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예배의 정신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시작하는 말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는 천태만상으로 다변화 하고 있다. 그 이름만 열거해도 상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종교다원주의 시대나 혹은 포스트모던이즘 시대에 추구해야 할 교회의 다양화를 위한 운동이라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교회의 예배는 결코 인위적이거나 자의적인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형식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선교 130년 동안 이렇다 할 예배 형식의 정형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지금도 온전한 예배가 아닌 형식적이거나 편의위주의 예배 형태를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하게 예배를 드려야 할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우리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예레미야 시대에 유다 왕국은 앗수르에서 유행하고 있던 점성술과 앗수르 궁정에서 유행하던 비술(秘術) 등 갖가지 이방 풍습들이 예루살렘에서도 유행하고 있었다(습 1:8). 심지어 사람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야만적인 의식까지도 출현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좌정하신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자행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행을 서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여호와 신앙의 본질은 희석되었고 너무도 오랫동안 이방 종교 의식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 신앙은 다신교로 혼합되고 말았다. 더 이상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유다 사회는 율법에 대한 경시와 더불어 폭력과 부정이 판치게 되었다(습 1:9; 3:1-7). 더불어 여호와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일어났으며(습 1:12), 혹 누군가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어 항의한다 할지라도 철저하게 무시될 뿐 아니라 오히려 가혹하게 처리되고 말았다(왕하 21:16).
지금 우리에게는 예레미야가 무너져가는 유다 왕국을 바라보았던 선지자의 심정이 필요한 때이다. 본 강의안에서는 작금 다양한 종류의 예배 형태에 빠져있는 한국교회가 온전하게 추구해야 할 예배 형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개혁주의 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왔던 예배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 교회의 예배는 단적으로 교회관으로부터 나오며 교회관은 교회의 표지와 직분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전제하고 칼빈과 개혁교회가 교회의 표지와 직분관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정당한 예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자 한다.
1. 칼빈의 교회론에 근거한 교회의 표지와 직분에 대한 이해
칼빈의 교회론은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 중 ‘거룩한 교회를 믿사오며’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자의 전체수, 천사들이나 사람들(엡 1:9-10; 곧 1:16), 사람들 중에서는 죽은 자든지 아직 살아있는 자들 그리고 산자들 중에서는 어느 땅에 살고 있든지 또 어느 민족 속에 흩어져 있는지 간에 이들이 한 교회요 사회이며 하나님의 한 백성인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이 모두의 지도자요 통치자이며 한 몸의 머리이여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기초가 있기 전에 택하심을 입어(엡 1:4)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모이도록 하셨다.
이제 이 사회는 보편적이며 우주적인데 이는 둘이나 혹은 세 교회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모든 택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가 되고 연합되어져서(엡 1:22-23) 그들이 한 머리에 붙어 있는 동안 한 몸으로 함께 자라며, 함께 결합되고 짜여 가는 것이(엡 4:16) 한 몸의 지체들과 같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이들은 한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상속으로 부름을 받아 함께 살아가는 진정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교회를 거룩하다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 선택되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져서 이 모든 이들이 주님의 말미암아 거룩해지기 때문이다(요 17:17-19; 엡 5:25-32).
<Inst., 1536, II. 21>
이러한 ‘성도의 보존’(De perseverantia sanctorum)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구체적으로 교회의 회원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을 ‘부르심’과 ‘칭의’로써 설명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가끔 택함받지 않은 자들도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선택받은 자가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숫자에 계산되지 않는 사람도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롬 9:11, 25-26; 10:20; 11:7, 24, 28; 호 2:3).
이런 이유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근거한 예정 교리에 근거하여 그의 교회론을 정립했다.
주께서는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목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고 말씀하셨다. 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요 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앞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4-5).
그리스도께서 더할 나위 없는 명백한 증표로써 구분지으셔서 이 표가 보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거기에 교회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며, 이것이 없는 곳에는 참된 교회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해주셨는데도 어찌하여 우리는 교회를 찾아내는데 정신 나간 사람같이 행동하는가?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구별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탄의 도당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Inst., 1536, VI. 20>
이처럼 칼빈은 교회를 택함받은 자의 총수로 이해했다. 그 수에는 이미 죽은 자와 지금 살아 있는 자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의 머리이시며, 그들은 자라면서 하나의 몸을 이룬다고 이해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자신의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분하여 말하지만 칼빈은 실제로 이 두 교회를 구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가시적인 교회만이 실제적인 교회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때문에 칼빈은 권징을 통해서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을 택함 받은 신자로부터 가려낼 수 있다거나, 참 신자와 신앙을 갖지 않은 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칼빈은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했다. 실제로 1537년에 칼빈은 제네바 시민들에게 제1제네바 신앙고백서(Ereste Genfer Bekenntnis)를 받아들인다는 선서를 행하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제네바는 일종의 국가교회였기 때문에 공인된 종교 이외에는 다른 종교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대신에 칼빈은 두 가지 관점에서 진정한 교회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첫째로는 1) 하나님 앞에 참된 교회가 있고 2) 둘째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서 이루고 있는 교회가 있다. 그들은 한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하기로 고백하는데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하나 됨을 참된 교리와 사랑으로 증거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말씀을 사역하는 일을 맡아 수행한다.
<Inst., 1559, IV, 1, 7>
여기에서 칼빈은 1)의 참된 교회와 2)의 교회는 성례와 말씀 사역 면에서 동일하지만 2)의 교회가 1)의 참된 교회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권징의 한계 때문에 구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즉 2)의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단지 이름과 외모를 위하여 믿는 외식자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다름과 같이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관용을 받을 수 있으니 그들을 합법적인 판단을 통하여 외식자로 확증할 길이 없거나 또는 교회의 권징이 반드시 원칙대로 잘 시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Inst., IV, 1, 7>
이런 점에서 칼빈은 성례(세례와 성찬), 말씀사역, 권징을 신자들의 모임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구인 교회의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교회를 모임 또는 회중(Kongregation)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나의 조직적인 기구(Institution)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칼빈은 기구로서의 교회관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교회를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동시에 교회는 신자들이 일생 다녀야 할 학교라고도 부르면서 교회의 몸 밖에서는 죄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으며 교회를 떠나는 일은 치명적이라고 경고하면서 교회를 ‘기구’(Institution)라고 강조한다(Inst., IV, 1, 3-7).
이처럼 교회는 조직적인 기구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존하시는 기구이다. 이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 있는 지체들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기관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하나의 성도의 모임인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관에 근거하여 칼빈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맡겨진 사역이라고 강조한다. 즉 교회의 직분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올바르게 시행함으로써 교회의 존재를 드러내는 봉사를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비롯한 그 어떤 것도 수단으로 삼지 않고 친히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사람들의 봉사를 사용하셔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다(Inst., IV, 3, 1). 이런 점에서 칼빈은 교회를 ‘직분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Amtskirche)로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직분을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으로 임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사용하신다. 성령께서는 직분자들을 겸손하도록 훈련시키시며 서로 사랑하는 일을 힘쓰도록 역사하신다.
<Inst., IV, 3, 1>
칼빈은 “하나님께서 친히 직분자를 세우시고 직분자를 통하여 일하신다”(Inst., IV, 3, 2)고 강조하고 교회의 직분으로 목사(Pastores), 교사(Doctores), 장로들(Presbyteri), 집사들(Diaconi)로 구분하고 있다.
1) 여기에서 목사와 교사는 동일한 말씀사역자이지만(엡 4:11) 교사는 목사와 같이 교회의 권징이나 성례를 집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별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이 언급한 교사는 구약의 제도에 있어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던 기관인 서기관과 같은 역할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2) 또한 칼빈은 목사와 장로들을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칼빈은 감독과 장로들을 동일한 직분으로 보았다(빌 1:1; 딤전 3:1-7; 딛 1:5). 사도행전 역시 장로들을 감독으로 부르고 있다(행 20:17). 단지 목사는 한 교회 안에 꼭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집례하는 사역을 하며(고전 4:1; 딛 1:9)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기구로서 언제나 목사와 함께 복수체제로 운영이 되어야 한다(행 14:22-23; 딛 1:5)는 점에서 구별된다(Inst., IV, 3, 8).
3) 집사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구제사역을 전담하였다(롬 12:8)는 점에서 긍휼의 직분이며 장로들과 같이 교회의 치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립적이다(행 6:1-6).
이런 점에서 볼 때 교회는 다스리는 일과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이 늘 있어야 하며 이를 행하기 위한 직분자들인 장로들(및 목사)과 집사들이 꼭 있어야 한다. 이들 직분을 가리켜 교회의 항존직이라고 한다.
2.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교회의 항존직에 대한 이해
교회 직분의 기원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관련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제31문. 왜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려집니까?
답.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임명을 받으셨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어 우리의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과 뜻을 우리에게 완전히 계시해 주시는 우리의 대 선지자이시며 교사이시고, 당신의 몸을 단번에 희생제사로 드려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계속해서 아버지 앞에서 중보하시는 우리의 유일하신 대제사장이 되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며 우리를 위해 얻은 구속 안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보존하시는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31문>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따라 교회의 직분 제도를 도입했다.
사도들은 자신을 돕는 자들과 함께 복음 설교를 했다. 나중에 교회가 확장되기 시작했을 때 장로의 직분은 다스리는 직분만 아니라 가르치는 직분이 되었다. 바울은 가르치는 장로를 다스리는 장로와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딤전 5:17-18). 이 가르치는 장로가 목사이다. 이때 그리스도는 직분자인 목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인도하시는 선지자가 되신다.
사도들이 복음을 설교하는 일에 전념하기 원하였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교중 가운데서 일곱 집사를 선택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집사들을 통하여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게 하셨다. 이때 그리스도는 직분자인 집사들을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시는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 되신다.
또한 그 초대교회 시대부터 장로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미 첫 번째 복음전도 여행 중에 장로들을 세웠다. 이 장로의 직분은 신자들을 다스리는 일을 위해 세워졌다. 이때 그리스도는 직분자인 장로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통치하시는 왕이 되신다.
이처럼 직분자들은 교회를 다스리고 유지하시는 그리스도의 손에 있는 도구들이다. 즉 그 직분자에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자들을 사용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그들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역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직분으로 말미암아 각각의 신자들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자라게 하는 일에 봉사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문민규(반석교회 목사)는 ‘칼빈의 그리스도 삼중직론’에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구약에서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은 그들의 직무들에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구원자 예수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이시라는 것이다.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선지자, 제사장, 왕의 삼중직으로 표현한 칼빈의 대속교리는 가히 대속교리의 만개(滿開)된 꽃이라 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기독교강요 제2권 제15장을 참고하라).
김영규(개혁주의성경연구소장, 목사)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권세를 그의 교회에 선물하였다. 그 때문에 세 가지 방식의 권세가 있고 그 권세에 따라 목사와 장로, 집사가 있고 역시 그리스도의 삼직인 선지자직과 왕직과 제사장직이 그 직책들과 결합되고 있다. 이렇게 교회에는 세 가지 권세가 구별되어 존재한다. 즉 가르치는 권세(potesta docendi), 다스리는 권세(potestas gubemans), 자비의 권세(testas seu ministerium misericordiae)가 그것이다라고 하며 교회의 직분을 교회의 권세로 연결시키고 있다.
3. 개혁교회에서 교회의 표지와 직분에 대한 이해
개혁교회는 무엇이 참 교회인가를 밝히는 기준으로 교회의 표지를 표방했다. 그것이 곧 참 교회의 표지로 말씀선포, 성례, 권징이다. 벨직신앙고백서(1561년)는 제29장, ‘참 교회의 특징 및 거짓 교회와의 차이점’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권징)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한다. 요컨대,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일이 제거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되신 분으로 인정됨으로 그 누구도 이 분에게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 참 교회로 분명히 알 수 있다.
<벨직신앙고백 제29장>
그렇다면 참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선포, 성례, 권징만으로 참된 교회를 규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벨직신앙고백서는 제30장, ‘교회 행정과 그 직무에 대해서’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우리는 참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 주신 그 영적인 형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1)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며 2) 성례가 이뤄지고, 3) 목사와 더불어 장로들과 집사가 교회 회의를 구성하며 이렇게 됨으로써 참 종교가 보존되어 모든 곳에서 진실한 가르침이 전파되고, 영적인 방법에 의하여 범죄자들이 징벌을 받으며 구속받게 되는 것이다. 4) 또한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구제 받고 안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치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디모데전서 3장 1-16>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믿음 있는 성도들이 뽑히게 될 때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일이 선한 순서와 질서를 따라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벨직신앙고백 제30장>
여기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직분, 곧 목사직분과 장로직분과 집사직분은 곧 말씀선포와 성례와 권징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교회의 기관이다. 특별히 벨직신앙고백은 교회 행정과 그 직무를 규정함에 있어 위 4)를 추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집사의 직분을 통해 구현되는 구제사역이 교회의 표지와 함께 교회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구제사역은 이미 사도들에 의해 규명된 교회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시대의 교회는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첫째,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행 6:4)고 하는 복음전도, 즉 말씀선포였다. 사도들은 성례전적인 예배에서 복음의 증인이었으며, 이것은 사도들이 떠난 후에 말씀사역의 직분을 통해 유지되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고 하면서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며 복음사역의 연속성을 강조한 바 있다.
둘째,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신 명령에 따라 교회는 성례전 중심의 예배 공동체로 모였다. 누가는 당시의 상황을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고 보도하고 있다.
지역 교회가 점차 많아지면서 사도들이 없이 예배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때는 성례만으로도 예배가 가능했다. 이후 점차 말씀사역자들이 교회의 필요에 의해 세워졌다. 바울은 말씀사역자들 외에도 교회의 치리를 위해 장로들을 세움으로써 교회의 예배가 한결같이 보존되도록 제도화했다.
누가는 바울 사도가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행 14:21-23)라며 증언하고 있다. 이미 그 때에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장로들이 사역을 하고 있었다(행 15:2, 4, 6, 22, 23).
셋째,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구제사역>을 저희에게 맡기고”(행 6:3)라고 명시한 것처럼 구제사역은 교회의 태동과 함께 집사의 고유한 직책이었다. 이때 교회의 연보는 집사들에 의해 모집되고 집행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연보를 횡령하는 자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고후 8:20-23) 마게도니아에서 모은 연보를 7명의 사절단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게 하였다(행 20:4). 이처럼 구제사역은 성례전적인 예배와 말씀선포와 함께 교회의 고유한 업무였다.
특별히 말씀선포와 성례는 언약적 복과 저주라고 하는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권징’은 교회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말씀선포와 성례 안에 언제나 함께 동반되었다는 점에서 이론이 없다. 이것은 말씀 곧 복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언약적 성격으로부터 이미 확인되고 있다. 때문에 교회 안에서 복음의 이해와 관련한 문제가 발생할 때 교회는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와 관련해 처음부터 교회의 권징은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이는 기구에서 시작되었다.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신자의 할례 문제가 발생할 때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의뢰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행 15:1-2)라며 누가는 보도하고 있다.
이어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행 15:6) 이 문제를 논의하여 결정한 후 “이에 사도와 장로들과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행 15:22)고 보도하는 것처럼 사도와 장로들은 교회의 대표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했다.
아울러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들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행 15:23-25)는 보도와 같이 사도와 장로들의 회의의 결정 사항을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전달해서 할례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참 교회는 교회의 표지와 직분이 정당하고 정상적으로 행사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서 교회의 표지는 교회의 내형적 특성을 드러내며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외형적 특성을 나타낸다.
4. 교회의 표지와 직분의 완성으로서 교회의 예배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참 교회는 말씀선포와 성례와 권징으로 표시된다. 그리고 이 참 교회의 표지를 위해 봉사하는 직분으로 목사(및 교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규명하는 교회의 표지와 직분이 온전하게 구현되는 형태는 교회의 조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 어느 특정한 장소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자들의 모임만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은 교회의 외형이나 조직 혹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가 행하는 어떤 활동이나 사업과 같은 것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오로지 교회가 교회로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만 구현될 뿐이다. 그리고 이 표지들과 직분이 전적으로 온전하게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어 완성된 것이 바로 ‘교회의 예배’인 것이다.
이차식(덕일교회 목사)은 ‘개혁교회의 예전’에서 “특별히 개혁교회의 예배가 교회의 표지와 직분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직분자가 자기 직분을 따라 그분의 말씀의 방식으로 예배를 추구하여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목사만 섬기는 것이 아니다. 장로, 집사들이 받은 직분에 따라 능동적으로 봉사에 임했다. 목사는 말씀을 수종들고 장로는 교회예배를 감독하며 살피고 집사는 구제헌금을 거두어 섬겼다. 이처럼 직분자들은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한다. 로마교회는 회중 없이도 사제만으로 예배가 성립되며, 회중교회는 목사나 장로가 없이도 신자들이 예배를 인도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이 둘을 엄히 경계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그분의 방식으로만 섬길 것을 가르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때문에 누구든지 자의적인 형태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4계명에서 안식일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인위적인 의식주의를 철저하게 금하심으로써 자신과 그의 백성과의 교제를 보존하신다. 그 예로 아론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이상한 불을 가져 왔을 때 즉각 그들을 죽이셨다(레 10:1-2). 또한 엘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속한 고기조각을 취하였을 때에도 죽이셨다(삼상 2:12-17, 25, 34). 인간적인 의식주의는 이처럼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든다.
말라기 선지자는 자기 방식대로 행하는 예배와 의식주의를 강력하게 대항하여 경고한 바 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말 1:7-8>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1:12-14>
이처럼 교회의 예배는 말씀선포, 성례, 권징이 동시에 동반되어야 하며 아울러 이 표지를 위해 봉사하는 직분, 즉 목사와 장로들과 집사가 협동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의 예배는 교회의 표지와 직분으로만 구현이 가능하다. 이 중 어느 한 요소가 빠지거나 어느 한 직분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코 온전한 예배라 할 수 없다.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신다. 이때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하는 ‘왕의 홀’이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는 결코 하나님 말씀의 범위를 이탈하여 새로운 법을 제정하거나 종교적 외관을 가진 새로운 제도를 만들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오래전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고 명령에서 이미 확증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들이 생각해서 고안한 예식들로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가증하게 여기신다. 사무엘이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라고 경고한 것처럼 인위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패역일 따름이다.
5. 개혁교회의 예배 정신
개혁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에 따라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예배의 내용과 순서를 정했다. 장로교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파견한 대표들의 협조로 스코틀랜드, 영국, 아일랜드 세 왕국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간에 약속한 신앙 일치의 일환으로 1645년 총회와 의회의 법령으로 예배 모범을 채택 인준하였다.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다. 화란개혁파교회는 매우 구체적으로 예배모범을 채택해 사용하고 있다.
1)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특징적인 면
① 세례에 대하여 / 세례는 필요 없이 늦출 것이 아니요 어떤 경우라도 개인이 행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에 의하여 행해 질 것이다. 세례는 또한 개인 집에서 사사로이 행할 것이 아니요 공중 예배 시에 회중 앞에서 사람들이 가장 편리하게 보고들을 수 있는 곳에서 행할 것이며, 교황 시대처럼 세례대가 합당치 않게 미신적으로 설치된 곳에서 하지 말 것이다.
② 성만찬에 대하여 / 성찬 혹은 주의 만찬은 자주 거행해야 한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는 목사와 개혁교회 당회원들이 저희 손에 맡겨진 사람들의 위로와 건덕에 가장 편리한 대로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성찬식을 거행할 때는 아침 설교 후에 하는 것이 편한 줄로 우리는 판단한다. 무식한 자와 후욕하는 자는 주님의 성찬을 받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 성찬을 자주 행하기에 불편한 곳에서는 반드시 성찬식 거행 일주일 전에 공적으로 광고를 내보내야 하고, 또한 그 때 혹은 그 주간 어느 날이라도 그 규례에 관하여, 성찬 참예에 대비하여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목적으로 거룩하게 하신 모든 방편을 공적 사적으로 부지런히 씀으로 모든 사람은 천국 잔치에 들어갈 준비를 더욱 잘 한다는 사실이다.
③ 시편찬송에 대하여 / 하나님을 공적으로 찬송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회중에서 함께, 또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시편을 찬송할 것이다. 시편을 찬송하는 데 있어서 목소리는 곡조에 맞게 엄숙하게 낼 것이다. 그러나 제일 조심할 것은 이해를 가지고 마음에 은혜를 가지고 주님께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온 회중이 다 함께 불러야 하므로 읽을 수 있는 자는 다 시편 책을 가질 것이요 다른 사람들도 나이나 다른 조건으로 불능이 되지 않는 한 읽는 법을 배우라고 권면할 것이다.
2) 화란개혁파교회 예배모범의 특징적인 면
① 개혁파 교회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I. 예배의 시작
1. 예배로의 부름 (votum)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들어 올려 함께 고백합시다(목사)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 회중 혹은 목사)
2. 하나님의 복의 선언 <salutation>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3).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중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의 머리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4,5a).
3. 시편찬송
II. 죄의 고백
4. 언약의 십계명 선포(출 20:2-17. 혹은 신 5:6-21)
5. 죄의 고백
6. 죄사함의 은혜 선언
7. 시편찬송
III. 말씀의 봉사 및 자비 사역
8. 성경봉독(본문과 다른 구약 혹은 신약에서)
9. 세례(매주) 및 성만찬(매주 혹은 매월 또는 2-3개월마다)
10. 주의 온 교회 위한 기도
11. 공적기도(목사)
12. 자비 사역을 위한 연보헌금.
13. 성경봉독 및 설교
14. 감사기도
Ⅳ. 마침
15. 시편 찬송
16. 축복 선언(민 6:24-26. 혹은 고후 13:14)
② 개혁파 교회의 예배 특징 / 이차식은 ‘개혁파 교회의 예배 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개혁파 교회의 예배는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고백함으로 시작한다. 이 고백은 형식상의 절차이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의 일부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적절한 태도의 표현이다.
이 고백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복의 인사를 건넨다. 주로 고전 1:3이나 계1:4,5a가 사용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축복인사는 예배 자체와 관련된 것으로 소망이 아니며 진술이다. 이에 대하여 회중은 노래로 답한다. 찬송에는 축복인사에 답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언약의 십계명을 선포한 후에는 죄의 고백이나 감사 찬송이 될 수도 있다. 설교 후에는 그에 맞는 시편 찬송을 한다.
특이한 것은 오늘날도 개혁주의 교회는 여전히 제네바 은율을 부른다는 것이다. 곡보다는 말씀 자체에 신경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다. 1536년 5월 21일, 제네바 교회는 로마로부터 분리하였다. 이 개혁은 교회의 예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교회 예전은 끝났으며 우상행위인 미사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다. 목사가 주문을 외우는 것도 없어졌다. 예배 중에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회중은 이에 응답하였다.
<이차식, ‘개혁교회의 예전’ 강의안>
마치는 말
온전한 예배는 참 교회의 표지인 말씀선포와 성례와 권징의 올바른 시행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말씀선포와 성례와 권징의 올바른 시행을 위해 교회에 직분자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자들을 주신 것은 결국 온전한 예배를 위해 봉사하기 위함이다. “어떠한 제정된 예배도 하나님이 그 창시자요 제정자가 아니라면 적법하지 않다”(신 4:1-2; 12:32).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이 한 몸이 되어 예배에 봉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와 관련해 윌리엄 에임스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게 열납될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예배가 효과적이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도록 예배에 그러한 덕목을 시여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제정하는 능력이 하나님에 의해 어떤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마 15:9)
<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13장 13절>
이런 점에서 교회의 표지와 직분은 예배의 절대적 요소라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윌리엄 에임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제정된 방편들 중 일부, 예를 들면 말씀의 정중한 공적 설교, 세례, 성찬의 집행, 기도와 같은 것들은 믿음, 소망, 사랑의 실행과 증진을 간접적으로 야기시킨다. 그리고 이들 중 신자들이 회중 혹은 교회에 모이는 것,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직원들의 선출과 임직과 직분 그리고 종교적 권징에 관한 관심과 같은 것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13장 17절>
그러므로 교회가 예배를 드림에 있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 또는 제도를 축소하거나 혹은 어떤 것을 더한다는 것은 심각한 신성모독의 패역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는 모세의 명령과 같이 예배의 장소와 방식, 피의 금지 등등과 같은 예배의 부수적인 것들까지도 어떤 하나라도 첨삭되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러한 명령을 어긴 인간이 자의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것은 미신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비록 하나님이 그 예배의 대상이 되고 목적이 된다 할지라도 미신에 빠진 예배는 그 행위 자체가 부당하며 가증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개혁주의 예배의 정신에 부합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이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그 속에서 지시하고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모든 태도가 그 속에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심지어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성경 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합당한 일이 아니다”(벨직신앙고백서 7장)는 고백과 같이 잘못된 예배 행위는 바로 성경을 믿지 못하고 부인하는 이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CNB>
<참고도서>
본 주제와 관련해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참고도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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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찬, 세례와 성찬, 도서출판 깔뱅, 2006.
송영찬, 교회와 사명, 도서출판 깔뱅, 2006.
송영찬, 교회와 신앙, 도서출판 깔뱅, 2007.
이광호, 개혁주의 조직신학, 칼빈아카데미, 2012.
이성호, 성찬-천국잔치 맛보기, 그라티아, 2012.
최낙재, 하나님의 언약과 유아세례, 성약, 2012.
사무엘 리더포드, 민성기 역, 성찬설교, 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7.
오토베버, 김영재 역, 칼빈의 교회관, 합신대학원출판부, 2008.
윌리엄 에임스, 서원 역, 신학의 정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존 칼빈, 양낙흥 역, 기독교강요<초판>,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코르넬리스 프롱크, 황준호 역, 도르트신조 강해, 그책의사람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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