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창원한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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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세대주의의 문제점

 

1. ‘세대주의’와 ‘세대’라는 용어

 

'세대'라는 말의 헬라어 ‘오이코노메오’는 ‘청지기가 사무를 보다’라는 뜻인데, 명사형인 ‘오이코노모스’는 우리 말로 ‘청지기’라는 말 이외에도 ‘직분’, ‘경영’, ‘경륜’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곤 합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어떤 일정한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시는 기간을 가리키는 뜻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즉 세대주의는 세상을 하나님의 뜻(경륜)이 이루어지는 장(場)으로 간주하고서 시간의 과정 안에서 여러 단계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이 성취되어 간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의 단계마다 확실하게 구분되어지는 하나님의 경륜을 '세대'(dispense)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대주의자들은 단계적 세대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신학적 과제로 삼았는데, 이 계시는 마침내 완전한 종말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이러한 신학 사상을 가리켜 ‘세대주의 종말론’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2. 세대주의 개괄적인 역사와 한국 교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

 

‘세대주의’란 19세기에 출현한 (종말론적) 신학의 경향으로서 흔히 ‘세대주의 신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일랜드계 영국인 존 넬슨 다비(J.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그는 변호사였으나 회심 이후에 그의 직업을 포기하고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회의 길에 접어든지 일 년 만에 수백 명의 캐톨릭 신자들을 개신교로 개종시킬 만큼 유능한 목사였으나, 대주교의 교령에 반발하여 국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라는 신령주의적 성경 연구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신앙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플리머스 교단의 대표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면서 그의 예언에 기초한 독창적인 성경해석법을 완성시켜 나가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10세의 어린 성령 운동 지도라는 ‘맥도날드’양의 예언(대환난이 있기 전에 휴거되는 환상)을 전해 듣고서 그녀의 휴거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대주의적 성경해석방식을 구체화하였습니다.

 

다비의 대환난 이전의 휴거설과 7년 대환난과 이후에 전개되는 천년왕국 사상이 주장될 때만 해도 반대 주장이 만만치 않았지만, 미국의 스코필드(C.I. Scofield) 박사의 손질을 거친 후, 세대주의는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무디 성서신학교 출신으로 회중 교회 목사였는데, 다비의 세대주의적 종말 사상에 심취되어 자신의 스코필드 관주성경(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1909, 1917)의 주석에 그 내용을 포함시켰습니다. 스코필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던 다비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스코필드의 주석 성경의 유명세와 더불어 삽시간에 전 세계에 전파되면서, 어느덧 세대주의 종말론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성경적인 종말론 사상으로 인식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무디 성서학원의 아이언싸이드(Ironside)를 비롯해서 달라스 신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론화 작업과 D.L 무디와 R.A. 토레이같은 유명 기독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19세기 이후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확고하고 보편적인 기독교 종말론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어졌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세계 선교화의 추세에 따라 한국에 들어 온 미국 복음주의 신학교 출신의 선교사들이 당시 기독교 종말론의 정설로 인식되던 세대주의 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은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에 깊이 관련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창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세대주의 종말론 신봉론였다고해도 과언이 아닌데, 요한계시록을 많이 강해하신 길선주 목사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초기 신학자들도 세대주의 종말론의 문자적(여자적) 논리성에 매료되었는데, 한국 정통 보수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 박사와 성서 침례신학교 장두만 교수 같은 이는 세대주의 종말론주의에 확신을 가졌던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해방이후 세대주의 신학(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사상)은 불안한 사회 현실과 맞물리면서 보다 극단적인 종말론 형태로 변형을 거듭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오용과 변질의 중심에서 가장 큰 (나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J 목사입니다. J 목사는 세대주의 종말론 사상에 기초해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기록된 순서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서 말세에 될 일의 시나리오를 작성하였습니다. 1992년에 한국은 물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일파의 극단적 종말론 운동은 J 목사의 세대주의적 종말론 해석의 완곡한 적용에 지나지 않은 일입니다.

 

J 목사는 Y 교회와 산하 집단을 통해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한국적 토착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미선교회의 환상이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음에도 오늘날 여전히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의 환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세대주의 신학의 강조점(특징)

 

세대주의 신학의 세계화가 있었던 만큼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다비와 스코필드를 이 이론의 창시자로 볼 때, 두 사람이 주장한 범위 안에서 세대주의 신학의 포괄적인 신학적, 교리적 요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자적인 구약과 신약 해석에 근거하여 미래를 연속적인 시대의 도식으로 묘사한다.

 

대개 세대주의자들은 계시록 4장은 교회의 휴거를 예언하며, 6-10장까지는 전환난 3년 반을, 11-19장은 후환난 3년 반을 예언하다고 주장합니다. 후환난 시대의 마지막에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도, 그리스도는 지상에 강림(둘째 강림)하여 천 년간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고 천년왕국을 건설한다고 봅니다. 이후 사단은 잠시 놓였다가 백보좌 심판이 있으며,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가 건설된다고 합니다. 특히 J 목사는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이러한 계시록의 문자적 성취 과정을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해서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2) 스코필드의 일곱 세대 구분

① 낙원의 무죄 세대

② 홍수까지의 양심 세대

③ 인류 통치 세대

④ 아브라함의 소명으로 시작하는 약속 세대

⑤ 시내산에서 골고다까지의 율법 세대

⑥ 은혜 세대 (교회)

⑦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년왕국 세대

 

세대주의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작용하며, 각 시대는 자연인에 대한 새로운 시험(test) 기간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고 주장합니다.

 

3)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지연되었기에 하나님이 교회의 우회로를 택했고, 교회 세대는 결국 과거의 이스라엘과 미래의 이스라엘 사이에 놓인 중간단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주의 재림으로 교회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7년 대환난으로 이어지고 7년이 끝난 이후에는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의 7년 대환난 이전에 ‘하늘로 들림’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휴거’(rapture)가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임하는 7년 대환난을 겪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중 재림이다.

 

세대주의는 주님의 첫 번째 공중 재림 때에 교회와 성도들은 첫 번째 부활을 경험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휴거라고 합니다. 주님의 첫째 재림은 심판의 재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데리러 오시는 재림입니다. 이후에 지상에서의 7년 대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이 있은 이후에, 주께서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7년 공중 혼인잔치를 마치고 지상 강림하시는데, 이것이 둘째 재림이요, 마지막 ‘지상 재림’이라고 합니다. 이때 비로소 주님은 모든 원수, 마귀를 멸하시고 천년동안 무저갱에 가두심으로서 성도들과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천년왕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지상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의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5) 문자적 해석에 집착한다.

 

세대주의는 계시록에 나타난 대부분의 숫자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계시록 7장과 14장에 언급된 ‘144,000’이라는 숫자 역시 주님의 첫 번째 공중 재림과 더불어 부활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혼인 잔치를 즐길 때, 지상에 남겨진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숫자로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회개를 하게 된다고 봅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도 문자적 해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이후에 땅위에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천년왕국을 건설해 직접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도 7년 대환난의 7년과 심지어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보석으로 묘사된 모습마저 문자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4.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세대주의 종말론 비판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해 세부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몇 편의 논문으로도 모자를 만큼 세대주의 신학은 복잡, 다양한 양상으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특징을 보더라도 세대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신학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언급한 내용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적 견지에서 세대주의 종말론을 평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대주의 종말론 해석법의 문제 - 보통 계시록을 해석할 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문자적 해석 방법 ② 영해적 (spiritualizing) 방법 ③ 문자적-영해적 방법입니다. 세 가지 범주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무조건 적용할 수 없지만, 대체로 개혁주의자들은 세 번째 해석 방법을 존중합니다. 사실 계시록은 단순한 어떤 문학 형태로 고정할 수 없을 만큼, 저술 원인과 방식에서 그 어느 성경보다도 독특합니다. 계시록은 요한이 하늘의 환상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탁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의 천상적 경험을 지상의 문자적 형식으로서 기술한 것입니다. 계시록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적 초월성을 함유한 동시에 세상에 내재된 관념으로 실제로 추론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진술을 한쪽 방향에서 고정된 채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계시록 21장에서 언급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소위 천국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내가 본 천국’ 간증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는데, 과연 환상 가운데 요한에게 보여 진 새 예루살렘이 진귀한 보석으로 치장된 새로운 문명 세계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또한 계시록의 ‘144,00’이라는 숫자는 새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특정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년’은 과연 인류가 경험한 10세기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계시록에 기록된 수많은 하나님 관점에서의 초월성과 상징성과 묵시성을 지극히 인간적인 상식과 이성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억지스런 시도가 바로 세대주의 종말론의 특징인 동시에 한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환상과 상징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라는 구도 속에서 성경의 유기적 진술에 근거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2)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 해석하는 문제 -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 관계를 대립 혹은 단절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언약적 통일성 안에서 보는 개혁신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개념입니다. 옛 언약(출 20:1-17, 24장)은 이스라엘과만 맺은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 개종자들이 하나님의 언약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언약 역시 교회와만 맺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새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만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구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 맺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히 8:10-11). 새 언약은 또한 옛 언약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옛 언약의 성취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유대인에게, 교회를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성도에게만 적용하는 이분법적 도식은 언약의 통일성적 유효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오류인 것입니다.

 

3) 이중 재림설에 대한 해석 문제 - 세대주의는 7년 환난을 전후로 있을 그리스도의 이중 예정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그러니까 환난 전에 첫 번째(공중) 재림이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교회와 성도들이 들림(휴거)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휴거되지 못하고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들은 불신 세계의 심판을 위해 대환난을 겪은 후에야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또 한 번 반복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중 재림에 대해 말하는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존 T. 샤프트라는 사람은 그의 책 『세상을 진동시키는 종말사건』을 통해 교회와 성도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는 성경 구절을 단 한 구절이라도 찾는 사람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 4만 명의 목회자들에게 통지를 했으나 상금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단회적 재림은 정통 교부들과 어거스틴으로부터 칼빈과 루터,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공히 지지받고 있는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적어도 19세기 세대주의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중 재림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구나 7년 대환난을 전후로 각각의 다른 대상을 전제한 첫 휴거와 재림에 대한 견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의 말씀대로 인격적이며, 육체적이며, 가시적이며, 갑작스러우며, 영광스럽고 승리의 단 한 번의 재림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시기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의 종말, 죽은 자의 육신의 부활, 그리고 모든 악의 세력의 파멸과 마지막 심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4)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 문제 - 계 20:1-3절에 나와 있는 ‘일천년 동안’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셋 또는 네 가지 해석의 경향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점으로 천년이 앞에 오면 전천년설이요, 뒤에 오면 후천년설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천년의 위치는 정반대이지만 천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편 무천년주의는 형식상 후천년설에 속하지만 천년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이 중 전천년설은 두 가지로 구분되어지는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입니다.

 

후자는 전자의 지나친 주장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자와 비교해 가장 큰 차이점은 재림을 단일 사건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진술을 문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역사적 사건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개의 천년설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다소 견해차가 있습니다.

 

기독교 3세기의 이레니우스, 저스틴, 터툴리안, 락탄티우스와 같은 정통 교부들은 전천년설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교회 시대를 천년왕국으로 보는 무천년설이 유행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지지 가운데 무천년설은 중세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날 즘, 로마 교회에 반대하는 신령주의적 급진적 개혁세력들에 의해 현세적 천년왕국 사상이 번성하였습니다.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 대부분은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의 무천년설에 머물면서도 재세례파와 같은 극단적인 세력의 전천년주의 운동의 폐해를 지켜보면서 천년왕국설을 개진하는데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 이후 기독교 복음의 번성과 함께 낙관적인 후천년주의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프린스톤 3인인 핫지, 댑니, 월필드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던 신학자들에 의해 후천년설이 정통 교회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와서 프랑스 혁명 시대 이후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전천년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염세적인 사상과 천국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가 맞물려 예언 집회가 유행하던 때에, 다비와 플리머스 형제단을 통하여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나타났습니다. 불과 몇 십년만에 이 사상은 20세기의 복음주의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 있는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자리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천년왕국설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네 가지 입장 모두 나름대로의 성경과 현실에 대한 주장과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배제하고라도 세 가지 주장 중에 어느 것 하나가 유일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이전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왕성하게 이루어진 천년왕국에 대한 논의 과정을 지켜볼 때, 문자적-영해적 해석을 근간으로 한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천년은 문자적 의미에서의 천년이 아니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순서들 역시 문자적인 예언이 역사적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천년왕국은 문자적 지상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 천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축복 상태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의 시간을 집약적으로 상징화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일천년 동안 왕노릇하다’는 계시록 20:4절 말씀 역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건인 동시에, 현재의 성도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천상의 미래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은 지상과 하늘에서 메시아 왕권이 발휘되는 이중적 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지상과 천상을 통(通)하는 메시야의 ‘천년왕국’은 사단과 그의 대행자인 악의 세력들이 받을 아마겟돈 최후 전쟁과 더불어 임하게 될 주의 재림과 마지막 대심판으로 끝이 나고, ‘새 하늘과 새 땅’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축복 상태가 완성될 것입니다.

 

5) 144,000과 짐승의 표(666), 적그리스도에 대한 해석 문제 - 세대주의자들은 계시록 7장과 14장에 언급된 숫자 ‘144,000’을 민족적, 혈통적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함께 교회와 성도들이 휴거된 이후, 지상의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살아남은 자의 이스라엘(유대인)의 숫자가 144,000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전에 땅 위에 남아 있는 성도들 중에서 구원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무리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계시록 말씀을 문자적으로 과도하게 해석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총수를 상징화한 숫자입니다. 즉 이 숫자는 12×12×1000으로서 약속의서의 구약의 백성(구약의 12지파)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신약의 12사도)에다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숫자인 1,000을 곱하여 나온 숫자입니다. 따라서 이 숫자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딤후 2:19).


계시록 7장에서는 이들이 마지막 때의 환난과 사단의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14장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받을 최종적인 운명(영벌과 영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짐승의 표’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세대주의는 이 ‘표’를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억지보다 더한 주장입니다.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컴퓨터의 영자 철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하여 합하면, 666이라는 숫자를 얻게 된다고 말하고, 더러는 상품의 통상부호인 바코드(barcord)도 666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하기도하고 지금은 배리칩을 짐승의 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666이라는 숫자를 적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억측들이 난무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언급된 ‘표’는 당시 군인들, 노예들, 신전 봉사자들에게 소유물의 증거로서 낙인을 찍는 통상적인 전통에서 빌려 온 상징어입니다. 즉 ‘표’는 소유, 충성, 보호를 상징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성경에 적그리스도와 666이라는 숫자가 직접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보면, 666을 로마의 불신 황제들(네로, 칼리굴라, 도미티안등)과 관련시키거나 히브리어 원어를 환산하는 방식을 통해 설명하려했던 시도가 많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을 전부 무익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와 666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놓쳐서는 안되는 점은 짐승의 수를 판독하는 일보다 짐승의 도덕적 본질을 파악하는 통찰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짐승의 머리이고,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입니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부정하며, 복음의 본질을 파괴하려 합니다. 집단적 권력의 총체로서 등장하는 적그리스도가 초대 교회에서는 네로로, 중세시대에는 교황으로 지목되었고, 그것은 바른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계시록에 언급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전의 적그리스도 보다 훨씬 더 가공할만한 능력과 속임을 가진 인격체로서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는 적그리스도와 짐승이 언제 어느 때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며 인내와 믿음가운데 굳건히 서야 할 것입니다(계 13:10).

 

6) 대환난 이전에 나타날 징조에 대한 해석 문제

 

세대주의는 7년 대환난을 매우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7년 대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교회와 성도의 공중 들림(휴거)이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7년 대환난이 다가올 시기와 징조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세대주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한국의 세대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전도자라고 할 수 있는 J목사의 해석을 살펴보기만 해도 얼마나 황당하고, 억지스러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J목사는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과 『지금이 말세인가?』, 『다가올 미래』라는 책에서 7년 대환난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세계적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EC 통합을 로마 제국의 부활로 보면서 다니엘이 예언하고 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열 발가락시대, 열 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봅니다. 또 마지막 전쟁을 중동전쟁으로 보고, 1991년 1월의 걸프전을 전주곡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페라스토로이카의 실패로 경제가 위축된 소련이 아랍의 동조를 얻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3차 대전과 같은 전지구적 전쟁이 발생하는데,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으로 패하게 되고, 마침내 승리한 이스라엘이 시온산에 솔로몬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통일 유렵과 평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7년 대환난 직전에 일어날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식의 세계 종말 시나리오는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날 성경 중에 계시록만큼 관심이 많은 반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 구절도 많습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계시록 해석과 주해와 설교가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적으로 드리운 불안하고 암담한 시대 정서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영혼의 도피처를 찾는 심약한 성도들에게 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호기심과 열심을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모를 일 없는 거짓 선생들이 거짓된 가르침과 선동으로 이들을 파멸로 인도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때에 성도들에게 진정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과 신앙을 보다 바르고 정밀하게 추구해 가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해석과 관련된 세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1) 홍창표, 천년왕국, 합신대학원출판부.

2)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 유니온교회.

3) 김영익, 문영탁 역, 윌리엄 핸드릭슨. 요한계시록. 출판사 아가페.

 

이 책들은 계시록에 대한 좋은 통찰과 전망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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