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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를 누리는 삶(3)
# 이 글은 이천우 목사(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의 글입니다. 개혁교회를 이해하고 누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개혁 교회를 누리는 삶(1-4강)
이천우 목사(개혁주의 신앙공동체)
3강 성경의 교회를 이루는 행동 요령
- 함께 진정한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한 제안들 -
성도로서 바른 교회를 이루는 삶은 구원론적인 근거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교회에 속하는 방식으로 부활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오,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를 이룸으로 그의 몸을 구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가히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임재하시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홍수에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과연 자칭 교회들이 온 사방에 널려 있지만, 정작 교회다운 교회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비극적인 교회 부재의 시대에,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취할 행동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여기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해 봅니다.
목회자들의 경우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인 목회자가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에 일치되도록 교회를 섬기는 것은, 목회자로서 순종해야 할 당연한 의무요, 목회자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목사는 섬기는 교우들과 더불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충만하게 이룰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만큼 구원의 확신이 증가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적 운반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됩니다.
2. 목회자는 최선을 다하여 성경과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을 연구하여야 하며, 온갖 기회를 살려 교인들에게 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 가르치기를 게을리 한다거나, 또는 성경적으로나 신앙고백적으로 점검되지도 아니한 마땅치 않은 것들, 곧 전통성과 정통성도 없이 반짝하며 일어나는 유행에 현혹되어, 그러한 것들을 가르쳐 교인들을 우민화시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크게 책망 받을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3. 목회자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일치하는 설교를 하여야 하며, 그렇게 설교한 대로 직접 모범을 보이면서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목사는 소위 설교를 팔아먹는 장사꾼들에게 돈을 주고 설교문들을 사서 설교에 써먹는 비겁하고 거짓된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시중에 퍼져 있는 소위 유명(?)하다는 이들의 설교책을 베끼고서는, 마치 자신이 고뇌하여 깨달은 진리인양 설교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 목사는 자기 자신이 말씀과 씨름하여 깨달아야 하고, 그렇게 깨달은 말씀이라야, 입술에 의한 지식 자랑이 아니요, 가슴으로서 선포하는 말씀이 되게 되고, 그러면 성령께서도 합당하게 쓰시게 됩니다. 말씀의 신실한 선포는 교회의 3대 표식 중의 하나입니다.
4. 목회자는 가급적이면 교회의 외적인 부흥에는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고, 오직 교인들의 인격적인 성장,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이르기까지 자라가도록 하는 일에, 마치 여인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듯한 심정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는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듯이, 교회의 부흥은 전적으로 성령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만일 목회자가 이 원칙을 고수하지 아니할 경우 여러 가지 유혹에 빠져 필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기 보다는, 인본주의를 앞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부흥되려는 욕구에 사로잡히게 되면, 중생한 증거가 없는 사람에게까지도, 단지 교인 숫자를 더 늘리려 한다거나, 그의 주머니에서 나올 헌금에 미혹되어서, 그에게 함부로 세례를 베풀게 될 것입니다. 성례를 순결하게 시행하는 것은 교회의 3대 표식 중의 하나입니다.
5. 만일 교인들 중에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에 일치하지 않는 신앙 행동을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힐 경우, 목회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치리권을 교회의 정당한 절차와 질서에 따라 당당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가령, 꿈을 꾼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인양 퍼뜨리고 다닌다거나,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체험과 생각을 성경처럼 주장한다거나, 또는 공적인 자리에서 명백하게 금지해야 하는 방언 기도 같은 것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그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정면으로 거스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요, 마땅히 치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외적인 부흥욕에 사로잡혀서 이런 것들을 하나 둘씩 용인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대혼란을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목사가 직권을 남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함부로 칼을 대서도 안될 일이지만, 마땅히 도려내야 할 쓴 뿌리를 방치하는 것도 역시 피해야 할 직무유기죄가 됩니다. 권징권의 능력 있는 시행은 교회의 3대 표식 중의 하나입니다.
6. 목회자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임을 명심함으로, 교인들의 어떠한 잘못된 요구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얼빠진 교인들의 죄 발린 헌금에 기대어 사느니, 차라리 굶어 죽어 순교하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는 각오로 임하면서, 순결을 지키는 당신의 종을 결코 모른 척 버려두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전능하심과 자비의 손길만을 애절한 심정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이 흐리멍텅한 쭉정이 같은 사람들인 한,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모여 있다 한들, 천국의 그물에 걸린 못된 물고기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알곡들이 아닌 것입니다.
7. 목회자로서 그만한 각오와 용기도 없다면, 차라리 일반 성도로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유익하고 지혜로운 줄로 알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기꺼이 일반 교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결단은 결코 부끄럽다거나 패배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일조하는 일이 된다는 정직성과 자부심에 의거하여 마땅히 결행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직분은 천국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결코 벼슬이 아니요, 명예와 권세인 것도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기꺼이 부정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나아가는 사람만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목사직의 독특한 성격입니다.
8. 목회자는 자신이 원칙을 지켜 목회하는 까닭에 교인들이 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대로 의기소침한다거나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인양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항간에 일부 정신 없는 목회자들이 함부로 말하듯이, 개척교회니 성공한 교회니 하는 등등의 평가에 마음을 기울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를 지키는 것인 한,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서의 자부심을 갖는 것이 옳고, 이는 정당하며, 또한 실제로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훼손시킨 데 대한 책임은 물으실지언정,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회자를 책망치는 않으실 것입니다. 교회가 집단적으로 배도하는 어려운 시기일수록, 엘리야나 세례 요한과도 같이 좀더 각별한 각오로서 사는 선지자적인 목사와 교회가 필요한 법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견지하는 일은, 우리 주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안겨드릴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이것이 바로 목사의 기쁨이겠습니다.
성도들의 경우
1. 목회자가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들을 교회의 생명처럼 여기고, 그것에 기초하여 교회를 인도하며 섬기는 경우, 교인들은 최선을 다하여 목회자에게 협조하고 돕고 섬김으로 동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가령 목회자가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들을 가르침으로서 교인들을 섬기려 할 때에, 교인들은 최선을 다하여 참여하고 열심히 배우는 것이 옳고, 이는 본인에게도 큰 유익이 됩니다.)
2. 만일 목회자가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들을 가르치는 학습반을 운영하지 않을 경우,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그러한 학습을 진행해 달라고 요청해야 하고, 이는 성도의 당연한 권리요, 또한 의무입니다. 목사가 혹시라도 도덕적으로 부족한 경우라면, 성도는 얼마든지 기다리면서 이해해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성도 역시 같은 타락한 인간으로서 능히 같이 시험에 빠지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목사가 말씀에서 의도적이며 자의적으로 타락하여, 성경 진리와 신앙고백을 멀리하는 한, 그것은 결코 이해나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신앙고백 학습을 목사에게 줄기차게 요구해야 합니다.
3. 그러나 목회자가 위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성도들은 뜻 있는 사람들끼리 자체적으로 그룹을 형성하여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들을 학습해야 합니다.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문서들은 인터넷 상에서 자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내용상으로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신앙고백 문서들을 그냥 읽어가기만 해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진리들은 다 깨달을 수 있습니다.
4. 목회자가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에 맞지 않는 설교를 할 경우 교인들은 시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교회를 운영하려 할 경우에도, 결코 응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 한 사람 개인의 소유가 아니요, 세상 기업처럼 목사의 독단으로 운영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처럼 다수결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말씀이 명확하게 제시되고, 거기에 순종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잘못된 목회임을 뻔히 알면서도 동참하는 것은, 성도 역시 함께 교회 타락의 주범이 되는 것입니다.
5. 목회자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서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을 배척할 경우, 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러한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추방해버려야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 달라고 하는 근본적인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목사의 자격을 포기한 것입니다. 둘째, 그렇지 않으면 성도 자신이 차라리 교회의 소속을 변경할 필요가 있고, 이는 주님께서도 기뻐하시는 것이요,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도 참으로 안전한 결단입니다.
6. 이때 교인들은 함부로 아무 교회에나 소속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에 근거하여 주님을 섬기는 교회를 찾아 거기에 소속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합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할지라도 반드시 이러한 교회를 찾아서 소속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교회를 바르게 이루는 일은 구원론적인 근거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직장, 사업, 결혼, 교제, 학업 기타 등등 다른 어떤 문제들보다도 바른 교회를 이루는 이 일이 항상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7. 만일 교회를 찾지 못할 경우, 때가 올 때까지 스스로 교회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전개해 나가는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주일에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서히 그러한 가정들끼리 연합해 나갑니다. 혹은 뜻이 맞는 다른 성도들끼리 새로운 모임을 가짐으로써 바른 교회로서의 출발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아직까지 이런 행동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경우,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한 주간 중에 특별한 날을 택하여 대치할 수 있고, 또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규칙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할애하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8. 이 단계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묻고 진실하게 대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에 근거하여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일까?" "진정으로 성경 진리의 말씀인가?" "혹 이 시대의 유행과 분위기와 종교 감정에 근거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점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즉 교회의 표식이 없는 자칭 교회, 곧 죽은 교회요 거짓 교회인 한, 제아무리 거기에 속하여 하려한 예배를 드리고, 아낌 없이 봉사한다 한들 정작 주님 앞에서는 쓰레기로 취급될 뿐이라는 사실을. 사람쪽에서 온갖 기독교적인 폼을 잡고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는 예배인 한 하나님께서는 거들떠도 안보십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역사가 있고, 규모가 크고, 제도가 장엄하고, 분위기가 종교적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참된 예배는 오직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이 받으셔야 하는 합당한 권위를 얻으시는 데서 찾아집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앙 생활의 근거는 진리 체계를 따라가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지, 기독교적인 색채로서 치장하여 무지 위에 쌓아 올린 맹신적인 종교 행위들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함께 생각해 볼만한 제안들
성경의 교회, 곧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교회를 이루려 하는 이마다 다음과 같은 성경적 신앙의 원리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
개혁교회 성도라면,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정확하게 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고 변질되는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하여 교회에 대한 이해가 흐리멍덩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성경적으로 정립하지 못한 채, 그냥 자기 시대의 유행을 따라 교회를 이루려고 하는 데서 온갖 부작용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렇게 해서 세우진 교회 아닌 교회로 말미암아 교회관은 다시금 변질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 곧 신학의 모든 이론은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상 교회를 이루는 것으로 집결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이론을 체험하고 맛보며 누리는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 됩니다. 바로 이 중요한 사실 때문에 교회를 바르게 이루는 일은 구원 그 자체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정말 중요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후로부터 교회를 바르고 풍성하게 알고 체험해 나가는 삶으로 옮겨졌다는 말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과제가 바로 교회를 바르게 아는 지식의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상대적으로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부족한 행동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나름대로 열심을 내어 봉사한다고 하는 일들이, 사실은 무익한 열심에 불과한 것이 되어, 자신의 신앙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는 나쁜 영향을 주게 되어 해를 끼칠 수 있게도 됩니다. 이런 상태로서는 시간이 흐르게 되면, 자기 자신도 지치게 되어, 결국 간신히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이름만의 교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고, 세상 앞에 우리 주님의 몸을 드러내는 일에 기여하는 적극적인 성도 노릇은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전 같은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지 않는 교회
결코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육신을 가진 분이 아니시므로, 당연히 인간처럼 주거용 건물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화점처럼 화려하게 지은 특정한 성전 건물(?) 혹은 반대로 초라하고 작은 건물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건물 자체에 거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약에 나타난 성전 제도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계시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드시 특정한 건물을 가진 교회에 소속되어서 예배를 드려야만이 제대로 예배를 드린 것인 양 생각합니다. 성전이라는 건물 속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순서를 진행해 나가는 절차를 밟아야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실 제아무리 그럴듯한 의식 속에서 혹은 많은 사람들과 예배를 드렸다 한들, 그것이 근본적으로 거짓 교회인 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통상 사람들은 아주 편안하고 수동적인 믿음을 행사하려 합니다. 마치 인스턴트 식품을 즐기듯이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개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참으로 말씀만으로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 선포이지, 이런 저런 순서를 진행하는 절차 따위가 아닙니다. 가정은 교회의 최소의 공동체요 세포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서로 인격적으로 연결되어서 좀더 확장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교회는 건물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가정이나 기타 성도의 사업장을 예배 처소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성도 중에 각별한 누군가가 건물을 기증한 경우라면 혹은 지속적으로 장소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건물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원칙은, 교회의 헌금으로서 그러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정신을 표현한 것이지, 있으면 좋은 그런 장소들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 형식을 띤 제도적 교회 그 자체를 믿고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는 구원을 누리는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날에 매이지 않는 교회
신약 교회가 주일을 지키는 원리는 구약의 안식일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즉 구약에서 지키던 토요일의 안식일이 단순히 날짜가 바뀌어 일요일로 변경되었다고 하는 차원에서 신약 교회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특정한 날짜를 지키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요구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로 영적 안식의 예시인 안식일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제 칠일을 안식일로 정하사 '영적 안식의 표'로 삼으시기를 원하셨고 가장 신앙의 높은 수준으로 여기셨습니다.
⑵ 믿는 자들이 이 정해진 날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고 그를 예배하면서 '경건의 훈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⑶ 그러므로 이 하루를 종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사 이들이 '노동으로부터 쉼'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⑴의 경우와 관련하여 오늘날 안식일은 폐지되었습니다. 안식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될 것을 바라보게 하였으므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그림자는 폐기되니, 모든 안식의 형상들이 소멸합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자답게 새 생명으로서 일생을 사는 데서 진정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니, 이 날 자체를 지킴으로 미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반면, ⑵와 ⑶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계속 적용됩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일정한 날에 모이고 노고를 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연장 차원에 날을 지키지 않으며, 단지 신약 교회가 지향하는 질서를 위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한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에 어느 날이든지 공동체가 편리한대로 하루를 떼어 하나님 경배를 위한 보조수단, 곧 예배와 명상을 훈련하는 교회의 질서로서 사용하면 되니, 안식일의 연속성 차원인 양 생각하여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만 하면 됩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 원리를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지 않는 교회
교회의 타락은 교회에 축적되어진 재산에 제일 큰 원인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롯하여 이단일수록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미명 하에 자기네 단체를 살 찌우고, 거기에 속하여 떡고물을 줍고 이익을 챙기는 구조 때문에 교회는 처음부터 타락할 수밖에 없는 자충수에 빠져버렸습니다.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는 교회가 재산을 소유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해마다 예산을 세우고, 그것도 새해에는 전년도에 비하여 항상 더 많은 예산을 집행해야만 되는 양 생각하는 현 시대의 풍토는 참으로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재물이나 권력의 힘을 빌어 확장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사업을 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첫째는 교회의 구성원들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으로서 자라가는 일에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이 뒷받침 되지 아니하면, 일이라는 것도 성경에 입각하여 정도를 따라 진행시켜 나갈 수가 없습니다.
키엘케골은 말하기를, "역사 속에서 자체적으로 커지고 부흥한 사실 때문에 사실은 망한 것이 있다면, 유일하게 교회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슴 깊이 새겨보아야 할 아주 적절한 평가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재산을 축적해 나가면 안됩니다. 만일 헌금을 수집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바로 그 즉시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성전 건축과 같은 이상한 명분이나 기타 돈이 많으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앞세워, 교회가 돈을 모으고 짜내면서 축적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교회는 타락의 행진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원리와는 달리, 오늘날 교회를 기업처럼 생각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기까지 하는 세습이 판을 치고 있으니, 정말 통곡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스스로 근검과 절약에 모범을 보이면서, 하나님께 바친 헌금이니, 한푼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하도록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목사가 교회를 섬긴다면, 결코 생활상으로도 사치와 방탕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며, 교회 차원에서도 재산을 형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헌금은 수집되는 즉시 합당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많이 모아서 크게 쓰겠다고 꾀를 부리기 시작하면,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재산을 모으게 되니, 교회 안에서 싸움이 그칠 날이 없고, 세상 사람이 재물을 자식에게 물려주듯이, 목사가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미혹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강제적인 십일조 헌금 제도와 상관 없는 교회
사도행전을 비롯한 성경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제도적으로 십일조를 거둔 일이 없고 자발적으로 헌금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칼빈 같은 개혁자들도 예배시에 십일조 제도가 아닌 자발적인 헌금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헌금 모금과 사용에 있어서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 집중하였습니다.
이런 원리를 따라 개혁교회 성도들은 평소의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서 헌금 생활을 합니다. 즉 살아가는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스스로 헌금을 드리듯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평소의 삶 속에서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정신이 뒷받침 될 때에 주일에 몸으로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2:1).
예배 의식 속에서 헌금을 드리는 형식을 취해야만 그것이 진정한 헌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명확한 목적 하에 물질을 사용한다면 사실 그것이 바로 실제적인 헌금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평소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일에 자신을 투입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되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일에 재물을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헌금이란 바친 사실 못지 않게, 그것이 정당하게 사용되었느냐 하는 문제까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당하게 사용되는 문제에까지 연결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됩니다(빌 4:10-20).
예배 원리
작은 개혁교회는 주일이 되면 가정들이 연합하여 한 몸으로서의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는 목사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목사가 없는 그룹의 경우 성경적으로 잘 구성된 설교문을 함께 읽는 것으로서 설교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지겠지만, 곧 익숙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엉터리 설교를 듣느니 보다는, 잘 구성된 진리의 글을 한편 읽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가령 종교개혁 이후 영국의 어느 목회자는 제2스위스 신앙고백을 작성한 불링거의 교리 설교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라는 지시를 전임자로부터 받았습니다. 불링거의 교리 설교를 모은 '데카데스'는 당시 목사들의 필독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비상시기에는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의 설교들 또는 기타 교리적으로 검증된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를 읽는 방식으로 설교를 대신할 있으며, 그러는 동안 주께서 합당한 설교자를 공급해 주시기를 소원하여 교회적으로 기도에 힘써야겠습니다.
이런 방법은 지금도 개혁 교회가 지키고 있는 전통으로서, 목사의 부재 혹은 적법한 목사가 없는 경우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입니다. 지금도 호주에 있는 화란 계열의 개혁 교회들은, 부득이 목사가 설교를 못하게 되면, 예전에 설교하였던 설교문을 장로가 대독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찬송
찬송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유행하는 찬양과 경배 같은 것들은 엄밀히 말하여 찬송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개혁교회의 예배 찬송은,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에 따라 시편 찬송을 사용합니다. 만일 시편 찬송을 사용할 형편이 되지 못하면, 시편 한 장을 함께 낭독하는 것으로서 찬송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전도한다',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차원의 명분만 내걸면, 무엇이든지 어떤 방법이든지 다 통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온갖 세일즈맨 기법과 마케팅 기법이 다 동원됩니다. 또는 드라마 예배나 찬양과 경배 같은 희한한 것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입심 좋게 '성령의 역사'라고 내세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처음에는 이런 방법들을 모르셨기에, 지금에 와서야 부랴부랴 알려주는 분이신가 말입니다. 성령께서 과거에는 요즈음 유행하는 찬양과 경배 같은 것들이 있는 줄 모르셨다가 이제서야 아시고는 부랴부랴 쓰시는가 말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교회 역사 속에서 과거에는 단호하게 배척되었던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목소리의 아름다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음악이란 묘한 것이어서, 감정 절제 능력이 보통 웬만하지 아니하면, 찬송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종교 개혁의 대부들, 곧 쯔빙글리와 칼빈과 불링거 같은 이들은 예배당에 있는 오르간 같은 악기들을 치워버리고, 성가대를 없애버리는 등등 로마 카톨릭 교회가 타락시킨 예배의 잔재들을 척결했습니다. 즉 지금 항간에 유행하는 것들은 이미 정통 개혁자들에 의해서 오래 전에 폐기 처분된 것들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딴 따라 놀음을 없애고, 시편 찬송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가 개혁교회로 돌아가려 할 때에 필연적으로 회복해야 할 명제입니다.
교회의 성경공부
성경에 대한 해석은, 이미 역사적 개혁파 교회를 통하여 충분히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을 학습하면 성경의 핵심 골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학습을 통하여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한 후, 기타 좀더 깊은 성경 학습서들을 대하면, 신앙이 절대로 곁길로 가지 않고, 갈 수도 없습니다.
종교개혁 시대는 문화적인 여건상 오늘날처럼 신앙 서적들이 활발하게 출판될 수 없었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진들이 신앙을 견고하게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한 신앙고백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오늘날은 온갖 정보 전달 매체들이 발달하긴 했지만,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이 나타나서 검증되지 아니한 비성경적인 사상들이 책으로, 테이프로, 인터넷 망으로 널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올바른 정보의 작성과 선택이라고 하는 문제에 부딪혀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얄팍한 성경공부들을 배척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QT식 성경공부 같은 것은 그야말로 성도를 우민화시키는 첨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 교재까지 유행을 타는 이 시대의 정신은 정말이지 통탄할 노릇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야가 되었든지 그 분야의 학문에는 왕도가 없는 법입니다. 성경을 공부한다 할 때에도 개혁교회가 해 나온 방식, 곧 정상적인 절차와 체계 따라 진행되어야 하니, 반드시 교리 공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숲을 먼저 보아야 길을 잃지 않는 법입니다. 교리 공부는 마치 숲을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복음의 상업화에 참여하지 않는 원칙
개혁교회 성도들은 시중에 나와 있는 엉터리 설교책들을 사는 일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선포한 메시지를 상업적인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내용상으로도 대부분이 성경의 정통 사상과 맞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허울 좋은 문서 선교라는 미명 뒤에 숨어, 실상은 돈벌이로 설교를 공급하는 장사꾼들이나, 그런 것을 베껴 먹고 사는 엉터리 설교자들을 추방해야 합니다.
한번 설교에 써 먹은 원고라면 다시 책으로 만들어 팔아 먹는 파렴치한 행위들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됩니다. 학문적인 책들과 기타 도서들이야 얼마든지 출판할 권리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버젓이 사례비 받으면서 설교한 원고들을 다시 책으로 만들어 팔아 다시 2중의 수입을 챙기는 태도는 정죄받아 마땅합니다. 지금은 인터넷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자신의 설교가 그렇게도 세상 앞에 드러내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책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망감만 안겨주기 보다는, 인터넷 상으로 공개하는 것이 더 진실한 자세일 것입니다.
또한 영문 번역에 재주가 있는 번역자들도 더 이상 돈벌이에만 급급하지 말고, 중세기 믿음의 선진들의 좋은 글들을 번역해서 인터넷에 공개하는 진실하고 헌신적인 봉사의 자세를 취해야겠습니다. 교회는 교회 내의 인재들을 통하여 과거 믿음의 선진들의 좋은 글들을 번역하여 적극적으로 공개해 나가야 합니다.
인본주의 광고에 속지 않는 지혜
우리는 개혁 교회 성도로서 '광고'라는 매체를 잘못 이용해서도 안되고, 거기에 속아서도 안되겠습니다. 특별히 이민 사회를 가보면, 교민 신문들과 잡지들을 통하여 자기네 교회를 집중적으로 광고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상업적인 광고 수단을 써서 교회를 홍보하는 짓이야 말로, 자기만 크면 최고라는 아주 저급한 세속주의의 발상이요,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종교 모리배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속된 말로 '자본이 많으면 왕이다!'는 식의 세상의 자본주의 사고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태도는 성령의 역사와 전혀 상관없고, 다만 종교 장사요, 종교 기업일 뿐이겠습니다.
광고를 사용하지 않는 것 못지 않게, 광고에 현혹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날 소위 성구 업자들이나 기독교 용품 생산 업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출판사들은 하루 종일 돈벌이를 구상하고, 침상에서도 계획하며, 날이 새기가 무섭게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가 막힌 발상으로 돈이 될만한 것들을 만든 후, 교회를 향하여 광고 공세를 가합니다. 가령 아주 단적인 예를 들자면, 목사와 성가대 등등의 가운들을 만들어 파는가 하면, 소위 '성전(?) 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건설업체도 있습니다.
개혁 교회 성도들은, 성경 공부에 열심을 내되, 이것 저것 기웃거리기보다는 개혁파 교회가 역사 속에서 피값을 지불하면서까지 지켜 나온 신앙고백들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지혜롭고 실제로 유익하며, 안전한 길임을 다시 한번 확신해야 합니다. 성경을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깨닫는 데는 사실 이 이상의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신앙고백을 학습하여 성경의 숲을 먼저 보면서 동시에 성경 각 부분들을 읽어 나가면, 그것으로서 충분히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설교집들을 읽고 테이프를 듣고 하는 데 매달린다면 이는 아주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져 있듯이, 인스턴트식 신앙생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방식들은 하루 속히 개선되어야 합니다. 돈만 내면 얼마든지 지면을 살 수 있고, 시간을 살 수 있는 것이, 기독교의 신문이나 잡지들 그리고 방송 매체이므로, 그런 데서 쏟아내는 설교들이 행여라도 정통성이나 권위가 있는 듯이 잘못 생각하지 지혜를 발휘해야 겠습니다.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
개혁교회의 전도는 가정이 가정을 전도하는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먼저 된 개혁교회의 가정이 이웃 가정을 헌신적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전도한 가정과 함께 예배드리는 방식을 취해 나갑니다. 사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이고, 따라서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은 비상한 시기가 아니고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가정 내에서 먼저 교회가 되고 가정과 가정이 연결되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가정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독립되어있으면서도 함께 모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주체는 가정 교회이고, 가정 교회들이 서로 지역적으로 연결되면 됩니다.
이웃을 향한 전도는 '삶의 모범'을 통해서 합니다. 성경 구절 몇몇 개를 외어서 사람을 설득하는 방식은 참된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믿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사는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웃이 자신의 가정을 볼 때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볼 수 있게끔, 그렇게 실력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이런 진지한 접근과 실제로 복음으로서 사는 신앙의 실력을 발휘함이 없이, 요즈음 유행하듯이 갖가지 기발한 착상으로 꾸며진 기교와 방법들로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태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시는 구속사에 대한 고려가 없이, 사람의 노력과 수고로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고, 심지어 세상 전체를 복음화시키겠다면서 큰 소리 치는 배짱(?)들을 대하노라면, 실소를 금할 길 없습니다. 교회가 사명을 설정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정직해야 합니다. 무조건 민족 복음화니, 세계 선교니 하면서 믿음을 빙자하여 스스로 만든 망상의 그물에 자초하여 노예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원리 만인제사장 원리 회복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 원리를 개혁의 원리로 내세웠습니다. 종교개혁기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원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 "어디에서 참된 교회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신칭의' 교리에서 찾아집니다. 바울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하면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 '이신칭의'에 의한 것임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습니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대답은 '만인제사장' 사상에서 얻어졌습니다. 교회는 로마 교회 주장처럼 성직자들로 구성된 사제단의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이 두 가지 원리를 구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두 가지 문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신칭의 교리는 통탄스럽게도 신앙주의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을 강조한 이 복된 교리가, 사람 편에서 아무 때나 마음만 먹고 큰 목소리로 '믿습니다'고 하면 구원을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행칭의로 변질되어버린 것입니다.
만인제사장 사상은 또 어떻습니까? 아직까지도 이런 것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만인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이 제대로 누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사장된 성직자인데, 오직 목사만이 제사장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평범한 성도들은 말 그대로 평신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수직적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요, 수평적으로는 모두가 동등한 만인제사장이 되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제사장이요, 서로가 서로에게도 만인제사장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만일 목사와 성도들 간에 계급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제대로 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특권을 가진 성직적 전통 계급제가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어느 지역 교회의 담임 목사와 동일시한다거나 혹은 목사와 평신도 또는 성직자와 일반 성도 식으로 갈라놓는 이중 사고방식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진실한 자세로 성도의 교제를 누리는 교회
지역의 개혁교회는 13 가정 이상 확장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어 있는 다른 성도들간에 몸을 이루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체들끼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고 할 때, 요즈음처럼 형식적인 정도가 되면 안됩니다. 마치 몸의 각 지체들이 생명 관계로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구원 받은 성도들은 실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지역의 개혁교회는 구성원이 13 가정이 넘게 되면 세포 분할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교회에 성도의 수가 많아지고, 그러면서도 하나의 단체로서 억지로 유지해 나가려고 하면, 그때부터 교회의 생명인 유기성은 말살되고, 세상적인 조직성이 부각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성원들간에 유기적인 교제가 방해 받을 정도라면, 그때는 신속히 세포 분열을 재촉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개혁교회의 전담 사역자
만인 제사장의 원리는, 교회에 교역자 제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교회는 특정한 전문가에 의하여 섬겨질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는 교회를 전적으로 섬기는 목사가 필요합니다. 이 원칙하에 교회 역시 전담 사역자인 목사를 필요로 하고, 그는 철저하게 성도들을 섬깁니다. 필요한 경우 한 명의 사역자가 3-4 그룹의 지역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의 개혁교회의 목사는 사치와 낭비를 경계하고 검소한 삶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목사 역시 가정을 가진 자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교회를 전적으로 섬기는 데 대한 대가를 교회로부터 받는 것은 당연한 성경의 원리입니다. 교회의 가정들은 이 일에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그러나 12 가정이 힘을 모은다면 목사 한 가정의 살림을 뒷받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역자는 항상 사양하는 자세를 취하고(고전 9장), 성도는 항상 대접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정도입니다(갈 6:6). 교회를 섬기는 목사는, 한 사람의 가난한 성도의 입장에서 주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손길을 통하여 공급하시는 사랑의 빚으로서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 목사는 자비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형편만 해결된다면, 교회를 보다 열심히 섬기기 위하여 목회에 전념할 것을 권합니다.
신실한 말씀 선포에 집중하는 교회
말씀의 신실한 선포는 교회의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한 유일하고도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교회를 가리켜 일명 '말씀주의 교회'라고도 일컫는 것입니다. 말씀주의의 본질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기독론적 해석주의'는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말씀주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구속의 사건을 선포하는 데서 성립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하셨는가를 선포하는 내용이 아니고서는 능숙한 말재주로 제아무리 그럴싸하게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낱 이야기주의에 불과할 뿐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그것의 구속사적인 성격상 절대적으로 내용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말씀의 능력이 중생의 결과를 얻고 성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의 내용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설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한 결과를 보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개혁파 교회로서의 말씀주의의 진수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창조해 나가시는 하나님 말씀의 주권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행하셨던 구속사를 깨달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보편적인 원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런 역사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불변의 사실도 파악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던 현장마다 순수한 하나님 말씀의 선포가 있었던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 이 말씀만이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여 거듭남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 사람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끔 하는 성화의 능력을 제공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례를 순결하게 시행하는 교회
교회의 참된 표지는 성례가 순결하게 시행될 때에 또한 찾아집니다. 성례의 순수한 집행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성례전적인 효과'가 있게 해줍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습니다. 칼빈은 어거스틴을 따라 성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설교라고 하여 가견적인 말씀(Visible Word)이라고 보았습니다. 칼빈은 당시 형편상 어쩔 수 없었지만, 처음 수세기 동안 전통적으로 전해온 교회의 본을 따라 본래 매주마다 성례를 행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게 되면 세례와 같은 거룩한 성례가 교회 부흥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일부 교회들 중에는 확실한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단순히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후 함부로 세례를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 묶어 놓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혀서, 마땅히 살펴보아야 할 구원의 증거와 그것에 대한 합당한 신앙고백 유무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세례를 베푸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경우 성례가 순수하게 집행되지 않았으므로, 이름만의 신자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성례를 더럽히기까지 하게 됩니다.
권징을 실력 있게 집행하는 교회
교회의 참된 표지는 권징의 권세 있는 집행에서도 찾아집니다. 권징의 적절한 시행은 교회의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부분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 꾸짖었습니다. 권징이 시행되지 않고서 성례를 순수하게 시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시에 말씀의 권위도 훼방을 받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현저하게 드러나는 어떤 죄에 계속 안주하기를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성찬에 참여시켜서는 안될 것이므로 권징이 집행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권징을 적절하게 집행하는 것을 통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온전히 보전해 나가게 됩니다. 칼빈은 누구보다도 권징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실제로 제네바 교회에서 목회할 때에는 이 부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즉 당시 너무나도 타락한 회중들을 위하여 성례 베풀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시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습니다.
칼빈은 부처와 마찬가지로 권징의 필요를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 권징은 성도가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고, 굴복시키고, 그로써 최후 부활에 대비하는 성화에 도움이 되고, 둘째, 권징은 교회의 머리이자 만물을 다스리시는 승천하신 주의 위엄을 보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만약 교회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본연의 특성을 보존하려면 불가피하게 권징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권징의 목적을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송영적이니, 권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런 악하고 부패케 하는 지체들을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방치해 둘 경우 교회의 머리이신 분께 불명예가 돌아간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이름에 불명예의 낙인을 찍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명을 남기는 그런 자들을 교회라는 가족으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때에도 주의 만찬의 질서를 보존해야 하며, 그로써 주의 만찬이 무분별한 집례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정죄적이니, 교회를 순결하게 지켜서 '선인들이 항존하는 악인들의 무리에 의해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치유적이니, 저급한 행동을 한 뒤에 수치심에 압도된 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성경 연구에 집중하는 성도와 교회
성도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심령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심령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심령에 하나님의 통치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기 마련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으려 하게 됩니다. 사실 알아야 순종할 수 있는 법입니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순종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을 본능적인 즐거움으로 삼게 됩니다.
성도가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실천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구원 받은 이후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야 하는 원리에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이 없이 실천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 더욱이 그것이 깊은 의미에 이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라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고 이에 따라 성경연구에 날마다 지고의 관심을 쏟기 마련입니다.
기도 생활을 실천하는 성도와 교회
성도는 개인적인 기도 생활이 삶의 한 부분으로 이어지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어떤 정해진 자리에서 미리 맡은 순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형식적인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무도 자기를 보는 눈이 없는 골방에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얼마든지 기도하는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하는 은밀한 골방 기도는 오직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교회가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에도 진정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올바른 기도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기도의 영역처럼 온갖 미신으로 얼룩져 있는 부분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 내는 수단' 차원에서 기도를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의 기도에 이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다분히 미신적인 기도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원리를 잘 깨닫고, 적용해 나가는 기도 생활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와 교회
성도는 사랑의 실천을 삶 가운데 현실적으로 실행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의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자기만이 아는 은밀한 사랑의 내용들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순간적인 충동심에 이끌린 감정으로 잠깐 나타내고 마는 동정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성도들은 물론이려니와 자신의 손길이 미치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는 헌신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정의하는 사랑이란 자기 희생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은 그리스도인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이며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사랑의 원천자이시오, 이 생명의 능력을 몸인 교회에 수여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천마디 말로써 떠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도라 한다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실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 교회
성령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셔서 역사하실 때에 그 사람에게는 '진리를 아는 지식의 증가와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의 발휘'가 나타나게 됩니다. 만일 진리를 아는 것 그 자체에 머물러서 실천이 뒤따르지 않게 된다면 이를 성령의 역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제아무리 드라마틱한 체험을 했어도 그것이 진리의 체계에 걸맞지 않는 것이라면 이 또한 성령의 역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진리의 체계란 건강한 교회를 이루는 원리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다움을 가장 성경적으로 이루는 일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령의 은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데 목적을 두고 나타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충만하게 입으면 입을수록 상대적으로 성도에게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실천하는 능력이 증가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는 역사를 집행하셨고 이후 성도들로 하여금 이것을 깨닫도록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성도의 삶은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써의 역할을 온전히 다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과 관련하여 그에게 비로소 은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며 이것이 은사를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잘 섬기고 교회를 더더욱 교회답게 이루어 나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은사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항상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된 데서 나오는 것이며 반드시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교회에 덕을 세움이 없이 자기 혼자 스스로 도취되고 자기 개인의 즐거움이나 유익에 머무는 것이라면 그것이 제아무리 드라마틱한 것이라 할지라도 은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결어
이상으로 지금과 같이 배도한 교회가 제도권을 형성함으로서 도도히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비상 시기에, 과연 어떻게 해야 성경의 교회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간략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현실 교회의 타락한 모습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가치도 없으므로 생략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우리의 신앙적 용기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나쁜 태도, 곧 옳은 것이 무언인지 뻔히 알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개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썩은 물에 담근 발을 빼지 않고서는 맑은 물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종교 개혁자들의 모범들을 눈 여겨 볼 때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도 현재의 그릇된 방식에 길들여져 버렸습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들이,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계속 거기에 머물듯이, 우리 중에도 현재의 제도권 교회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선뜻 뛰쳐나와야 하는 문제와 만나게 되면 주저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기존의 교회를 나오는 것만이 대안은 아니고, 여기서 그것을 장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차선의 방법일 뿐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결과적으로는 거기에 동조하는 우리 자신의 모순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개선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 실제로 온갖 부패한 요소들을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안되면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자신이 탄 배가 죽음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어쨌는지 모르겠으나, 교회개혁의 당위성과 방법론에 대하여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이만큼 충분하게 제시한 논증을 읽고 난 이제부터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책임은 이제 자기 자신의 몫이 될 것입니다. 공은 지금 '나 자신'에게로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야만 합니다. 칼빈과 같은 분도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추방지의 난민 교회를 섬길 때, 교회로부터 생활을 뒷받침 받지 못하자 스스로 자비량하여 하숙을 치고 옷 만드는 공장에서 일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넘치도록 연구해 냈고, 개혁 교회를 훌륭하게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의 때보다도 더 명확하게 진술된 진리의 글들을 소유했기 때문에, 사실은 칼빈보다도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이요, 그래서 믿음의 선지들이 수고해 놓은 진리를 따라 그대로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칼빈의 마음에 있었던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 그것이 우리에게도 있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입니다.
끝으로 위에 열거한 내용들은 핵심 사항만을 꼭 집어낸 것이요, 결론만을 제시한 것입니다. 각 항목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성경적 근거에 대한 좀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경우 반드시 연관된 성경 강론들을 주의 깊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작은 실천과 결단이 우리 주님의 나라의 거룩한 회복에 호리만큼이나마 기여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를 위하여 사시고자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우리 주님의 넘치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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