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창원한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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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천우 목사(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의 글입니다. 개혁교회를 이해하고 누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개혁 교회를 누리는 삶(2)

이천우 목사(개혁주의 신앙공동체)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사

- 개혁교회의 정통성 회복을 위하여 -

 

초대 교회 시절 교회는 이단과 사이비와 세속주의의 숱한 도전을 받았지만 굳건한 믿음 위에 서서 견고히 신앙을 사수했습니다. 하지만 4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교회는 외세의 공격이 아닌, 내부의 타락으로 자체적으로 변질되어 로마 카톨릭이라고 하는 거짓 교회가 무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칭 교회의 영광을 더럽혔습니다. 하지만 중세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은혜를 힘입어 교회는 개혁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참된 교회의 모습을 세상 앞에 당당하게 비춰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다시 4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곳곳의 개혁 교회들이 새로운 사이비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교회 회복의 길 그것은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데서 이룰 수 있습니다.

 

제네바 교회 요리문답(Geneva Catechism, 1541년)

 

칼빈은 교회의 자녀들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부터 끊임없이 교육 받지 않으면 그러한 교회는 참으로 개혁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교회가 행하는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고 자신이 집필한 기독교 강요를 요약한 요리문답을 만들어 신앙 교육 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사도신경의 모델을 따른 것으로서 1536년에 초판이 나온 후 1559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증보판이 발행되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도 개혁 교회권의 필수적인 신학 교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칼빈은 1차 제네바 목회 시절시 교회 개혁에 집중적으로 매달리게 되는데 가령 당시 방만하게 사용되던 예배 음악도 개혁하여 시편 찬송을 도입했습니다. (칼빈은 추방된 후에도 목회지인 스트라스부르크에서도 이 작업을 계속하여 시편 찬송을 예배 음악으로 계속 사용하였고, 사람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고양시키는 오르간 같은 악기 사용을 금지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육에 집중함으로 전년도 1536년에 출판한 기독교강요를 간추려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제네바 신조로 공포하였으며(1537, 2, 18), 이것을 다시 요약하여 21개조로 된 제네바 교회 신앙 문답서를 작성한 후 제네바 시민들로 하여금 고백하게 하였습니다(1537, 4, 27). 이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된 제1스위스 신앙고백(1536년)과 더불어 개혁교회 진영의 최초의 신앙고백입니다.

 

칼빈은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거의 ‘교회의 존립’ 차원에서 보았는데 이 사실은 그가 핍박을 받아 제네바를 떠났다가 다시 의회의 재 초청을 받게 되었을 때 교회 안에서 ‘요리문답교육’을 허락할 것을 조건으로 초청에 응한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처럼 칼빈에게 있어서 올바른 교회의 설립은 올바른 신앙고백과 분리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칼빈은 많은 반대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에는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어 스트라스부르크로 가게 됩니다. 칼빈은 이곳 추방지에서 피난민들의 교회를 맡아 설교하였으나, 사례비를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비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한 일은 큰 집을 빌려서 하숙을 치는 일이었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따라서 궁리 끝에 옷을 만드는 재단사로 취직하여 생계를 해결하였습니다. 칼빈의 일과는 오전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시편 주석 연구 및 기독교강요 개정 작업에 몰두하는 일이었으며, 이곳에서 기독교강요 제2판을 출판하게 됩니다. 부처의 권고로 비록 결혼 후 8년 만에 죽게 되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을 위하여 온갖 정성으로 헌신해 준 두 남매가 있는 미망인과 결혼한 얼마 후 칼빈은 초청에 응하여 다시금 제네바로 가게 됩니다.

 

칼빈은 1541년 9월 1일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고, 1564년 5월 27일 이곳에서 임종할 때까지 목사 중의 최고의 목사로서 직무를 감당하게 됩니다. 그는 돌아온 즉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의지와 이성이 우리들의 사고와 우리들의 일을 지배하지 않도록 합시다. 육체에 속한 일을 추구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부분을 우리들의 유일한 목표인 그분에게 돌려드립시다.” 칼빈은 이러한 선포 하에 곧장 373문답으로 된 요리문답을 작성하여 가르쳤습니다. (1545년도에는 라틴어판 발행). 또한 칼빈은 ‘제네바 교회 헌법’을 발표하여 교회 조직을 목사와 교사, 장로, 집사 등의 네 직분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이후 개혁교회 정치 체제의 근본적인 구조로 자리잡게 됩니다.

 

칼빈의 이 요리문답은 이후 개혁 교회원에서 나오게 된 요리문답들 작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가령 여기 1541년의 칼빈의 요리문답은 1556년에 영어판이 되어 제네바에 나타나게 되고 존 낙스가 이끌던 스코틀랜드 교회에도 도입되게 됩니다. 제네바 교회 요리문답 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인생의 목적인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형식은 훗날 1563년 작성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에서 “사람이 생사간에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로 1648년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 각1문에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로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네바 교회 요리문답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개혁 교회권에서 오랜 동안 성경 교육 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참고로, 최근 들어 칼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관련 서적들이 출판되면서 칼빈의 이름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을 봅니다.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그의 본래 이름은 꼬<코>반, 꼬<코>뱅 혹은 깔<칼>뱅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칼빈입니다. 그의 이름이 칼빈으로 바뀐 것은 1523년 파리에 있는 말슈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로 그는 입학원서를 쓰면서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화하여 칼비누스<Calvinus>라고 직접 기록하였고 이후 다시 칼빈<Calvin>이라고 고쳤습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land Confession, 1560년)

 

1560년 8월 1일 스코틀랜드 의회에 하나의 청원서가 접수되었습니다. 이 서류는 당시 일고 있던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온갖 악습들을 제거하고 성경에 입각한 예배의 회복 등등에 대한 청원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보자면 ‘교황 제도의 제거, 예배와 권징의 순수성 회복, 경건한 목사 양성을 위한 교회 재정 마련, 학문의 장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등의 내용입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개혁교회의 중심에 서 있던 존 낙스(John Knox, 1505-1572)에게 먼저 신앙고백 작성을 요청하게 됩니다.

 

낙스의 초기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1540년에 그는 사제직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고위 당국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맨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 영국과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독립을 지켜낸 사람 그가 존 낙스입니다. 그가 땅에 눕혀질 때 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 여기에 누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존 낙스는 당시 제네바의 칼빈 밑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죠지 위사트(George Wishart)가 1543년부터 본격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한 개혁주의적인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위사트는 1548년에 ‘제1스위스 신앙고백’(1536년 작성)을 영어로 번역 출판함으로써 스코틀랜드 개혁자들에게 성경 교리에 대한 좀더 넓은 시야를 열어주었습니다. 위사트는 곳곳에서 개혁 신앙을 외쳤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결집시켰습니다. 낙스의 사상은 그의 스승 조지 위사트를 통하여 받았는데 그가 로티안 지방을 순회하는 동안에 녹스는 한결같이 동료 겸 경호원으로서 같이 다녔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처럼 담대한 설교자를 암살하려고 온갖 계책을 다 동원하였지만 당시 낙스는 양날이 번쩍이는 칼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면서 설교하는 위사트 옆에서 그를 경호하였습니다.

 

이후 위사트가 비톤(Cardinal Baton) 추기경에게 체포되어 화형 당하게 되자 존 낙스는 남은 무리의 추대를 받아 세인트 엔드류성에 머물면서 지도자로서 개혁 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곳에서의 3개월이 그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칼빈이 제네바에서 파렐에 의하여 하나님의 손에 길들여진 것처럼, 존 낙스 자신도 조용한 학문 연구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스코틀랜드를 위한 영적 전쟁터로 내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1547년 6월 프랑스 지원병의 도움으로 총독의 군대가 세인트 앤드류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낙스는 체포되어 갤리선의 노예로 끌려가 19개월 동안 노예의 사슬에 묶여 있게 됩니다.

 

낙스의 노예 생활 19개월 동안에 겪은 끈질긴 고통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광산에서 당했던 고난과 비교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명에서 6명이 한 조를 이룬 상태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노를 젓는 의자에 앉자 하루 종일 노를 젓는 고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고통을 견디느니 보다는 차라리 프랑스의 정책이나 신앙을 따르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이처럼 끔찍했던 경험을 거의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갤리선에서 건지십니다. 영국 정부의 정치적 개입에 힘입어 석방되게 된 것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낙스는 에드워드 6세가 다스리던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설교하면서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과 예식 법규 제정에 공헌했고 영국 청교도들이 영국국교회 안에 남아있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이렇게 낙스는 개혁 신앙 성향의 에드워드 6세가 다스리던 영국에서 설교하면서 개혁의 메시지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후 철저한 카톨릭 신자인 메리 여왕이 즉위하게 됨에 따라 위기는 다시 초래되었고, 결국 1554년 1월 존 낙스는 제네바로 피신하여 칼빈과 교제하면서 연구하는 과정을 보내게 됩니다. 이후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1557년에는 다시 한번 제네바로 피신하는 과정을 겪을 정도로 힘차게 개혁 운동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이후 낙스는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제네바에 머무르면서 칼빈, 불링거, 베자 등과 교제하였습니다. 이때 낙스는 신앙을 위협하는 군주에 맞서 대항할 권리와 의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칼빈의 요청에 따라 영국 피란민 교회의 목사가 되어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때까지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1559년 5월 2일 존 낙스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존 낙스의 입지가 이렇게 개혁 운동의 중심에 있었기에 의회는 청원서를 접수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신앙고백 작성을 의뢰하였던 것입니다. 존 낙스도 때마침 오래 전부터 신앙고백을 준비하고 있었던지라 서둘러 다른 다섯 명의 존인 동료들(John Willock, John Winram, John Spottiswood, John Row, John Douglas)과 작업을 마무리 한 후 나흘 만에 초안을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이 문서는 의회의 주도면밀한 검토를 마친 후, 1560년 8월 17일 마침내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에 기초한 교리’라는 제목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 공포됩니다. 이 신앙고백이 갖는 특징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 교회의 표지 세 가지를 명확하게 선언하는 부분은 보다 특별합니다. 가령 이것은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표지와 어떻게 교리를 판단하는가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18장에서 고백되는데,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전파, 둘째, 성례의 순결한 시행, 셋째, 권징의 정당한 집행 등 세 가지가 실행되는 데서 참 교회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구원을 누리는 삶이 온전한 교회를 이루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도 본 신앙고백이 갖는 특별한 점이라 하겠습니다(16장).

 

낙스는 60세가 되던 1572년 11월 24일 임종을 맞게 됩니다. 정오경에 낙스는 아내가 읽어주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들으며 부활의 소망 중에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오후가 되자 그는 아내에게 “내가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을 읽어주시오”라고 부탁하였고, 요한복음 17장을 들으면서 잠들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잠이었으니 주님께서 그를 부르사 영원한 안식의 삶을 시작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는 옛적 1546년에 로마 교회가 ‘트렌트 회의’를 열고 결정한 것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1580년에 한번 더 신앙고백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전자는 ‘제1스코틀랜드 신앙고백’으로 후자는 ‘제2스코틀랜드 신앙고백’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후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자, 스코틀랜드 교회는 에딘버러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이것을 주도면밀하게 검토한 후,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일치하며, 우리 교회의 공적인 교리, 예배, 권징, 정치와 위배됨이 전혀 없다’고 선언하면서 1647년 8월 27일에 만장일치로 채택하게 됩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들도 1648년 7월 20일과 28일 각기 스코틀랜드 교회에 의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공표되었고, 의회는 1649년 2월 7일 두 요리문답을 승인하였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1561)

 

벨기에에 신앙고백은 17세기에 라틴어로 지명된 ‘벨기에 고백(Confessio Belgica)’에서 전해져 왔습니다. 벨기에(Belgica)는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나뉜 남과 북으로 된 베네룩스(Lowlands)를 가리킵니다. 당시 통치자는 스페인 왕 필립 2세로서 그는 개혁교회를 무자비하게 핍박하였습니다. 필립 2세는 아버지 챨스 5세의 정책을 보다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설득시켜 나갈 것을 마음 먹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로마 교회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육적인 탄압을 수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을 탄압하는 가공할 만한 기구인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단'을 멸절하기 위해 엄청난 형벌을 가했습니다. 개혁신앙과 관련한 어떤 행동이나 말로서 이단적인 낙인이 찍힌 자는 곧 국가적인 적이 되는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재판은 종교의 자유를 전적으로 질식시키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개혁신앙을 독력하는 어떤 전단에는 다음과 같은 절규가 써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네덜란드 신교도들의 가장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복음을 읽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비록 우리의 적들이 우리들의 신앙과 무죄를 증거하기를 강요할지라도 감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도덕한 사람들이 아니요 술취한 자들이 아니며 우리는 새로운 반열에 속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려고 날조하는 모든 형벌에 복종할 각오가 되어있다.”

 

이렇게 필립 2세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남부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수많은 개혁자들이 순교하게 되는데 가히 그 숫자는 초대 교회 당시 로마 제국에 의해 자행된 순교자들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확산 원리가 그러했듯이 이 박해로 말미암아 오히려 네덜란드 전역으로 개혁교회는 확산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개혁교회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를 진술한 벨기에 신앙고백이 남네덜란드 벨지움의 베르겐 출신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 1522-1567)에 의하여 작성되게 됩니다. 그는 개혁교회의 신앙과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 성경을 연구하였고 24세 때 개신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고국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자 영국으로 망명하여 에드워드 6세의 도움을 받습니다(1548-1522). 이후 귀도 드 베레는 다시 고국을 떠나 제네바로 갔고(1556년), 거기서 칼빈과 교제하게 됩니다. 결혼 한 후(1559년) 같은 해에 네덜란드로 귀국하여 두닉(Doornik)에서 3년간 목사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당시 ‘십자가의 아래’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프로테스탄트들이 받았던 극심한 박해에 자극을 받아 윌리암의 종군 목사 모데터스(Modetus)와 연락을 취하면서 신앙고백을 작성하게 되었는데 이 고백서는 2년 전에 칼빈의 구상(Calvin's design) 하에 작성된 프랑스 개혁교회의 ‘갈릭 고백서’가 기초가 되었습니다.

 

귀도 드 베레는 당시 라이덴 대학의 신학 교수인 아드리안 드 사라비아(Adrian de Saravia)와 오렌지 공의 궁정 목사인 모데투스(H. Modetus)와 윙겐(G. Wingen)의 도움 아래 37개 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을 프랑스어로 작성하였습니다. 귀도 드 베레는 1년 후인 1562년에 ‘프로테스탄트들이 결코 국가에 대한 반역자가 아니며, 단지 성경에 근거하여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려 할 뿐임을 입증하려 한다’고 하면서 작성한 신앙 고백문을 스페인 황제 필립 2세에게 바치게 됩니다. 이때 동봉한 편지에서 '정부의 모든 법에 순종하겠다'는 전제 하에 ‘하지만 신앙 고백서에서 밝힌 사실들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등가죽이 벗겨지고, 혀가 잘리고, 온 몸이 불 속에 던져지는 등등의 온갖 핍박’을 감수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핍박은 중단되지 않았고 귀도 드 베레 자신도 천만의 순교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1567년 5월 31일 순교의 대열에 가담한 믿음의 전사가 되었습니다.

 

‘월룬 고백’(Walloon Confession), ‘네덜란드 고백’(Netherlands Confession)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벨기에 신앙 고백은 이후 네덜란드어로 번역이 되어 배포됨으로써 엔트웝 회의(1566)와 베셀 회의(1568) 등의 여러 회의에서 약간의 개정 작업 후 공식 신앙고백서로 채택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공직에 취임하는 모든 사람은 이 신앙고백을 승인해야만 할 정도로 권위 있는 문서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후 도르트 총회(1618-19)는 벨기에 신앙고백의 권위를 재 인정하면서 의미의 명확성을 위하여 용어와 길이를 약간 수정하여 당시 통용되던 중요한 몇 개의 언어로 번역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후 16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벨기에 신앙고백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더불어 네덜란드 교회 및 대륙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혁파 교회권의 중요한 신앙고백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에큐메니칼한 신조와 교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3-7장에 언급되는 성경관, 8장-11장에 진술하는 삼위일체론, 19장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과 구별에 관한 진술, 22장에서 밝히는 ‘이신칭의’라는 개혁교회의 핵심적 교리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례로 9장에서는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사도신조와 니케아 신조와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받아들입니다. 또한 이 신조들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고대의 교부들이 합의한 신조들도 받아들입니다”라고 하여 에큐메니칼 신조를 바탕으로한 전통적 교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고대로부터 정죄받았던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을 배격하여 혐의를 받고 있는 이단정죄를 벗어나려는 의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벨기에 신앙고백은 전통적인 개혁파 신학의 질서를 따르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고유의 신학, 본문 1-11장), 인간론(인류학, 본분 12-15장), 그리스도론(본문 16-21장), 구원론(본문 22-26), 교회론(본문, 27-35), 마지막으로 종말론(본문, 37장) 등입니다. (본문 36장은 신정주의의 사회 본질에 대해서 다룹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은 객관적인 교리의 순서로 이어가지만 신앙 경험이 풍성하게 풍기는 따뜻한 정신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서 벨기에 신앙고백의 특징 한 가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독특한 역사적 상황 아래서 네덜란드 개혁교인들이 겪는 경험들이 27장 공교회에 관하여 진술하는 가운데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 교회는 이 세상의 온갖 박해를 막으시는 하나님이 보존하시고 지원하신다. 교회는 한 때 사람들 눈에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수가 있다. 그것은 아합의 위험한 통치기간을 보기로 들 수 있으나 그 때에도 주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천명을 남겨두셨다….” 이 부분은 당시 필립 2세에 의한 박해와 학정, 처형 등의 정치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자신들이 신앙적 지조를 지키는 것을 마치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천명에 비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28조에서 “어디든지 하나님이 세운 회중에 가입하는 일은 시장이나 군주의 칙령이 반대하거나 죽음이나 육체의 형벌을 과하는 일이 있더라도 모든 신실한 신자들의 의무이다. 이렇게 해서 교회에서 후퇴한 사람이나 가입하지 않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 ‘하나님이 세우신 개혁교회의 온전함과 무결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박해와 죽음을 맞닥뜨려도 의연할 수 있는 태도’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31장에서는 교회의 직분자로 ‘목사, 장로, 집사’를 명확하게 언급한 것도 큰 특징입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교황, 추기경 등의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한 직분들을 세워 운용하였던 반면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종교개혁 중에 형성되던 교회의 새로운 직분들을 명확하게 신앙고백서에 명시하였던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

 

프레데릭 3세는 팔라티네이트를 다스리는 영주로 수도인 하이델베르그의 한 낭만적인 성에 살면서, 1559년부터 1576년까지 자신의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당시 프레데릭 3세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레데릭 3세의 통치 초기에 팔라티네이트는 성만찬 교리에 대한 이해 차이로 말미암아 루터파와 멜랑흐톤파 사이에 큰 갈등이 빚어지게 됩니다. 루터파는 그리스도 인성의 ‘편재성’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 '안에, 그와 함께, 그리고 그 아래' 물리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교리는 1559년에 하이델베르그와 이웃한 영지인 뷰르뎀베르그 영지의 개혁자인 존 브렌츠에 의하여 스투트가르트 신앙고백에 포함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신앙고백서는 멜랑흐톤의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배척한 것이 되었는데 이후 루터파에 있어서 그리스도 인성의 편재성 교리를 처음으로 진술한 공식 문서가 됩니다.

 

당시 팔라티네이트는 루터와 존 브렌츠의 소요리문답을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형편에 다시금 스투트가르트 신앙고백이 작성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성 교리는 멜랑흐톤의 견해를 반대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공표된 것입니다. 팔라티네이트의 선제후 프레데릭 3세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루터파와 존 브렌츠의 요리문답을 대신할 새로운 요리문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1560년 6월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신학 교수요 교회의 감독이었던 틸레만 헤세시우스와 쯔빙글리파 교수인 디아콘 크레비츠 사이에 전개된 5일간의 공개 논쟁은 이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인 프레데릭 3세로 하여금 새로운 요리문답의 필요성에 더더욱 다가가게끔 하였습니다. 결국 1562년 초에 프레데릭 3세는 팔라티네이트를 위한 새로운 요리문답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1563년 1월 19일자로 나온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초판의 서문에 의하면, 신학교 교수단, 감독들, 팔라티네이트 교회의 주된 직원들의 노력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화란 신학자 헨리 알팅(Henry Alting)은 팔라티네이트와 폭 넓게 접촉한 이후 1644년에 연구 결과를 밝히기를, 불링거의 제자였던 자카리아스 우르지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와 카스파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견해에 따르면 이 둘 중의 한 사람이 기본적인 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최종적인 편자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자에 대한 견해는 일치하지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이 한 팀의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입니다. 자카리아스 우르지누스와 카스파 올레비아누스가 이 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자카리아스 우르지누스는 이미 1561년에 323문답의 요리문답, 1562년에 108문의 요리문답 등을 작성한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건대 아마도 그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작성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프레데릭 3세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에서 요리문답의 작성 동기로 “우리들의 학교와 교회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강단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만일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생의 초기에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게 되면, 그것은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 그리고 세속적 문제와 영원한 문제에 대한 개혁을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는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서 이에 따라서 가르치고 행동하며 살도록”이라고 했습니다. 정리해 보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작성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교리적 가르침의 틀을 제공하고, 두 번째로, 설교의 지침을 마련하며, 세 번째로, 단일한 고백서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독일어로 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초판은 1563년 2월말에 출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독일어 성경이 절로 나뉘어지지 않았던 때였던 까닭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성경 본문은 해당 문항의 맞은 편 여백에 장(章)으로만 제시되었습니다. 초판의 경우 각 문답의 일련 번호도 없었고 지금처럼 52주로 나뉘어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한 달 후인 3월말에는 두 번째 판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 때는 '성만찬이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다루는 제 80문이 삽입됩니다.

 

카스파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이 80문의 내용을 덧붙이도록 프레데릭 3세를 격려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후 곧 이어서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라틴어 판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80문에 몇 가지가 첨가된 형태로 제3판이 다시 4월경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63년 11월 15일자 서문과 함께 ‘팔라티네이트 교회의 새로운 규례’ 안에 넣어져 다시 출판됩니다. 바로 이 판이 이후부터 공인 본문으로 취급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그 성격에 있어서 철저하게 개혁파적입니다. 도르트 회의에 참석하였던 온 유럽의 대표들은 이 사실에 이구동성으로 동의하였습니다. 한 영국 대표는 말하기를 “대륙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은 수천톤의 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내용들로 가득찬 요리문답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이같은 개혁적인 특성은 문답의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제시한 수많은 성경 구절들에 의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그 이전에 나타났던 어떤 요리문답들 보다도 더 많은 성구들을 제시하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요리문답들은 대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성례에 대한 부분 등등의 네 가지 중요한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저자들은 이 네 가지 내용을, 비참, 구원, 그리고 감사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위로’라고 하는 주제로 놀랍게 구성하였습니다. 개혁자들에 의해서 성경에서 다시 발견된 복음의 위로는 요리문답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비참에 대한 첫 번째 부분은 죄를 가르치고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율법의 요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은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의 유일한 위로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장이 되는 성례에 대한 부분으로 마칩니다. 그리고 감사에 대한 세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구원하신 것에 대해서 신자가 하나님께 나타내는 감사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감사의 삶에 대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세 번째 용도’를 설명하고 있으며, 주기도문에 대한 설명으로 마쳐지는데 116문에서 그 이유를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원래 팔라티네이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개혁신앙을 위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전 세계의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지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도르트 회의는 1563년에 라틴어로 작성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교회의 정식 학습교리서로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목사는 임직시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그대로 믿을 뿐 아니라 반드시 가르칠 것을 서약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39 Articles of Region, 1563년)

 

영국쪽에서 작성된 최초의 신앙고백은 에드워드 6세(Edward Ⅵ)의 명령을 받은 크랜머(Cranmer) 감독이 1552년 11월에 작성한 ‘42개 신조’입니다. 크랜머는 칼빈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영국의 종교 개혁을 칼빈주의적으로 이끌어갔습니다. 42개조 신조에서 성찬에 관한 부분을 보면, 루터의 편재설, 카톨릭의 화체설, 쯔빙글리의 상징설을 부정하고 칼빈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42개 신조를 승인한 후 명령을 내려 소요리문답서와 함께 출판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6세가 갑자기 죽게 되어, 철저한 카톨릭 신자인 메리(Mary) 여왕이 즉위하게 되자 영국의 교회 개혁은 뒤로 후퇴하게 됩니다. 그래서 존 녹스의 경우도 제네바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의 의식과 제도에 있어서는 로마 교회의 입장을 선호하는 반면 신앙과 교리에 있어서는 개혁 교회의 입장을 선호하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메리의 뒤를 이어 영국의 왕이 되었을 때, 영국의 교회는 다시 한번 개혁의 기회를 맞게 됩니다. 파커 대주교는 42개 신조의 개정을 여왕에게 건의한 후 상하 양원의 심의를 얻어 39개 조항으로 조정된 신조를 1563년에 작성하였습니다.

 

39개조 신조는 어거스틴과 칼빈에 의해 발전한 예정론을 고백하고 있으며(17장), 로마의 7 성례를 부정하고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인정하며(25장), 성찬에서의 영적 임재설(28장)을 취하는 등등의 개혁 교회권의 신앙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훗날 감리교는 이 39개 신조에서 예정론 같은 것을 뺀 25개 신조를 채택하게 되니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감리교의 25개 신조도 사실은 칼빈주의의 영향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1643년에는 이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를 사수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리게 되며 내친김에 아예 보다 적극적인 신조 작성 작업으로 전환되게 되어 개혁 교회권의 마지막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문서들이 작성되게 됩니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종교 개혁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당시 스위스의 경우 각 도시들은 쯔빙글리가 루터보다 1년 앞선 1916년도부터 선포하기 시작한 개혁적 메시지에 따라 1529년 초부터는 본격적인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미사와 의식과 수녀원 제도들을 폐지하고, 각종 성상들을 깨트려버렸으며, 온갖 그림으로 치장되어져 있는 성당 벽들을 하얀 색으로 칠해버렸습니다. 당시 쯔빙글리는 몇 가지 악기를 손수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지만 성당의 오르간들도 치워버리면서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쯔빙글리는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 성경으로써 검토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오르간, 성상, 그림, 축제, 성자의 날, 가두 행렬 등등의 중세의 행습들을 폐지시켜 나갔습니다. 또한 쯔빙글리와 개혁자들은 1524년에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보급하였고, 1526년에도 이르러서는 루터의 독일어 번역본이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530년에는 쯔빙글리의 팀에서 성경 전체를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제 일반 군중들도 쉽게 성경을 소유하고 읽을 수 있었고, 쮜리휘 곳곳에는 주말 성경공부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로마 교회가 그 동안 얼마나 잘못된 것들을 가르쳤던가가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교회 개혁 운동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일어났으니 저마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천 가지 만 가지의 신앙들을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쯔빙글리의 개혁이 미흡하다고 보면서 좀더 진보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재세례파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1534년에는 오늘날 ‘뮌스터 시의 재난’으로 알려진 비극적인 사건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지 아니한 신앙의 자유가 초래한 비극으로서 오늘날 한국적인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개혁 교회는 믿는 바의 도리를 확정하고 통일해야 할 필요성을 더더욱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슬프게도 쯔빙글리가 개혁교 쮸리히와 카톨릭 자치 주 카펠(Kappel)의 전투시 종군 목사로 참여했다가 아들과 함께 전사하게 됩니다. 따라서 같은 해인 1531년 12월 9일에는 하인리히 불링거(Hienrich Bullinger)가 그의 뒤를 이어 쮸리히의 수석 목사가 됩니다. 그는 이때부터 쯔빙글리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44년 동안 이곳을 무대로 개혁 운동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로마 교황 바오로 3세가 1537년에 교회 공의회를 소집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에 따라 그에 대항하여 스위스 각 도시 시장들의 추천을 받은 신학자들이 1536년 1월 30일 모임을 갖고, 28개 장으로 구성된 스위스 교회들 전체가 사용할 신앙고백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것을 훗날 30년 후에 작성되는 제2 헬베틱 신앙고백과 구별하기 위하여 헬베틱은 라틴어로 스위스라는 뜻인데, 제1 헬베틱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불링거는 초기에 루터의 저서 멜랑히톤의 ‘신학요의’등을 읽으면서 개신교 사상을 접했습니다. 1549년에는 칼빈과 함께 ‘쮜리히 일치 신조’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로서 쯔빙글리 파와 칼빈파가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불링거는 교회론에 관한 작품을 많이 저술하였습니다. 교회의 외적 표시는 말씀과 성례라고 하였으며, 그러면서 재세례는 부정하였고, 인효론을 부정하였습니다. 교회의 ‘내적 표지’는 성령의 교제, 신실한 신앙, 그리스도의 자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이며 사도적 계승은 서품에 의해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과 삶을 계승함으로 해서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점에서 카톨릭 교회의 교권과 속권의 일치를 비판하였습니다.

 

제1스위스 신앙고백 작업에서 막중한 역할을 한 불링거는 좀더 나은 신앙고백의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무려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칼빈과의 협력 속에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게 됩니다. 이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중인 1564년에 쮜리히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 아내와 세 자녀가 죽고 불링거 역시 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불링거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연구에 박차를 가한 후 자신이 죽으면 쮜리히 시장에게 보내달라는 유언장과 함께 라틴어로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불링거가 잠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1566년 5월 그는 급박한 도움을 요청하는 프레데릭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프레데릭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하여 보급시킨 데 대한 모함을 받아 황제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게 되자 자신이 어떤 식으로 신앙을 진술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하여 불링거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불링거는 때마침 작성해 두었던 문서를 보내주게 됩니다. 이것을 받아 본 프레데릭은 대단히 만족해 하면서 독일어와 라틴어로 출판하였고 따라서 불링거의 문서는 공식적으로 교회 앞에 공개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좀더 나은 신앙고백의 필요성에 직면한 스위스 교회는 각 지역 대표들이 참석한 교회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때 불링거가 작성한 신앙고백에다 약간의 손질을 한 후, 1566년 3월 12일 공식적인 제2스위스 신앙고백으로 공표하게 됩니다. 이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20,000 단어 30개 장으로 구성된 문서로서 개혁파 신앙의 핵심을 명쾌하게 드러내줍니다. 1-16장으로 구성된 첫번째 부분에서는 교리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둘째 부분인 17-30장에서는 실제적인 적용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불링거는 당시 개혁 교회권에서 대단히 뛰어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전체 성경에 대한 주석을 1532-1546년 사이에 집핍하였으며, 또한 데카데스(Decades)라는 50개의 교리 설교를 묶은 그의 설교집은 한때 영국 개혁교회 목사들의 필독서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불링거가 작성한 이 두 번째 스위스 신앙고백은 16세기 중반기 중 수립된 개혁신학의 본질적인 진술을 대표하는 문서로서 국제적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여 네덜란드어, 영어, 폴란드어, 이탈리아어, 헝가리어, 터키어, 그리고 아랍어 등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도르트 신경(Canons of Dort, 1618-1619)

 

1618년 11월 13일 화란의 도르트에서 화란 의회에 의해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오늘날까지 화란의 표준 교리들 중의 하나로 알려진 도르트 신조(Canons of Dort)가 작성되는데 이 신조는 예정론과 이에 부수된 문제들에 대한 칼빈주의의 입장을 수정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천명하고자 했던 알미니우스파를 정죄하였습니다.

 

제네바 학파를 이끌던 칼빈의 수제자 베자가 확정한 ‘전택설적 예정론’에 반대하던 사람으로 라이덴 대학(Leiden University)의 교수 야곱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가 있었습니다. 1580년대에 베자에게서 배우던 알미니우스는 위켄보르케트와 함께 칼빈의 예정론을 반박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자주 제기했습니다. 베자가 죽은 후 알미누우스와 위켄보르케트의 활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알미니우스가 1609년에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스승의 입장을 정리하여 정통 칼빈주의에 대항하게 되는데 1610년 알미니안들 43명은 예정론을 주장하는 정통파 입장에 반대하는 항변서(Remonstrance)를 위켄보르케트의 작성 하에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으로서 발표했습니다.

 

1. 하나님은 개인의 신앙과 불신앙의 예지에 기초하여 선택하시고 또한 유기하신다.

2.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3. 믿음과 선행에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4. 하나님의 은혜는 거절될 수 있다.

5. 중생자의 견인에 관하여는 좀더 연구할 여지가 있다.

 

이와 더불어 알미니안들은 화란 교회의 신조를 자신들의 주장에 따라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Gomarus) 진영의 정통파에서는 즉각 ‘반항변서’(Counter-Remonstrance)를 냄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재천명하게 되어 당파간의 격렬한 논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논쟁은 시간이 흐르면서 예정론 이외의 다른 문제들로도 번져서 뒤얽히게 되었습니다. 알미니우스파는 좀더 자유분방하고 관대한 교회, 국가의 감독을 받는 교회를 원했고 정통파는 이를 교회의 독립성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당시 화란의 내전과 맞물려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화란 대통령 마우리스(Maurice)는 정치적으로 정통파를 옹호했습니다. 도르트 회의는 이러한 상황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따라서 회의는 당연히 정통파 대표들이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올덴바르네펠트의 강력한 후원을 희구하던 알미니우스파들은 그들의 후원자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1618년 11월부터 1619년 5월까지 7개월간 154번의 정식상의 교회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교회회의에는 각지방 교회회의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참석했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독일의 칼빈주의 교회의 대표들도 고문으로 참석했습니다. 화란 의회는 또 고문으로 5명의 신학교 교수와 18명의 위원을 선임하여 정식 대표는 총 56명에 이르렀습니다. 회원들은 알미니우스파의 저작물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정통이 아니요,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결론짓게 됩니다. 그래서 알미니우스파의 견해에 반대하는 정통교리를 작성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도르트 신조라고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렇게 도르트 회의에서 결정된 위의 5대 신조는 각 교리의 첫 자를 따서 일명 ‘튤립(TURIP) 교리’라고도 하는데 화란 개혁교회가 생명과도 같이 여기는 신조로 채택되었습니다. (비록 도르트의 신조는 단지 4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신조는 다섯 가지 항론에 대항하여 편집되었기 때문에 항목상으로는 다섯 가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3번째와 4번째 편은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여 하나로 합쳐서 ‘셋째와 넷째의 핵심 교리’라고 했습니다.) 각 편에는 긍정적인 개혁 교리의 주제를 포함하고 부정적인 부분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오신에 대한 결의를 포함해 놓은 도르트 신경은 모두 합해서 59개의 논설과 34개의 반론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도르트 신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다’는 성경적 교리를 분명하게 확증한 것이요,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인 만큼,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천명한 것입니다. 이 회의가 결정한 핵심 내용들은 이후에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와 같은 알미니안주의의 주요 교리는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4세기에 어거스틴의 전적타락에 반대한 펠라기우스주의와 6세기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주장과 동일 선상에 위치합니다. 따라서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차이는 형식상의 차이가 아니라 내용상의 차이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죄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서로 대립시킴으로 신인협력(神人協力)의 구원관을 가집니다. 반면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도르트 회의는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진행되어온 가장 주요한 논쟁이 재연된 것이라고 하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제출한 신앙 5개조가 도르트 회의에서 거부되었으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계속 발전시키고 전파하였습니다. 이후 이들의 주장은 서구 자유주의 신학의 기반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실천적 경건운동으로 나타나 후에 감리교회의 정신인 메소디즘(Methodism)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의 정신은 앞선 교회가 성경에 근거해서 형성해 낸 신앙고백의 정통성에 의거하여 다시금 ‘개혁되어진 신앙고백’(Confession Reformed)을 이어내고, 그렇게 해서 교회는 자기 시대에서 나아가야 할 보다 더 성경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그래서 자체적으로 계속해서 교회를 보다 더 성경에 가깝게 개혁해 나가는 것(Reforming)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 - 1649)

 

영국 교회의 39 신조에 서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종교 정책에 있어서 중도의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양쪽의 반대를 받게 되니 카톨릭 교회 측에서는 개혁교회 쪽을 지지한다고 보았고 개혁 교회권에에서는 불완전한 개혁을 가속화하여 카톨릭 교회의 잔재로부터 교회를 깨끗케(Purify)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퓨리탄’(Puritan)을 형성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었을 때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를 왕으로 모셔옴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합병합니다. 이 왕이 제임스 1세(JamesⅠ)인데 그는 퓨리탄들의 청원서를 거절하면서 ‘감독 없이 왕이 없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즉 감독 제도를 포기하는 것은 왕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영국사에서 교회가 한 사람의 감독에 의해서 지배되는 체제와 한 나라가 왕에 의해서 지배되는 체제는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장로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장로정치와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정치는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임스Ⅰ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서는 사태를 잘 파악하였으니, 만약에 영국이 청교도들처럼 장로교 국가가 되면 결국 왕권이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독 없이는 국왕이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 대한 회유책으로서 1611년에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의 번역을 허락하였습니다.

 

제임스Ⅰ세가 죽고 난 다음에 찰스Ⅰ세가 국왕이 되었는데 이 찰스Ⅰ세는 영국 성공회에 대한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영국 성공회야말로 가장 깨끗한 전통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찰스 1세는 영국 교회에 대해서 카톨릭 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해서도 감독제를 취할 것을 강요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이에 내전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고, 따라서 영국 안에서도 내란이 일어나게 되어, 1642년에서 1649년까지 왕당파와 청교도들 사이에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내란은 점차적으로 청교도들의 승리로 굳어져 갔는데 이러한 정세 속에서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즉 영국 의회는 당시 격렬한 논쟁이 되고 있던 일련의 신앙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한 신학자들의 회의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개최하게 됩니다. 회원들의 면모로는 영국 교회 소속의 청교도 목사들 121명, 평신도 국회의원 30명, 에라스티안 3명, 스코틀랜드에서 온 자문관 6명 등입니다.

 

회의는 ‘영국 교회의 39개조 신조의 교리를 수호하라’는 명령에 따라 이에 대한 개정 작업에 들어갔지만(1643, 7, 1), 다시 의회의 새로운 요구를 받고(1643, 10, 12), 신조 개정 작업이 아닌 아예 새로운 신조 작성 작업으로 들어가 첫 위원회를 갖게 됩니다(1644. 8. 20). 3년 여의 수고 끝에 신앙고백서 초안이 작성되어 상원에서 통과를 본 후(1647. 2.) 하원으로 넘어갔습니다. 하원에서 심의를 기다리는 동안 스코틀랜드 대표들은 이것을 본국으로 가져가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공표하게 합니다(1647, 8,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첨부된 성경 구절들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끝난 후 마침내 하원에서도 통과됩니다(1648. 6. 20). 여기에 덧붙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주석하고 보충 설명하는 196문답으로 구성된 대요리문답이 작성되었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 위하여 이것을 좀더 간결하게 다음은 107문답의 소요리문답 작성이 마쳐진 후 의회의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1948. 9. 15).

 

총 33장으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장에서 모든 진리의 원천인 성경에 대한 고백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 부분(2-5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며, 세 번째 부분(6-20장)에서는 죄를 범한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6-7장),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8장),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길과 효과(11-20장) 등을 고백했습니다. 네 번째 부분(21-26장)은 기독교 윤리를 다루었으며, 마지막 다섯 번째 부분(27-33장)은 교회와 성례전과 종말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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