어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삶이었다는 것이 또한 특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모범을 제시하면서 교회 장로들도 이러한 원리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시대의 모든 사역자들이 그와 같이 일률적으로 자비량 전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강조점은 받는 자 보다는 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마땅히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마 10:10).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쪽에서 강제로 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억지로 일정한 액수를 정하여 주느니 못 주느니 하고 불화를 일으킬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현명합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들을 살펴주는 이들을 잘 대접함이 마땅합니다. 한편에서는 덜 받으려고 자꾸 사양하며 또 한편에서는 더 주려고 애쓰는 모습은, 더 받기 위해서 안달하거나 덜 주기 위해서 인색해 하는 데 비해서 그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부분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이 말씀과 같이 항상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선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보상을 받습니다(잠 19:17).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바 없으며(약 5:1-6),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딤전 6:10). 돈을 사랑하는 자의 심령 속에는 말씀이 거할 곳이 없으며(마 13:22),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는 반드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습니다(눅 12:21).
사람이란 두 주인을 결코 섬기지 못하는 존재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야 합니다(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주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자입니다. 필요에 따라 물질을 제한하기도 하시고 풍부히 주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지 못하고, 물질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교역자로서의 자격이 상실된 자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조용히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장로들은, 그가 말을 마치게 되자 서로 울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이 울음은 단순히 헤어지는 데서 오는 슬픔이 아니라 앞으로 피차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라는 데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별이었기에 바울은 위에서 열거했던 각종 부탁들을 그토록 간절하게 장로들에게 당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뒤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길한 예감을 성령 안에서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연히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36-38절). 이렇게 해서 바울은 에베소를 들르지 못하는 대신 장로들을 불러서 교회를 부탁하는 사역을 마친 후 밀레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정리와 결론; 신앙고백 교육
지금까지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던 장면을 통하여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가져야 할 목회의 자세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평생을 복음을 위하여 몸바치느라 인생을 다 보낸 노장 선배의 메시지는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제 글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지금까지 살펴본 바울의 사역 원리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바울의 사역 원리는 여기 사도행전 20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기타 그의 서신 전체를 통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지만, 지면의 한계를 고려하고, 중심 사상을 보는 것은 이 부분만으로도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서신에 다양하게 나타난 목회자들의 사역 원리란 핵심적으로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다양한 상황들을 살펴볼 때 무엇보다도 두 가지 핵심적인 사실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정도' 문제이고, 둘째는 그것에 근거한 '실천적 의지'의 문제입니다. 물론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구별은 될지언정 분리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깨닫고도 행치 않는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는 것은 시간 낭비로 보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정말 가져야 할 관심은 과연 어떻게 바르게 깨닫겠는가 하는 데 대한 것이겠는데, 이제 이 사활적인 문제 앞에서 비록 간단하지만, 그러나 가장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말이 많으나 적으나 핵심은 이것이니, 그것은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이란 바울이 전하지 아니한 복음을 가리킵니다(9절). 갈라디아 교회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불교가 들어왔습니까, 유교가 들어왔습니까? 그런 것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율법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희뿌연 복음'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유교나 불교 같은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전한 것과 같지 아니한 내용으로서 전하는 바 '유사 복음'을 가리켜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곧 사도적 정경 위에 서는 것은 개혁 교회의 생명력입니다. 로마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적 정경 위에 서지 않은 고로 사실상 '성경의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소!"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느 사이비인들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말로 성경을 믿는다면,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들을 따르는 데서 되어집니다. 그래야 사도적 정경 위에 서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아무리 성경을 앞세워도 실상은 사이비 집단인 밖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주위를 보면 비록 겉으로는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행하는 모습을 볼 때에,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들의 내용과 배치되는 신앙 행위들을 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이비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살았다 이름하나 실상은 죽었고, 교회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종교 단체에 불과하며, 도무지 교회의 표식들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앞에서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사는 길이요, 성경의 교회를 이루는 길입니다. 이 긴박하고 절대적인 당위성 앞에서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됩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47 |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세대주의의 문제점 | 손재호 | 2019.09.30 | 2691 |
146 | 세대주의란 무엇인가 | 손재호 | 2019.09.30 | 1423 |
145 |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점 | 손재호 | 2019.09.30 | 39418 |
144 | 말라기 3장에 등장하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의 바른 이해 | 손재호 | 2019.06.05 | 1712 |
143 | 성경에서 말하는 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 | 손재호 | 2019.06.05 | 4617 |
142 | 2019년 봄학기 특강(개혁교회의 예배, 헌상, 친교, 권징) | 손재호 | 2019.02.11 | 558 |
141 | 2018년 가을학기 특강(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경륜) | 손재호 | 2019.02.11 | 527 |
140 | 개혁주의와 언약론(언약론의 역사) | 손재호 | 2018.08.29 | 756 |
139 | 칼빈의 개혁사상과 오늘의 교훈(김재성 교수) | 손재호 | 2018.08.29 | 880 |
138 | 한국교회의 예배와 예배갱신(김영재 교수) | 손재호 | 2018.08.27 | 654 |
137 | 한국에서의 개혁 교육(김헌수 목사) | 손재호 | 2018.08.27 | 1556 |
136 |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이상규 교수) | 손재호 | 2018.08.27 | 497 |
135 | 강복선언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 | 손재호 | 2018.08.27 | 737 |
134 | 기도는 섭리신앙의 시금석인가? 은혜를 받는 방편인가? | 손재호 | 2018.08.13 | 557 |
133 | Berkhof의 언약과 이스라엘 역사 | 손재호 | 2018.08.13 | 487 |
132 | 언약과 선택 | 손재호 | 2018.08.13 | 531 |
131 | 2018년 봄 사경회 강의안(개혁교회의 역사와 그 특징) | 손재호 | 2018.03.29 | 523 |
» | 개혁교회를 누리는 삶(4) | 손재호 | 2018.03.23 | 525 |
129 | 개혁교회를 누리는 삶(3) | 손재호 | 2018.03.23 | 497 |
128 | 개혁교회를 누리는 삶(2) | 손재호 | 2018.03.23 | 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